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다른 곳에 - 교양선집 16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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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생은 다른 곳에》(까치, 1988, 안정효 역)는 그가 1970년 체코 공산당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쓴 두 편의 소설 중 하나다. '생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란 말은 랭보가 했던 말로 전해지는데,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거쳐 1968년 5월, 혁명의 중심 파리에 도착한다. 쿤데라는 이 말을 빌려 혁명과 젊음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의 삶을 통해 말이다.

시인의 탄생과 성장

시인 야로밀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시인의 아버지는 야로밀을 갖게 된 걸 한 순간의 사고로 치부해버리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거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소설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시인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까지 더해 어린 야로밀에게 쏟아 부으며 함께 살아간다. 한편 어린 야로밀은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 시인의 어머니는 어느 날 야로밀이 그린 그림 <개머리 달린 사람>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우연히 만난 한 화가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는데, 화가는 야로밀의 재능을 알아채고 그의 스승이 된다. 이제 야로밀은 화가 밑에서 예술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야로밀을 시인으로 발돋움 시킨 건, 그의 삶에 찾아온 여성들이다. 야로밀은 어린 시절 하녀 마그다에게 처음으로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는 데, 마그다를 위해 시를 지으며 처음으로 시적 경험을 한다. 그 후 자라면서 욕정과 '남자다움'에 대해 탐구해간다. 대학생이 되어 찾아간 정치모임에서 한 여학생을 만나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우연히 만난 (소설에서는 못생겼다고 표현되는) 붉은 머리 점원을 만나면서 비로소 '남자다움'을 느끼며 시를 쓴다.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야로밀에게 어머니는 질투를 느끼지만, 그럴수록 야로밀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청년 야로밀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시를 널리 알리고 싶었지만 그 시가 실릴 곳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체코에 공산주의 혁명의 바람이 불고, 야로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인으로 거듭난다. 바야흐로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시대에 그 시인이 된 것이다. 야로밀이 처음부터 그 길을 걷고자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와 함께 예술을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그 친구들과 순수예술과 참여예술을 두고 논쟁을 벌일 때, 야로밀은 순전히 반항하고자 하는 마음에 반기를 든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여하튼 이제 야로밀은 혁명의 기수가 되어 잘 나가는 시인이 된다.

그는 드디어 참된 생('참된 생'이라고 야로밀이 이해했던 것은 행진하는 군중과, 육체적인 사랑과, 혁명의 구호가 소용돌이치는 세계였다)의 영역에 이르렀고,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이 새로운 삶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그 삶의 바이올린 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시적인 정신이 마음속에 가득하다고 느꼈으며,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생은 다른 곳에

바라던 시인이 되어 야로밀은 행복했을까? 성공한 체제의 시인이 된 야로밀은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 '관리인의 아들'을 만난다. 친구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가정까지 꾸려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시인이 된 야로밀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친구는 야로밀의 시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에 걸어놓을 정도로 야로밀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허나 그런 친구를 보며 야로밀은 부러움을 느낀다. '참된 생이 바로 저기에 있었구나' 느끼며 말이다.

그는 야로밀의 존재를 끊임없이 능가하는 험악한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의 '참된 생'이 부러웠다. 나이가 같은 친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는 또다시 자신이 아직 참된 생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음을 깨닫고 마음이 아팠다.

시인의 파멸

그런 야로밀을 파멸로 이끈 건, 나르시시즘의 환영이었다. 혁명 정신에 도취된 야로밀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여자친구인 붉은 머리의 오빠를 혁명의 적으로 당국에 고발하기에 이른다. 오빠 대신 붉은 머리가 구속되어도 야로밀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순수혁명의 이상에 대한 시를 짓고, 최고의 시라고 평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걸까. 말미에 이르러 야로밀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불같은 혁명의 시기, 야로밀은 불의 죽음을 꿈꿨지만 끝에 이르러 마주한 건 차가운 물의 죽음이었다.

자유를 꿈꾸는 젊음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하기 마련이고, 그 젊음은 단지 나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혁명과 젊음의 현현인 야로밀의 삶은 그 자유를 포기했을 때, 그러니까 참된 생이 다른 곳에 있을 거란 사실을 망각했을 때 이미 끝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시인이 자유를 억압하는 혁명가 옆에 서서 그 심판에 동조하며 찬양하는 순간에 말이다.

