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

도 허사일 것이다. 마라톤은 만인을 위한 스포츠는 아니다. 소설가가 만인을 위한 직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권유를 받거나, 요구를 받아 소설가가 된 것은 아니다(만류를당한 적은 있지만).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해명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칸트가 경험을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사유한 반면, 들뢰즈는 경험을 다양하고 복잡한 조건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주어진 경험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칸트는 기본적으로 경험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주어진 경험 자체를 해명함으로써 들뢰즈는 새로운 경험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 다시 말해 새로운 경험의 생성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에 따르면 우리 경험에는 타자라는 요소가 항상 ‘초월론적‘ 계기로 개입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타자란 절대적인 타자가 아니라 상대적인타자를 의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상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 그 부분을 동시에 나는 타자가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정립한다. 내가 대상의 숨겨진 쪽을 보기 위해 돌아가면, 나는대상 뒤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고 타자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때 대상의총체적 봄이 달성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 뒤의 대상들은타자가 그것들을 볼수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며, 나는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타자는 세계 안에서의 여백들과 전이를 확보해 준다.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내 앞에 아름다운 조각상이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다고 해보자. 이 순간 나는 조각상의 뒷부분을 볼 수 없다. 만약 이때 어떤 타자가 테이블 건

너편에 있다면, 그는 내가 볼수 없는 부분까지 보고 있을 것이다. 들뢰즈에따르면 반드시 타자가 테이블 건너편에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타자가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그래서 마치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로부터 조각상의 입체적인 면모에 대한 경험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언제든지 타자의 자리 혹은 타자의 시선으로 직접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대상 뒤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고 타자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나는 ~였다" 속에서, 즉 더 이상 대상과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과거 속에서 흔들리게 만든다.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 예컨대 어떤 안정된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과 구분하지 못했다. 타자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등장하며, 이세계는 타자 없이는펼쳐지지 못한다. 나?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자가 나타나게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뿐이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의미의 논리』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는 나와 삶의 규칙이 다른 존재라고 할수 있다. 이런 타자와 마주쳤을때 나는 낯섦을 느낄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보기에 심하게 느끼한 이탈리안 파스타를 좋아한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얼큰한 음식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된다. 단지 음식만 그렇게 낯설겠는가? 정치적인 입장, 미적인 취향, 성적인자극 등, 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너무도 큰 차이를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문제는 내가 그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만나려고 할 때 발생한다. 이경우 나는 과거 자신이 살았던 안정된 세계를 자각하며, 동시에 타자를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으로 직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변한다면, 그것은 내가 타자와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agencement 을 실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지금까지 내가 영위해온 삶의 규칙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된다. 타자가 없다면 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매몰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속의 철학자들 -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하여
나가이 레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스를 쫓아 달려가는 남자는 승객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길 바라고 있다. 남자가 승객을 부른 것은 맞지만, 승객은 자유롭게 거절할 수도 있다. 승객 역시 마찬가지다. 승객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남자가 손을 잡지 않을 가능성을 알고부른 것이다. 서로의 자유를 전제로 이뤄진 부름에 의해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고 남자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사례지만, 어쨌든 나는 사르트르의
‘부름‘에 관한 메모를 정리하여 밑바탕으로 삼고 ‘승인‘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윤리학 논문을 썼다.

그런위험성까지 포함해서 타인과 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 같다.
대화란 무서운 행위다.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는 것은 저기 멀리 있는 상대를 향해 힘차게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충분히 도움닫기를 하고 힘껏 뛰어도 상대에게는 닿지 않는다. 당신과 나사이에는 넓고 깊은 계곡이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는 행위는 항상 위험성을 동반한다. 도약에 실패하는 건 그대로고꾸라지는 걸 의미한다. 그 말은 반대로 애초에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려 하지 않으면, 딱딱한 지면에 부딪칠 일도 없다는 걸뜻한다. 마음먹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었건만, 실수로 넘어뜨려서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버스를 향해 달리는 내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긴 할까. 누군가 나를 눈치채줄까.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려 하면,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사르트르가 말했듯이 부름은 결코 강제여서는 안 된다. 많은 위험성을 감수하고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불러야만 한다.
내 부름이 완전하게 상대방에게 전해지고, 상대의 부름 역시내게 완전히 닿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타인과 서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타인에게 무언가를전달하기란 불가능해요. 이런 감각은 오늘날 널리 공유되는 것 같다.

