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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자렛 - 즉흥의 상태
이기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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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너무 재미있습니다. 두꺼운 책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요즘 책을 넷플릭스와도 많이 비교하던데 그 정도로 재미를 보징합니다. 재즈에 조금 관심 엤으신 분은 재즈에 관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한데 오래 두고 볼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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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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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_ 김지혜 지음 (창비)

특권이 내면화된 나에게

요즘도 공중파 방송을 보면 출연자들이 ‘바보’, ‘병신’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쓰는 모습을 본다. ‘바보’는 주로 ‘동네 바보’라는 말로 자주 쓰이고 ‘병신’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때 자주 쓰인다. 둘 다 장애인을 가리키며 비하하는 말인데 언젠가 한 번 지적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출연자들의 부적절한 발언을 ‘삐~’ 소리로 처리하면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요소로 활용하는 듯하다. 시청자들은 그 내용을 유추하면서 발견의 재미를 찾는 것도 같다. 그 내용 가운데는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많이 담겼다. 그러한 표현을 마주하면서 분명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만, 프로그램의 재미에 휩쓸려 금방 잊어버리곤 하는 나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그럴 때면 불편한 상황을 잠시 견디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이제는 뿌리 깊게 박힌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나도 위에서 언급한 그런 말들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난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작가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라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주었지만 뭔가 크게 잘못 생각했고 지내왔다는 직감을 하고 나서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장애인 봉사활동을 꽤 오랫동안 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조금은 놀랐던 건 그들이 자조 섞인 말투로 농담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을 종종 쓸 때였다. ‘애자’, ‘장애자’라는 말을 줄여서 자기들끼리 재미 삼아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장애인인 당사자들이 그렇게 표현하면서 웃기에 나 역시 그래도 되는가보다 싶어서 별생각 없이 웃고 넘겼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장애인과 봉사자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건 재미있는 표현이 아니라 불편한 표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불편함을 표시했던 이들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신나게 웃던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장애인과 가까이 지낼 일이 없어진 나를 발견한다.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거의 매 순간 불편함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신마비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날은 불편함을 공기처럼 마주해야 했다. 침대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앉히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옷을 입히고 콜택시를 불러 태우고 목적지에 가서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보람된 마음과 함께 후련한 마음이 동시에 어쩌면 더 많이 몰려온다. 그 후련했던 마음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장애인에게는 불편함이었지만 나에게는 특권으로 가득한 일상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중증 장애인 봉사활동은 덜 했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났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활동에 큰 불편함이 없는 약시(弱視)를 가진 장애인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마음이 어렵지 않았다. 위험한 곳을 지날 때 잠시 팔만 잡아주면 될 정도로 그를 돕는 일은 아주 쉬웠다. 이제야 조금 깨닫는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일상에서의 특권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장애인과 있을 때 내 모습이 평소와 가장 비슷한가를 큰 그림을 그리며 봉사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빠져나오듯이 장애인들에게서 벗어났던 나는 비장애인이다. 그들과 조금 멀어지고 나서 그들에 관한 내 생각은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굳어져 있을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책에 등장하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과연 나의 반응이었다. 왜 저런 방식으로 표현할까, 다른 방법으로 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생각이 바로 내가 품었던 생각이다. 나는 그저 비장애인으로서 당연히 어떤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권리가 특권인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침해받았다는 생각만 한 것이다.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향한 나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꽤 합리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장애인으로서 특권을 방패 삼아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p.184)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너의 생각을 존중해’, 라는 말은 이제 흔히 쓰는 말이 되었다. 우리는 이 말을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매너 있는 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젠틀한 말도 언제부턴가는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말로 사용되는 것 같다. ‘너와 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끝내자’, 라는 의미로 말이다. 이처럼 이 말의 쓰임이 어느 순간 날카롭게 다가와서 뭔가 개운치 못한 구석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가 어쩌면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다르다’라는 말을 기형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기존의 질서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다르다’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향해 점잖게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낙인과 억압을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자신을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장애인을 멀뚱멀뚱 바라본 게 아니었을까. 이 특권이 몸에 밴 역사는 내 유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아득한 그 거리만큼이나 장애인을 향한 내 마음도 어느새 아득해진 것을 발견한다. 다시 장애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라고 걱정하게 되는 건 그들은 돕는다고 하면서 그저 연민의 마음만 품고 여전히 ‘선량한 차별주의자’ 행세를 할까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나는 내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내가 있어야 할 곳, 그리고 장애인이 있어야 할 곳을 하나씩 알려줄 것 같아 조금은 용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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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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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어준 자연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혹은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치유와 위로를 받는다. 그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연 어딘가로 나아가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자연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과 촉촉하게 내리는 비, 그리고 나를 향해 내리쬐는 햇빛이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이다. 나 역시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을 생각한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비롯되었던 곳, 그리고 앞으로 내가 돌아갈 곳이기에 자연을 떠올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자연을 떠올리고 나서 굳이 자연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자연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다. 깊은 절망을 느낀 어느 날, 나는 나를 향해 비치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느꼈다. 빛이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것을. 이 말은 정말 빛만이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다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빛 그 자체가 주는 존재감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떠올린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빛은 언제나 나의 유일한 친구야.’


