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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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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어준 자연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혹은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치유와 위로를 받는다. 그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연 어딘가로 나아가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자연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과 촉촉하게 내리는 비, 그리고 나를 향해 내리쬐는 햇빛이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이다. 나 역시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을 생각한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비롯되었던 곳, 그리고 앞으로 내가 돌아갈 곳이기에 자연을 떠올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자연을 떠올리고 나서 굳이 자연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자연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다. 깊은 절망을 느낀 어느 날, 나는 나를 향해 비치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느꼈다. 빛이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것을. 이 말은 정말 빛만이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다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빛 그 자체가 주는 존재감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떠올린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빛은 언제나 나의 유일한 친구야.’


배리 로페즈가 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에서도 자연을 유일한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자연을 통해 힘을 얻은 순간순간을 담은 일기와도 같은 글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지인이자 요양병원 의사인 한 남성에게 오랫동안 성폭행을 당한다. 치료 목적이라는 말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린아이는 공포를 느끼지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끔찍한 시간을 견뎌낸다. 공포에 압도된 그 어린 생명에게 그래도 살아갈 힘이 되어준 건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한 줄기 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빛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었다. 작가는 그 빛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건 언젠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온전히 자기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긍정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큰 힘을 얻는다.


분명 빛에서 존재 이유를 발견했지만, 작가는 자연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자연이라는 대상은 더 또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는 자연을 언어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에 대한 분석을 유보하며 결국엔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연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을 받았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리라.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은 자신에게 크게 확장되어 다가온다. 그건 엄습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끌어안는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의 힘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연을 알려고 하기보다 그저 자연을 향해 몸을 맡긴다. 그가 배 위에서 폭풍을 마주하면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자연이 보여줄 미지의 세계를 긍정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자연의 광대함을 새롭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지나간 일이라며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이라는 트라우마는 작가의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는 이 있었다. 그리고 처럼 느껴지는 자연이 곁에 있었다. 빛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크나큰 고통이 주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우리 대부분은 작가가 겪은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그 경험에서 우리가 입은 상처는 비록 어느 정도는 아물었을지라도 그 흔적은 분명히 남았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길을 마주한다. 나 역시 희망과 기대가 끊긴 것 같은 절망을 느끼면서 그 상황 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온 찬란한 태양의 빛이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내 고통의 순간이 극심했다고 한들 작가가 어린 시절 당한 고초와 비교할 수 있으랴. 나 역시 내 삶에 빛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없었다면 아마 작가의 글을 그저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자연으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고 치유의 과정 가운데서도 자연의 섬세한 위로를 받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가올 고통의 순간에 나 역시 조금은 의연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그 어려운 고비를 지난 후에 아마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이 내게 빛이 되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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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하림 글, 지경애 그림 / 그리고 다시, 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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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면서도 단호함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음악과 함께 읽어보세요.
흥얼거리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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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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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사실 비밀이라는 건 없다. 이미 한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그건 비밀이라 할 수 없다. 진정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때 그것을 비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비밀이라는 말은 대개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비밀이라고 여기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기보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이건 비밀인데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라고 할 때 그 비밀이라는 말은 혼자만 아는 소중한 무엇을 누군가와 나누겠다는 뜻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일상에서 비밀은 이건 비밀인데···.’라는 말과 함께 다가오기도 하지만 설령 그런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비밀이 다가오는 어떤 순간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정말 소중한 무언가를 말하려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비밀을 말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정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사람과는 어떤 비밀도 나눌 수 있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런 비밀은 어떤 자극적이기만 한 무언가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랑으로 잇는 끈이 되어준다. 만약 그 비밀이 말을 통해 전달된다면 비밀은 그 말이 전하는 의미 이상으로 사람들 사이에 깊게 남을 것이다.


