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움에서는 사람을 아주 바보로 아나보다.

사장의 이방인 번역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는데, 올바른 댓글은 지우고 계속해서 정당함을 주장한다.

언제까지 저러나 멀리서 지켜봤다.

오늘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대응한 댓글 포함 40개의 댓글을 지우고서 떳떳한 척 한다.

카뮈가 접신했다는데, 카뮈가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었나?


사라진 카뮈야 내 어쩔 수 없다만, 사라진 댓글들이나 복원해 둔다.



(2014.05.06 오후 10시가 넘어서 사장은 결국 모든 댓글을 지웠기에 처음 댓글부터 살렸다.

아래 댓글은 처음부터 이후에 내가 보지 못했던 indifference님의 댓글과 그에 따른 사장의 '바퀴벌레 모욕 댓글'은 제외되었다. 바퀴벌레 댓글은 뒤이어 쓴 마이리뷰에 나와 있으니 참고바란다.)






  1. indifference 2014/05/02 14:03 addressedit & delreply

1. <이방인>과 우연성

이정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기존 <이방인> 번역본에는 인과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기존 번역본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정서 씨 비판의 요지입니다.

이정서 씨가무어인아랍인의 구분을 문제 삼는 이유도 바로 이 개연성과 의미 부여 때문입니다. 바로 카뮈는무어인아랍인핏줄을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다르게 지칭한다고 말입니다. 이정서 씨에게는, 이런 구분에 그런핏줄구분으로서의 의미가 없다면, 카뮈가 이들을 다르게 지칭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그냥소설이 아닙니다. <이방인>부조리 소설입니다. 다음은 부조리 창작에 대한 카뮈의 견해입니다. (‘부조리 소설부조리 창작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겠지요.) 번역본으로는, 아주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통용되는 것이니 김화영 씨 것으로 하겠습니다.

« L'œuvre d'art naît du renoncement de l'intelligence à raisonner le concret. (…) L’oeuvre absurde exige un artiste conscient de ces limites et un art où le concret ne signifie rien de plus que lui-même. » - Le Mythe de Sisyphe, p. 134.
예술작품은 지성이 구체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따지기를 포기함으로써 생겨난다. (…) 부조리한 작품은 이러한 한계를 의식하는 예술가를 요구하며, 구체적인 것은 그냥 그 자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그러한 예술을 요구한다.” 김화영 역, pp. 150-151.

한 번 관점의 차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카뮈의 태도는 인과관계나 개연성에 집착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더구나 애써 이성적으로 따지거나 구체적인 것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카뮈가무어인아랍인동일한 의미로 보고 단지 구체적 표현을 달리 한 것인지, 거기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이들을 구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후자라고 단정하거나 선언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후술할 것입니다.)

물론 철학 에세이와 소설은 다릅니다. <이방인>을 독서하기 위해 카뮈의 철학 세계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카뮈가 부조리 창작에 대해 남긴 글이 있다면, 카뮈 역시 그에 따라 소설을 썼으리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카뮈의 부조리 창작에 대한 관점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정서 씨는 또한 기존 번역본이 우연에만 기대서 문제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정서 씨는, 기존 번역본에 따르면 뫼르소가 해변에서 아랍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우연이라서 문제가 있고, 자신의 번역본에 따르면 그건 뫼르소가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던 중 벌어진 일이어서 올바른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무엇이라고 하는지 보겠습니다.

« Celui-ci me tournait à demi le dos et, sans me regarder, il a déclaré qu'avec l'autorisation du président, il aimerait savoir si j'étais re-tourné vers la source tout seul avec l'intention de tuer l'Arabe. “Non”, ai-je dit. “Alors, pourquoi était-il armé et pourquoi revenir vers cet endroit précisément ?” J'ai dit que c'était le hasard. » - L’Étranger, p. 125
검사는 나로부터 절반쯤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재판장님이 허락한다면, 내가 아랍인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나 혼자서 샘으로 돌아갔던 건지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그랬다면, 어째서 이자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어째서 바로 그 장소로 되돌아 갔던 걸까요?” 나는 그것은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이정서 역, pp. 122-123.

즉 뫼르소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우연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정서 씨 번역에 따르더라도 말입니다. ‘우연은 비단 <이방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카뮈의 부조리 사고를 관통하는 개념입니다.

« Je peux tout réfuter dans ce monde qui m'entoure, me heurte ou me transporte, sauf ce chaos, ce hasard roi et cette divine équivalence qui naît de l'anarchie. Je ne sais pas si ce monde a un sens qui le dépasse. » - Le Mythe de Sisyphe, p. 73.
나는 나를 에워싸고 나에게 부딪쳐오거나 나를 싣고 가는 이 세계 안의 모든 것을 다 반박할 수는 있으나 오직 이 혼돈, 이 설쳐대는 우연, 그리고 무정부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이 기막힌 등가성만은 물리칠 수 없다.” – 김화영 역, p. 79.

따라서 이정서 씨의 기획, ‘우연으로 점철되었던 기존의 번역본들과 달리 <이방인>에 개연성을 불어넣겠다는 기획이, 과연 카뮈 본인의 뜻과 맞는지 의문입니다. 이정서 씨는그러한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카뮈에게우연은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던지요?

2. ‘
무어인아랍인의 구별

<
이방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모든 것을 치밀하게 개연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라든가, 모든 단어에 개별적인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꼭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레몽 정부는무어 여자라서아랍인일 수 없으며, ‘무어인아랍인은 같은핏줄일 수 없고, 동일어로 쓰일 수 없는 것인가요? 우선무어인에 대한 프랑스어 위키백과 설명 중 일부입니다.

« Durant le colonialisme français, “les mauresques“ désignait aussi la population algérienne autochtone. » - http://fr.wikipedia.org/wiki/Maures
프랑스 콜로니얼리즘 시기에, ‘무어인들(les mauresques)’은 또한 알제리의 토착민들을 가리켰다.”

다음은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어 위키백과 설명 중 일부입니다.

« Localement, l'administration est différente pour les Européens et les indigènes (arabes). » - http://fr.wikipedia.org/wiki/Alg%C3%A9rie_fran%C3%A7aise
현지에서는, 유럽인들과 토착민들(아랍인들)에 대한 행정이 달랐다.”

즉 프랑스인들은 당시 식민지 알제리 토착민들을아랍인내지무어인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무어인아랍인이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상당부분 잃습니다. 더구나태생적 차이를 지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어인이냐아랍인이냐는 기본적으로 표현을 선택하는 문제이지 거기에 반드시 의미의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카뮈 소설에서 그런 엄밀한 의미 부여가 필수적이지 않다면 말입니다. 카뮈는 그저 당시의 용법에 따라 이들 단어들을 사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게 카뮈를 모욕하는 일도 아닙니다.

아직 설득이 안 되었다면 <이방인>에 대한 프랑스 분석가들과 해설가들의 글로부터 따온 아래의 짤막한 인용구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되도록 간단한 직역 위주입니다.)

