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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쓴 수기 ㅣ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관련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 세계는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기 어려운 욕구를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사회화 과정에서 억눌린 욕구가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는 대신 틀에 맞추어 정형화된 모습이 의식으로 나타난다. 생각해 보면 이 억눌린 저마다의 본능이 오히려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에서 쓴 수기』는 어쩌면 이를 전제로 삼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1부와 2부로 나뉜 이 작품은 1부 「지하」에서 먼저 대다수가 자각하지 못하는, 숨겨진 욕구에 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침으로써 2부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지하’가 단어 의미 그대로의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을 의미하는 비유적 단어임을 암시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가장 유명하나, 창비에서는 관습과 달리 새로운 제목으로 출간한 점이 돋보여 과연 어떤 각도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지 궁금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1부에서 펼쳐지는 화자의 이론은 평가하자면 잘 정돈된 솜씨 좋은 연설은 아니다. 1부에서 그는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고, 이따금 자문자답도 하며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심취된 듯 보이기도 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인간은 사실 고통에서 음욕을 느낀다’는 등, 사회에서 용인하는 수준에 맞추어 깎이고 재단된 사람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을 인간의 실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정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면 2부부터 읽고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
2부에서는 화자가 스물넷이었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험을 시간 순으로 설명하고 있어 확연히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지점이며, 화자가 본격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집을 부려 자신이 싫어했던 고등학교 동창인 즈베르꼬프의 송별연에 참여하지만 비웃음만 당하고, 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찾아간 곳에서 리자를 만난다. 훈계에서 시작된 화자의 이야기는 그녀의 인격을 짓밟는 데까지 이르고, 상처받은 리자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엉겁결에 집 주소를 알려준다. 언제 찾아올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며칠을 보낸 뒤, 하인인 아폴론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를 내던 도중 리자가 찾아온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해 당일의 경위를 실토하는데, 그녀가 보인 반응은 분노나 실망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화자는 오히려 리자를 내쳐 그녀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고, 글쓰기를 관두며 끝이 난다.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게다가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에, 우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뒤바뀌어버렸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이제 주인공은 그녀가 되고, 나는 나흘 전, 그날 밤 내 앞에 있던 그녀와 똑같이 상처받고 굴욕당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중략) 아, 이럴 수가! 그럼 내가 그날 밤 이 애를 부러워했단 말인가?
자기 분출 욕구로 점철된 삶
이토록 나까지 함께 부끄러워지는 소설은 처음이다. 처음 읽으면서는 화자가 미치광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어깨를 치고 갔던 장교에게도, 즈베르꼬프에게도 복수하고 싶어 하면서 온통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자처럼 보이는 리자와 아폴론에게만 그 분노를 분출하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점점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수준을 뽐내려는 모든 행동의 결과로 원한 보상은 상대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렸을 적부터 또래보다 지식 수준이 높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때부터 그는 비뚤어진다. ‘내 지식에 모두 놀라겠지’로 시작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화답하는 이가 없자 다른 이를 향한 내면의 무시와 경멸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즈베르꼬프의 질문에 “당신의 우정”이라고 대답하고, 리자에게 내심 사랑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리자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도중 그날 밤 자신이 리자를 부러워했다는 사실, 실체를 목격당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화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대부분 앓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약 160년 전 쓰인 이 작품의 화자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현대인도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대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이상 지하생활자를 나와 분리된 소설 속의 가상인물로만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싸구려 행복과 승화된 고통
내가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이해할 때 중점을 둔 부분은 “싸구려 행복”과 “승화된 고통”이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두고 생각하면 즈베르꼬프의 송별연에 가겠다고 떼를 쓴 일, 그 무리를 욕하면서도 끼고 싶었던 욕구, 자신이 우월한 척 리자를 훈계한 일 모두 “싸구려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승화된 고통”은 리자에게 진실을 토로한 뒤 겪게 되는 일련의 깨달음이다. “설마 내가 저 여자를 부러워했던 것인가?” 라는 믿을 수 없다는 투의 질문과 함께 비로소 자각하게 된 감정이기도 하다.
리자에게 모욕을 주고 화자는 “모욕이라는 것은 마음을 승화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싸구려 행복이 더 나을까, 아니면 승화된 고통이 더 나을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일침을 날리는 화자 본인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화자 또한 자신이 무시했던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이다. 속마음으로는 그들보다 우수하다고 여기면서 실은 주류이자 인기인인 즈베르꼬프와 친해지고 싶고, 지식을 설파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등 그저 “이성”을 뽐내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은 사회화되어 ‘아닌 척’하며 살아가는 인간들과 달리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지만, 그도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회의 위계 질서를 체화한 인간이다. 그러나 수치를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 그의 내면은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깨달음으로 채워지고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부에서 화자가 던졌던 ‘과연 이성이 가져다 주는 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하지만 이성이란 그저 이성에 불과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을 만족시키는 데 그칠 뿐이다. 반면 욕구는 삶 전체의 표출이다. 이를테면, 이성뿐만 아니라 가려운 데를 긁는 생리적 행위까지 인간의 삶을 표출하는 행위다. 물론 이러한 표출 속에서 우리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그게 삶이다.
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살아 있는 삶에서 이탈해 있기에 약간씩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나름대로 정신지체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혐오스러운 것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근본적 자아 탐구에만 몰두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의식에 먹혀 타인에게 상처를 주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화자가 이야기하듯, “수기”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 목적은 그가 지은 죄를 회고하고 스스로를 징벌하려는 데에 가까우며, 소설 말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믿어 왔던 승화된 고통의 가치에 의문을 품기까지 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싸구려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별점이 생기는 부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다음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 그 행복에만 안주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하생활자는 싸구려 행복에 심취한 나머지 더 나은 인격이 되기 위해 얻어야 할 승화된 고통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어떤 면은 잘리고 어떤 면은 극대화된 상태로 거울 앞에 서게 된다.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학교가 있으니 학교를 다니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하는 것이니 공부를 하고, 가난보다는 부유가 좋다고 하니 부를 좇고, 옳다고 규정된 것을 옳은 것으로, 나쁘다고 규정된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도스토옙스키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식으로 대부분이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을 아주 근본적인 사회와 인간의 뿌리에 가해지면서 전체를 흔든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인간의 무의식에 관한 강의를 인상깊게 듣고, 걸핏하면 ‘척’하며 얻는 가벼운 행복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해석으로 여겨지지 않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뭇사람의 이야기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일독할 당시에는 재미있게 읽었으며 나름의 자신감까지 느꼈었는데, 본격적으로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몇 번이고 나의 생각을 곱씹고 여러 번 고쳐 썼다. 여전히 오독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나에게도 꽤 난해한 책이었던 것 같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도 과거에는 권선징악에, 현재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무서움에 중점을 두었던 것처럼 먼 훗날의 내가 다시 한 번 이 책의 책장을 덮으며 어떤 사유를 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해설을 읽어 보니 도스토옙스키는 거의 평생을 도박꾼으로 살았고, 노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에 비례해 원고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시 재능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일명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지고 있는 고전 작품들을 두고 인터넷상에서 도는 우스갯소리가 여럿 있다. 그중 어떤 것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심리와 본연에 관심을 두고 깊게 고찰해 본 사람일수록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류의 작품은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욱 재미있기에 해설 등 뒤에 실린 부록도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