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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환상적 모험을 통한 신랄한 풍자소설, 책 읽어드립니다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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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익숙해서 꼭 읽어 본 것 같은 책이 있다. 나에게는 『걸리버 여행기』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어렸을 적 동화책에선가 보았던 소인국 사람들에게 꽁꽁 묶인 걸리버 삽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의사였던 걸리버는 1부에서 단조로운 생활에 염증을 느껴 여행을 떠난다. 배가 난파되어 도착한 첫 나라 릴리퍼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인국이다. 처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여러모로 협력하며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소변으로 화재를 진압한 일로 황후의 미움을 사고, 적대국인 블레푸스쿠를 식민지로 삼는 대신 동맹을 맺을 것을 제시해 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후 모함하는 세력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블레푸스쿠의 힘을 빌려 탈출한다. 2부에서는 여행을 떠난 걸리버가 물을 구하러 선원 몇 명과 내렸다가 거인과 조우하는데, 이곳이 거인국인 브롭딩낵이다. 그는 농부에게 주워져 이웃마을 장터를 전전하며 공연을 선보이게 되고, 혹사당해 죽어갈 무렵 왕비를 만난다. 왕비와 국왕에게서 귀여움을 받지만, 실수를 저지르면 궁궐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결여된 자신의 생활에 절망한다. 고국이 그립다고 생각할 무렵 산책을 나갔다가 독수리 덕분에 탈출한다. 3부는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와 라퓨타의 국왕이 다스리는 땅 발니바르비, 마법사의 섬 글럽덥드립, 그리고 영생불멸인 스트럴드브럭이 사는 럭낵을 여행한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일본을 거치고, 4부에서 선상 의사가 아닌 선장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중간에 열병 때문에 죽은 선원들의 대타를 구했으나, 그들 중 대부분이 해적이었던 터라 배를 빼앗기고 버려진다. 이성을 가진 말들의 나라 휴이넘이다. 자연 그대로의 생활을 하며 급기야는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노력하던 도중, 의회의 결정으로 떠나라는 권고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휴이넘을 떠난다.


  우선 목차를 보고 가장 놀랐던 부분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 외에도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어느 나라에 가든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어 공연까지 마다하지 않는 걸리버의 태도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하녀 거인의 티눈을 떼어 두었다가 속을 파내어 컵을 만든다거나, 국왕의 수염으로 빗을 만든다는 발상은 굉장히 참신하고 세밀해서 혹시 작가의 실제 경험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잠깐 들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도 <천공의 성 라퓨타>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번에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집중한 부분은 풍자였다.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이미 풍자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완전히 옆으로 밀어 두고 읽을 수 없었다. 풍자는 이야기 곳곳에서 속속들이 나타나는데, 후반부로 가며 점점 강화된다.







우리의 모습을 3인칭으로 바라보기

  배은망덕을 벌한다면서 황제 자신부터 배은망덕한 데다가 고작 ‘달걀을 넓은 쪽과 좁은 쪽 중 어느 쪽으로 깨는가’와 같은 사소한 것으로 다투는 릴리퍼트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 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 주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에서도 대의를 붙여 가며 편을 가를 뿐, 아주 작은 데에서 분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브롭딩낵의 현명한 국왕은 걸리버와 대화를 나누며 걸리버의 고국인 영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영국뿐만 아니라 아마 지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비가 식사하는 모습이나 거인들의 털 등을 보고 역겹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모습도 역겹게 보이지 않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인 자기 자신의 모습과 사회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며 은근히 나타나던 인간 혐오는 휴이넘의 생활로 정점을 찍는다. 휴이넘에서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야후’는 야만적인 동물이며, 말의 필요에 따라 집에서 떨어진 헛간에서 길러지고 말을 위해 노동한다. 한술 더 떠 의회에서 인간이 말을 효과적으로 길들이기 위해 거세하는 방식을 야후에게도 사용하자는 안이 건의되기도 한다. 사람과 말의 역할이 완전히 반전되는 장이다. 조금의 이성을 가졌다고 해서 똑같은 생명을 지배하려 하고, 가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정이 떨어지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나 역시 그 사람들에게 역할을 떠맡겼을 뿐 다 같은 책임을 지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을 왜 감추라고 하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옷도 입지 않고, 의심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개념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휴이넘의 세계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며 말 그대로 이상 세계처럼 느껴졌다.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돈을 내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