« Les deux Mauresques aussi sont sans corps, sans regard, sans visage sauf celle qui n’a plus de nez - elles ont seulement une fonction infirmière, prostituée ; » - Joseph Gazengel, http://www.oedipe.org/fr/spectacle/litterature/etranger
두 명의 무어 여성들 역시 육체도, 표정도, 얼굴도 지니지 않는다. 다만 그 중 한 명에게 코가 없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녀들은 단지 직무만을 갖는다. 한 명은 간호사, 한 명은 매춘부.”

위의 글은 <이방인>에서는아랍인으로 지칭되었던 간호사를무어 여성으로 지칭합니다. 또 다른 글입니다.

« L'Arabe est présenté de trois manières. (…) Une autre manière est de les présenter par le biais du narrateur ou d'un autre personnage exprimant des échanges avec eux. Un style indirect. Exemple de la Mauresque qui parle à travers la voix de Raymond : "elle me disait que c'était juste, qu'elle n'arrivait pas", » - Ahmed Hanifi, http://www.africultures.com/php/index.php?nav=article&no=11872
아랍인은 세 가지 방식으로 소개된다. (…) 그들을 소개하는 다른 방식은 그들과 의사를 교환하는 화자나 다른 등장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다. 간접적인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레몽의 목소리를 통해 말을 전달하는 무어 여성이다. “그녀는 나한테 그게 정확하다고, 그녀는 그 돈으로는 살림살이를 꾸릴 수 없다고”,”

위의 글은 아랍인을 소개하는 방식의 예시로 무어 여성 부분을 들고 있습니다. 만약 무어 여성이 아랍인일 수 없다면 이 예시에 포함하지 않았겠지요. 이름에서 아실 수 있지만, 위 글의 저자는 아랍계입니다. 이제 마지막 글입니다.

« La deuxième Arabe apparaît en effet, elle aussi, de façon curieuse : d’abord c’est "une dame", la maîtresse de Raymond, un souteneur furieux de son refus de "travailler" pour lui, qui la menace de mauvais traitements divers (il veut la "marquer" pour la punir) ; ce n’est qu’au bout de quatre pages qu’on apprendra qu’elle est arabe et, après avoir été giflée et tabassée, elle disparaîtra de l’histoire. Mais elle nous permet auparavant de faire quelques autres remarques : lui écrivant une lettre au nom de Raymond, Meursault voit qu’elle a un nom arabe, mais cela restera une simple allusion : aucun nom arabe n’a droit de cité dans L’Étranger ; enfin, Camus la qualifie de "Mauresque" : excepté dans le cas de l’infirmière, le nom masculin Arabe fait en effet Mauresque au féminin, l’Arabe est une espèce masculine, sans contrepartie féminine. Faut-il y voir une délicate galanterie de la part de Camus ? "Mauresque" serait un euphémisme pour Arabe ! » - Rosa Llorens, http://www.legrandsoir.info/l-etranger-de-camus-humanisme-universel-ou-solipsisme-pied-noir.html
두 번째 아랍 여성, 실제로 그녀 역시 의아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 레몽의 정부인 그녀는 먼저 "한 여인"으로 지칭되는데, 포주 레몽은 그녀가 자기를 위해할 것을 거부하자 화를 내고 갖가지 몹쓸 짓을 꾸민다 (그는 그녀에게 흉터를 남겨 응징하려 한다). 본문 네 페이지가 넘어간 후에야 그녀가 아랍 여성임이 드러나고, 그녀는 폭행을 당한 뒤로 소설에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 뫼르소는 레몽을 대신해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아랍 이름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정작 그 이름은 암시되는 데 그친다. <이방인>에서는 그 어떤 아랍 이름도 제대로 언급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카뮈는 그녀를모레스크(Mauresque)’라 칭할 뿐이다. 앞서 등장한 간호사의 경우는 예외지만, 아랍(Arabe)이라는 남성 명사는 그 여성형에서모레스크로 변해버리고아랍인은 여성이 사라진 남성 인종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카뮈의 세심한 화술이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모레스크가 아랍 여성을 가리킬 때 쓰는 일종의 완곡어법이라고! (한말씀님 번역)”

위의 글에서는 아예 그 무어 여성을 아랍 여성이라고 부르며, 게다가 왜아랍인무어 여성이라는 표현이 갈라졌는지도 다르게 설명됩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분석가들이나 해설자들도무어인아랍인을 양립 불가능한 단어들로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번역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닌, 프랑스어 텍스트를 그대로 놓고 해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정서 씨와는 달리아랍인무어인이 명확히 구별된다는 점이나, 그들이 친남매가 아니며, 아랍인이기둥서방이었다는 점을 잡아내지 못합니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인들도 보지 못하는 것을 이정서 씨는 보고 계십니다. 과연 지난 25년간의 한국 독자들, 그리고 70년간 프랑스 독자들이 오독한 것일까요, 아니면 오로지 이정서 씨의 해석만이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는 이정서 씨의 입장이 후퇴해야 하는 것일까요?

    • 한말씀 2014/05/02 23:25 addressedit & del

번역자는 <이방인>을 잘 짜여진 추리소설로 각색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어쩌면 번역자 자신도 모르게 뫼르소의 행적과 동기를 추궁하고, '일반상식'대로 끼워맞추는 검사의 모습을 닮아버린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또 곤란한 측면이, 번역자라면 응당 사소한 단서들에 고도의 주의를 기울여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과 '()이성'의 논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검사의 자세를 갖추기도 해야 하는 터라, 한편 이해가 가기도 하겠지요. 그저 자신과 같은 텍스트를 연구하고 고민한 사람들에게 통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려나요.

    • indifference 2014/05/02 23:41 addressedit & del

, 이정서 씨가 본인의 입장을 옹호하더라도, 지난 번 글에서와 같이 '상식'의 이름으로 옹호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번역자라면 매우 세밀한 번역을 해야겠지요. 다만 세밀함이 꼭 정확성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것을 이번 일로 뼈아프게 느낍니다.

    • ... 2014/05/02 23:53 addressedit & del

갈리마르 출판사에 전화걸어서 물어보면 논란이 종결될 거라고 말하는 이가 프랑스 카뮈 연구자들의 말은 경청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자가당착적입니다. 갈리마르 출판사가 카뮈 학회도 아니고요...

    • indifference 2014/05/03 09:33 addressedit & del

원 댓글을 수정하면 댓글 순서가 너무 뒤죽박죽이 되어 여기에 덧붙입니다.

위 내용 중 Ahmed Hanifi의 글에 대한 번역에서 뒷 부분을
"
레몽의 목소리를 통해 말을 전달하는 무어 여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녀는 나에게 그걸로는 빠듯하다고, 살림살이를 꾸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로 수정합니다. 이 부분을 수정해도 Ahmed Hanifi의 글을 인용한 맥락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1. 독자 2014/05/02 15:04 addressedit & delreply

다른건 모르겠고 당시 알제리에 무어인과 아랍인 두 종족이 있었다는 명제 자체가 틀려요ㅠ 이거야말로 대박 간단히 확인 가능한건데... 부정하려다 보면 이야기가 엉킬수밖에 없써여ㅠㅠㅠㅠ 저 농담으로 당시에 타종족간 결혼이 성행했냐고 여쭸더니 정말 그럴수도 있겠다! 하신거 같은데 아랍사회가 글케 자유연애하고 그럴리가 없자나요 진짜ㅠ 속상하네요.