맡겨진 소녀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는 킨셀라 부부라는 먼 친척에게 맡겨진다. 집안일과 자녀 양육으로 바쁜 데다가 새롭게 태어날 아이를 뱃속에 가진 상태라 더없이 고단한 엄마와 집안일에는 무심한 아빠 사이에 자란 소녀는 부모의 결정에 따라 친척 부부의 집에 오게 되었다. 주인공 소녀는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환대를 경험한다. 아주머니는 간밤에 소녀가 이불에 실수해도 습기가 찬 낡은 매트리스 탓을 하며 넘어가 주고 아저씨는 우체통에 다녀오는 심부름을 달리기 놀이 시간으로 삼아서 소녀가 뛰기에 재미를 붙이도록 응원해 준다. 여태껏 다정한 보살핌을 받고 자라지 못한 소녀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하지만 킨셀라 부부의 따뜻한 마음에 조금씩 편안함을 느낀다.


어느 날, 함께 우물에 가보자고 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소녀는 이거 비밀이에요?”라고 묻는다. 다시 한번 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에요?”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아주머니는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라고 덧붙인다. 소녀는 아주머니의 말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우물에서 마신 시원하고 깨끗한 물처럼 비밀이 없는 아주머니 집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다른 말도 한다. “비밀이란다.” 아주머니의 말에 소녀는 여기에 비밀이 없다고 하셨잖아요.”라고 묻는다. “이건 달라. 비밀 요리법에 더 가깝지.” 아주머니는 시리얼을 우유 없이 한 알씩 먹는 것을 피부 관리라고 말하며 귀엽게 비밀이라고 말한다. 소녀는 이 말도 싫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소녀는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기쁘기 때문이다.”


비밀이 없으면서도 있는 관계, 어쩌면 소녀는 킨셀라 부부 집에 머물며 비밀의 비밀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로 기꺼이 비밀 없이 살아가지만, 그 사랑의 관계 가운데 발생한 비밀을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만이 오롯이 느끼는 감정의 고유한 차원을 말하는 것 같다. 혹여나 자신들의 관계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비밀은 밝혀내야 할 수상한 어떤 것이 아니라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돌아보며 서로 관계를 확인하고 앞으로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다짐하는 것, 그게 비밀의 속뜻이 아닐까.


소녀는 킨셀라 부부와 장례식에 갔다가 이웃 아주머니에게 잠시 맡겨지는데 그녀에게서 킨셀라 부부의 비밀을 듣는다. 그들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사고로 죽었다는 내용이다. 소녀가 머무는 방, 입었던 옷도 그 아이의 것이라고도 말해준다. 분명 그 일들은 일어났었다. 그러나 소녀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사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사실일까. 오로지 이 이웃 아주머니의 흥미를 위한 게 아닐까. 킨셀라 부부와 그 아들 사이의 비밀은 간직되지 못하고 이웃 아주머니 입을 통해 쉽게 나와버렸다. 그렇게 흘러나온 말들은 비밀로 복원되지 못하고 당사자들을 향한 폭력이 되어버린다. 거기에는 앙상한 사실들만이 남아 값싼 동정을 기다린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3)

 

이웃 아주머니의 행동을 책망하기라도 하듯이 아저씨는 소녀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소녀가 이웃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킨셀라 부부에게 비밀 없이 말한 후의 일이다. 비밀이 당사자들이 아닌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너무나 부주의하게 다루어지기 쉽다. 비밀에 얽힌 이들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가십거리만 남는다. 킨셀라 부부가 죽은 아들을 향한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 소녀를 잘 보살폈는지, 그 마음은 다 알 수 없다. 다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같은 건 없다는 아주머니의 말처럼 부부는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소녀를 진정으로 아낀 것 같다. 소녀 역시 부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도 실수로 우물에 빠졌던 이야기는 부모에게 절대 하지 않는다. 그 사건이 드러날 때 발생하는 오해는 소녀가 킨셀라 부부와 만들었던 다정한 이야기를 삼켜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는 무심한 아빠와도 비밀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소녀는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킨셀라 부부의 집으로 오는 길에 어떤 나무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빠. 나무 좀 봐요.” “아픈가 봐요.” 아빠는 딸의 말에 수양버들이잖아.”라는 한마디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어린 소녀가 아빠와 함께 만들고자 했던 비밀은 아빠의 한결같은 무심함에 사그라졌다. 아빠와 함께 만들어 갈 이야기는 사라지고 수양버들이라는 사실만 덩그러니 남았다.