  라퓨타와 발니바르비는 오로지 허무맹랑한 신식 기구 개발과 효과적으로 국민을 탄압하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이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웃을 수 없는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 수백 명이나 되는 연구원들은 뚜렷한 결과도 내놓지 못한 채 몇 년씩 얼토당토않은 연구에 매진하는데, 건물을 지을 때도 지붕부터 짓자가나 언어를 폐지하자는 등의 발상이 그것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지점은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 “국민을 괴롭히지 않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이나 의심가는 사람을 감시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반란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부분이다. 그런 공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돈을 바칠 수밖에 없는 일개 국민의 운명이나, 세금을 내고 고용한 것과 진배없는 대리인들이 도리어 국민을 탄압할 방법을 궁리하고 모의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현실과 가까운 이야기였다.

  글럽덥드립에서 등장하는 망자들은 자신들과 역사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미화되었다고 말한다. 선인은 음모를 뒤집어쓴 채 반역자로 남거나 역사에 기록되지조차 못하고, 역사의 승자로 남은 악인에게만 유리하게 편찬되었으며 실수로 나온 결과도 가치를 지니면 그에 맞게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특성 자체가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없는 게 역사이지만, ‘과연 누구의 입맛에 맞게 쓰였는가’라는 직구를 던지는 부분이었다. 럭낵에서 영생을 누리는 존재 스트럴드브럭의 일생 이야기는 서글프다 못해 애끊듯 아프게 다가왔다. 그들에게도 신체적 노화는 계속 진행되지만, 여든에는 국가의 주도로 사망 신고 후 강제 유산 상속을 해야 한다. 걸리버를 만나 여행담을 듣고도 신기해하는 대신 “기념품을 달라”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다채로운 경험을 했기에 무뎌졌다기보다는 완곡된 표현으로 구걸할 정도로 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것으로 보였다. 그 바탕에도 역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층의 속셈이 숨어 있어 역겨웠다.


  걸리버는 책 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인간 사회와 영국 사회를 맹렬히 비판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의 조국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영국을 모욕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들으면 발끈하면서도 “우리 유럽에서는 누가 발명한 것인지 가려내기 어렵도록 남의 발명을 가로채는 습관이 있다”는 등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이 애국심 강한 국민조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야기할 정도로 통상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해 효과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공의 나라만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일본과 일본의 십자가 밟기(후미에 밟기)도 함께 언급되어 신기했다. 부가적으로 거인국 부분에서는 묘사가 뛰어나서 나라면 소인국과 거인국 중 어느 곳에 사는 것이 더 고역일지 상상해 볼 수 있었고, 삽화 덕분에 눈의 피로를 덜어 가며 책의 재미를 풍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 소설이 풍자 소설로 분류되어 소개되는 것이 싫다. 자세히도 써 놓고 이제 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에는 기가 막힌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세계가 있는데, 풍자 소설로 알고 한정해 둔 채 읽는다면 걸리버의 흥미진진한 여행을 따라가며 탐구하기보다도 어느 부분이 풍자인지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적이라는 특성을 부여하는 순간, 더 이상 청소년이 호기심을 가득 품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어른을 위한 ‘어려운 책’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질지도 모른다. 소설의 시작을 열기 전, “이 책이 청소년들에게 흔해빠진 정치와 정당과 사회의 잡서보다는 재미있고 유익한 호기심 천국이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당부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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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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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이맘때쯤 『여름, 스피드』로 이름을 알렸던 김봉곤의 신작이 발간되었다. 이번에도 감각적인 제목과 “어쩜 사랑을 그렇게 그려내느냐”는 박준의 추천사에 잔뜩 기대하던 중, 창비에서 진행하는 사전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된 덕분에 가제본을 먼저 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읽어 볼 수 있었다. 내가 받은 가제본에는 표제작이 실려 있어 아무래도 더 특별해진 기분이 들었다. 「시절과 기분」은 한때 꿈을 공유했던 두 친구가 칠 년만에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작가가 된 '나'에게 과거의 친구 혜인이 연락을 해 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절이라는 단어를 적어도 나는 보통 '그 시절', '그때'와 같이 과거의 한 순간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데, 그럴 때마다 꼭 참 힘들었다거나 참 좋았다는 식의 철 지난 감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슬프다는 인상이 강했다. 땅을 파다 보면 습기 머금은 흙이 나오듯이, 기억도 파다 보면 질척하고 찌질한 게 우르르 쏟아져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인데도 자꾸만 회상하는 버릇을 싫어하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독자에게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나 감정을 꼭 어떤 범주로 몰아넣어야만 하느냐고 묻는다. 게이인 ‘나’가 여자와의 연애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자 “경악”하는 친구들의 반응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이나 우정보다 우리가 살아가며 더 자주 느끼는 것은 그 사이의 어딘가일 텐데, 언제부터인지 사랑은 때로는 끝나거나 때로는 지속되는 것으로, 변함없이 곁을 줄 수 있는 한 사람을 향할 때만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 외의 관계는 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제되며 때로는 소외당하기까지 한다. 또한 어느 날 불쑥 찾아와 “공소시효가 지나 원고인을 맞닥뜨린” 듯한 인상을 주고, 결국에는 이미 지난 시절을 살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저릿한 감각”만 남기지만 순간 달콤함에 젖어들게 하는 시절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작가는 그 시절이 있어 더 아름답다는 쪽에 조심스레 추를 올리는 듯 보인다.