  1. 모르쇠 2014/05/02 15:44 addressedit & delreply

수많은 논문을 읽어보지만 어떤 논문이든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해 선택과 배제의 원리를 철저히 따른다. 한두 사람의 크리틱을 근거로 들어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수많은 입장 차이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텍스트를 에스노그라피 관점에서 보기 위한 서술의 전략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절대화할 수는 없다.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자기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다. indifference 님과 한말씀 님이 '우연히' 같은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다 함은 어떤 측면에서는 그 근거의 빈약함을 방증하는 인상마저 준다.

무어인과 아랍인이 같다는 점도 객관적 사실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북아프리카의 토착민은 베르베르족이었고, 7세기 경에 아랍인들이 첫번째 원정을 왔다. 그 뒤로 이들 아랍인에 의해 알제리는 점차적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전향한다. 무어인은 이들의 혼혈족이며, 나중에 무슬림화, 아랍화가 전반적으로 확대되면서 무어인 스스로 아랍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했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작품 밖의 사정이 그렇다면 논거는 작품 안에서 마련하는 게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번역자는 지금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설령, 번역자가 해석에서 상당 부분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번역 결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해석을 문제삼는 것이 번역의 오역으로 귀결되지 않는 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꾸로 이방인이 포지하고 있는 의미의 다양성과 풍부함, 소설작법의 치밀함을 확인시키는 데 그칠 뿐이다.

    • indifference 2014/05/02 16:35 addressedit & del

1. 입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정서 씨에게 본인의 해석만 맞다는 입장에서 '후퇴'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2.
무어인과 아랍인의 용례는 위에서 근거를 들었습니다. 두 단어 모두 토착 알제리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말입니다. 지금 제시하신 설명은 게다가 무어인도 결국은 아랍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는 특정 인물을 무어인으로, 특정 인물을 아랍인으로 지칭하지만 그에 따라 "핏줄"이 달라진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즉 작품 내에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고, 외재적 근거를 들 수밖에 없지요.

3.
이것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제가 일찌감찌 지적했습니다.

    • 한말씀 2014/05/02 22:28 addressedit & del

1. 인터넷에서 발견한 논거는 이미 10여개 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맘 크게 먹고 국립도서관을 찾으면 더 많겠지만, 아마 그 전에 이미 이곳에 학을 떼고 돌아선 후겠지요. 엊그젠가 번역자가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면 아주 큰 걸 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삭제됐지요), 그 내기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그리고 제가 정말 번역자 개인의 큰 손실을 입히고자 한다면, 이틀쯤 시간 내서 도서관을 뒤질 의향은 있습니다.

2. '
객관적 사실'을 님이 정하는 건 아니지요. 남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당당히 제시하시고, 해당 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주장을 펼치십시오. 그리고, 작품의 안과 밖을 공기처럼 장벽없이 통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식민지 알제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특정 집단이 쓰던 언어생활, 어휘와 용법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 번역자는 카뮈의 텍스트가 아니라 불한사전의 'Mauresque' 번역에만 의지하고 있는 겁니다.

3.
님의 독서를 말릴 이유도 권한도 제겐 없지 말입니다.

  1. 모르쇠 2014/05/02 15:52 addressedit & delreply

까뮈가 말한 이 세계의 우연성과 소설의 플롯에서 개연성에 대비되는 우연성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 indifference 2014/05/02 16:36 addressedit & del

저는 카뮈가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입을 빌려 이 사건의 '우연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먼저 인용한 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의 '우연성'에 대한 카뮈의 태도를 인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 별개의 문제는 아닙니다.

  1. 비교해보니 2014/05/02 17:06 addressedit & delreply

세 번역자의 번역들을 비교해 보니 김화영의 번역이 가장 문학적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다른 사람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라 딱딱한 느낌이 들고..

세 사람의 번역이 사실상 뜻은 같고 결국 어감의 차이 정도인데 딱 한 문장이 뜻이 서로 다르게 번역돼 있군요.

dans le soleil
가 있는 16번 문장이 그것인데 김화영은 칼을 태양빛에 빛추며라고 번역했고 이정서는 태양 안에 있는 나에게, 이기언은 태양 아래 있는 나에게 라고 번역했네요.

내 개인적으로는 의미상으로 본다면 김화영의 번역이 의역이긴 하지만 그나마 맞다고 봅니다. 이정서의 번역은 완전 직역이라 제일 안좋고 이기언의 번역도 좋지 않죠.

내가 번역했다면 태양 아래서 내게 칼을 겨눴다 정도로 번역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아랍인과 무어인은 다른 사람들이 잘 설명했듯이 다른 종족이 아니죠.
굳이 보자면 무어인이 아랍인에 속하는 하위개념이라 해야 할까요? 동양인과 한국인의 관계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일제시대가 배경이라면 이런 식의 글이 됐겠죠. "그 여자의 이름을 듣고 나는 그녀가 조센징이란 걸 알았다"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우리를 따라왔다" 뭐 이런 느낌인 것이죠.

    • ... 2014/05/02 23:51 addressedit & del

제가 보기에는 이정서 번역본이 김화영 번역본에 대단히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이기언 번역본과 김화영 번역본은 단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구성 자체가 굉장히 다릅니다. 하지만 이정서 역본은 김화영 역본과 주요 단어 사용이 대단히 비슷하네요.

  1. 증언 2014/05/02 18:15 addressedit & delreply

초판 1쇄를 구입한 독자입니다. 이정서 씨께 다시 부탁드립니다. ind...님이 지적하신 'nuit' 'charge'의 오역 문제에 대해 답변해 주십시오.

  1. 한말씀 2014/05/02 22:09 addressedit & delreply


[1] '
모레스크(Mauresque)', 백과사전

번역자께서는 <이방인>모레스크 Mauresque’무어인의 여성형이며, 이 무어인은 아랍인과 별개의 인종/종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권, 불어권 백과사전이라도 꼼꼼히 참조하셨다면, 가령 이런 내용을 분명 보셨을 겁니다.