배리 로페즈가 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에서도 자연을 유일한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자연을 통해 힘을 얻은 순간순간을 담은 일기와도 같은 글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지인이자 요양병원 의사인 한 남성에게 오랫동안 성폭행을 당한다. 치료 목적이라는 말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린아이는 공포를 느끼지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끔찍한 시간을 견뎌낸다. 공포에 압도된 그 어린 생명에게 그래도 살아갈 힘이 되어준 건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한 줄기 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빛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었다. 작가는 그 빛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건 언젠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온전히 자기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긍정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큰 힘을 얻는다.


분명 빛에서 존재 이유를 발견했지만, 작가는 자연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자연이라는 대상은 더 또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는 자연을 언어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에 대한 분석을 유보하며 결국엔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연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을 받았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리라.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은 자신에게 크게 확장되어 다가온다. 그건 엄습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끌어안는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의 힘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연을 알려고 하기보다 그저 자연을 향해 몸을 맡긴다. 그가 배 위에서 폭풍을 마주하면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자연이 보여줄 미지의 세계를 긍정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자연의 광대함을 새롭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지나간 일이라며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이라는 트라우마는 작가의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는 이 있었다. 그리고 처럼 느껴지는 자연이 곁에 있었다. 빛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크나큰 고통이 주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우리 대부분은 작가가 겪은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그 경험에서 우리가 입은 상처는 비록 어느 정도는 아물었을지라도 그 흔적은 분명히 남았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길을 마주한다. 나 역시 희망과 기대가 끊긴 것 같은 절망을 느끼면서 그 상황 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온 찬란한 태양의 빛이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내 고통의 순간이 극심했다고 한들 작가가 어린 시절 당한 고초와 비교할 수 있으랴. 나 역시 내 삶에 빛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없었다면 아마 작가의 글을 그저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자연으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고 치유의 과정 가운데서도 자연의 섬세한 위로를 받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가올 고통의 순간에 나 역시 조금은 의연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그 어려운 고비를 지난 후에 아마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이 내게 빛이 되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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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하림 글, 지경애 그림 / 그리고 다시, 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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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면서도 단호함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음악과 함께 읽어보세요.
흥얼거리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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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오마이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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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안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들 가운데 산책을 즐겨 했던 이들이 여럿 있다. 소크라테스는 산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하이데거는 숲속을 산책하며 존재를 사유했고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산책은 단순히 기분 전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동안 품었던 생각을 전개, 확장하고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가볍게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 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을 아마 많은 이가 경험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휴식의 시간이자 깨달음의 시간이며 치유의 시간이다.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의 제목을 보며 가장 눈에 띈 단어가 산책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법고전이라는 단어와 가볍게만 느껴지는 산책이라는 단어의 부조화 때문이다. 더구나 산책이라는 말은 책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개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고자 하는 책에 사용된다. 그런 책을 읽으며 당황스러울 만큼 가벼운 걸음만 실컷 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 가볍게 다닌다는 산책이라는 의미를 단어 그대로 실현한 책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국 교수의 책은 산책이라는 이름처럼 가벼움도 있지만, 그 가벼움에만 머물지 않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15권의 법고전을 소개하며 핵심이 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을 뿐만 아니라 이 고전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책은 조국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기에 접근하기에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그야말로 부담 없이 산책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가볍게 산책하듯 읽어나간 책은 서서히 법고전의 핵심에 이르도록 했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토록 많은 기본서가 나왔지만 계속해서 기본서가 나오는 이유는 그 기본만 제대로 알아도 핵심을 알게 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때문이다. 조국 교수의 이 책은 우리가 이미 알게 모르게 품어왔던 법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또한 법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소개하기 위해 산책이라는 장으로 이끈다. 철학자들이 했던 산책의 의미를 조국 교수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 중에서 법과 관련한 주제를 다뤘다. 대개 법이라고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게 일반적이다. 법은 실제로는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법의 내용은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법이 지향하는 바도 추상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자유, 평등 이러한 가치는 물론 좋게 느껴지지만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법을 전문가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법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한 사람(한 사람만이 아닌)의 소중함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나마 법이 조금 더 친근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법에 관한 이야기가 친근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과 같은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한 사람의 소중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한 사람의 가치를 담은 말이 인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에서 자주 쓰는 말이라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지칭한다. 영어의 ‘people’이 바로 인민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흔히 쓰는 국민이라는 말은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한데 영어로는 ‘nation’이라 쓴다. ‘국민은 특정 국가를 전제하지만 인민은 국가 이전에 존재한다. 저자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은 국가가 있기 전이라고 말한다. 국가 이전에 존재한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를 하여 나라를 만들자라고 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이는 로크가 말한 자연법이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안티고네가 강조한 신의 법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국가도 없고 법도 없었지만, 자유와 평등을 꿈꿀 수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법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느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계약을 통해 국가와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게 살아온 세월은 거의 인간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부여받은 권력을 모든 사람을 자유와 평들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사물의 추이가 항상 평등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입법의 힘은 항상 그것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p.41)

