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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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는 책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고 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내 또래의 작가.
다시 한 번 내가 사는 평안한 동네에 온다면
다시 꼭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의 예전 생각을 읽으며
신간이 나오길
그의 시집이 나오길 기다린다.

스스로를 마음에 들이지 않은 채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왜 나밖에 되지못할까 하는 자조 섞인 물음도 자주 갖게 된다.
물론 아주 가끔, 내가 좋아지는 시간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간이 그리 오래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시간을 불러들여야 할지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나 자신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순간만은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이의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않을 때 좋음은 오지 않는다. 내가 남을 속였을 때도 좋음은 오지 않지만 내가 나를 기만했을 때 이것은 더욱 멀어진다.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자책과 후회로 스스로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할 때,
속은 내가 속인 나를 용서할 때, 가난이나 모자람 같은 것을 꾸미지 않고 드러내되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제야 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믿는다.

‘연인의 발과 내 발을 맞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신발을 선물하지 않는다,
방에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 빈 가위질을 하지 않는다. 밤에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손톱 발톱은 낮에 깎는다, 사람의 이름을 붉은 글씨로 쓰지 않는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생각해보면 나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신 같은 말을 잘도믿고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믿어야 할 사람에게는 의심을 품은 채 그사람과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디 타인뿐이었던가. 삶의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때가 많았다. 믿으면 믿는 만큼 상처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나에게 ‘믿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 중에 가장 추상적이고 아득한것으로 다가온다. 이 추상과 아득함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상대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보다는, ‘믿음‘이라는 나의 감정이 언젠가는 닳고 지쳐 색이 바래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온다.
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얼마 전 한 신문사의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는 주제로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다수의 문화예술인에게 설문을 받고 있으니 내게도 수일 내로 설문의 답을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는데도 ‘어른‘이라 불릴 만한 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곧 답을 했고 얼마 후 그기사를 지면에서 볼 수 있었다.
정치와 종교와 사상과 사회운동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 시대의 어른으로 꼽혔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분들도있었지만 이견이 들지는 않았다. 그분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인물들이었고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이상을 그려 보이는 사상가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혁명가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꼭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어느 모임의 저녁 자리에서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시작은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될 수 있다면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 역시도 쉬운 일은아니겠다. 사실 내가 가장 자주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여전히 나는 후회와 자책으로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후회하고 자책할 일이 모두 동날 때까지.

바람이 차다. 숨을 깊게 들이면 코에서부터 가슴까지 냉한 기운이 감돈다. 기도氣가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감각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재미있어몇 번 더 깊은 숨을 쉰다. 곧 기침을 한다.
살아오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맞이해야 할 때가 많았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로 마음 앓던 날도 있었고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는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다시 새해가 온다. 내 안의 무수한 마음들에게도 한 살씩 공평하게 나이를 더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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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언가가 웃기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를웃게 만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지알고 싶다면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면 된다. 웃음만큼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좀 더 조용하고 주춤거리며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다만모네의 세계에는 흔히 아는 햇빛 대신 색채만이 존재한다. 이 작은 우주의 훌륭한 조물주답게 모네는 햇빛을나타내는 색깔들을 펼쳐두었다. 펼치고, 흩뿌리고, 엄청나게 숙달된 실력으로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고정해두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시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고, 에머슨(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인간 스스로를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사상을 주장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옮긴이)은이를 "눈부심과 반짝임"이라고 표현했다. 이 그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녹아내리는 수백만 개의 아롱진 반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옛 거장들의 상징주의적인 표현법에는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미학이고,

정돈된 상태를 추구하는 우리의 두뇌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는 더 혼돈스럽고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있다. 초상화도 아니고 스냅사진도 아니다. 습작이라고해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은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한노력들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손, 발, 몸통, 가슴, 얼굴,
다시 얼굴 그리고 다시 얼굴.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몸짓으로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사람들에게 어떤 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 속의 오키프는 털이 없는 영장류같기도 하고, 또 일순간 근엄한 여신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체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류라는 생물종의 신비로움이 나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사진에서 눈을 돌려 전시실을 둘러보니 문득 웃음이터질 것 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살아 숨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데 하나같이 벽에 걸린 무색의 움직임 없는 인물 사진들을 보느라 옆 사람에게는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람들은 흔해 빠진 대상들로 간주되는 듯하다. 정말이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대상 아닌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지나쳐 영원히사라져버릴 낯선 이들에게 왜 구태여 관심을 쏟겠는가.
여기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조지아 오키프는 우리에게는 없는 미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멈춰 있다.
그녀는 영구적이다. 그 주변으로는 그녀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옛말에서 성스럽다 Sacred는 단어의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세속의 영역을 분리하는 액자가 둘러져 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멈춰 서서 무언