                       


                          
                       


                          
                       


                             ‘동성애자’와 ‘과거 헤테로 연애’라는 소재 모두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말미에서 그래서 과연 그가 “엑스 헤테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달리 원망하거나 미워하려 드는 대신 기약 없이 기다리기로 한다. 삶의 어느 순간 찾아온 그 떨림이 멈추지 않기만을 바라며 몇 번이고 사랑할 인간과 그 감정을 음미할 뿐이다. 김봉곤은 앞으로 품을 감정과 살아낼 시절을 어쩔 수 없이 환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름에 이어, 이번에는 늦은 봄을 그만의 무늬로 덧씌우려 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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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K-포엣 시리즈 12
양안다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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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접할 때마다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현대 시는 상이한 단어들의 나열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학의 일부를 놓을 수 없다는 일념만으로 애써 찾아 읽어가며 공부하고 있다. 이번에도 해설을 바로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오독 여부를 떠나 나만의 해석을 펼치겠다고 세워 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접어 두었다. 책을 좋아하는 지인이 시 해설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며 나만의 방식대로 느끼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일을 생각하며.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에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만 남아 있다. 배경으로 ‘끝’을 마주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정확히 무슨 사건으로 끝이 도래했는지, 두 사람이 유일한 생존자인지 등에 관한 정보는 주지 않는다. 그로써 사회적 배경은 모두 저편으로 밀어 두고 너와 나라는 두 사람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시집은 꼭 한 편의 영화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장」으로 독자를 자신의 꿈에 초대하며 시작했던 이야기는 연극이 끝난 뒤 배우들이 직접 나와 관중에게 인사하는 「커튼콜」로 막을 내린다. “어느 날 세계가 망가지는” 나의 꿈으로의 초대장을 발부한 이후 무대는 ‘애프터월드’로 옮겨진다. 유혈이 낭자하고, 밖에서는 온통 폭약이 터지고, “학생들이 당연한 것을 요구하나 요구는 묵살”당하는 등 세계는 시끄럽다. 그와 동시에 세계는 침묵한다. 시끄러운 한복판, 조용한 방 한 칸에 지내는 두 사람이 조명되고, ‘너’와 ‘나’는 곧 주인공이 된다. 그들도 어쩌면 침묵하는 세계의 한 부분이다.