소설의 시작에서 끝까지 야로밀의 생애가 그려지는데, 중간 중간 난데없이 시점을 달리하는 대목이 끼어 있다. 그건 때로는 야로밀의 또다른 자아이기도 하고, 레르몬토프나 랭보 같은 시인의 시점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서문에서 이 책의 창작에 대해 "시의 비평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밝히는데, 그 기법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까? 그 시도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을까 평할 재간은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젊음을 꿈꾸는 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할 거란 사실이다.

그는 야로밀의 존재를 끊임없이 능가하는 험악한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의 ‘참된 생‘이 부러웠다. 나이가 같은 친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는 또다시 자신이 아직 참된 생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음을 깨닫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드디어 참된 생(‘참된 생‘이라고 야로밀이 이해했던 것은 행진하는 군중과, 육체적인 사랑과, 혁명의 구호가 소용돌이치는 세계였다)의 영역에 이르렀고,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이 새로운 삶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그 삶의 바이올린 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시적인 정신이 마음속에 가득하다고 느꼈으며,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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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독서모임 하나의책 독서모임 시리즈 2
이진영 외 지음 / 하나의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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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순정고백담. <책은 왜 함께 읽으면 좋을까?>에 대한 답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저마다의 삶이 묻어나는 고백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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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얘기해도 - 5.18민주화운동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마영신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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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먹는 사람들이 있으니, 얘기하고 또 얘기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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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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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우리말로 하면 풋토마토튀김인데 미국 남부 지역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지금도 즐겨 먹는 지는 잘 모르겠다). 잘 익은 토마토는 튀기면 흐물흐물해지기 때문에 풋토마토를 튀기기 시작한 게 전해져 내려왔다나. 여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민음사, 2011, 김후자 역)는 1987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고, 평단에서 좋은 평도 받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소설이다. 원제는 "Fried Green Tomatoes at Whistle Stop Cafe"로 미국 앨라배마 주의 작은 마을 휘슬스톱의 한 카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은 1929년 휘슬스톱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작은 소식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체국 바로 옆에 이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이미슨이 카페를 개업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바로 다음 장엔 1985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의 한 요양원으로 배경이 옮겨진다. 중년여성 에벌린 카우치는 남편을 따라 시어머니를 만나러 매주 요양원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니니 스레드굿이라는 생기 넘치는 노부인을 만난다. 노부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에벌린에게 말을 걸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바로 오래 전 스레드굿 가족과 휘슬스톱 카페를 둘러싸고 벌어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제 소설은 현재의 에벌린과 니니가 만나는 이야기와 1900년대 초 휘슬스톱 이야기가 교차되어 전개된다.

잃었던 여성의 자리 되찾아주는 이야기

이 소설의 특이점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소설이란 점을 꼽을 수 있을까. 일단 주요 등장인물, 에벌린과 니니, 리지와 루스만 봐도 다 여성이고 500쪽이 넘는 분량만큼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멀쩡한 남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여성이 주요 인물로 나와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는 그저······ 딱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기분이에요. 저에겐 여성 해방 운동이 너무 늦게 왔어요······.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더라고요. 부인께서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네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이젠 뭔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인생이 그냥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아요.”

에벌린은 어린 시절부터 눈치 보며 살아왔다. 사회와 교회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좇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는데, 지금은 콤플렉스와 열등감 덩어리로 무기력한 중년이 되었다.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하고, 스트레스-군것질-다이어트의 순환고리는 강박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에벌린이 니니를 만나 스레드굿 가(家)의 이야기를 들으며 변해간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지 스레드굿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긍정하고,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에벌린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이 그토록 중이 여기는 이런저런 특혜를 누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단지 남자가 가진 힘만을 갖고 싶었다. (···) 그리하여 나이 마흔여덟 살에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 사는 에벌린 카우치 부인은 믿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에벌린이 그렇게 매혹되었던 이지 스레드굿은 누구일까? 휘슬스톱의 이지는 스레드굿 가의 막내이자 천방지축 꼬마다. 이지는 보통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유별났다. 치마나 드레스는 불편해서 입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외모 꾸미기는 뒷전이고 밤새워 낚시하거나 모험하는 걸 즐겼다. 형제나 부모가 뭐라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로 놀러 온 루스 제이미슨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여자인 두 사람이 그냥 이어 질리는 만무하다. 후에 루스가 결혼하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자 이지는 루스를 구출해내고, 우여곡절 끝에 같이 카페를 꾸리며 살아간다.