끊임없이 잔인한 사실만을 캐묻는 사람에게 비밀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비밀을 깨부수어서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닭을 비밀 그대로 두지 못하고 닭의 배를 갈라서 많은 황금알을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 앞에 놓인 건 죽은 닭이라는 사실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긴장감이 고조되며 급격히 섬뜩해지는데 이는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가르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집착 같은 게 느껴져서이다.


때가 되어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기를 집에 태워주고 떠나는 킨셀라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소녀는 뒤따라 뛰어간다. 머지않아 아저씨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뒤에서 아빠가 따라온다. 왜 아저씨를 향해 뛰어갔는지 그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고 작정한 모습으로 말이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 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마치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비밀을 침범하러 오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들에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빠는 또 어떤 서슬 퍼런 사실을 얻어내려고 할까. 이들 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소녀가 이전과는 많이 달려졌다는 것이다. 비밀을 무자비하게 파헤치려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는 것, 비밀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비밀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 소녀는 그 심오한 '비밀'의 의미를 어린 나이임에도 알아버린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아빠에게 소리치며 맞서는 소녀의 모습에서 두려움은 다행히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소녀의 마음에 확고히 자리잡은 용기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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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오마이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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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안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들 가운데 산책을 즐겨 했던 이들이 여럿 있다. 소크라테스는 산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하이데거는 숲속을 산책하며 존재를 사유했고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산책은 단순히 기분 전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동안 품었던 생각을 전개, 확장하고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가볍게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 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을 아마 많은 이가 경험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휴식의 시간이자 깨달음의 시간이며 치유의 시간이다.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의 제목을 보며 가장 눈에 띈 단어가 산책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법고전이라는 단어와 가볍게만 느껴지는 산책이라는 단어의 부조화 때문이다. 더구나 산책이라는 말은 책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개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고자 하는 책에 사용된다. 그런 책을 읽으며 당황스러울 만큼 가벼운 걸음만 실컷 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 가볍게 다닌다는 산책이라는 의미를 단어 그대로 실현한 책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국 교수의 책은 산책이라는 이름처럼 가벼움도 있지만, 그 가벼움에만 머물지 않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15권의 법고전을 소개하며 핵심이 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을 뿐만 아니라 이 고전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책은 조국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기에 접근하기에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그야말로 부담 없이 산책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가볍게 산책하듯 읽어나간 책은 서서히 법고전의 핵심에 이르도록 했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토록 많은 기본서가 나왔지만 계속해서 기본서가 나오는 이유는 그 기본만 제대로 알아도 핵심을 알게 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때문이다. 조국 교수의 이 책은 우리가 이미 알게 모르게 품어왔던 법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또한 법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소개하기 위해 산책이라는 장으로 이끈다. 철학자들이 했던 산책의 의미를 조국 교수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 중에서 법과 관련한 주제를 다뤘다. 대개 법이라고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게 일반적이다. 법은 실제로는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법의 내용은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법이 지향하는 바도 추상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자유, 평등 이러한 가치는 물론 좋게 느껴지지만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법을 전문가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법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한 사람(한 사람만이 아닌)의 소중함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나마 법이 조금 더 친근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법에 관한 이야기가 친근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과 같은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한 사람의 소중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한 사람의 가치를 담은 말이 인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에서 자주 쓰는 말이라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지칭한다. 영어의 ‘people’이 바로 인민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흔히 쓰는 국민이라는 말은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한데 영어로는 ‘nation’이라 쓴다. ‘국민은 특정 국가를 전제하지만 인민은 국가 이전에 존재한다. 저자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은 국가가 있기 전이라고 말한다. 국가 이전에 존재한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를 하여 나라를 만들자라고 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이는 로크가 말한 자연법이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안티고네가 강조한 신의 법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국가도 없고 법도 없었지만, 자유와 평등을 꿈꿀 수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법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느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계약을 통해 국가와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게 살아온 세월은 거의 인간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부여받은 권력을 모든 사람을 자유와 평들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사물의 추이가 항상 평등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입법의 힘은 항상 그것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p.41)

