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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악어빌딩에 흐르는 공기는 듣던 것과는 달랐다. 고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겹기도 하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을 공기에 새겨놓기라도 하듯, 악어빌딩에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1층에 철물점에서 중년의 남성이 꼼지락거린다. 그는 어떤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화면 안에는 내가 잡혀 있었다. 내가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그는 손짓을 한다. 어떻게 오셨대? 나는 검지로 위층을 가리켰다. 구동치 씨 뵈러 왔어요. 아하.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안으로 들어간다. CCTV가 좋긴 좋은 거구먼. 대견하다는 듯 CCTV의 몸체를 가볍게 툭 치고는 도로 자리에 앉는다. 백기현이 CCTV를 설치했단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밟기 전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레스토랑은 조용했다. 음식을 만드는 냄새가 섞였다면 참기 힘들 것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위층으로 갈수록 공기의 냄새는 희박해진다 했는데 땀냄새가 코에 끼얹어진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합기도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근엄한 얼굴로 '인자무적'이라고 소리친다.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합기도와 잘 어울린다. 아이들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 말을 따라하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다. 구령에 맞추어 하낫, 둘, 이렇게 소리치다가 차철호가 나를 발견했다. 악어빌딩은 낯선 사람을 빨리도 알아차린다. 그가 잰걸음으로 내가 있는 통로까지 오고는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정중히 물었다. 구동치 씨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 안에 계실까요? 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위층에 시선을 주었다. 글쎄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만약 있다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인자무적이야, 인자무적. 아는 단어가 그것뿐이라는 듯 차철호가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굵직하게 낸다. 낯선 사람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뻣뻣했다.
낯선 사람이기에 악어빌딩의 냄새에 민감했을 것이다. 낯설다는 것은 때론 긴장을 주기도 한다. CCTV 화면에서 얼굴을 뗄 수 없던 백기현도, 긴장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합기도를 가르쳐주는 차철호도, 그들 나름대로 낯선 공기에 민감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간발의 차로 사람의 텐션을 끌어올려주기도 하는데, 낯선 곳에서 온 나도 악어빌딩에서 만난 낯선 나도 서로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시켜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3층으로 향했다.
3층은 피씨방이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한 젊은 청년은 구동치의 소일거리를 도와준다고 들었다. 이빈일이라고 했던가. 악어빌딩에 대한 정보는 이미 머릿속에 숙지하고 있었다. 이빈일, 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서는데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엇, 구동치 아저씨 보러 오신 분인가요? 친근하게 말을 거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 조금 놀란다. 그렇지만 평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노크 잊지 마세요. 이빈일은 손을 흔들면서 3층으로 재빨리 내려간다. 기가 차서 웃음만 나온다. 계단 난간을 잡고는 심호흡을 한다. 4층에 올라오니 냄새가 많이 희박해졌다. 선선한 공기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지, 아래와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구동치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가볍게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 기척이 없다. 다시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구동치가 얼마나 보안에 철저한지 알고 있기에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며 그의 행동을 재촉할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면서 구동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에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11p)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굵은 음성이 방에서 튀어나왔다. 그를 감싸고 나를 감싼 후 악어빌딩 아래로 사라진다.
훤칠한 키, 살짝 날카로운 눈매. 전직 형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부진 몸. 덩치는 크지만 기척마저 내지 않는 조심스러운 행동이 구동치가 하고 있는 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나를 샅샅히 훑어본다. 나는 대답 대신 안으로 들어선다. 당돌한 행동에 그가 기막혀 했지만 이내 문을 닫고는 작은 의자를 내게 건넸다. 그는 등받이가 있는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고는 오디오의 소리를 줄였다.
애꾸눈오디오, 맞죠?
언제나 선방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은 처음 공격을 어떻게 하냐에 결정이 된다고.