이야기가 이러하니 페미니즘 소설이나 퀴어 소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민음사의 작품 소개에 따르면 페미니즘 단체인 <페미니스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소설이라고도 하고, 영화는 LGBT 작품들을 뽑아 시상하는 단체(GLAAD)에서 수여하는 상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지와 루스 사이에 성적인 코드는 거의 드러나진 않는다. 그저 둘 사이의 애정이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소설을 발표할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 걸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방식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은근해서 더 그윽하게 느껴진다.



차별과 혐오를 이겨내는 연대의 이야기

그래서일까. 차별과 혐오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대목과 설정이 여럿 나온다. 에벌린은 마트에 장보러 가서는 이름 모를 청소년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당하는가 하면, 이지와 루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루스의 아들은 어릴 적 사고로 외팔이로 자라나는데 이지는 오히려 차별의 시선을 정면돌파 하도록 키운다.

흑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도 이야기의 주요한 가지다. 어린 시절 스레드굿 가의 집에서 일했던 십시 부인, 온젤, 빅조지 부부는 이지, 루스와 함께 카페에서 노동하며 살아간다. 온젤과 빅조지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이야기는 흑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차별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준다. KKK단이 찾아와 흑인에게 음식을 팔지 말 것을 경고해도 이지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 이지를 보면 허클베리 핀들이 모여 살았을 법한 마을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작은 음식 하나로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

휘슬스톱 카페가 미국 대공황기가 시작된 1929년에 개업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휘슬스톱 카페는 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지와 루스는 부랑자들이 찾아오면 비굴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며 원없이 먹이고 재웠다. 기차를 몰래 얻어 타고 떠도는 부랑자들 중에는 카페에 들러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지만 소설이 풍겨내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음식'은 대공황기에나 현재에나 중요한 매개물이다. 휘슬스톱 카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에벌린과 니니도 음식을 나누며 마음을 나눈다. 둘은 만날 때마다 무언가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처음엔 초코바나 칩을 나누던 것이 에벌린이 니니를 위해 장만한 음식으로 바뀌어간다. 음식이 변해가면서 에벌린의 내면도 변해간다. 작은 과자 하나, 저렴한 풋토마토튀김 하나에도 온 마음이 담긴다. 그 음식 나누면 마음도 나눌 수 있다.

이야기의 힘

패니 플레그의 소설은 처음이고, 우리에게 알려진 책도 이게 전부지만 천부적인 이야기꾼이 아닐까 싶다. 양념처럼 소소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백미다. 예컨대 이런 이야기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자그만 호수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오리 떼가 날아와 앉아 있는데 갑자기 희한한 일이 일어났지 뭐에요.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호수가 바위처럼 꽁꽁 얼어버린 거에요. 3초쯤 걸렸을까. 그리곤 오리들이 얼음을 매단 채 날아가버렸어요. 지금 그 호수는 조지아 주 어딘가에 있을걸요."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충만하다. 에벌린의 마음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운 건, 휘슬스톱 마을 사람들을 연대의 끈으로 이어준 건 바로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다.

분량은 만만치 않다. 구성은 액자식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을 통째로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세세해서 처음엔 읽어내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조금만 참고 1/3 정도 읽으면 에벌린과 니니, 이지와 루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속도가 붙는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들은 마치 도움닫기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니 짙은 여운이 밀려왔다. 이런 마을이 또 있을까. 이런 이야기가 또 있을까. 고도로 현대화 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풍경일 거란 생각을 하면 안타깝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기억 속에선 영원히 존재할 풍경일 게다. 그 이야기를 향한 마음이 이런 소설을 창작하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고, 때론 누군가의 삶을 바꾸어 놓기도 했을 것이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니 여러 말은 하지 않으렵니다. 우리는 둘 다 바로 이 휘슬스톱에서 나고 자랐으며 무수히 많은 멋진 시간들을 보내며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습니다. 이곳이 이제 예전 같지 않네요. 넓은 고속도로가 여기저기로 뚫리면서부터 버밍햄은 어디서 끝나며 휘슬스톱은 어디서 시작되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지요.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카페가 문을 닫은 뒤로 이 마을의 심장이 박동을 멈춰 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처럼 작은 공간 하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요.