‘너’는 그림을 그리고, 밖에 나다니며 “어느 도시에 방문”하기도 하고, 양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수영하는 인물이다. 그에 반해 ‘나’는 캔버스에 갇히는 꿈을 꾸고,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너와 끝없이 깊어질까 봐” 무서워한다. 수록 시는 전부 ‘너’의 시점에서 적히지 않고 ‘나’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름이나 성별, 혹은 그 외의 특징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신호도 없이 오직 너와 나로만 칭하고 있기에 중간에 몇 번쯤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는 너였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차이점을 가진 너와 나는 하나인 것도 같다. “신 역할을 맡은 배우가” “심판도 없이, 용서도 없이 관객을 관조”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극 안으로 속절없이 끌어들여지고, 나 역시 그 연극의 한 부분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가 죽은 뒤 「불과 재」에서 나는 큰 슬픔에 너의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이어 「커튼콜」에서는 대부분 가정형의 문장으로 슬픔과 울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던진 화두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부르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종결되는 이 시의 말미에는 그래도 너의 죽음으로 슬픔 대신 얻게 된 값진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인생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연극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인생의 주인공이고 누구든 상대 역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자주 이를 간과하고는 한다. 양안다가 만들어낸 세계처럼 무너지거나 궁지에 몰려 의지할 곳이 서로밖에 없는 “세계의 끝에서(야)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양안다가 시 쓰는 일을 “혼자 추는 춤”이라고 말했으나 실상 “춤을 출 때마다 누군가와 함께”였던 것처럼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인 에세이에서 “나보다 병든 그가 나를 많이 치유”했다고 말하듯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병든 인간을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인간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장에서 도망치는 자본가들”을 바라보거나 “방에서 침묵”하며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를 거부한다. 가치 가능성을 잊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싶다. 표지에서부터 드리워지는 서늘한 아포칼립스 같은 분위기도, 하지만 정작 그 가운데에 서게 되는 것은 무미건조한 두 사람인 것도, 양안다가 사람을 보고 질문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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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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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관련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 세계는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기 어려운 욕구를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사회화 과정에서 억눌린 욕구가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는 대신 틀에 맞추어 정형화된 모습이 의식으로 나타난다. 생각해 보면 이 억눌린 저마다의 본능이 오히려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에서 쓴 수기』는 어쩌면 이를 전제로 삼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1부와 2부로 나뉜 이 작품은 1부 「지하」에서 먼저 대다수가 자각하지 못하는, 숨겨진 욕구에 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침으로써 2부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지하’가 단어 의미 그대로의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을 의미하는 비유적 단어임을 암시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가장 유명하나, 창비에서는 관습과 달리 새로운 제목으로 출간한 점이 돋보여 과연 어떤 각도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1부에서 펼쳐지는 화자의 이론은 평가하자면 잘 정돈된 솜씨 좋은 연설은 아니다. 1부에서 그는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고, 이따금 자문자답도 하며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심취된 듯 보이기도 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인간은 사실 고통에서 음욕을 느낀다’는 등, 사회에서 용인하는 수준에 맞추어 깎이고 재단된 사람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을 인간의 실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정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면 2부부터 읽고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

  2부에서는 화자가 스물넷이었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험을 시간 순으로 설명하고 있어 확연히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지점이며, 화자가 본격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집을 부려 자신이 싫어했던 고등학교 동창인 즈베르꼬프의 송별연에 참여하지만 비웃음만 당하고, 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찾아간 곳에서 리자를 만난다. 훈계에서 시작된 화자의 이야기는 그녀의 인격을 짓밟는 데까지 이르고, 상처받은 리자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엉겁결에 집 주소를 알려준다. 언제 찾아올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며칠을 보낸 뒤, 하인인 아폴론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를 내던 도중 리자가 찾아온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해 당일의 경위를 실토하는데, 그녀가 보인 반응은 분노나 실망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화자는 오히려 리자를 내쳐 그녀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고, 글쓰기를 관두며 끝이 난다.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게다가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에, 우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뒤바뀌어버렸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이제 주인공은 그녀가 되고, 나는 나흘 전, 그날 밤 내 앞에 있던 그녀와 똑같이 상처받고 굴욕당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중략) 아, 이럴 수가! 그럼 내가 그날 밤 이 애를 부러워했단 말인가?

