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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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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365p~366p)



삶은 때론 어떤 의미로 처절하다. 가볍다가도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된다. 살면서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삶을 버티느냐, 무게에 깔려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다. <투명인간>은 한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해 보이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처절해 보이는 삶. 김만수의 삶은, 삶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기억하게 만든다.

이 글은,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왜 투명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투명인간이 된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가 김만수다.

김만수의 역사는 실로 엄청나다. 만석꾼이었던 집안이 할아버지의 일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졸지에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개운리로 오면서 할아버지는 소를 사서 키우고 농사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등 개운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김만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으로 농사만 아는 양반이었다. 할아버지와 뜻이 달랐다. 그래서 무조건 일만 했다. 그러나 술을 먹으면 성질이 사나워진다. 할아버지는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손주들에게 많은 지혜를 베풀었다.

김만수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는 크고 몸을 말라, 허약한 체질이었으니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발육도 느리고 말이 트는 것도 느려, '사람 노릇'을 할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조건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아이였고 식구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아이였다. 말이 트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는 무모하기까지 하고 바지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만수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누나들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석수가 자신을 무시하고 깔봐도 하하 웃으면서 동생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의 인생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증언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 큰누나, 석수, 명희, 옥희, 친구들과 선생님, 어쩌면 김만수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사람들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고, 어른이 되어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김만수와 얽혔다. 그리고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김만수가 어떤 인간인지 철저하게 파헤쳤다.

정작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하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즈음에 그의 말이 독백처럼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이 또 특별하다.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김만수의 삶이 아니라 주위에서 말하는 김만수의 삶. 이를 통해 삶이란, 어느 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삶의 파도를 느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는 내 안을 휘저어, 삶을 다시 적었다. 김만수가 가족을 위해 치른 희생은 희생이었는가. 그의 행보는 전율케 했으며 때로는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가. 그가 동생들을 위해 제 한 몸을 깎아 만든 돈은, 분명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 한 몸 몸바쳐 일하고 일하고 일을 했다. 그렇지만 막상 또 돌아서서 생각하면 김만수가 원한 삶이 그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도가 난 공장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 불법이 되어버려 엄청난 빚이 떠안겨졌을 때, 그는 그것을 모두 갚겠다고 했다. 그때 식구들은 얼마나 힘들어했는가. 동생의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아이처럼 돌보았다. 송진주는 어찌 되었는가. 그의 삶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대로 열심히 살았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살았다. 그것은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부분이 있다.

<투명인간>이 전해주는 그 서늘한 감각은, 어찌 보면 이 글 전반에 깔려 있는 사회문제 때문일 것이다. 김만수가 살아오면서 거친 수많은 정치상황, 노동현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상황들. 그것들이 맞물려 가난한 자들은 비참해지는 상황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이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바스러져 간 사람들의 모습이다. 김만수가 결국 투명인간이 된 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희생이다. 그것을 놓고 보면 투명인간이 되는 삶은, 지금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태석이가 왜 투명인간이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열심히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고 외면받았다. 태석이 바라는 건, 그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진심을 외면했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빚을 떠안기도 한다. 삶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여전히 이 시대에선 투명인간이 넘쳐나고 있다. 다리에서 떨어져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손목을 그어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그들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행복해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더 고통스러워지는가.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은 소외되어 가는 현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독거노인, 고아,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들과 같은 그런 삶. 삶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평등하기에 모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기에, 외면받는 현실이 벌어진다. <투명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외면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누군가의 삶을 외면하면 그는 바로 투명인간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을 붙잡으며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 허상의 이름을 오래도록 생각할 사람은 없다. 투명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내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 존재를 증명하는 길은, 김만수의 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픔도 슬픔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367p)" 삶이 투명인간의 삶이라면 "아픔도 슬픔도 존재하고 모두가 불평등한 삶"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찌할 수 없이 만들어지는 차등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고 비굴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369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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