"저는 그저······ 딱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기분이에요. 저에겐 여성 해방 운동이 너무 늦게 왔어요······.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더라고요. 부인께서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네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이젠 뭔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인생이 그냥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아요."

에벌린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이 그토록 중이 여기는 이런저런 특혜를 누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단지 남자가 가진 힘만을 갖고 싶었다. (···) 그리하여 나이 마흔여덟 살에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 사는 에벌린 카우치 부인은 믿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니 여러 말은 하지 않으렵니다. 우리는 둘 다 바로 이 휘슬스톱에서 나고 자랐으며 무수히 많은 멋진 시간들을 보내며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습니다. 이곳이 이제 예전 같지 않네요. 넓은 고속도로가 여기저기로 뚫리면서부터 버밍햄은 어디서 끝나며 휘슬스톱은 어디서 시작되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지요.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카페가 문을 닫은 뒤로 이 마을의 심장이 박동을 멈춰 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처럼 작은 공간 하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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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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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취준에 성공해서 직장생활에 열심히 적응하며 지내던 신입사원 시절, 아침마다 타야했던 지하철은 지옥 같았다. 매일 똑같은 시각에 맞춰 일어나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환승역은 절정이었다. 폭이 수십미터나 되는 통로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일정한 속도의 걸음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오가며 만나는 직장인들의 얼굴은 다들 굳은 표정이거나 졸린 표정이었고, 그것도 아니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거나 작은 스마트폰에 머리를 빼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답답하고 삭막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인가. 믿기 싫었다.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출퇴근길엔 사람들이 가장 적게 다니는 시간대를 찾아보기도 하고, 가장 덜 붐비는 경로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직장생활은 차츰 익숙해졌다. 출퇴근길도 더 이상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이제 곁을 스치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나보다. 불편하게 느꼈던 삭막함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쳇바퀴 속에 갇혀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2015, 창비)의 주인공 마르띤 산또메는 이 쳇바퀴 같은 일상을 탈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년의 회사원이다. "이제 퇴직까지 6개월 28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휴전》의 첫 대목은 산또메의 일기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일기 속에서 산또메는 담담하고 재치있는 어조로 참을 수 없는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적어간다.

담백한 문장들 사이사이로 산또메의 삶이 그려진다. 삶에 드리운 크나큰 불행의 그림자도 정체를 드러낸다. 산또메는 21년 전 상처한 후 5년의 결혼생활 가운데 얻은 3명의 자녀와 아등바등 살아왔다. 다른 사랑은 꿈꿔볼 새도 없었다. 아이들과 잘 지내보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그 오랜 시간 산또메는 신과 불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내색하진 않지만 자신을 거대한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신과는 화해할 마음이 없어보인다. 《휴전》은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휴전 같은 시간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직장인으로 몇 년 살아보니 출퇴근길 말고도 익숙해지는 일이 있다. 월급날과 휴일을 기다리는 일, 월요일이 지옥같이 느껴지는 일이다. 하루하루 고단할 때마다 주말을 기약하며 버티곤 한다. 그래도 종종 생기는 특별한 일들은 퍽퍽한 일상에 내리는 단비 같은 일이다. 도전해보고 싶은 일을 만난다든가,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만남이라든가,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모임이라든가. 이런 일들이 있어 일상이 그런대로 흘러간다. 지난한 삶이 있기에 이런 일들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불행과 행복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어떤 삶도 풀 수 없는 아이러니일게다. 모두가 산또메처럼 그 문제 앞에 용기 있게 신과 대결할 수도 없을게다. 그럼에도 붙잡을 만한 사실이 있다면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일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닐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형벌이라던 철학자도 있었지만 삶이 없었다면 그런 말도 없었다. 오늘 남아있는 시간은 불행에게나 행복에게나 동등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일기장 속 빈 페이지도 마찬가지이고, 그 여백을 채우는 건 우리의 손이고 삶이다.

이제 퇴직까지 6개월 28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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