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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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는 재미있는 게, 어떤 표적을 맞히려면 그 표적을 겨누면 안 됩니다. 중력이란 게 있어서 표적을 정확히 겨누어 쏘면 화살은 그 아래에 가서 꽂힙니다. 다시 말해, blank를 맞히려면 중력으로 인한 낙하를 고려해 그 위 어딘가를 겨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aim high높이 겨누다(높은 뜻을 품다)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높이 겨누라‘고 하는 건 높은 곳을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맞히기 위한 거죠. - P55

그런데 이런 민간어원의 예외가 butterfly나비입니다. butterfly는 진짜로 butter버터와 관계가 있습니다. (중략) 여기까진 괜찮은데, 좀 유쾌하지 않은 설이 하나 있습니다. 나비도 응가를 하는데요, 그 똥 색깔이 노르스름한 게 꼭 버터 색입니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나비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똥을 관찰하고 똥 색깔로 이름을 지었냐고요. 그게 말이죠, 네덜란드 사람들 소행인 것 같습니다. - P86

왜 이렇게 나비 이름을 다 길고 멋지게 지었을까요? 미천한 fly(파리)는 날아다니니까 그냥 fly라고 짓고서는 말이죠. beetle(딱정벌레)은 ‘무는 놈‘이란 뜻이고, bee(벌)는 ‘떠는 놈‘이란 뜻입니다. louse(이)는 이름부터 참 lousy(허접한)하고요. butterfly만은 왠지 특별 대우하는 느낌입니다.
서로 연관이 없는 여러 문화권에서 저마다 나비를 인간의 영혼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넋이 이 세상의 고난을 벗고 아름다운 내세에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존재가 바로 나비라는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 P90

나비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psyche였는데, Psyche(프시케)는 ‘영혼의 여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Psyche는 영혼을 연구하는 psychoanalysis(정신분석)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 P90

벌판 혹은 전쟁터를 뜻하는 camp는 독일어에도 침투해 ‘전투, 투쟁‘을 뜻하는 Kampf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히틀러의 자서전 《Mein Kampf 나의 투쟁》는 상당히 camp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요. - P185

그래서 여자가 virtuous해지려면 ‘남자다운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권할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자다운 여자라면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가질 테고, 심지어 그 의견을 입 밖에 낼 테지요. 그러면 virago(괄괄한 여자, 왈가닥)가 됩니다.
사실 virago가 더 예전에는 ‘영웅적인 여자‘를 뜻했습니다만, 그것도 성차별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영웅성은 본래 남자다운 특성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으니까요. 사실 언어라는 게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을 만큼 성차별적입니다. - P348

amateur는 본래 ‘사랑하는 자‘로, 그 어원은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amare입니다. 거기서 amiable(정감 있는), amorous(연정의), paramour(내연의 연인) 같은 말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중략)
amateur(아마추어)와 professional(프로)의 차이는 다른 게 아니라 좋아서 하는 사람과 돈 벌려고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불행히도 모든 연인은 amateurish(미숙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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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 관한 생각 - 영장류학자의 눈으로 본 젠더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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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여전히 폭력과 전쟁을 우리 종의 필수적인 유산으로 간주하는데, 선사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만연했다는 증거가 매우 빈약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를 보인다. 예를 들면, 고고학 기록에는 1만 2000년 전의 농업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 DNA에 전쟁이 들어 있다는 진화 시나리오는 추측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311

나는 두 가지 주요 알파 유형을 안다. 첫 번째 유형은 이러한 경영서에서 추켜세우는 유형에 딱 들어맞는다. 이들은 "둘 다가 될 수 없다면, 사랑받는 존재보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무뢰한이다. - P320

전통적으로 인류학은 인간 사회를 남성들 사이의 협약으로 묘사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학 분야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남성 간의 유대, 남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집, 남성 성년식, 형제애, 맹수 사냥, 전쟁에 관한 현장 보고서가 쏟아졌다. 여성은 단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고, 이웃 부족 간의 결혼 교환에 적합한 대상이었다. 비판적인 한 논문은 "인류학은 늘 남성이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남성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라고 지적했다. (P.350-351) - P350