서로 이해할 수 없으니까 재미있다, 혹은 타인이란 이질적이기에 창조적인 것이 생겨난다, 하는 말도 주위에서 많이 듣는다. 그 말대로다. 맞는 말이다. 정말로 완벽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과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느을 계속하고 싶다고, 나는 바란다. 완전히 통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것. 함께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무방비에,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다. 그 때문에 대화는 언제나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예전에 어떤 철학 대화를 하다 한 남성이 "대화가 물러터졌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남성은 "이렇게 미적지근한 건 그만두고, 서로 더 의견을 부딪치면서 승패를 가려야 해. 더 싸움이 붙을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해."라고 했다.
무르다. 그렇게 말한 남성은 대화란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함께, 모두 사이좋게 하는 것. 그날의철학 대화가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대화란무지막지하게 어렵고, 때로는 괴로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 대화에서는 좋든 싫든 대화의 어려움과 직면해야한다.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것,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 타인의생각을 듣는 것. 너무 어려워 현기증이 일어도 계속해야 한다.
승패를 정하기란 간단하다. 이쪽이 알기 쉬워요, 논리적이야,재미있어 등등 서로 상처 입히는 걸 감수하고 싸우기란 더욱 쉽다. 정말로 간단하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비로소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닮았고, 형편도 공유하며, 쌍둥이 같았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잘 듣고, 끈질기게 생각할 수 있다. 무책임한 공감 따위는필요 없다. 내 친구가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뭔가 말할 때마다 다 같이 입을 모아 "완전 알겠어!"라고 맞장구치는 여학교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이렇다고 생각해 완전 알겠어! 나는 이럴지도 맞아, 맞아, 이해해! 무슨 말을 해도 아이들은 서로 공감하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끈기 있게 이유를 물어보자 사실은 전혀다른 전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드러났다. "뭐지?" 누군가가의아한 표정을 짓고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묻기 시작했다. 의견이 전혀 다르던 두 사람이 같은 이유를 공유했던 게 밝혀지기도 했다. 말을 쓰는 법, 받아들이는 법이 처음부터 전혀 달랐다는 사실도그들의 왕국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오히려 안도하는 듯 평온해졌다. 몇 사람에게, 아니, 아마 모두에게 그 왕국은 허구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가두는 감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상을 느끼며 아무튼 아이들과 함께참을성 있게 생각했다. "이 얘기 간단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구해준 사람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람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와 맞서며 고독하다고 하는이유는 아마 자기만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괴물로 보이고, 자기만 혼자 겉도는 느낌.

괴물들이 쫓아온다. 나를 몰아붙인다. 막다른 길로 몰려서 바닥에 쓰러진다. 내 손바닥을 보는데 무서운 짐승의 발톱이 돋아있다. 소름이 끼친다. 괴물은 나였던 것이다. 주위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다. 계속 이랬다. 나 혼자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까.
그렇지만 세계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 사람은 주위가 모두 똑같고 서로 이해하며 공감하는데오로지 나만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복잡하다. 거기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외로워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안달복달하거나 웃으면서 살아간다.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나 혼자‘들은 뿔뿔이두서없이 흩어져 제각각 외로워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평등하다.
철학 대화를 하다가 거북한 동조나 참기 어려운 고독이 대화를 감쌀 때, 나는 바란다. 더욱더, 더욱더 뿔뿔이 흩어지자 뿔뿔이 흩어져서 제대로 절망하자. 세계는 처음부터 항상 다양했고,
복잡했고, 모호했고, 불확실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가엾고,
모두 평등한 외톨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힘드네."라고 웃으면서 함께카페오레를 마실 수 있다.