 

여기서 사물의 추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 말하는 것이 아닐까. 루소의 문맥에서 보자면 권력의 속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권력은 누구의 손에 쥐어지더라도 그것을 선용하기보다는 남용하기 쉬워진다는 말일 게다. 그렇기에 권력은 견제되고 또 견제되어야 하고 권력을 부여받은 자는 끊임없는 자기 객관화를 거쳐야 한다. 루소가 입법의 힘으로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권력을 분산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도 연결되었다. 루소는 인간이 권력을 다루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삼권분립을 최초로 제기한 몽테스키외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75~76)

 

몽테스키외가 말한 사물의 본질은 루소가 말한 사물의 추이와 맞닿은 말이다. 어찌 보면 본질이라는 말은 추이라는 말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느껴져 누구도 예외가 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권력의 속성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우며 제도적으로 다른 권력을 견제 장치로 둘 때 그나마 남용하는 일이 줄어든다고 하겠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국가와 법률을 떠나 인간은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조심스럽게 거머쥐어도 통제가 될까 말까 한 권력을 너무나 자신감 있게 움켜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그렇기에 어느새 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빠져버리고 전체라는 덩어리로서의 사람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던 게 아닐까 싶다.

법이 인간을 담고 있고 인간을 향해 있는 한, 법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법은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대전제 안에서 법은 자기 내면을 파고든다. 그럴 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존재다.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법이라는 사물의 추이사물의 본질은 한 사람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토머스 페인이 말한 것처럼 법이 왕이 될 수 있다.

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면서 투박했던 법이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왕이라는 한 사람이나 소수 권력층만 자유로웠던 법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법으로 발전했다. 이는 어쩌면 법이 제 모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소중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법은 인간의 가치에 부합하고 인간의 분수에 맞는 법으로 다듬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법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부각된 소수자의 문제를 통해 다수의 전제라는 토머스 페인의 문제의식을 살핀다. 상대적 다수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법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해결된 문제는 그 아래에 묻혀 있던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법의 운동은 그 아래로 계속 향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상대적 다수가 된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끝으로 멈춰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집단은 부분적 진실’, ‘제한적 진실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권력과 마찬가지로 진실 역시 인간이 온전히 품을 수 없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계를 인정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형식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법은 자신을 끊임없이 객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만의 이득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행동하겠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법의 정신에 반영된 인간의 태도가 아닐까.

법고전을 대하며 법의 여정은 한 사람의 소중함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은 법을 만들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법으로 판단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법이라는 이름 위에 덧입혀진 권위의 덮개를 치워버릴 때 법의 억압에서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성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다. ‘영구 평화론을 구상한 칸트를 이상주의적이라 염려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의 정신은 이상을 향해 있다. 책에는 신의 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주로 법을 엉뚱하게 사용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로 사용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신이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에 자유와 평등을 알게 한 존재, 그 존재가 있다면 그를 신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그 신은 법이라는 이름 안에서 놀랍게도 우리 모두를 향해 다가온다. 아직 다가오지 못했다고 느끼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도 비록 더딜지라도 신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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