“The term is of little use in describing the ethnic characteristics of any groups, ancient or modern. From the Middle Ages to the 17th century, however, Europeans depicted Moors as being black, “swarthy,” or “tawny” in skin colour. (Othello, Shakespeare’s Moor of Venice, comes to mind in such a context.)”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Moor (people)> 항목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용어는 고대나 근대의 어떤 그룹이던지 그 종족 특성을 가리키는 데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용어로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집단적 실체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 사전을 참조한 결과 위키피디아가 제법 상세한 편인데, 아직 그 신뢰성이 확고하지 못하니 <이슬람 사전(Encyclopedie de l’Islam)>무어인(Maures)’ 항목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는 매우 불명확한 개념으로서, 19세기까지 서유럽권에서 과거 에스파냐의 무슬림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연안 항구 주민들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그 어원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 라틴어 ‘Maurus’는 그리스어로 ‘Mauros’로 변형됐고, 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베르베르인을 칭했다. 에스파냐에서는 ‘Mauri’ ‘Moros’로 변하면서 이슬람 지배기(711-1492) 동안 무슬림 정복자들을 의미했다. 이후 서유럽의 다양한 언어에 수용된 ‘Moros’는 종족적 특성보다는 지역적 특성을 가졌으며,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정복민, 즉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을 가리켰다.” (그 다음 부분은 아랍 무슬림들로부터 전파되어 이베리아반도에서 꽃피운모레스크예술양식을 짧게 설명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모리타니 외에 말리, 스리랑카 등지의 소수 집단이 그 명칭을 갖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번역자께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무어인아랍인을 별개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어인의 종족적, 인종적 특성이 무엇인가요? 무어인과 아랍인을 구별할 수 있는 신체외형, 언어, 종교, 지역,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까? 저는 못 찾았습니다. 어느 분의 댓글에서도 잠깐 봤지만, 무어인은 아랍인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종족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부적합하다는 게 백과사전들의 설명입니다.


[2]
무어인 혈통의 카뮈

카뮈의 외가쪽이 무어인 핏줄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렇다면 근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제가 참조한 자료들은 스페인에서 알제리로 이주한 가계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또 그 무어인 혈통이 정확히 아랍인 혈통과 무엇이 다른지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무어인의 집>이라는 책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La maison mauresque>모레스크 양식의 저택이라는 뜻일 겁니다. 예술양식으로서의 모레스크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3]
무어인 이름의 비밀

마지막으로,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그 여인의 이름만 보고모레스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혹시 번역자께서는무어인이 아랍인과 전혀 다른 독특한 성씨, 또는 이름을 쓴다고 확신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아랍권 이슬람국가의 대부분은 그 종교에서 유래한 성씨를 씁니다. 일부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신자의 경우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번역자께서 저 문제의 장면을 제대로 해명하시려면 무어인의 이름은 아랍식이 아니다라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근거를 찾아 제시하신다면 번역자의 가설은 명백한 사실로 입증될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이방인> 연구업적으로 소개될 것입니다.


차후에 시간이 나는대로, 또 그럴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Mauresque’ ‘Arabe’ 건을 재론하겠습니다. 일단은 이상의 기본적인 문제제기에 성실히 답변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단어의 개념정의조차 바르게 하지 않은 채로 <이방인>의 후반부 장면들을 나열하고 논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무용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indifference 2014/05/02 23:37 addressedit & del

저도 마침 그걸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카뮈의 외가가 무어인 혈통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2] [3]은 마침 깊은 연관이 있지요. 카뮈 어머니는 Catherine Hélène Sintès인데, 이정서 씨 말이 맞다면 Sintès는 아랍인들은 전혀 안 쓰고, 오로지 무어인들만 쓰는 성씨어야 합니다. 물론 아랍인과 무어인이 구별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정서 씨는 무어인 혈통들도 19세기 당시 Catherine Hélène와 같은 기독교계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말씀 2014/05/02 23:54 addressedit & del

아 그렇군요! 귀찮아서 일단 올려두기나 하자고 떨궈내듯 마무리했는데, 카뮈 모친의 성이 Sintes 였다는 걸 깜빡했네요. 이 성은 <이방인>에서 레몽 셍테스의 성과 같지요. 따라서 까뮈 모친이 부계쪽으로 (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무어인 혈통'이면, 레몽도 무어인인 셈인데, 그런 무어인 후손도 몰라본 사실을 'pied-noir' 뫼르소만 단번에 알아차렸다는... , 고전의 힘이란 참 놀랍군요.

    • indifference 2014/05/03 00:00 addressedit & del

그러고보니 레몽의 성씨가 Sintès였군요! ㅎㅎ 미처 못 떠올렸네요.

  1. indifference 2014/05/02 23:22 addressedit & delreply

우선, <이방인>에서아랍인이라는 단어는 18번도, 20번도 아니고 25번 이상 나옵니다. 분명 25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못 찾은 부분이 더 있을 수 있지요. pp. 14, 63, 73(3), 79, 80(4), 81, 82, 84, 86, 87(2), 104(2), 105, 106, 108(2), 125, 141, 145 입니다. 제가 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바로잡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정서 씨도, 누구나 그러듯이,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확신에 가득 찬 채로, 자신과 다른 해석을 지시하는 것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라거나, 엉터리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숫자 세는 일과 같이 객관적인 부분에서도 실수가 드러나는데, 이정서 씨의 해석이 과연 완전무결할 수 있을까요? 바꿔 말하면 제가 제시하는 해석도 역시 완전무결하리라는 보장은 없겠지요. 그리고 저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더라도, 모든 것이 정답이 되진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정서 씨의 해석을 계속 검토해보려고 합니다.

(
글을 다시 읽어보니 한 발짝 물러나셨네요. 예전에는친남매일 가능성은 없고, ‘기둥서방인 것이 옳다고 선언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기둥서방개인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군요.)

마침 한말씀님도 언급하시고, 이정서 씨도 언급하셔서 “La maison mauresque”의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도 묻고 싶습니다. 이정서 씨는 이 텍스트를 읽으셔서 소개하는 것인가요? 참고로 저도 이를 <무어인의 집>보다는 <무어 양식의 집>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번역은 김화영 씨 것(“무어인의 집”, 카뮈 전집 제19권에 있습니다)이 그나마 가장 알려졌기에 그것을 인용했지만, 번역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 L’inquiétude qui flotte sous la coupole de l’entrée, la confuse attirance du couloir bleu, la stupeur d’une brusque floraison de lumière élevant l’importance de la courte pénombre qui mène enfin au patio, large infini, horizontal, parfait de lumière, ces fines et courte émotions que donne la première visite d’une maison mauresque, j’ai voulu les élargir dans des correspondances, plus générales et plus humaines, devant des créations naturelles. » - Œuvres complètes I, La Maison mauresque, p. 967.
입구의 둥근 지붕 아래 떠도는 불안감, 푸른색 복도의 어렴풋한 매력, 무한정으로 넓게 퍼지며 완벽하게 빛나는 파티오로 마침내 인도하는 그 짧은 박명의 중요성을 돋보이도록 하면서 갑작스레 환하게 밝아오는 빛의 놀라움, 무어인의 집(une maison mauresque)을 처음으로 방문할 때 느끼게 되는 이 섬세하고도 순간적인 감동을 나는 자연의 창조물들 앞에서 맛보는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조응들로 확대해보고 싶었다.” – 김화영 역, p. 109.

위 구절에서 카뮈는 ‘une maison mauresque’에서 돋보이는 빛의 풍요로움과 감동에 대한 자신의 감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 중에서푸른색 복도부분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 Comme dans ces maisons arabes, au sortir d’un couloir qui chasse sa pénombre dans une longue fuite de bleu, on s’arrête surpris devant une brusque tombée de lumière, tous sentiments et pensées bloques, dans une subite communion, heureuse puisqu’elle ne se doute point qu’elle l’est, ainsi au sortir de moi-même j’entrevis un jour la paix et la lumière, sans les préciser et sans me demander si la était enfin le bonheur angoissant, à toute force cherché. » - Œuvres complètes I, La Maison mauresque, p. 970.
이 아랍인 집들(ces maisons arabes)에서, 길게 달려가는 푸른빛 속으로 어둑한 미광을 쫓아내고 있는 어느 복도의 출구에서, 어떤 돌연한 합일 (행복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행복한) 속에서, 모든 감정과 생각이 꽉 막히는 것을 느끼며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듯이, 나는 어느 날 평화와 빛을 엿보았다.” – 김화영 역, p. 114.