어느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철학대화를 했다. 한 여성 참가자는 말하면서 뚝뚝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생각과 이해하지 못한 것과 고독감이 왈칵 흘러넘친 것이다. 그 자리의 누구도 "나도 알아."라고 하지않았다.
우리는 단 한 사람과도 서로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나 알jok고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모른다. 당신의 슬픔을 영원히 모른다.
그래서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어느새 우리는 모두 물속에 있다. 함께 숨을 멈추고 깊이 잠수해서 집중한다.
뿔뿔이 흩어진 우리는 같은 바닷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일관성‘을 동경한다. 힘 있게 뻗어나가며 흔들리지않는 나무의 줄기 같은 것을 신뢰한다. 생각이 변하면 일관성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논의하는 자리에서 의견을바꾸는 것은 패배를 뜻한다.
‘불변‘도 동경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30년 전과 똑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멋지다고 감탄한다. 육체가 사라져도바통처럼 이어지는 불변의 영혼을 꿈꾸듯이,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꿈쩍 않는 생각에 매료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변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을 함께하자 맹세한 연인은 허무하게 갈라선다. 초심을 잃고 오로지 욕심만 차린다. 변한다. 변해버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변하는 것을 정말 어려워하기도 한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신념을 바꾸거나 전제를 의심하지 못한다. 기존의 내 입장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당신도 아저씨도, 어린아이도, 엄마도, 고등학생도 변하기란 어렵다. 변하는 것은 갑옷을천천히 벗고 말랑한 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영혼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남이 만지게 두는 것이다.
교수님의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반복된다. 철학 대화에서는 매번 다양한 규칙을 채용하는데, 변화를겁내지 말라는 규칙을 정한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라고지금은 생각한다. 변화를 겁내면서도 반기는 것, 그리고 변화에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수 있기때문이다.

철학 대화는 돌봄이다. 철학 대화로 치유된다는 뜻은 아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돌봄이라 한 것이다. 철학은 지체를돌본다. 진리를 돌본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듣는 나 자신을돌본다. 입장이 변하는 것을 겁내는 나를 돌본다. 당신의 생각을 돌본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대화는 결코 투기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 대화가 서로 공감하는 공동체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화dialogue‘라고 하면 흔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하는 행위를 떠올린다.

영어 ‘dialogue‘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디아로고스dialogos‘로‘말logos’을 ‘통해dia‘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생어로는 ‘디아렉티케dialektike‘가 있다.
디아렉티케. 즉, ‘변증법‘, 나는 이 말을 철학사 교과서에서처음 봤다. 물론 수많은 철학자가 수많은 방식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내가 일종의 변증법을 처음 ‘실감한 곳은 바로철학 대화가 이뤄지는 자리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면 공감하든지 싸움을 벌이든지,
둘 중 하나로 끝나리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변증법은 그것들과 전혀 다르다. 변증법은 나와 다른 의견을 마주하고 자포자기하듯이 내 의견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차이를 확인하고 내 의견의 개요를 더욱 다지는 것도 아니다. 변증법은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 생각을 쇄신하는 것이다.
중간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타협도 아니다. 대립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다만 그러려면 대화하면서 ‘변모하는 것‘이 용인되어야 한다.
예전에 보았던 눈빛이 무서운 그 사람도,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쇄신한 사르트르도, 그들이 그저 겸허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장보다도 진리를 돌보고,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서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누구든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진리에 공헌하는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된다.

철학 대화라고 하면, 원모양으로 배치한 의자에 사람들이 ㅇ아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ㄷ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이미지는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장소를상징하는 장면이고, 탐구 공동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철학 대화는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고 투기장도 아니다. 마주 본다고하면 ‘대결‘이 떠오르지만 그 역시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를 꿰뚫지 않고, 누구도 활과 화살을 쥐고 있지 않다.
교수님과 눈빛이 무서운 그 사람의 먼 곳을 보던 눈을 떠올린다. 시선은 분명 나를 향했지만, 결코 나를 차갑게 찌르지 않았다. 철학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는다기보다 수면에 떠서 둥실둥실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조심조심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힘을 빼고 물결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림을 즐기고 있다. 선생님의 귀는 분명히 내 말을 듣고 있지만, 눈은 머나먼 저편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무거운 활과 화살을 내버린 나 역시 힘을 빼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눈앞에 있눈 무언가를 보려고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다.

인간에게는 숭고한 가치가 있고, 각자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믿으려는 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라는 언설도 넘쳐나는데, 잘 알고 있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에 답하는 일종의 ‘닭‘도 잔뜩 있다. 생물학적인담도 있고, 사회학적인 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결국 내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그로 인해 나는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다.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골머리를않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질문이언제까지 계속 일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요?
보통이란 뭔가요?
나는 태어나도 괜찮았던 걸까요?
하루하루는 내게 탐구의 쾌감과 고통을 가르쳐주었다. 모르는 것이 점점 늘어났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외려 허물을벗듯이 틈새를 보이며 전혀 모르는 것으로 변해서 다가왔다. 우리는 넘어지면서도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계속 달린다.