 

여기서 사물의 추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 말하는 것이 아닐까. 루소의 문맥에서 보자면 권력의 속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권력은 누구의 손에 쥐어지더라도 그것을 선용하기보다는 남용하기 쉬워진다는 말일 게다. 그렇기에 권력은 견제되고 또 견제되어야 하고 권력을 부여받은 자는 끊임없는 자기 객관화를 거쳐야 한다. 루소가 입법의 힘으로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권력을 분산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도 연결되었다. 루소는 인간이 권력을 다루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삼권분립을 최초로 제기한 몽테스키외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75~76)

 

몽테스키외가 말한 사물의 본질은 루소가 말한 사물의 추이와 맞닿은 말이다. 어찌 보면 본질이라는 말은 추이라는 말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느껴져 누구도 예외가 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우며 제도적으로 다른 권력을 견제 장치로 둘 때 그나마 남용하는 일이 줄어든다고 하겠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국가와 법률을 떠나 인간은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조심스럽게 거머쥐어도 통제가 될까 말까 한 권력을 너무나 자신감 있게 움켜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그렇기에 어느새 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빠져버리고 전체라는 덩어리로서의 사람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게 아닐까 싶다.

법이 인간을 담고 있고 인간을 향해 있는 한, 법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법은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대전제 안에서 법은 자기 내면을 파고든다. 그럴 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존재다.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법이라는 사물의 추이사물의 본질은 한 사람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토머스 페인이 말한 것처럼 법이 왕이 될 수 있다.

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면서 투박했던 법이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왕이라는 한 사람이나 소수 권력층만 자유로웠던 법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법으로 발전했다. 이는 어쩌면 법이 제 모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소중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법은 인간의 가치에 부합하고 인간의 분수에 맞는 법으로 다듬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부각된 소수자의 문제를 통해 다수의 전제라는 토머스 페인의 문제의식을 살핀다. 상대적 다수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법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해결된 문제는 그 아래에 묻혀 있던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법의 운동은 그 아래로 계속 향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상대적 다수가 된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끝으로 멈춰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집단은 부분적 진실’, ‘제한적 진실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권력과 마찬가지로 진실 역시 인간이 온전히 품을 수 없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계를 인정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형식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법은 자신을 끊임없이 객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만의 이득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행동하겠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법의 정신에 반영된 인간의 태도가 아닐까.

법고전을 대하며 법의 여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은 법을 만들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법으로 판단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법이라는 이름 위에 덧입혀진 권위의 덮개를 치워버릴 때 법의 억압에서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성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다. ‘영구 평화론을 구상한 칸트를 이상주의적이라 염려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의 정신은 이상을 향해 있다. 책에는 신의 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주로 법을 엉뚱하게 사용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로 사용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신이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에 자유와 평등을 알게 한 존재, 그 존재가 있다면 그를 신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그 신은 법이라는 이름 안에서 놀랍게도 우리 모두를 향해 다가온다. 아직 다가오지 못했다고 느끼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도 비록 더딜지라도 신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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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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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_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글항아리 / 2023)

 