딜리팅하러 오셨나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안을 꿰뚫것만 같은 강렬한 눈빛에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시늉을 했다. 구동치는 탐정이다. 그가 하는 일은 탐정의 영역에서 다양하지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다짜고짜 '딜리팅'을 언급하는 것도, 내가 그 일을 의뢰하러 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상대방의 비밀을 지켜주며 그것을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딜리팅의 일이라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또 다른 비밀도 알고 있다.
딜리팅보다도 기록하러 왔어요. 당신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들을.
내가 무엇을 보관하고 있다는 거죠?
사람들이 의뢰한 걸 지우지 않고 보관하고 있잖아요.
저에 대해 많이 조사하셨나 보군요.
그는 이제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있지 않다. 오히려 취조하는 형사처럼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 목소리가 딱딱하게 변해서 나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나는 빙긋 웃어보였다.
저는 그저 기록하는 사람일뿐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왔어요.
저는 기록과는 무관한데요.
저 파일함에 무엇인가 들어 있지 않나요?
독특한 자물쇠로 일일히 잠긴 파일함을 가리켰다. 나는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했다. 저 안이 빈 파일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찔러본다. 구동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탐정입니까?
아니요. 저는 탐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구동치는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구동치는 두 개의 세계 모두에서 물건을 없애는 것을 풀 딜리팅이라 불렀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물건을 옮기는 하프 딜리팅이라 불렀다. 물건을 그저 옮기는 것만으로 딜리팅이 가능한 것이다.(85p)
저에 대해 조사하셨다면 제가 딜리팅을 그만뒀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딜리팅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많은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어느 드라마에서였던가. 진실은 잡히지 않는 먼 곳에 있다고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하다고, 그 사실 하나하나를 찾아나서야만이 진실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진실 하나를 붙잡기 위해 사실을 모으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구동치는 바로 그런 단편적인 사실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구동치만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모아둔 비밀들, 내가 가리켰던 파일함엔 그가 지우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구동치를 찾았다.
제가 왜 딜리팅을 관뒀는지도 그럼 알고 있겠죠?
구동치가 파일함으로 향한 내 시선을 거두어내듯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도로 시선을 옮겼다.
네, 알고 있어요.
탐정도 아니라면서 참 많이도 알고 있네요.
그가 팔짱을 끼며 비꼰다. 탐정이 아니어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어요. 나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한다. 그는 눈썹을 위로 올리며 더 말해보란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만 내 말은 이제 침묵을 지킨다. 나는 그저 어떤 이야기를 찾아 흘러들어왔을 뿐이다. 길고 길게 뻗어나간 그림자 뒤편에 숨겨진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의 사연을 보았고 그 사연을 들추어내며 조심스레 좇아왔다.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흘린 빵부스러기는, 구동치와의 세상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깊은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나 깊어서 도무지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우물이 있습니다. 저는 무심코 그 안에다 돌멩이 하나를 던졌습니다. 아무 이유 없었죠. 그냥 던졌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겁니다. 저는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갔죠.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또 돌멩이 하나씩을 던졌습니다. 그 사람들도 이유가 없었겠죠. 우물이 거기 있고, 우물은 깊으니까 돌멩이를 던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 근처에 있다가 그 속에서 '퐁당'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들었습니다. 지금 도착한 돌이 누구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제가 던진 돌멩이가 지금 도착한 것일지도 모르고, 아침에 누가 던진 던일 수도 있죠. 그런데 그 소리가 어쩐지 제 돌멩이 소리 같은 겁니다. 저는 우물 속에다 돌멩이를 던졌기 때문에 '퐁당'이라는 소리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384p)
지우고 싶은 이야기들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꺼내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은 그 자신의 삶을 핵심지을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는 자신만이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동치에게 맡겼는지도 모른다. 구동치는 비밀스럽고 치밀하며, 부담스러울 만큼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그의 절제된 행동은 딜리팅을 통해 익혔다기보단 형사 생활을 통해 익혔을지도 모르는 신중함이 배어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맡기는비밀이란, 그의 실력을 신뢰하기보단 그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보관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이였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동치의 삶 한 자락에 살짝 드리워진 어느 누군가의 비밀은 그림자처럼도 길게 뻗어나간다. 그 그림자를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모두 지나쳐버린다. 비밀은 그런 게 아닐까?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나쳐도 상관 없는 그러한 것들.