흔히 ‘생각을 하면 사람은 강해진다.‘라고 여긴다. 주체적으로 자기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화를 하면사람들과 협동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철학 대화가 영 내키지 않는 학생에게 어른들은 "사회에 나가서 도움이 돼."라든지 "구직할 때 써먹을 수 있어."라면서 장려한다. 생각하는 것이 너를 성공으로 이끌고 안정을 손에 넣을수 있다는 식으로,
막상 사람들과 모여 천천히 생각해보면 깨닫게 된다. 생각하는 것은 외려 약해지는 것이라고 확고하던 자기라는 존재가 무르고 연약해져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타인의 반문으로 인해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익숙했던 것이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가 불가사의한 것으로 변모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란 어렵다. 가능하면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잘 아는 것을 공유하거나 나 혼자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다. 하지만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준 남성도,
자동차에 통행을 양보한 여성도, 그들이 한 행위는 모두 타인과하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내게 교재를 보여주려 했던 그 역시 내게 관여하려 하는방식으로-나와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도덕이 뒤흔들리면서도 나에게 관여하려 함으로써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닐까

여러분이 살기 이전 인생은 무無이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며, 가치란 여러분이 고르는 이 의미이외의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인생에 의미 같은게 없기 때문에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역설.

생각할 때, 사람은 의미의 바닷속에서 같은 바다에 거주하는모든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ㅡ모리타 노부코

잘난 척하지도 않고, 아는 척하지도 않고, 교수님은 싱겁게모른다고 말하고는 다시 오래 읽어서 낡은 책을 진지하게 보기시작했다.
아마 수십 년 동안 수십 번은 읽었을 책에는 선배들의 의견과 교수님 자신의 생각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이 대단한 교수님과 같은 바닷속에 있구나 깨달았다.
철학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깨닫는 경우가 있다. 계기가 되는 일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모두 ‘모른다‘고 공유했을 때 같다.
"모르겠는데."라며 다 같이 노력해서 탐구를 진전시키려고 할때, 내 귀에는 바닷소리가 들린다. 명민하게 논문을 척척 써내는 선배가 "음, 모르겠어."라며 고민하는 걸 보면 왠지 기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맞서는 것은 드넓은 바다에서 계속 헤엄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쓸쓸하지만, 다른 사람과함께 빠지면 좀 마음이 든든하고 웃을 수 있다.

우리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웃고 있다. 친구도 선배도 대단한 교수님도, 다 함께 빠져 있다.
잘 응시해보면 분명히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하이데거나 키르케고르도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계속 헤엄치다 보면, 구름의 틈새로 사랑하는 진리가 언뜻 보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찾았다!‘라고 외칠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도 ‘초월론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밑줄을 친다.

대화를 하는 건 타인과 만나는 거구나 생각했다. 친숙하던 친구가 ‘뭔가 나와 다른,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는 존재‘로 모습을 바꾼다. 거짓말,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뭐, 영혼이 있다니.
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계속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 역시 내게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말하면서 ‘뭐야, 이 생각은?‘ 하고스스로에게 놀란다. 분명한 줄 알았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순간 손아귀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미꾸라지로 변모해버린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을 만날 수 없는 약속과비슷하다. 신주쿠역에 도착한 나는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구에게 "안녕! 나는 도착했어! 지금 어디야?"라고 메시지를 보

낸다. 그러면 친구는 "안녕, 나도 도착했어! 그쪽으로 갈 테니까어디인지 알려줘."라고 답을 한다. 나는 "고마워! 동쪽 출구 근처에 있을게."라면서, 실은 한 층 아래에 있지만 알기 쉬운 장소로 이동한다. 그런데 친구가 "미안해, 나는 신주쿠산초메역에서내렸어."라고 하고, 나는 ‘아, 친구는 나랑 노선이 다르지.‘라고생각하면서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하고 걷기 시작한다. 친구는 다시 "아냐, 벌써 동쪽 출구로 가고 있으니까 기다려! 그런데 출구 근처 어디라고?"라고 물어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찰 것 같다.
그렇지만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말을 나의 말과 힘껏 비교해서 어딘가 교차하는지점이 없는지 찾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동쪽 출구근처의 자판기 앞에서 딱 마주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천사와 악마 사이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안내서
마이클 슈어 지음, 염지선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재밌다 유쾌하다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계속 성찰하고 성찰하라
굿 플레이스 드라마 꼭 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속의 철학자들 -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하여
나가이 레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나의 마음과 비슷한 구석이 이렇게나 많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