서로를 비추는 우정의 순간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떤 계기를 통해 친밀해지고 그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서로의 거리를 0(zero)에 가깝게 만들려고도 한다. 그 관계가 불타는 사랑이 됐든, 끈끈한 우정이 됐든 말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음처럼 쉽게 유지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원했던 것과 상대방이 원했던 것이 어긋나버리는 상황은 야속하게도 꼭 찾아오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적절한 거리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사랑이라는 관계에 기대되는 거리는 0, 혹은 그것에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정이라 불리는 관계에서 서로가 어긋나는 상황은 그 관계를 재조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정이라는 관계에 기대되는 거리는 0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넉넉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비언 고닉의 짝 없는 여자와 도시를 읽으며 사람의 관계, 그 가운데 사랑과 우정에 관해 생각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고층 건물의 유리창처럼 서로 되비치는 거울 같은 관계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층 더 잘 드러나도록 한다. 도시는 분명 많은 사람이 함께 있지만,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동반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기를 은밀히 기대하는 눈치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도 친밀함의 순간이 발생하면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렇기에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관계는 대개 폭발적인 에너지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감이 낮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관계의 이루어짐이라는 뜻밖의 상황은 반가움이 증폭될 만한 사건이다. 책은 이처럼 도시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 내용은 대개 사랑과 우정의 관계다. 저자는 연인들이 이루는 사랑의 관계도 소중히 여기지만 누구와도 이룰 수 있는 우정의 관계에 더 무게를 둔다. 저자가 주목한 도시라는 공간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사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관계였지만 그 안에서는 사랑보다는 욕망이 더 자주 드러났고 이를 친밀함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에 반해 우정은 상대방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서적으로 감성적으로 이어짐을 경험하는 관계이다. 어쩌면 저자에게 우정은 사랑에 선행되어야 할 것, 혹은 사랑을 포괄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책은 우정의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작용을 사랑과 대비하면서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사랑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주로 사랑이 실패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저자의 경험담뿐만 아니라 저자의 지인들이 겪은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상대방과의 사랑의 관계가 맥없이 시들어버리는 상황이 목격된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관계가 급격히 도약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마도 육체적인 갈망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든 탓일 텐데 이는 관계가 진행되는 중간 과정을 생략해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압축적으로 발전한 관계에서는 관계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지만, 사랑에 취해버린 상태에서는 그러한 반성의 차원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들의 관계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이들의 사랑이 언젠가부터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상대방을 소환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무언가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우정이다.

 

우정이라는 과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p.134)

 

사랑을 시작하는 관계든, 사랑에 몰입한 관계든, 그 외 어떤 인간관계든 저자는 우정이라는 관계를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듯하다. 단순하게 우정이 사랑에 선행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정이 아닌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과도한 자기 몰입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그러한 자기 몰입은 신경증적인 우울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에게만 몰입할 때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은 관계가 되고 만다.

책에 어느 부분에서 독특한 지점이 발견된다. 도시의 헛헛함,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이라는 관계의 실패 같은 글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정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말하는 듯한 글이 등장한다. 저자는 지하철역에서 기형아처럼 보이는 한 아이와 아빠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농인이기도 했던 그 아이는 남자와 수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상대방의 말에 반응하며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흉측해 보였던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남자의 얼굴에도 애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생각한다.

 

저 둘은 굉장히 높은 차원에서 서로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구나.” (p.95)

 

회색빛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그 주위를 밝게 만드는 풍경을 저자는 발견한다. 이들은 정서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서로에게 집중한다. 언뜻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이들에게서 우정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중년 커플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저자는 흑인 여자와 백인 남자가 손을 잡고 대화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와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며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흑인과 백인이 서로에게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가 새삼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p.97)

 

서로 다른 인종이 커플이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에 대한 저자의 소감은 우정에 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서로에게 우정이라는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말이다. 저자는 책의 어느 대목에서 여자와 남자는 다른 종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다른 종이 커플이라는 현실이 되고자 한다면 불가피하게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달려가면서 놓쳐버렸던 그 중간 생략과정들을 대면해야 할 시간을 말이다. 그 시간은 기형아 아이와 남자가 지하철에서 나누는 대화의 시간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돌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통해 비어있던 사랑의 공간을 메워갈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도시의 풍경을 비관적으로도 보지도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느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 사람이 더 삭막해지고 황폐해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 수도 있다고 책은 말하는 듯하다.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는 흐릿해 보였던 것을 조금 더 뚜렷하게 마주하기도 한다. 책에는 사랑에 실패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를 통해 사랑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도시는 사랑을 포기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사랑의 의미를 조금 더 잘 보이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 즉 우정의 힘을 불러낸다. 사랑이 우정의 힘을 받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거라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우리가 처음 서로를 볼 때 비추었던 것은 우정의 거울이 아니었을까. 그 우정의 거울은 마치 도시의 유리창처럼 서로를 비추어 준다. 어느 순간 홀연히 사랑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우정의 거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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