침팬지 사이에서는 마치 마음속에서 단순히 감정 조절 손잡이를 적대에서 우호 쪽으로 돌린 것처럼 이러한 반전이 놀랍도록 빨리 일어난다. 사람도 이 감정 조절 손잡이를 조작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 우리는 갈등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에서 함께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면서 매일 그렇게 한다. 우리는 나쁜 감정을 억누르거나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분출할 때마다 사후에 문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적대감에서 정상화로 전환되는 과정을 용서로 경험한다. 이 감정은 가끔 사람의 전유물로,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 ("다른 뺨마저 내주어라.")으로 칭송하지만, 모든 사회적 동물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P.364-365) - P364

관계의 가치가 갈등 관리의 필요성을 결정한다. 수컷 간의 유대가 중요한 유인원 사회에서 암컷과 수컷이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이 모계 중심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유인원과 다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만약 화해 경향이 생물학적 진화에 의해 형성된다면, 추가적으로 문화적 진화가 어떤 가능성을 가져다줄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호미니드 중에서 수컷 간 유대와 암컷 간 유대가 균형을 이룬 유일한 종이며, 또한 문화적으로 가장 유연한 종이다. - P370

이것은 정의상 암컷과 관련된 ‘모성 본능‘을 탐구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논의할 것도 많다. 불행하게도 ‘본능‘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어미의 보살핌이 미리 프로그래밍된 로봇의 행동인 것처럼 들린다. 마치 모든 암컷이 갓 태어난 새끼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즉각적으로 알고 있고 자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린다. - P388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따뜻함과 보호와 액체 영양이 필요하다. 출생 후에 새끼의 살과 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는 후보는 적어도 처음에는 어미밖에 없다. 알을 낳고는 알에서 새끼가 부화하기 전에 버리고 떠나는 수많은 동물과 달리 어미 포유류는 새끼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항상 그 옆에 함께 있다. 수컷도 가까이에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자식을 돌보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진화는 암컷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암컷은 영양을 공급하는 장비와 자식을 마치 여분의 팔다리처럼 자신의 몸에서 뻗어나온 부분으로 간주하는 뇌를 받았다. (P.388-389) - P388

사회적 처리 방식은 가끔 그 배후에 있는 생물학보다 더 엄격하다. 생물학을 무시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방법이 아니지만, 기존의 사회적 역할의 원인을 생물학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동물과 사람의 행동에 대한 현대 지식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연한 대응책을 시사한다. - P426

나는 생물학자이지만 인간 문화의 힘을 굳게 믿는다. 나는 젠더 관계가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지 직접 경험했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젠더 관계는 교육과 사회적 압력, 관습,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젠더의 몇몇 측면조차도, 한 젠더에게서 다른 젠더와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박탈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젠더 사이에 정신적 우월성이나 선천적 지배성이 있다는 개념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런 개념을 버리길 희망한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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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각 성이 걸치고 돌아다니는 문화적 외투와 같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관련이 있는데, 그러한 기대는 사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일부 정의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데, 젠더의 본질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의들에서는 젠더를 생물학적 성과는 완전히 별개인 임의적 구성물로 본다. 말하자면, 외투가 혼자서 스스로 돌아다니는데, 그것을 어떻게 꾸미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P74

젠더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젠더는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권장하는 성 역할과 각 개인이 그것을 표현하고 그것과 일치하는 정도와 관련이 있다. 젠더에 적절할 용어는 ‘남성male‘과 ‘여성female‘이 아니라 ‘남성스러움masculine‘과 ‘여성스러움feminine‘이다. 이 용어들은 쉽게 분류하기 힘든 사회적 태도와 경향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흔히 서로 섞여 양쪽 측면이 한 사람에게서 표출되기도 한다. - P88

600만 년 전에 일어난 일은 사람의 진화 이야기에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유인원 조상이 오늘날의 침팬지와 생김새와 행동이 비슷했다고 상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추측에 불과하다. 숲에서는 화석화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상 호미니드의 존재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P180

