어릴적 내가 접한 '청소년 추천 도서', '청소년을 위한--' 같은 꼬리표를 달고 있던 청소년 문학이, 최근 몇 년 간 영미권 "영어덜트(YA)" 장르 유입으로 한층 풍성해졌다는 기분이 든다. 영어덜트 장르 소설을 읽다 보면 사실 표면적으로는 일반 문학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청소년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딱 2가지가 있다. 주요 인물이 청소년 혹은 어린이일 것(성인이 아닐 것). 그래서 어른은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앗아가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려 들지 않고 철저히 곁다리가 될 것. 두 번째는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할 것.

그래서 절대 YA 소설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작품이 뭐가 있을지 잠시 내 방 책장을 훑어 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제법 기준이 확고했는데 막상 자연계(?)에서 그 예시를 찾으려니 쉽지가 않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그나마 크리스틴 맹건의 《탄제린》 정도가 떠오른다. 주인공 '루시'가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을 관철하려 또다른 주인공 '앨리스'를 가스라이팅하고 심지어는 그 작전이 성공해 앨리스를 나락으로 떨구는 이야기라서 다분히 1차원적인 교훈을 전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 다소 파격적인 크리스틴 맹건의 데뷔작에 비하면, 다이애나 하먼 애셔의 첫 소설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충격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서 맡던 연노란색 흙, 햇빛이나 비 냄새를 돌이키게 하고(그런 기억이 없다면 비슷한 다른 기억이라도), 가을 운동회날 이상하게도 파랗던 하늘을 곱씹게 하는 친근함이 있다(나는 학창 시절 운동회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다만 그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다.

YA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만만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 문장을 고쳐 써서 장점으로 바꿔 보자면, 청소년 소설은 대체로 아주 보편적이고도 만연한 기억을 배경지로 삼는다. 그래서 웬만큼 나이를 먹었다면(10대 중후반을 넘겼다면) 이야기의 진입 장벽을 대체로 쉽게 넘는다. 오히려 너무 쉽다는 게 때론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 심리의 미묘한 지점 아닐까.

큰 노력 없이 허들을 넘고, 책장을 넘기면, 저기 멀찍이 '조지프 프리드먼'이 숨은 그림 찾기 속 교묘하게 숨은 뒤집어진 운동화 한짝처럼 머쓱하게 독자를 맞이한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조지프'를 만나 왔다. 심지어는 나부터도 '조지프의 시절'을 보내 왔다. 작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하먼 애셔가 밝힌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지인 중 하나가 제가 조지프와 무척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ADD 성향도 없고, 7학년 남자아이도 아니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딱히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걱정이 많고 사물을 독특하게 바라보는 편이긴 해요. 작중에서 찰리의 축구화가 벌 위로 내려앉는 대목을 예로 들면, 조지프가 보인 반응이 딱 제가 보였을 법한 반응이에요. '가엾은 벌! 찌부러졌을까? 갇혔을까? 내가 살릴 수 있을까? 제발 무사하길.' 아마 저는 조지프의 성격을 통해 이런 생각을 확장해 나갔던 것 같아요."


앞서 만난 조지프처럼 머쓱하게 고백하자면, 여러 대목에서 찔끔찔끔 눈물을 짜내며 소설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며 방송에 출연한 아이와 어른의 치유 과정을 공감하고 함께 치유받는 기분을 느끼듯이, 《우리가 함께 달릴 때》에는 어릴적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격려와 응원, 공감이 있다. 심지어 따로 유효 기간도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마음을 조금만 열고 받아들이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책 속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퍼뜩 〈원더〉가 떠올랐는데(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는 줄은 이번에야 알았다), 영화의 전개가 대체로 '어기'의 단독 시점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아예 도입부에서부터 조지프의 친구 '헤더'의 존재가 기분 좋은 균형감을 준다. 그리고 이 균형은, 우리가 삶을 온전히 혼자 내달려 갈 수 없음을 일깨우는 소설 자체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조지프, 헤더 외에도 주변 학교 친구들, 크로스컨트리 경기로 만나게 되는 타학교 학생들, 가족과 동네 어른들 등, 등장하는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개별 인물의 색채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것도 작가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 책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내가 반장 선거에 나갔던 일이 떠올랐다(왜 나갔는지 이유는 당시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뭔가 남들처럼 감투를 써 보고 싶었던 걸까? 구체적인 이유는 몰라도, 단상에 나간 직후에 짙게 후회한 기억은 여전히 선명히 떠오른다. 그 학기에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대반전!). 다만 그 과정이 좀 창피했다. 딱히 반 아이들이 제 의지로 날 뽑아줘서 부반장이 된 게 아니라(나는 인기는 커녕 딱히 친구도 없었다) 순전히 반장 1명, 부반장은 여자 1명, 남자 1명을 뽑던 당시 체계 덕분에 부반장이 됐는데, 그때 소감을 말하라는 담임 선생님 말씀에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되냐고 한참이나 어물거린 기억이 난다(아무도 날 뽑지 않았으니 딱히 소감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별안간 얼굴 붉어지는 옛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한 건 바로 다음 대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헛다리를 짚었다. 헷갈리기만 했다. 공을 가로채 바스켓에 넣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그 대신 아무에게도 주목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두 번 다시 공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딱 한 번 부반장을 해 본 경험 덕분에, 이후 중학생이 되어 뭣모르고 3년쯤 서기도 해 보았고 선생님들과도 아주 살짝 친해지고 결론적으로는 괜찮은 방향으로 풀렸다(창피하든 말든 아무렇게나라도 그냥 하는 게 최고인가 봐, 조지프!). 나 역시도 창피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서(=걱정하느라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 하고 뒤로 한 일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이런 미묘한 심리를 조지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풀어 준다.

이쯤해서 내가 한밤중 베갯잇을 적시며 읽은 구절을 잠시 소개한 후 리뷰를 마쳐 볼까 한다.


"이거 반칙 아니에요?"

"어째서?"

"아무도 안 쓰잖아요."

"그야 아무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필요하다면 다들 쓸 거야."


"누가 뭐래도 넌 슈퍼히어로야."

벗어나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나를 더 꼭 붙들었다.

"들어 봐. 왜 너에게 귀마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그야 무서우니까―"

"아니야!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듣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좋아. 그게 네가 지닌 초능력이야. 내가 괜히 그렇게 부르겠냐?"


리뷰의 제목은, 최근 애나 아카나의 에세이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 마케팅의 일환으로 작업한 유튜브 영상 중 하나에서 애나 아카나가 소개한 브레네 브라운의 책 《The Power of Vulnerability》 제목에서 가져와 봤다. 순간의 당혹감과 창피함을 이겨내면 우리 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듣고,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가 자라남을, 이 책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아주 잘 보여 준다. 올해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들이 아주 조금만 더 자라면 선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