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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낸 신작으로, 그의 일곱 번째 소설이다. 『파묻힌 거인』의 배경은 서기 500년에서 600년 사이로, 로마인들은 철수한지 오래이며 아서 왕은 이미 아발론으로 떠났다. 브리튼 족은 서쪽으로 쫓겨 가고 색슨족이 섬의 동쪽을 차지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섬을 덮은 자욱한 안개다. 안개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개가 생겨난 이후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제 일도, 오늘 일도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마저도 잊게 되는,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잊는 상황. 잃어버린 기억은 사소한 일일 수도,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생명체는 바로 도깨비[*1]이다. 토박이 괴물이라 언급되는 도깨비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도깨비, 엘프, 용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해 기독교도들은 토착 신앙의 주술적 요소도 믿고 있다. 망각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액슬과 비어트리스라는 브리튼 족 노부부다. 어느 날, 액슬은 아내와 '여행' 이야기를 한 사실을 기억해낸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있었고, 그가 멀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음도 기억해 냈다. 부부는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그들의 여정은 기독교 마을, 색슨족 마을, 수도원, 숲, 강, 다시 숲, 거인의 무덤 순으로 이어진다. 줄거리라 하면 이것이 다다. 그리고 소설을 휘감은 거대한 알레고리는 은근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당시 사람들은 삿된 것을 상징하는 어둠을 꺼리고 이를 떨치기 위한 주술을 믿었다. 공동체는 폐쇄적인데 이는 정치와 종교 문제이기도, 도깨비와 용이라는 두려운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 인물들은 안개 문제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이보르는 안개의 원인은 하느님이 잊어버린 것이라며, 그분이 잊은 일을 인간이 어찌 기억하겠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어트리스는 혹시, 우리가 한 어떤 일에 하느님이 화가 났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한다. 색슨족 전사 위스턴[*2]과 현명한 조너스 신부는, 용 케리그 때문에 안개가 발생한 것이라 얘기한다. 아서 왕의 기사 가웨인은 이것이 멀린의 주술이었음을 확인해준다.
멀린은 왜 안개를 불러냈을까. 아서 왕 시절,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은 전투에서 여자와 아이, 노인을 죽이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는다. 브리튼 족은 약속을 깨뜨리고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색슨 족의 증오를 일으킨다. 승리로 찾은 평화를 유지하고자 아서는 멀린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증오를 희석시키기 위해 용 케리그를 이용한 거대한 주술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망각 위에 이루어진 것을 정당하다고,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하지 못하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는가? 가웨인은 아서의 결정을 옹호하며, 오래된 상처들은 망각 속에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스턴은 구더기가 아직 남았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낫겠냐고 반문한다.
한편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기억을 되찾으려 하면서도, 그 기억이 자신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다. 판도라가 열었던 상자를 다시 닫을 수 없듯이, 망각 속에 이룩한 평화가 깨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여정이 지속되면서 조금씩 그들은 기억을 떠올린다. 처음 길을 떠난 목적은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정이 진행될수록, 비어트리스가 느끼는 통증으로 인해 액슬의 두려움이 가시화된다. 부부는 색슨 족 마을에서도, 수도원에서도 치료법을 찾지 못한다. 잠든 비어트리스는 평온해 보이며, 그를 바라보는 액슬은 행복을, 이후엔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이, 픽시 도깨비들이 말한다. 그녀를 넘겨요, 그녀를 구할 치료법이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비어트리스가 마을에서 만났던 색슨족 여자, 폐가에서 만난 노파, 가웨인이 만난 과부들은 모두 뱃사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과 함께 섬으로 가려고 했는데, 뱃사공이 남편을 태워다주고 나는 내버려뒀다고. 어쩌면 뱃사공은 아케론을 건너는 카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은 죽음을 상징한다. 잠든 아내를 바라보다 떠나기로 결심한 액슬, 아들의 무덤이 저 섬에 있고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비어트리스의 말. 결국 이 여행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용서와 화해를 위해, 함께 한 시절의 기억들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뱃사공의 시험은 오히려 떠날 사람과 남겨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선의처럼 느껴졌다. 산 사람은 배에 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아름다운 유산을 전승한다. (『화씨 451』) 모든 기록을 삭제, 검열하여 그 사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없앨지라도, 기억으로 그 사람을 되살려낼 수 있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암묵적으로 동의한 망각의 커튼을 젖혀 역사적 사실을 복구하는 작업도 기억이다. (『살라미나의 병사들』) 사관의 목을 치고 기록한 역사에도 틈새가 있고, 입이 막혀도 양심선언을 하는 언론인들이 있으며, 물증을 없애 이룩한 완전 범죄에도 허점이 있다. 기억은 의심에서 시작되며 그 문은 단단히 걸어 잠글 수 없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곧 홍수가 되어 쏟아진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으며, 그로 인한 결과도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색슨 족이 증오를 기억해 내어,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잊는 비극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기억이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었듯이, 소년 에드윈이 한 약속, 브리튼 족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라는 그 약속에는 브리튼 족 부부가 보여주었던 우정에 대한 기억이 함께 할 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미래에 내릴 결정은 소년의 몫이다. 위스턴이 브레누스 경과 액슬에 대해 품은 감정이 다르고, 그가 인정을 베풀듯이 말이다. 이시구로는 색슨 족 여성의 입을 빌려 얘기한다.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함께 나눈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1] 도깨비: 어째서 서양 판타지 배경인 작품에서 도깨비라는 단어를 썼을까. 번역가도 고심한 부분이겠지만, 초자연적인 존재를 통칭하여 도깨비라 부를 순 있다. 그러나 소년을 공격한 것은 오우거(오거Ogre)이다. 『반지의 제왕』의 오크,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괴물로 사람들은 오우거에 익숙하다. 본문에서도 이를 가리켜 괴물이라 하며, 식인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차라리 주석을 다는 편이 좋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 엘프는 그대로 쓰였기 때문이다, (26쪽의 ‘변장한 엘프’) 요정에 가까운 픽시(Pixie)는 픽시 요정이 아닌, 픽시 도깨비(255쪽, 342쪽)로 번역되었다. 나에게 도깨비란 김서방 호구에 가까운 이미지라 더욱 그러했다.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도 용이 아니라지만 이는 이미 혼용되고 있기에...
[*2] 색슨족 전사 위스턴: 도깨비의 팔을 뽑았다는 점, 용에 맞선다는 사실 때문에 베오울프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