내가 구동치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 한 자락을 내 손아귀에 쥐고 싶었다. 그 비밀 때문에 구동치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도 알면서도 비밀 앞에서 물러설 수가 없다. 타인의 비밀을 손에 쥐고 협박이나 조롱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어가 그 삶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다. 구동치는 사람들이 지우려고 의뢰한 것을 모아둠으로써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람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고 어느 소설가가 말해주었다. 사랑한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말은 어디쯤에 있을까 가늠을 해본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어느 선까지 다가가야 할지, 상대방을 대하면서 어림짐작을 해보았다. 숨기고 싶은 비밀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동치는 그들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구동치도,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바동거리고 있을 뿐이다. 구동치는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한다.
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지우는 건 말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문장을 지웁니다.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또 지웁니다. 그걸 지워야 새로운 걸 또 쓸 수 있어요. 새로운 걸 쓰려면 계속 지워야 해요. 그렇게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누군가는 후배들과 후학들을 위해 모든 걸 지우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소설이란 건 말이죠, 길이 없는 겁니다. 길이 다 다른 겁니다. 제가 지운 글은, 그냥 제 길이고 제가 쳐낸 나뭇가지들일 뿐입니다. 그걸 보고 뭘 배울 수 있겠어요. 어설픈 길만 만들어줄 뿐입니다."(81p)
지우는 건 삶을 어루만지는 짓이다. 나는 그리 믿고 있다.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흔적을 조심스레, 신중히 지운다는 행위는 내 삶을 돌아보는 신성한 행위다. 단지 내 삶을 내 스스로 지우기보단 타인의 손을 빌어 지울 뿐이다. 그리고 그 타인의 행위에서 내 삶은 그 타인에게 스며들어간다. 그런 행위에 있어, 내 비밀은 숨겨지기보단 공유되어진다. 나는 구동치가 했던 딜리팅을 상상을 하며 내 삶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스며드는 것을 상상했다.
비록 각각의 삶은 구동치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악어빌딩에 사는 사람들처럼 비밀의 아파트에서는 각각의 은밀한 삶이 같은 공기를 공유하면서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달콤쌉싸름한 상상을 하면서 구동치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구동치는 침묵을 가장하며 시위하고 있는 내 낌새를 알아차렸다. 내 고집이 그에게 통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나는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다리를 굳건히 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가 있다면 어쩌면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비밀을 알게 되어서 겪게 될 일은 훗날의 일이다. 나는 고집스럽게 그에게 요구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은 건, 파일함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보았던 구동치의 내면이었다.
저는 잊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것이든.
나는 긴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구동치는 두손두발 들었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성량이 깊은 아리아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딜리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딜리팅 일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왜 그만 두어야 했는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야기는 몇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지워야 할 것을 남김으로써 그가 보았던 두 세계의 경계선은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의뢰한 일을 지우지 않고 남긴다는 것 역시, 구동치에겐 잊고 싶지 않은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구동치는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던 거겠지.
시간이 흐른다. 시간을 지운다. 조금씩, 느리게,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구동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시간의 흔적을 지워냈다. 나에게 오는 시간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검은 그림자를 가졌다. 뚝뚝 떨어지는 이야기들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 자라게 될까. 이야기는 결국 끝이 나고야 만다. 구동치는 말을 마치고서는 한참이나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게 되면 무엇을 지우시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지우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지우지 않는다란 말은 어떤 것이든 꼭 끌어안겠단 각오가 된다. 아무것도 지우지 않는다란 말이 월요일의 그림자를 가릴 것만 같았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날린다. 어차피 당신은 딜리팅을 그만두었잖아요. 그제야 구동치도 어색하지만, 미소를 보였다.
Fin.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