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글쓰기를 읽었다. 그 자신감이 불편하다. 책을 덮고 나서 더더욱 불편해졌다. 나는 소설이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상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에 작가의 가치관이, 세계관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객관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작가가 발견한 세계의 진실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상상해도, 더 깊숙히, 아주 깊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 소망이 담겨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이야기에는 이야기 바깥에서 스며든 꿈이 필요하다. 이 책 어디에 그 꿈이 있는지 나는 찾지 못했다. 고발하고,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마치 그것이 객관이라는 듯 너저분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왜 사는가? 이들은 왜 살아 숨을 쉬고 먹고 일하고 잠을 자는가? 작가는 이 인물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그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작가가 더한 것은 사실에 덧붙인 상상력 뿐인가? 작가의 철학은?

사람에게도 때때로 쥐구멍이 필요하다. 물러설 곳이 없는 공간에서, 몇 배는 더 악랄해진다. 자폐적인 섹스를 반복하고, 승리를 만끽하며 자리를 보전하려는 삶을 이들이 계속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미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작가는 진보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보수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왜 그들이 보수가 될 수밖에 없는지, 왜 그들이 댓글부대를 이끌어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지, 그들의 내면을 파고들어서 더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아무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럴듯한 인물들이지만 살아있지 못하다.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 특히 그 안에서 여자는 철저히 대상화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다. 작가조차도 인물들을 쓰고 버린다. 그 안에서 자신을 보전하려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처럼. 그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작가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책은 비난해야할 한 쪽 면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하는 표준같은 게 있을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문학이다. 왜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저들이, 나와 같은지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희망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어서, 희망을 말해야만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인물에게 몰입하여 옹호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인물의 곁에서, 작가가 최대한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드러내고 말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이미 알거나 상상하고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서사의 힘으로 소설이 되었고, 이미 출간되었지만, 이 이야기가 조금 더 생명력을 갖기를 원하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영화같은 빠른 서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다운 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6-01-25 0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가와 소설가는 분야 중에서 제일 근접하다고 생각해요. 인간과 환경을 재구성하는 그 방법이나 기술로 봐도. 그들은 자신이 파악한 원인으로 그 수많은 것들을 해석하고 분류하고 배치하죠. 그것은 그가 보는 시대이기도 하겠으나, 그 자신이 시대에 속한 방식을 보여주죠. 너무 가까이 가면 편협하거나 단순하거나 오류가 되기 쉽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글을 쓰고 여지도 없이 재단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끝까지 모를 수도 있고 너무 뒤늦게 알 수도 있다는 게 언제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강명 작가에게서 계속 느껴지는 아쉬움은 `거리두기의 실패-이성적이라 생각하겠지만 매우 감정적`입니다. 자기 분석에 빠져 있단 느낌 또한.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뛰어넘은 작가, 철학자들도 있다는 게 희망이겠죠. 하나의 세기와 싸웠던 니체는 참 대단했다 싶어요. 끝이 그리 되어 안타깝지만...

우끼 2016-01-25 10:57   좋아요 1 | URL
새삼 소설 안의 인물들간의 관계에서 조차도, 끊임없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면서 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개척하기를 바라듯...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되려면, 왜 이 사람이 이렇게밖에 행동을 못하는지 이해하고, 나 역시 왜곡된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도 바라보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나와 그 사람을 바라봐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강명작가의 불편함을 지적하는 제 말하기 방식과 태도도, 그와 닮은 것 같아서 글을 올리기 많이 망설여졌는데 더는 리뷰를 미룰 수가 없어 올렸네요.. 그래서 더더욱,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소설이 확실히 어떤 지점에 멈춰서다보니까, 일종의 관찰에 머무르고, 관찰 이상의 성찰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대로 심지어는 인물을 쓰고 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주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 찻탓캇을 바다에 던져버리기 전에 그에게 물었어야 했죠. 왜 그랬어, 왜 여기까지 왔어,라고 그 왜를 집요하게 캐물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 작가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같은 소설에서도 계나에게 조금 더 물었어야 하고요. 너는 왜 여기 호주까지 와서도 행복하지 않지?,라고요.

아무튼 저는 장강명 작가의 이런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도 분명히 있는 작가라고 봅니다. 다만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소설 작법이 단지 미숙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함에도 다른 어떤 것을 노리고 의도한 것이라면..조금 우려되기는 합니다만.

우끼 2016-01-29 01: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참 아쉽습니다. 시사적인 중대한 문제를 잡아내는 눈,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 플롯 모두 훌륭한데, 그것을 드러내는 문장이, (어떻게 보면 사유가) 너무 앙상합니다.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걸 이성적으로 치우쳤다 말한다면, 감정이입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적당히 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가 작중인물에게 갖는 연민이 없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면, 그 사람의 편에서도, 그 사람의 반대편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실을 르포처럼 드러내고서, 그 한계 이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넘어서는 게 연민 혹은 슬픔이라는 감성이라 보고 있습니다. 단지 폭력으로 쭉 밀고 나갔기 때문에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절실히 하고 싶었던 말이 제외된 채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게 혹시, 기자로서 오래 생활했던 탓에 생긴 습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전달하려고, 물러서서 글을 쓰는 습관?... 감정을 객관으로 포장한다고 표현해야 할까요...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