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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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_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글항아리 / 2023)

 

서로를 비추는 우정의 순간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떤 계기를 통해 친밀해지고 그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서로의 거리를 0(zero)에 가깝게 만들려고도 한다. 그 관계가 불타는 사랑이 됐든, 끈끈한 우정이 됐든 말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음처럼 쉽게 유지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원했던 것과 상대방이 원했던 것이 어긋나버리는 상황은 야속하게도 꼭 찾아오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적절한 거리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사랑이라는 관계에 기대되는 거리는 0, 혹은 그것에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정이라 불리는 관계에서 서로가 어긋나는 상황은 그 관계를 재조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정이라는 관계에 기대되는 거리는 0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넉넉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비언 고닉의 짝 없는 여자와 도시를 읽으며 사람의 관계, 그 가운데 사랑과 우정에 관해 생각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고층 건물의 유리창처럼 서로 되비치는 거울 같은 관계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층 더 잘 드러나도록 한다. 도시는 분명 많은 사람이 함께 있지만,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동반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기를 은밀히 기대하는 눈치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도 친밀함의 순간이 발생하면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렇기에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관계는 대개 폭발적인 에너지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감이 낮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관계의 이루어짐이라는 뜻밖의 상황은 반가움이 증폭될 만한 사건이다. 책은 이처럼 도시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 내용은 대개 사랑과 우정의 관계다. 저자는 연인들이 이루는 사랑의 관계도 소중히 여기지만 누구와도 이룰 수 있는 우정의 관계에 더 무게를 둔다. 저자가 주목한 도시라는 공간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사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관계였지만 그 안에서는 사랑보다는 욕망이 더 자주 드러났고 이를 친밀함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에 반해 우정은 상대방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서적으로 감성적으로 이어짐을 경험하는 관계이다. 어쩌면 저자에게 우정은 사랑에 선행되어야 할 것, 혹은 사랑을 포괄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책은 우정의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작용을 사랑과 대비하면서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사랑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주로 사랑이 실패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저자의 경험담뿐만 아니라 저자의 지인들이 겪은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상대방과의 사랑의 관계가 맥없이 시들어버리는 상황이 목격된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관계가 급격히 도약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마도 육체적인 갈망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든 탓일 텐데 이는 관계가 진행되는 중간 과정을 생략해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압축적으로 발전한 관계에서는 관계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지만, 사랑에 취해버린 상태에서는 그러한 반성의 차원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들의 관계가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이들의 사랑이 언젠가부터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상대방을 소환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무언가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우정이다.

 

우정이라는 과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p.134)

 

사랑을 시작하는 관계든, 사랑에 몰입한 관계든, 그 외 어떤 인간관계든 저자는 우정이라는 관계를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듯하다. 단순하게 우정이 사랑에 선행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정이 아닌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과도한 자기 몰입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그러한 자기 몰입은 신경증적인 우울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에게만 몰입할 때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은 관계가 되고 만다.

책에 어느 부분에서 독특한 지점이 발견된다. 도시의 헛헛함,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이라는 관계의 실패 같은 글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정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말하는 듯한 글이 등장한다. 저자는 지하철역에서 기형아처럼 보이는 한 아이와 아빠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농인이기도 했던 그 아이는 남자와 수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상대방의 말에 반응하며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흉측해 보였던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남자의 얼굴에도 애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생각한다.

 

저 둘은 굉장히 높은 차원에서 서로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구나.” (p.95)

 

회색빛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그 주위를 밝게 만드는 풍경을 저자는 발견한다. 이들은 정서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서로에게 집중한다. 언뜻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이들에게서 우정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중년 커플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저자는 흑인 여자와 백인 남자가 손을 잡고 대화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연인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와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며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흑인과 백인이 서로에게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가 새삼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p.97)

 

서로 다른 인종이 커플이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에 대한 저자의 소감은 우정에 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서로에게 우정이라는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말이다. 저자는 책의 어느 대목에서 여자와 남자는 다른 종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다른 종이 커플이라는 현실이 되고자 한다면 불가피하게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달려가면서 놓쳐버렸던 그 중간 생략과정들을 대면해야 할 시간을 말이다. 그 시간은 기형아 아이와 남자가 지하철에서 나누는 대화의 시간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돌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통해 비어있던 사랑의 공간을 메워갈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도시의 풍경을 비관적으로도 보지도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느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 사람이 더 삭막해지고 황폐해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 수도 있다고 책은 말하는 듯하다.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는 흐릿해 보였던 것을 조금 더 뚜렷하게 마주하기도 한다. 책에는 사랑에 실패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를 통해 사랑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도시는 사랑을 포기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사랑의 의미를 조금 더 잘 보이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 즉 우정의 힘을 불러낸다. 사랑이 우정의 힘을 받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거라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우리가 처음 서로를 볼 때 비추었던 것은 우정의 거울이 아니었을까. 그 우정의 거울은 마치 도시의 유리창처럼 서로를 비추어 준다. 어느 순간 홀연히 사랑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우정의 거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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