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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언가 획기적인 최신이론이 발표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수용된다. 
경주마 - 불치병 환자 - 보디빌더 - 스포츠 선수 - 부자 - 대중 최첨단에서 최말단까지의 정보격차는 대략 10년이다."


정보의 첨단을 이루고 있는 곳은 학계다. '논문' 이라는 빡빡한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안에서 다뤄지는 논의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접근성' 의 한계로 밀알들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정체된 경우가 허다하다. 식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당연시 되던 이야기가 한참 세월이 흘러 대중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킨다든지 대중적 이슈가 실은 오래전 학계에선 논의가 끝나고 '용도 폐기'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많다. 문두에 인용한 "경주마 - 불치병 환자 - 보디빌더 -스포츠 선수 - 부자 - 대중" 의 연쇄고리 역시 이러한 정보격차를 꼬집는 말이다.


학계와 대중사이에 가로막힌 이 높은 벽은 사실 식자들이 자초한 바가 크다. 어려운 글쓰기와 고답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담 안에 가두었다. 때론 대중저술가나 대중들을 무지하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중과 유리된 진공상태 속에서 낳은 말 들은 갈곳을 잃고 허공을 떠돈다. 학계에 투자되는 시간과 노력 비용이 공회전이라고 빈축을 사기도 한다. 이러한 두 문화 사이의 격차를 좁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인 '동방정책' 을 펼치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가족 기담과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기획으로 앞서 출간 된 <프로이트 심청이를 만나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표저자인 신동흔 박사는 국문과 교수로 한국 고전문학 안에서 오늘날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교훈들을 추출해냈다. 자신이 지도하는 대학원 석, 박사 과정의 제자들과 함께 기존의 논문양식에서 탈피한 쉽고 대중적인 글쓰기로 고문( 拷問 )같은 고문(古文) 읽기에 변화를 주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재미는 별로 없음. 평점을 주자면 별 두개 정도 ㅅㄷㅎ 교수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좀 무리수였지 말입니다...)

같은 출판사, 같은 기획, 저자이력, 다루는 영역까지 '가족기담' 은 '프로이트..심청...' 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인 유광수 박사는 고전문학을 공부한 국문과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학자다. 식자인 그가 학계의 이야기를 대중의 언어로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맡은 것이다. 이런 '식자에서 대중으로' 향하는 글쓰기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미덕은 부드러움이다. 의고체와 번역체로 가득찬 사변적인 글쓰기가 아닌 고등학생에게도 무리없을 부드러움을 뜻한다. 이 면에 있어서 가족기담은 합격이다. 상아탑의 학술언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어 쉽게 읽을 수 있다. 책장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빠른사람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독서를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글이 순하다.

그러나 무작정 쉽기만 하다면 이제 '식자의 글' 이 가지는 차별성이 없어진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단순지식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고전문학이라고 해봐야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같은 전래동화 내지는 교과서 문학들 뿐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을 발굴해 현대 언어로 소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가령 춘향전이 신효재가 엮은 판소리 완판본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결말이 존재하는 이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거나 춘향이의 자살로 끝나는 각종 경판본들의 엔딩을 묶어 소개하는 서지학적 작업등이 여기에 들 수 있겠다. 선정적인 이유로 교과서에선 배제된 당시의 통속문학들을 엮어 소개하는 방법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기담은 이러한 '지식적 사항' 을 충족시켜 주기엔 부족하다.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장화홍련,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심청전 등등으로 교과서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과 또다른 방향에서의 통찰적 접근이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누군가는 노파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는 미인의 옆모습을 보듯이 같은 대상을 새로운 측면에서 읽어주는 방법이 있다. 가족기담은 이런 측면에서 읽어야한다. 앞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본문에 수록된 14작품의 과반은 정규교과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히 들어본 것들이다. 그러나 그 뻔한 이야기를 또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내는게 가족기담의 맛이다.

착한 정실과 나쁜 첩실의 식상한 대립구도에서 저자가 읽어내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오신화 안에 수록된 '이생규장전' 을 보더라도 여성의 연애란 남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시대의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에 표현된 한계가 이 정도니 일상에서의 연애와 결혼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안에서 사실 남성의 자기 결정권도 제한받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결혼이 가문 대 가문의 공식적 비지니스였던 시대에서 일대일 관계의 낭만적 연애가 불가능 했던 것은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다. 날을 받아놓고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한평생 살아야 했던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에겐 공식적인 해방구가 존재했으니 바로 '후처' 라는 이름의 첩실이었다. 조선시대 당시 첩을 얻는 것은 경제력의 문제였고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정실부인과 혼례를 올리기 전 첩과 먼저 살림을 꾸리는 것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 상황에서 저자는 첩의 존재를 기능적으로 해석하여 '남성의 실질적 연애대상' 으로 풀이한다. 결혼은 비지니스다. 그러면 후처를 얻는 것은 연애다. 이러한 틀을 이용하면 홍길동전의 서사가 새롭게 들어온다. 홍길동의 모 춘섬은 사실 홍판서에게 있어서 '낭만적 연애' 의 대상이 된다. 길동은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고 단순한 적서의 차별과 울분만 드러나던 홍길동전에서 또다른 면모가 보인다. 좌충우돌하는 길동에게 초당을 지어주고 상대적으로 독립된 생활과 경제적 안녕을 약속해준 까닭, 그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며 자유를 준 이유등이 대략 납득이 간다. 더 나아가 유독 첩실들이 투기와 질투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이해가 된다. 정실부인에게 있어서 남편은 비지니스 파트너(!)에 가까운 존재지만 후실에게 남편은 일대일 낭만적 연애의 대상인 것이다.

심청전에선 장애인 인권 문제로 심봉사의 삶을 해석해낸다. 흔히 우리는 '무능' 과 '무기력' 을 혼동하기 마련한다. 무능과 무기력은 그 선후관계가 불분명하지만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판정이 어렵다. 무능한 사람과 무기력한 사람을 구분없이 사용하며 하나의 대상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이어지는데 홈리스(노숙인)들을 거지나 걸인과 동일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를 구독해본 이들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는 집이 없어 거리에서 생활을 해결하는 이들이 무기력하고 의지가 없어서 스스로 삶의 끈을 놓은 이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이들을 거지나 걸인 부랑아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범주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빅판' 이 되는등의 자활 의지를 가지고 경제활동중인 홈리스들을 만나게 되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우습고 폭력적인 시각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자활 의지도 있고 현재 소득도 존재하지만 빈곤이 빈곤을 낳는 사회적 제관계 때문에 - 이는 지난달 리뷰 도서였던 노동의 배신을 읽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 자꾸 길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도 많다. 단지 무능한 이들을 무기력한 이들과 동일시 해서는 안될 것이다. 심봉사도 그러했다. 우리는 심봉사를 딸을 사지로 내몬 나쁜 아버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심봉사는 청이어미가 죽은뒤로 혼자 젖동냥을 다니며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 아버지였고 황성 맹인 잔치를 찾아가기 위해 혼자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던 능동적 의지의 소유자였다. 심봉사의 무능은 장애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스스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 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 한 사람으로 대했고 이것이 심청이 일가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곱씹어 볼만한 지적이다. 차상위계층과 같은 복지취약 계층과 장애인 문제와 같은 오늘날의 복지행정과 인식 개선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가족기담의 장점은 똑같은 대상에서 남들과 다른 면을 읽어내는 데 있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식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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