위 구절에서 카뮈는 ‘ces maisons arabes’ ‘une maison mauresque’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넘쳐나는 빛, 행복과 평화, 그리고푸른빛’.

« Maison arabe où courent l’ombre, la pénombre et la lumière, apprends-moi à me lasser. » - Œuvres complètes I, La Maison mauresque, p. 972.
그늘과 미광과 빛이 흐르는 아랍식 집(Maison arabe)이여, 내게 싫증 내는 법을 가르쳐다오.” – 김화영 역, p. 114.

그늘, 미광, . 여기서 ‘Maison arabe’는 바로 그 ‘une maison mauresque’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칭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une maison mauresque’와 그렇게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이정서 씨는 카뮈가무어인아랍인을 완전히 구분하고 쓰고 있으며, 따라서 전혀 별개로 그 단어들을 사용한다고 하셨는데, 과연 “La maison mauresque”의 구절들을 읽고 나서도 그러한가요? 카뮈는 ‘maman(엄마)’ ‘mère(어머니/모친)’도 아주 철저하게 구분해서 씁니다. 뉘앙스가 달라지지요. 그렇다고 그 단어들이 지칭하는 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mauresque’ ‘arabe’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 한말씀 2014/05/02 23:39 addressedit & del

마침 계셨군요 ^^ 카뮈 전집까지 소장하셨다니 부럽습니다. 김화영 선생 번역이 불한 공히 문법적으로 꼬투리잡을 부분은 많겠지만, 일단 유려하군요.

번역자께서 기존의 강한 주장들을 슬쩍 유보적 표현으로 바꾸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래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더 좋을 텐데요. 지켜보는 독자들도 많을 듯한데.

백과사전이며 카뮈의 다른 저술들이며 연구서며 악착같이 찾아봐야 할 사람은 번역자 자신인데, 이걸 제가 하고 있으려니 불쑥 억하심정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카뮈 애독자도 아닙니다!

    • indifference 2014/05/03 00:13 addressedit & del

저도 소장한 것은 아니고, 힘겹게 구해서 인용해보았습니다 ^^ 소장하고 싶긴 하더군요. 특히 카뮈 초기작들은 뭐랄까, 터질 듯한 열정이 느껴져서 간혹 펼쳐 보면 또 색다른 감동을 줍니다.

저도 이 상황이 참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애초에 이정서 씨가 그렇게 강하게 자기 번역을 밀고 나가지 않으셨으면 좋았겠지요. 이정서 씨는 분명 김화영 씨의 몇 가지 오역을 수정하셨는데, 그걸 너무 과장하고, 거기에 기반을 두어 근거가 빈약한 해석론까지 주장한 나머지 긍정적인 면들까지 가려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 에크리 2014/05/03 01:31 addressedit & del

제가 댓글 달고 나니 바로 달렸네요.
하지만 주장하시는 건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네요.

'
아랍인의 집'은 소유 개념의 표현이지만
'
무어 양식의 집'은 건축 스타일의 표현이지요.
동일 의미가 아닌데요.
'
아랍인 소유의 무어 양식의 집'이란 표현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대체 가능한 어휘로 사용되지 않았는데요?

    • indifference 2014/05/03 03:04 addressedit & del

에크리님. 우선 제 위의 댓글이 에크리님 댓글보다 한참 전에 달렸습니다.

김화영 씨는 'une maison mauresque' '무어인의 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반면 저는 이것을 '무어 양식의 집'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셨지요? 김화영 씨는 소유 개념으로 번역하자는 입장인 반면, 저는 건축 스타일로 번역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une maison mauresque' 'ces maisons arabes' 'Maison arabe'나 모두 같은 문법적 요소와 구조로 이루어진 표현이기 때문에 소유 개념이든, 건축 스타일 표현이든, 한 쪽으로 일관되게 번역해야 합니다. 'une maison mauresque' '무어인의 집'이라고 소유 개념으로 번역하고, 'Maison arabe' '아랍식 집'이라고 건축 스타일로 번역하는 것은 일관성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이 일관성 부재가 바로 김화영 씨 번역본의 문제입니다.

어차피 둘 중 어떤 번역어를 택하는지가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봅니다. 'une maison mauresque' '무어인의 집'이라고 번역하든 '무어 양식의 집'이라고 번역하든 <La Maison mauresque>는 건축 스타일에서 착안한 텍스트가 맞습니다. 구절들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요. 누가 소유자인자가 중요한 텍스트가 아니에요.

때문에 이 텍스트에서는 '아랍인의 집'이나 '무어인의 집'이라고 번역했다고 그걸 누가 소유자인지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예컨대 '소유자가 아랍인인 집', '소유자가 무어인인 집'으로 이해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무어인의 집'에서 '무어인'이라 함은 무어인 일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지요.

참고로, 제가 보기에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고 싶었다면 'une maison d'un arabe'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랍인 소유의 집'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랍인 소유의, 무어 양식의 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une maison mauresque d'un arabe'으로 썼겠죠.

    • 안타까운 독자 2014/05/03 03:06 addressedit & del

인디님 그냥 니가 하세요. 이방인 번역. 이 고생하지 마시고... 김화영, 이기언, 이정서까지 님 수준에보면 하찮을 따름이잖아요.
출판안해준다하면 자비로라도 내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지금 이 고생할 시간에 저라면 그러겧네.

    • indifference 2014/05/03 03:26 addressedit & del

안타까운 독자님께서 이런 비아냥 거리는 댓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제가 덜 고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

개인적으로 김화영 씨의 번역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이 종종 오역으로 이어질 소지를 낳는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그건 스타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오역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김화영 씨의 스타일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김화영 씨 번역본이 지니는 가치겠지요. 또한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씨의 노고에 대해서는 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화영 씨가 하찮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정서 씨의 <이방인> 문체는,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이방인>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이정서 씨처럼 직역 위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이정서 씨의 번역본에 오역이 없지야 않겠지만, 몇몇 오역이 있는 것 정도는 절대 다수 번역본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정서 씨의 시도, 이번 <이방인>의 새 번역본이 우선은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이정서 씨가 제시하는 <이방인>의 해석 때문에 그 번역본의 가치가 특별히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정서 씨의 번역본을 읽는다고 이정서 씨와 같은 해석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이정서 씨가 자기 번역본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제시하는 <이방인> 해석 그 자체에는 많은 부분 동의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태가 여기까지 왔겠지요?

저는 무어양식의집 이라고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아름답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솔직히 무어인의집이 더 아련하고 아름다워요. 무어양식...이 더 정확하긴 하지만 울림은 무어인...이 더 커요.