pp.203~204


자기 분출 욕구로 점철된 삶   이토록 나까지 함께 부끄러워지는 소설은 처음이다. 처음 읽으면서는 화자가 미치광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어깨를 치고 갔던 장교에게도, 즈베르꼬프에게도 복수하고 싶어 하면서 온통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자처럼 보이는 리자와 아폴론에게만 그 분노를 분출하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점점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수준을 뽐내려는 모든 행동의 결과로 원한 보상은 상대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렸을 적부터 또래보다 지식 수준이 높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때부터 그는 비뚤어진다. ‘내 지식에 모두 놀라겠지’로 시작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화답하는 이가 없자 다른 이를 향한 내면의 무시와 경멸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즈베르꼬프의 질문에 “당신의 우정”이라고 대답하고, 리자에게 내심 사랑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리자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도중 그날 밤 자신이 리자를 부러워했다는 사실, 실체를 목격당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화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대부분 앓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약 160년 전 쓰인 이 작품의 화자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현대인도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대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이상 지하생활자를 나와 분리된 소설 속의 가상인물로만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싸구려 행복과 승화된 고통

  내가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이해할 때 중점을 둔 부분은 “싸구려 행복”과 “승화된 고통”이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두고 생각하면 즈베르꼬프의 송별연에 가겠다고 떼를 쓴 일, 그 무리를 욕하면서도 끼고 싶었던 욕구, 자신이 우월한 척 리자를 훈계한 일 모두 “싸구려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승화된 고통”은 리자에게 진실을 토로한 뒤 겪게 되는 일련의 깨달음이다. “설마 내가 저 여자를 부러워했던 것인가?” 라는 믿을 수 없다는 투의 질문과 함께 비로소 자각하게 된 감정이기도 하다.

  리자에게 모욕을 주고 화자는 “모욕이라는 것은 마음을 승화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싸구려 행복이 더 나을까, 아니면 승화된 고통이 더 나을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일침을 날리는 화자 본인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화자 또한 자신이 무시했던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이다. 속마음으로는 그들보다 우수하다고 여기면서 실은 주류이자 인기인인 즈베르꼬프와 친해지고 싶고, 지식을 설파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등 그저 “이성”을 뽐내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은 사회화되어 ‘아닌 척’하며 살아가는 인간들과 달리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지만, 그도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회의 위계 질서를 체화한 인간이다. 그러나 수치를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 그의 내면은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깨달음으로 채워지고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부에서 화자가 던졌던 ‘과연 이성이 가져다 주는 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하지만 이성이란 그저 이성에 불과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을 만족시키는 데 그칠 뿐이다. 반면 욕구는 삶 전체의 표출이다. 이를테면, 이성뿐만 아니라 가려운 데를 긁는 생리적 행위까지 인간의 삶을 표출하는 행위다. 물론 이러한 표출 속에서 우리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그게 삶이다.

p.50


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살아 있는 삶에서 이탈해 있기에 약간씩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나름대로 정신지체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혐오스러운 것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pp.211~212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근본적 자아 탐구에만 몰두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의식에 먹혀 타인에게 상처를 주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화자가 이야기하듯, “수기”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 목적은 그가 지은 죄를 회고하고 스스로를 징벌하려는 데에 가까우며, 소설 말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믿어 왔던 승화된 고통의 가치에 의문을 품기까지 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싸구려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별점이 생기는 부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다음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 그 행복에만 안주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하생활자는 싸구려 행복에 심취한 나머지 더 나은 인격이 되기 위해 얻어야 할 승화된 고통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어떤 면은 잘리고 어떤 면은 극대화된 상태로 거울 앞에 서게 된다.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학교가 있으니 학교를 다니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하는 것이니 공부를 하고, 가난보다는 부유가 좋다고 하니 부를 좇고, 옳다고 규정된 것을 옳은 것으로, 나쁘다고 규정된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도스토옙스키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식으로 대부분이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을 아주 근본적인 사회와 인간의 뿌리에 가해지면서 전체를 흔든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인간의 무의식에 관한 강의를 인상깊게 듣고, 걸핏하면 ‘척’하며 얻는 가벼운 행복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해석으로 여겨지지 않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뭇사람의 이야기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일독할 당시에는 재미있게 읽었으며 나름의 자신감까지 느꼈었는데, 본격적으로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몇 번이고 나의 생각을 곱씹고 여러 번 고쳐 썼다. 여전히 오독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나에게도 꽤 난해한 책이었던 것 같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도 과거에는 권선징악에, 현재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무서움에 중점을 두었던 것처럼 먼 훗날의 내가 다시 한 번 이 책의 책장을 덮으며 어떤 사유를 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해설을 읽어 보니 도스토옙스키는 거의 평생을 도박꾼으로 살았고, 노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에 비례해 원고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시 재능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일명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지고 있는 고전 작품들을 두고 인터넷상에서 도는 우스갯소리가 여럿 있다. 그중 어떤 것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심리와 본연에 관심을 두고 깊게 고찰해 본 사람일수록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류의 작품은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욱 재미있기에 해설 등 뒤에 실린 부록도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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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양장) - 공감을 이끄는 성공학 바이블, 책 읽어드립니다
데일 카네기 지음, 강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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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이 종류의 책이 대부분 그렇듯 퍽 직관적인 제목이다. 말 그대로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았다. 본 내용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뒤에 부록 세 개를 덧붙였다.



