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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 폴 크루그먼, 침체의 끝을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제학 저서로 꼽히는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 출간(1936년)된 지도 80년 가까이 흘렀지만, 경제학은 크게 보면 여전히 ‘애덤 스미스’와 ‘케인스’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애덤 스미스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케인스는 반대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주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케인스의 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p.462)
경제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아시겠지만, 이 책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의 저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케인스의 주장을 이어받은 경제학자입니다(자신도 책에서 신 케인스학파라고 밝히고 있죠). 따라서 이 책은 폴 크루그먼 교수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현재의 경제상황을 설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신 케인스학파의 입장에서 현재의 경제상황과 정책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책인 것이죠.
<자신을 신 케인스학파라고 밝힌 폴 크루그먼 교수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폴 크루그먼 교수는 해결책이 명확한데도 여전히 2008년에 시작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폴 크루그먼 교수가 이제 와 뒤늦게 경제위기에 관한 책을 출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재앙이 특별히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 과거 대공황 시절 정치인들에겐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끝내버릴 수 있는 지식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p.38)
그렇다면 폴 크루그먼 교수가 언급한 ‘모두’가 알고 있는 해결방안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해 ‘시장에 더 많은 돈을 풀라’는 것입니다. 경기침체 탓에 부족해진 수요를 정부가 채우라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시장에 돈을 풀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미국 정부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시장에 쏟아 부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수치대로 표현하면 7,870억 달러입니다. 이는 현재 원·달러 환율로 900조 원이 넘는 액수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돈을 시장에 풀었음에도 아직 경제는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폴 크루그먼 교수의 대답은 금액이 ‘너무 적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연간 국내총생산, 즉 연간 GDP 규모는 15조 달러가 넘습니다. 이를 3년간 부양해도 45조 달러의 규모를 부양하는 것인데, 그에 비해 7,870억 달러는 너무나 적은 액수라는 것이죠.
<폴 크루그먼 교수는 현재의 ‘이 불황’을 끝낼 수 있는 해법으로 더욱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주장합니다>
게다가 미국 경제의 규모는 그야말로 거대하다. 연간 제품 및 서비스 생산량은 15조 달러에 달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미국 경제가 3년 동안 침체에 빠지게 된다면, 경기부양책의 임무는 3년 동안 45조 달러 규모의 경제를 구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7,870억 달러라는 돈은 경제 전체 규모의 2%가 되지 않는다. 자, 이래도 7,870억 달러가 그렇게 커 보이는가? (p.172)
즉, 폴 크루그먼 교수는 시장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고, 건축 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일자리와 수요를 창출하고, 오바마 정부의 주택 재융자 프로그램(Home Affordable Refinance Program, HARP) 등을 통해 민간 부문의 부채문제를 해결하고, 환율 조정 등으로 수출을 늘리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폴 크루그먼 교수의 대답은 ‘걱정할 것 없다’입니다.
먼저 재정적자 문제입니다. 분명 재정적자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는 재정적자가 그리 우려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사례를 들고 있죠. 일본은 1990년대 이후로 부채 규모가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오랫동안 부채 위기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의 10년 만기 국채 이자율은 1%를 맴돌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 이른바 PIIGS 국가들은 일본만큼 부채가 심각하지 않은데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이에 대해 유럽 국가들은 특별한 경우라고 지적합니다. 이 국가들은 자국 통화를 갖고 있지 않은데 부채는 유로화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죠. 이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재정적자는 그리 우려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부채의 증가 속도를 경제 성장 속도보다 느리게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부채의 증가 속도보다 경제 성장 속도가 빠르면 부채의 규모는 그대로지만 GDP 대비 부채비율은 꾸준히 하락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정부의 부채는 2,410억 달러로 GDP 대비 120%에 육박했으나(2010년 말 93.5%에 비해 높은 수준), 완만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성장으로 1960년대에는 GDP 대비 부채 비중을 60%까지 끌어내렸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점점 증가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부채 규모가 향후 어느 정도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미국 정부가 당장 그 모든 부채를 갚을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부채 증가 속도가 경제 성장 속도보다 느리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자를 충분히 갚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부채의 실질 가치가 증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가 성장하면 GDP 대비 부채 비중은 지속적으로 낮아질 것이다. (p.199)
즉, 폴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은 재정적자를 우려해 경기부양책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정책은 오히려 경제에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가 돈을 빌려 경기를 부양할 경우, 민간 부채를 공공 부채로 대체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죠.
다음으로 인플레이션 문제입니다. 이 역시 재정적자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합니다. 경기침체에 빠져 있는 한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일본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요, 2000년 이후 일본에서는 경기침체 상황에서 급속한 통화 팽창과 함께 지대한 재정적자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는데, 심각한 인플레이션은커녕 디플레이션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장에 많은 돈이 풀리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폴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현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은 돈이 시중에 많이 풀렸다고 해서 가격을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여도 매출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에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로자들은 ‘신용 확대(credit expansion)’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다만 다른 일자리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임금을 높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인상되면 그만큼 그들의 구매력이 높아진다. 돈을 찍어내는 일, 정확히 말하면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자산을 사들이는 일이 인플레이션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촉발한 신용 확대가 더 높은 지출과 수요를 자극해야 한다.
이 말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경제를 과열시키는 경기활성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의미다. 즉,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p.215)
간단히 말해,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돈을 풀었다고 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금리가 매우 낮아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경우, 연방준비제도이사회(중앙은행)가 돈을 풀어도 은행들은 대출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매우 적기 때문에 대체로 자금을 그냥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중앙은행)가 돈을 풀어도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4%)은 부채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려 개인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등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는 괜한 걱정이라는 것이죠.
간단히 정리하자면,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으니 더욱 강력한 경기부양책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키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폴 크루그먼 교수가 케인스의 논리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특별히 놀랍거나 새롭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된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폴 크루그먼 교수 역시 칼럼 등을 통해 주장해 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크루그먼이라는 경제학의 대가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장인의 깊은 장맛’을 느끼게 합니다.
* 사족)
<폴 크루그먼 교수는 더욱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주장했으나, 얼마 전 벤 버냉키 의장은 연내 양적완화를 축소할 수 있음을 밝혔고,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교수는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이 책을 쓸 당시(2012년 2월) 미국경제에 나타난 긍정적인 신호를 보고 브레이크가 아니라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할 시점(p.303)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벤 버냉키 의장은 연내 양적완화를 축소할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폴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움직인 것이죠.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버냉키 의장의 발언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