    • indifference 2014/05/03 09:44 addressedit & del

'무어인의 집'이 더 문학적이지요? ㅎㅎ 동의합니다. 그게 틀린 번역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저라면 달리 했을 것 같다는 정도.. 그리고 김화영 씨의 <무어인의 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위에서 말했듯이 일관성 결여라고 봅니다.

  1. 2014/05/03 12:03 addressedit & delreply

이정서씨 힘내세요!

  1. indifference 2014/05/03 13:39 addressedit & delreply

이정서 씨의 논증 구조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1.
카뮈는 모든 단어에 아주 세밀한 의미의 구분을 둔다.
2.
카뮈는 '아랍인' '무어인'이라는 단어를 각각 사용한다.
3.
카뮈의 '아랍인' '무어인' 구별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4.
그 구별은 인종적인 것이다.

위의 명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1
번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논의 편의상 일단 맞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카뮈가 단어를 대충 쓰지는 않았겠지만 각 단어별로 반드시 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근거들은 위에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정서 씨가 드는 반대 근거란, '그래야 훌륭한 소설이다'라는 겁니다.)
2
번은 <이방인>에서 추출되는 사실입니다.
3
번은 1(대전제) 2(소전제)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입니다.
4
번은 1, 2, 3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명제가 아닙니다. 이미 결론은 3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아랍인' '무어인'이 인종적으로 구별된다는 새로운 증명이 필요합니다. 이정서 씨는 '원텍스트를 넘어서는 분석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인종 구분 문제가 원텍스트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정서 씨의 이번 글은 2번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2번은 사실 의견이 갈리는 명제가 아닙니다. '기둥서방'설을 증명해내기 위해서는 4번에 대한 증명이 필요합니다. '아랍인' '무어인'이 인종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말씀님이나 독자님이나 저나 여러 근거를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정서 씨가 든 반대 근거는 예전 댓글에 남긴 "아랍인과 무어인은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무어인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스페인계 아랍인입니다."가 전부입니다. (http://saeumbook.tistory.com/424#comment9604605)

그런데 이정서 씨의 댓글에 따르더라도 '무어인'은 결국 '아랍인'이 맞습니다. 즉 인종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합니다. (사실 "무어인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스페인계 아랍인"이라는 설명도 별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 에크리 2014/05/03 14:09 addressedit & delreply

먼저 올린 댓글을 수정하려고 했는데 글이 지워졌습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ㅠㅠ

  1. 진달래 2014/05/03 14:17 addressedit & delreply

오빠 아닌게 맞구먼!! 주말에는 집구석에 있지말고 산과 바다로 나가 힐링합시다.

  1. 지나가는+바람 2014/05/04 01:35 addressedit & delreply

세 번역자의 글을 나란히 제시한 걸 보니 역시 김화영교수의 번역이 가장 문학적이면서도 잘 읽히네요 . 반면 새움번역판은 읽는 맛이 없군요.

  1. 아카시아 2014/05/04 08:12 addressedit & delreply

파마 하면서 거의 다 읽었어요.정말 잘 읽히네요.이정서님! 좋은 번역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1. indifference 2014/05/04 09:11 addressedit & delreply

이정서 씨는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소설 번역 내내, 저는 원문에 없는 부사어나 형용사, 접속사를 제 임의로 넣은 게 하나도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정서 씨가 추신으로 달아둔 21개 부분을 갖고 한 번 확인해봅시다.


1. Près de la bière, il y avait une infirmière arabe en sarrau blanc, un foulard de couleur vive sur la tête.

관 옆에는 흰색 가운에 짙은 원색 스카프를 머리에 싸맨 아랍인 간호사 한 명이 있었다.(새움,이방인, 이정서, 19 /이후부터는 역자 이름만 표기)

: 'couleur vive'
'짙은 원색'이라고 번역했는데 'vive' '짙다'는 뜻은 있어도 '원색'을 지시할 만한 의미는 딱히 없습니다. 때문에 ''이 아니라 '원색'이라고 한 건 임의로 뜻을 추가한 겁니다.


2. Mais Raymond m’a dit qu’il ne se sentait pas capable de faire la lettre qu’il fallait et qu’il avait pensé à moi pour la rédiger.

레몽은 자신은 그만한 편지를 쓸 능력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것을 써달라고 할 요량으로 나를 생각했다는 것이다(이정서).

: 'Mais'
가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를 추가해야 합니다.


4.Il avait été suivi toute la journée par un groupe d'Arabes parmi lesquels se trouvait le frère de son ancienne maîtresse.

그는 하루 종일 아랍인 패거리들에게 미행을 당했는데, 개중에 이전 여자의 오빠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이정서)

: 'suivi'
'미행'이라고 번역했는데 'suivi' '따라가다'는 의미는 있지만 '몰래'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그리고 'ancienne maîtresse' '이전 여자'라고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옛 정부'입니다. 이정서 씨 기준에 따르면 굳이 '이전 여자'로 의역할 필요가 없습니다.


5. J’ai vu un groupe d’Arabes adossés à la devanture du bureau de tabac.

나는 한 무리의 아랍인들이 담배 가게 진열장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정서)

:
앞에서는 'groupe' '패거리'라고 번역하고 여기선 '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6.Raymond m’a annoncé que les Arabes ne nous suivaient pas.

레몽은 아랍인들이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이정서)

:
앞에서는 'suivaient(=suivi)' '미행'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선 '따라오다'로 번역했습니다. 역시 일관성이 없습니다.


8. Les Arabes avançaient lentement et ils étaient déjà beaucoup plus rapprochés.

아랍인들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이미 매우 근접해 있었다.(이정서)

: 'et'
'하지만'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18.La plupart des prisonniers arabes ainsi que leurs familles s’étaient accroupis en vis-à-vis.

대부분의 아랍인 수감자들과 가족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이정서)

: 'leurs familles'
에서 'leurs'를 빼고 번역했습니다. '그 가족들'이 되어야 합니다.


19.La grosse femme hurlait vers mon voisin, son mari sans doute, un grand type blond au regard franc.

뚱뚱한 여인이 내 옆의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러니까 정직해 보이는 얼굴에 큰 키의 금발 사내는 아마도 그녀의 남편인 듯했다.(이정서)

: '
그러니까'는 이정서 씨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20. Et c’est à partir de ce moment qu’ont commencé les choses dont je n’ai jamais aimé parler. De toute façon, il ne faut rien exagérer et cela m’a été plus facile qu’à d’autres.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결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들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어떤 것도 과장되어선 안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내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쉬운 일이었다.(이정서)

: 'cela'
'그것이야 말로'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이상의 뜻이 없습니다. '훨씬'은 이정서 씨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오역이 아닌 부분도 있고, 대체로 매우 사소하고, 다른 번역자들도 이정서 씨처럼 번역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에 대한 이정서 씨의 기준에 따르면 문제가 되겠지요?

. 물론 다른 번역본에도 이 정도의 '문제'는 다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정서 씨는 본인 번역본엔 그런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는 점이겠지요.