진화가 주로 남성 계통을 통해 일어났다는 미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류의 선사 시대에 관한 책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펼쳐보면, 남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불을 피우고, 큰 짐승을 사냥하고, 오두막집을 짓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반면, 여성과 아이들은 겁에 질려 옹송그리며 모여 있는 그림들을 보게 된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지만, 왜 항상 남성이 이야기의 주인공일까? 여성은 우리 종의 성공에 기여하지 않았단 말인가? - P208

진화에서 말하는 적합도fitness 개념을 ‘피트니스 운동‘처럼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인의 신체적 적합성과 혼동하면 안 된다. 적합도는 가장 높이 점프를 하거나 가장 빨리 달리는 능력하고는 상관이 없다. 생물학에서 적합도는 생존과 번식의 성공률로 정의한다. 그것은 뛰어난 면역계나 좋은 시력, 더 나은 위장 능력, 큰 폐 혹은 그 밖의 유리한 특성에서 나올 수 있다. 적합도는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유전적 기여로 측정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한 성의 전체 구성원이 다른 성의 전체 구성원보다 적합도가 더 높은 수가 없다. 두 성의 적합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P209

성 선택은 생존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잠재적 배우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특성을 선호한다. 수컷 공작의 꽁지깃과 수컷 바우어새의 멋진 둥지, 수사슴의 정교한 뿔처럼 수컷의 화려한 장식물과 행동이 그런 예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눈길을 끌긴 하지만, 그 동물의 생존에는 불리하다. 그런데도 유전자 풀에 계속 남는 이유는 오로지 암컷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암컷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꽁지깃의 화려함이 다른 수컷에 미치지 못하거나 멋진 노래나 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수컷은 암컷의 관심을 얻을 수 없다. 암컷 바우어새는 경쟁 상품들을 비교하며 돌아다니는데, 자기 구역의 많은 둥지들을 둘러보면서 적절한 수컷을 선택한다. 자연의 아름다움 중 많은 것은 암컷의 취향 때문에 존재한다. - P221

유성 생식은 10억 년도 더 전에 식물과 동물 모두에서 진화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므로, 우리가 유성 생식에 대해 아는 지식 중 대부분은 우리 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유전의 법칙은 실레시아에서 완두를 키우던 수도사가 발견했다. 양 부모가 모두 생식에 기여하면, 새로운 세대마다 유전자 조합이 뒤섞이면서 각 세대는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갖게 되어 변화하는 환경과 새로운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 유성 생식은 우리를 유전적으로 유연하게 만든다. (P.242-243)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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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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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까지 배우고자 했다던 한국의 교육열은, 실은 공부 못한 사람으로 멸시당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엄마들을 상스럽게 욕하지만 정작 상스러움은 다른 곳에 있다. 고된 노동이 마치 ‘공부 못한 죄‘로 받게 되는 형벌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것이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이 보여주듯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 ‘능력 없는‘ 개인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 P34

타인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이 없는 공정은 오직 나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한다. 이 집착은 개인의 억울함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억울함은 폭력을 낳는다. - P111

언어는 정치의 장이며 정치는 언어의 장이다. 공적 발화를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억울함을 번역할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위치에 따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공정‘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타인의 억울함을 무능력의 대가로 취급한다. - P115

부당한 낙인과 공격은 당사자에게는 존재를 걸고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되지만 공격하는 이들은 ‘아니면 말고‘ 식이다. - P137

피해자는 어떤 존재인가. 피해자는 신뢰받는가.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낙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 P147

이처럼 ‘OO세대‘를 가리키는 말은 사실상 계층, 인종, 지역, 젠더를 교차시켜보면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보편적인 세대를 아우르는 말처럼 쓰이곤 한다. 주로 중산층 남성의 관점인데, 그 중산층 남성이 ‘보편적 세대‘의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P161

물론 경제와 시민의 자유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의 ‘본질‘은 아니며 경제력이 자유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인권침해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시각이 그동안 국가의 성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수많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관행을 합리화해왔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다‘며 독재를 옹호하게 만든다. - P182

공적 영역에 여성의 자리가 없기에 여성들은 ‘엄마‘로서 자리를 구해야 한다. ‘왕자 낳은 후궁‘이든 ‘엄마‘든 재생산을 충실히 수행한 여성만이 권력을 가진다는 암시를 준다. 단지 비난을 위해서는 야망 있는 어머니 (후궁)을 끌어오고, 칭송하기 위해서는 희생하는 어머니를 내세울 뿐이다. - P212

