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는 소문을 두려워하는 대신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이 더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꾸몄다. 그것은 연기에 가까웠다. 연기하는 삶은 재미있었다. 그들이지어낼 소문을 짐작하는 시간은 흥미로웠고 짐작이 적중할때는 짜릿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앞서가고 끌어가는것. 휩쓸리지 않고 관망하는 것. 그들이 싫어해도 월화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싫어하는 자기는 연기로 만들어낸가짜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 같으면 상처받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 슬프고 우울한 연기도 가능했다. 월화는 자기 짐작대로 반응하는 그들이 우스웠다. 월화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 P35
그럼 사람을 구해. 사람을 구하는 일이 아니야. 한 명을 살렸다면서. 수십 명이 죽었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수십 명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십대오십이라고 생각해. 한 사람을 살리느냐죽게 두느냐의 문제라고. 하지만 난 다 본단 말이야. 죽어가는 사람을. 한 사람을 구하고 네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천자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니. - P75
무슨 일을 하게 되든 힘들 거야.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겠지. 그러나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어. 남들은 하지 않는 일을 네가 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누가 알겠니. 네가하지 않는 일을 또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 - P112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P125
정원은 때로 목화에게 화를 낸 것을 후회했다. 사과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사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제 갑자기 짜증 낸 이유를 설명하려면 지금 자신의답답한 상황을 먼저 말해야 하고, 그러려면 곤란함이나 세상의 부당함을 늘어놓아야 하는데 그런 말은 여태 질리도록 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연이어 하다 보면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P136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 P155
내 동생임명자와 임석태가 죽을 때 나는 왜 죽지 않았을까? 똑같이굶주리다가 같은 풀죽을 먹고 같은 물을 마셨고 같이 아팠는데 왜 나만 살아났을까? 의문은 더욱 생생한 기억을 불러왔고 또 다른 의문을 물고 왔다. 그때 어째서 나만 총알을피했을까? 지뢰를 밟지 않았을까? 그 역병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집에 불이 난 적도 있다. 가진 것이 없어몸만 빠져나왔다. 물난리로 온 동네가 잠긴 적도 있다. 역시가진 것이 없어 몸만 빠져나왔다. 임천자는 그 밤 내내 생각했다. 젊은 시절 자기가 살리던 단 한 명들처럼 자기 또한 누군가의 단 한 명이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났기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 P163
신은 의도도 목적도 없어. 네가 루나를 구한 건 우연일뿐이야. 아주 다행인 우연. 수십 년간 그것을 경험한, 더 많이 살릴 수 있지 않으냐고수백 번 질문했으나 답을 듣지 못한 장미수의 답은 그랬다.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덫에 걸린다. 굴레에 갇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 P180
목화는 자기를 둘러싼 나무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숲속의 날개 달린 것들에게, 흙이 되어가는 죽은 것들에게, 가장 먼 곳까지 이동하는 바람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당신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 가서 그 나무에게 전해. 당신의 일을 대신하는 나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나를 도구로만 쓰지 말라고. 나 또한 한 번뿐인 삶을 사는 단 한 명임을기억하라고. - P195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산다. 상대의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 쉽게 판단하지. 불행할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부족한 게 뭐냐고,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 P197
내가 원하는 삶. 목화는 생각했다. 그건 바로 지금의 삶. 목화는 원하는 삶 속에 있었다. 다시, 목화는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죽음. 읽어임천자가 수없이 연습한 것처럼 신목화도 매일 준비하고 싶었다. 멀리서 죽음의 실루엣이 보이고 차차 선명해질때, 당황하지 않고 의젓하게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깊이 그리워한 친구를 만난 듯 진심 어린 포옹을 해도 좋을것이다. 그럼 육신에 편안한 표정을 남길 수 있겠지.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 또한 많이 목격했다. 목화는 그들의마지막을 기억했으며 그와 같은 죽음을 원했다. 그러므로남김없이 슬퍼할 것이다. 마음껏 그리워할 것이다. 사소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목화가 원하는 삶.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처럼 삶과 죽음또한 나눌 수 없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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