    • 오늘 2014/05/04 12:09 addressedit & del

제 친구중에 의사가 하나 있습니다. 녀석이 한 말입니다. 새로운 치료법이 발표되면 전 의학계가 긴장한다. 일단 발표된 그것이 특별히 의미가 없다면 그냥 조용히 사그러진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거들떠도 안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의미가 있다면 그동안 기존의 치료법을 사용하던 측에서 서서히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그 의미가 크면 클수록 그 반발과 소란은 크다.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그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어디에서 역자는 저러한 자신감을 '그냥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는 표현으로 이해해달라는 말을 했던 걸 본 기억도 있습니다. indifference님의 집착은 과유불급이다. 흠을 잡기 위한 흠집잡기같습니다. 진정성이 있으려면, 기존 번역들의 의역을 지금처럼 세세히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닐지. 오히려 최대한 문체를 살리려 애쓰고, 의역을 삼가한 역자의 개인적 언어 취사를 다시 보여줄게 아니라. 아니겠는지요?

    • indifference 2014/05/04 13:11 addressedit & del

열심히 한 것으로 봐달라는 말은 이정서 씨가 아니라 새움지기님이 한 말입니다. 이정서 씨가 자기 번역본에 이러저러한 첨가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철회하고, 그저 열심히 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저도 이 지적들은 철회하도록 하지요. 아차피 이정서 씨 말 때문에 나온 지적이니까요.

제 지적을 비판하려면 변죽만 울리지 말고 내용을 비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님, 이 번역본을 새 치료법에 견주자면 이정서씨는 이제까지의 치료법은 모조리 엉터리다라고 주장한 겁니다.

  1. 도레미 2014/05/04 12:43 addressedit & delreply

다 받아들여서 식민지 알제리인을 무어인이라고 치자. 그게 또 식민지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까뮈 역시 무어인이 되는가?
그 무어인이 식민지 동족을 무어인이라고 부르나?
조센징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나?
그렇다면 아랍인 간호사는 왜 아랍인이라고 했나?
작가가 그렇게 어수룩하나?
이건 그냥 단지 흠집내기밖에 안된다.

짙은 원색?
짙다는 말 속에 원색이 내포돼 있다.
말하자면 풀어준 것이다. 없는 말을 추가한 게 아니고.
역시 흠집 잡기다.

    • indifference 2014/05/04 12:56 addressedit & del

1. 카뮈는 식민지 알제리 토착민이 아닙니다.

2.
짙다는 말 속에 원색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고 친다면, 굳이 '원색'이라는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전에는 그런 반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불필요한 첨가입니다.

    • 개그하나 2014/05/04 13:52 addressedit & del

ind는 새움 사장이 다른 번역보고 의역이라면서, 번역도 아니라면서 비판한 논리를 그대로 써서 비판한 건데, 도대체 글 읽는 사람은 정신이 있는건지. 누가 먼저 때렸는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1. 몰라서묻는 순수한질문임 2014/05/04 13:45 addressedit & delreply

도레미 님//

"
짙다는 말 속에 원색이 내포돼 있다."는 게 맞나요?
첨 듣는 말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그런 뜻은 없던데요?

오늘 님//

불어를 전혀 읽지 못하는 저같은 사람은 이정서 님의 말을 맹신해서 이정서 번역문에는 '접속사나 형용사 부사 등 일체의 더하기나 빼기'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위 본문에 이정서 님이 열거한 세분의 번역문들을 보면서도 이정서 님의 번역문장이 원문 그대로이고, 다른 두분의 번역문은 약간의 의역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이정서 님의 번역을 포함해서 셋 다 약간의 의역들이 가해진 것이라면, ind..님의 지적은 타당해보이지 않나요?

  1. 오늘 2014/05/04 14:55 addressedit & delreply

인디님/ 저도 찾아보니 그건 새움지기님에게 이정서씨가 그렇게 전하라고 한말이더군요. 어찌되었건 저는 왜 그런 작은데 집착하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인디님 말씀에 궁금해서 찾아보니, Mais 가 이정서 번역본에는 빠진 게 아니더군요. "그러나 레몽은 자신은..."(52p)라고 되어 있어요. 확인해보세요. 그런 지엽적인 문제에 대꾸를 안하고 있을 뿐인 거 같아요.
인디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불어를 조금은 알고 번역을 조금은 해봤지만, 이번 이정서씨 번역은 인정할 건 인정해야할 것 같지 않은가요? 한두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전체 스토리가 틀린 걸 지적한 거예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결코 이런 방식이 김화영 교수님을 위해서도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은 어떤가요?

L’audience a été levée. En sortant du palais de justice pour monter dans la voiture, j’ai reconnu un court instant l’odeur et la couleur du soir d’été. Dans l’obscurité de ma prison roulante, j’ai retrouvé un à un, comme du fond de ma fatigue, tous les bruits familiers d’une ville que j’aimais et d’une certaine heure où il m’arrivait de me sentir content. Le cri des vendeurs de journaux dans l’air déjà détendu, les derniers oiseaux dans le square, l’appel des marchands de sandwiches, la plainte des tramways dans les hauts tournants de la ville et cette rumeur du ciel avant que la nuit bascule sur le port, tout cela recomposait pour moi un itinéraire d’aveugle, que je connaissais bien avant d’entrer en prison. Oui, c’était l’heure où, il y avait bien longtemps, je me sentais content. Ce qui m’attendait alors, c’était toujours un sommeil léger et sans rêves. Et pourtant quelque chose était changé puisque, avec l’attente du lendemain, c’est ma cellule que j’ai retrouvée. Comme si les chemins familiers tracés dans les ciels d’été pouvaient mener aussi bien aux prisons qu’aux sommeils innocents.
-(Gallimard,
불어 원서, 143 20째줄~147 11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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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은 번역해보시고...

그것은 형무소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던 그 행로였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그런 시각이었다. 그러한 때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는 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 버린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내가 다시 대면한 것은 바로 나의 감방이니까 말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듯이. (김화영 번역)


이건 전체 인물이 왜곡된 것과는 다르게 그냥 상황을 설명한 문장이지만, 김화영 교수님 번역은 읽기에 요령부득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요?
제가 이정서씨 번역은 여기다 옮기지 않겠습니다. 혹시 저보고 편을 든다 할지도 모르겠어서... 이기언씨 번역은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indifference 2014/05/04 16:34 addressedit & del

1. 새움지기님은 "'애썼다' '신경썼다'의 좀 과한 표현쯤으로 이해해 주실 수 없겠는지요."라고 썼습니다. 전달한다는 말은 없지요.

새움지기님이 무언가를 전달할 때는 이렇게 쓰시더군요. "indifference,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시랍니다. 책을 내고 처음으로 문답다운 문답을 나누었다고... 태양 문제와 기둥서방 문제는 좀더 신중히 답을 골라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꼭 다시 들러달라십니다. 그밖에 이정서 번역에 오류가 있으면 꼭 지적해달라는 말씀과 함께."