인종주의에 맞서고, 장애인 차별에 맞서는 이들은 꾸준히 동물권 운동에서 연결성을 찾는다 동물이 학대받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오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동물 같은 인간‘을 찾기 때문이다. - P286

시장은 은폐의 언어를, 운동은 폭로의 언어를 쓴다. 당연히 후자가 더 즉각적 불편함을 안긴다. 이 불편함이 제 안에 침투하기를 꺼려서 적극적으로 외면하다 보면 자연스레 반지성을 향해 간다. 불편하지 않고 알아가는 진실은 없다. 일본이 아무리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수라 명명해도 그것은 오염수이다. - P286

연민은 강한 정치적 힘을 만든다. 그럼에도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따른다. ‘불쌍한 존재‘는 너무도 무력하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존재들은 그저 이 세계의 ‘불쌍한 존재‘라는 틀에 갇힐 뿐이다. 그렇게 연민의 대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타자의 불쌍함이 나의 사회적 참여의 감정적 원천이 될 때, 이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연대 의식으로 향하기보다 불쌍한 대상을 도울 수 있는 나의 대한 우월감으로 빠지기 쉽다. 불쌍한 대상들이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을 때 순식간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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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 P40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폐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 P63

음성 합성 AI, 웨어러블 로봇, 그리고 보청기를 통해 들려오는 ‘첫 소리‘ 영상들의 연출이 의도하는 바는 일관적이다. 기술은 장애인에게 정상성을 선물하고, 비장애인들은 그 아름다운 순간을 보며 감동을 받고, 장애인들은 희망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출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먼저, 장애인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주는 구도는 오래전 호주의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스텔라 영Stella Young이 비판했던 ‘감동 포르노‘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이제는 기술의 보조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 P70

기술철학자이자 장애학자인 애슐리 슈Ashley Shew는 기술의 발전이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관점을 테크노에이블리즘Technoableism이라고 칭하며 비판한다. 테크노에이블리즘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손상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개인에게 기술적 지원이나 교정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것을 혹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 P86

왜 휠체어를 위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보다 로봇 외골격이 더 주목과 찬사를 받을까? 이동 보조기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더 정상성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기술보다 수어나 문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로봇 외골격보다 휠체어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장애인의 몸은 설령 가능 유형의 장애라 해도 규격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다. - P87

사이보그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그리는 세련되고 효율적인 삶 속에는 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상의 불편함이 제거되어 있다. 사이보그 신화는 사이보그의 현실이 기계와의 불완전한 동거, 즉 불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 P138

플라스틱 빨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기술과 장애의 관계가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 더불어 특정한 진보적 가치를 위한 운동이 다른 권리운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주름 빨대는 주류화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 주류화를 통해 원래의 목적이 잊히고 말았다. 장애 접근성 이슈에서는 이처럼 자원 사용이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충돌 지점에서는 결국 격렬한 논쟁이 필요하다. - P210

어쩌면 미래의 기술, 미래의 과학은 장애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발전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함 없는 완전한 기술을 거머쥘 수 없고, 불멸에 도달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능력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 P278

몸의 위계, 능력의 위계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적절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차별에서 자유로울 세계를 그려보는 것조차 막연하고 어렵다. 차라리 인간이 죽음, 노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설령 그것이 아주 어려운 상상이라고 해도 나는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제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더 해방적이라고 믿는다. (P.281-282) - P281

<사이보그가 되다>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반복해서 떠올린 이미지는 블록버스터 영화 속 사이보그들이다. 그들은 매끈한 팔다리를 휘두르며 스크린 속을 날아다닌다. 이런 사이보그들은 내가 선뜻 이입할 수 없는, 감히 이입할 엄두도 내지못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사이보그들은 내 옆에 와 지친 표정을 지으며 앉는다. 보철 다리를 분리해서 손에 들고 사실은 이거 좀 걸리적거렸어, 하면서 투덜거린다. 결함을 가진, 그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넘어서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그 텅 빈 구멍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이보그들을 상상한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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