  1장은 사람을 움직이는 세 가지 원칙으로, 카네기가 제시하는 인간관계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이다. 주로 일인칭 시점에서 벗어나 상대의 신발을 신어봄으로써 상대의 요구를 파악하고 이를 일종의 떡밥으로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2장은 호감을 얻기 위한 여섯 가지 비결을 이야기한다. 미소 짓기, 상대방의 이름 기억하기 등 다소 방법으로 상대에게 보이는 순수한 관심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3장에서는 좋은 관계를 만드는 대화법에 관해 서술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갈 때 피치 못하고 마주하는 갈등 상황에서 지혜롭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이 주를 이룬다. 이어서 4장 「상대를 이해시키는 특별한 방법」은 대화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있을 때, 긍정적인 결과를 유도해내는 비법을 전수한다. 5장은 상대를 설득하는 아홉 가지 비법으로, 4장과 결을 같이한다. 6장은 일명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조직의 원수가 특히 필요로 할 만한 부분이다. 후면에 붙어 있는 부록 세 개는 각각 긍정적인 효과를 냈던 편지 사례, 화목한 가정을 위해 부부가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 그리고 카네기 강좌를 수강하고 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련되어 있다.



  카네기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링컨과 루스벨트를 비롯한 유명 인사, 그리고 카네기 강좌의 수강생이 전해 준 생생한 이야기까지, ‘인간관계론’이라는 다소 어려워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간단한 의견 제시와 함께 관련 사례들이 병렬되어 있는 구성이라 책장을 넘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쭉쭉 잘 읽히는 편에 속한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온 집중력을 쏟으며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집중했던 부분은 “아낌없이 칭찬하라”와 “논쟁은 피한다”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과 영혼 없이 텅 빈 아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카네기의 당부는 꼭 기억할 만하다. 의무감을 가지고 타인을 칭찬하려 하면 쥐어짜내는 아첨밖에 되지 않고, 이는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기에 카네기는 그보다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잠시 시선을 돌려 진짜 칭찬할 만한 그의 장점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런 부분에서 카네기는 어쩌면 관계에 대처하는 법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는 출판계에서 수백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꾸준히 채택되는 주제일 것이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고, 그 말은 곧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 된다. 나에게도 인간관계는 이성, 삶 자체와 더불어 신이 인간에게 내린 무거운 짐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상처받는 순간이 많아 포기하고 싶다가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고 만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골치를 썩이는 만큼 관련 서적을 꽤 찾아 읽었으나, 새로운 내용을 찾아볼 수 없어 관두었다가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 등장했다기에 흥미가 생겨 오랜만에 읽어 본 지침서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이 완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실천이고 습관화이다. 그렇기에 데일 카네기가 서두에서 권장하듯, 가까이에 두고 잊힐 때마다 읽으며 새롭게 아로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이 ‘다 아는 내용인데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으로 각 분야 지침서와 에세이를 읽지 않던 나에게 느낌표를 던진 대목이기도 하다. 대부분 앓고 있는 문제이기에 스스로의 관계 대처 능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하지만 특히 인간을 대하는 데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열고 싶은 사람들에게, 서비스업 등 업무에서 타인을 대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처럼 알면서도 좀처럼 풀리지 않아 속상한 사람들에게 곁에 두기를 권하고 싶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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