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 관람객이 미동도 하지 않는 조지아의 얼굴 사진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다. 목격하는 순간에는 이것이 초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지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메라 뒤의 남자는 그가 현실을 더 꽉움켜쥐고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손 틈새로 금세 빠져나가버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는 소유, 이를테면 주머니에 넣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주머니에 들어가지않고,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소유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

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 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사람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옷과,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손을 잡거나 혹은 잡지 않는 몸짓에서, 머리를 다듬고, 면도를 하고, 내 눈을 마주하거나 피하고, 얼굴과자세에서 기쁨이나 조급함, 지루함이나 산만함을 보이는 방식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내가 보는 대부분의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확실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저 이 장면에 깃든눈부심과 반짝임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한다.

브뤼헐의 이 명작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러 노력을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운율을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삶에서 마주할 대부분의 커다란 도전들은 일상 속에서맞닥뜨리는 작은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 인내하기 위해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또한 내가 방금 이야기한 맘루크 역사의 밑그림이 엄청나게 빈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일강을 따라 수천 마일에 걸쳐 펼쳐진땅에 존재했던 무한히 복잡했을 수천 년의 역사를 나는고작 ‘이집트‘와 같은 작은 단어로 일컫는다. 양탄자를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더 많은 것을 보게 될 테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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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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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듯 에세이인듯
에세이보다 픽션이 들어간 이야기
이슬아 작가의 글을 대부분 읽어서 소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비슷한 느낌

"선생님은 먼저 선에 날생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슬아는 문득 복희가 없는 미래를 생각한다. 복희를 그리워하며 멈춰 있을 자신의 모습이 꼭 기억나듯 그려진다. 이미 겪어본것처럼, 마치 오래전에 살아본 인생처럼 그 슬픔을 안다. 그는지금 이 시절을 꽉 쥐고 싶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손아귀에서쏙 빠져나가버린다.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도덕경』을 펼쳐놓고 이렇게 말했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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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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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한 사람의 이름일 줄은 제목만 보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시절의 여성 예술가의 가계로부터 지금을 사는 우리가 갖고 살아야 할 무언가를 이야기 해준다. 얼마나 많은 경험과 관찰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씌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감탄했다.
삶에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소설은 말그대로 인문학의 꽃이었음을 깨닫는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점에서 난정의 이야기가 공감되었고, 사랑은 단단한 돌이 아니라 매일 빵을 굽는 일이라는 말을 남편에게 건넨 화수의 마음도 내 마음 같았다. 지수처럼 살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화수처럼 해낸 것 같다고 나를 돌아봤으며, 새의 이야기에 마음을 쓰는 해림이가 이 세상을 구원해낼 것이라 믿었다.
물을 정말 무서워하는 나에게 서핑을 버킷리스트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한 우윤도 멋졌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지만 내 마음엔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존재를 넘어 실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니 있을 것 같다는, 아니 있다는 확신이 드는 기분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작가의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남편과 서핑을 배워보는 나를 자꾸 그리게 된다.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

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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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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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사람들의 추천이 있어 관심을 가지던 차에 어머니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발견하고 집에 가져왔다. 오후에 아이들이 학원에 가고 집에 홀로 남아 있는 시간에 읽게 된 책.
작가는 아주 천천히 읽길 바랐지만,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빠르게 읽히는 책.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모를 죽인 겨울이 지나고 봄은 무르익어 사방에 꽃향기가 난만했다. 겨울이 있어서 봄도 있을 수 있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 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의 별볼일 없는 삽화들을 멈추게 하지못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액자들 안에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걸어 놓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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