그나저나 오류가 있으면 꼭 지적해달라는 이정서 씨의 말씀도 있었으니 저의 이런 지적을 흠집내기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2. 'Mais'
부분은 이정서 씨가 위에 첨부한 본인 글을 그대로 복사하다보니 제가 실수했습니다. 위의 '추신' 부분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정서 씨도 '그러나'를 빼고 옮겨놓으셨습니다. 이정서 씨가 올린 본인 글 발췌를 그대로 옮기다가 발생한 실수를 가지고 뭐라 하진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여하간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철회하겠습니다.

3.
이정서 씨는 그런 작은 번역 문제가 합쳐져서 줄거리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므로 이정서 씨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4.
문체와 관련해서 저는 김화영 씨의 <이방인> 번역 문체보다 이정서 씨 번역 문체를 더 선호한다고 이미 위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번 번역이 "반갑다"고도 인정했습니다. 매번 댓글을 달 때마다 이런 말을 반복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저는 김화영 씨의 <이방인> 번역 문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5.
과연 이정서 씨대로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는 게 맞는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겠지요? 지금 논쟁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1. 읽다보니 2014/05/04 17:44 addressedit & delreply

읽다보니... 이정서님이 그렇게 해석하신 것도 대충 맥락이 이해가 가네요. 레몽의 정부로 나오는 무어인 여자의 비밀 애인이 있다. 또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단 건데...
근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드는데 그렇게 봐야만 한다는 생각까지는 안 드네요. 제시하신 근거가. 역시 오버하고 있는 거 아닌지요

  1. indifference 2014/05/05 04:21 addressedit & delreply

이제부터 조금 더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이정서 씨나 새움지기님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이방인> 해석 문제에 관심을 갖는 모든 분을 위한 글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했으며(그래서 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읽어보는 사람들이 바로 대조해볼 수 있도록 되도록 네이버 사전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 글의 쟁점은 하나입니다. 정말 이정서 씨는 레몽과 관련된 줄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한 번 검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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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김화영의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쓴 것은 실제로 두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가능한가? 그에 대해서는 번역이기에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정서 씨에 따르면 우리는 여태까지 캐릭터, 특히 레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정서 씨가 요약하는 레몽에 관한 줄거리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 http://saeumbook.tistory.com/440

이를 바탕으로 이정서 씨는 레몽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는 오히려 여자를 도왔던 레몽이(그는 유부남도 아니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지탄받을 짓을 한 게 아무것도 없다) 비난을 뒤집어썼지만, 실제악한은 여자와 손잡고 레몽을 농락한 그아랍인 사내였던 것이다.” - http://saeumbook.tistory.com/424

이정서 씨에 따르면 레몽이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아무리 레몽의 정부가 레몽을농락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피가 나올 정도로 때리는 게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평가 부분은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평가에 앞서 따져야 할 것은, 이정서 씨가 레몽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일단 이해가 정확해야, 캐릭터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1.
이정서 씨의 레몽 장면 번역

다음은 이정서 씨가 번역한 레몽 장면입니다. 등장하는 대사는 레몽의 대사입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 “내가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이를테면 부드럽게였소. 그 여자가 잠깐 울부짖으면 내가 겉창을 닫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끝나는 일이었소. 그러나 이번엔 심각했던 거요. 그런데 나로서는 그 여자를 충분히 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 이정서 역, http://saeumbook.tistory.com/405 (실제 인쇄본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정서 씨는 이 부분이 김화영 씨의 기존 번역이 가지는오류를 해결했다고 주장합니다. 한 번 살펴 보도록 합시다.

이정서 씨에 따르면 이 때 레몽은처음으로자기 정부를 때립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정서 씨는 그 전까지는 레몽이 자기 정부를 때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정서 씨에 따르면, 레몽의 대사는 레몽이 이번에 자기가 정부를처음으로때린 것을 뫼르소에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레몽이 이번에 처음으로 자기 정부를 때렸다고 가정했을 때, 레몽의 대사에서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세 군데 있습니다.

첫째, 레몽은 피가 나도록 자기 정부를 때렸지만내가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이를테면 부드럽게였소.”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레몽이 단순하고 무식하더라도, 누군가를 피가 나도록 때리는 게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정도는 알 겁니다. 그럼에도 레몽은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둘째, 이번이 처음 때린 것인데 왜 레몽은언제나 그렇듯이 끝나는 일이라고 말할까요?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는 말로 보이지 않는지요?

셋째, “그러나 이번엔 심각했던 거요.”라는 부분입니다. ‘이번엔심각했으면예전엔어땠다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장이그러나로 연결된다는 것은예전에는 심각하지 않았다, 혹은예전에는 달랐다는 것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이정서 씨의 번역에 따르면 레몽의 대사에예전에 대한 묘사는 없습니다. 예전은 어디로 간 걸까요?

근접해있는 문장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피가 나도록 때렸지만 부드러웠고, 전에는 때린 적이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끝이 난 일입니다. 예전에 어땠는지는 설명이 없지만, 이번엔 심각합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할까요?


2.
레몽은 과연 이때처음으로정부를 때린 것일까?

혹시 레몽이 전에도 자기 정부를 때렸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이정서 씨가 이 장면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요? 혹시, 이정서 씨가 ‘battre’ 동사와 ‘taper’ 동사의 뉘앙스 차이를 간과하고, 또 프랑스어의 반과거 시제의 용법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요?

한 번 원문을 문장 단위로 분석해보겠습니다. 주로 동사와 시제에 집중해서 분석할 것입니다. 우선 그 장면에 대한 원문입니다.

« Il l’avait battue jusqu’au sang. Auparavant, il ne la battait pas. « Je la tapais, mais tendrement pour ainsi dire. Elle criait un peu. Je fermais les volets et ça finissait comme toujours. Mais maintenant, c’est sérieux. Et pour moi, je l’ai pas assez punie. » » - p. 48

(1) Il l’avait battue jusqu’au sang.

여기서 동사는 ‘avait battue’, ‘battre’ 동사가 대과거 시제로 변형된 것입니다. 네이버 사전을 보시면 알겠지만때리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어에서 대과거 시제란 무엇일까요? <이방인>은 뫼르소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1인칭 소설입니다. 사건을 서술하는 기본 시제가 과거 시제입니다(정확하게는 복합 과거와 반과거가 주로 쓰이고, 드물게 단순 과거가 사용됩니다). 때문에 뫼르소가 서술하고 있는 사건 안에서, 그 사건보다 더 과거에 일어난 일은 과거 시제로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서술될 때 기본으로 사용된 과거 시제와 구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대과거 시제를 씁니다.

너무 설명이 어려울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대과거 시제는 어떤 과거의 사건보다 더 전에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특정한 사건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몽이 자기 정부를때린(battre)’ 것은 특정한 사건입니다.

여하간 한국어에서는 이런 규칙이 없으므로 대과거 시제를 보통 과거 시제로 번역합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라는 이정서 씨의 문장은 시제와 관련해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2) Auparavant, il ne la battait pas.

여기서 동사는 ‘ne battait pas’, 첫 번째 문장과 같은 ‘battre’ 동사를 반과거 시제로 부정문에 쓴 것입니다. 반과거 시제는 과거에 지속되었던 일, 과거의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위, 과거에서의 동시성, 추상적 과거, 과거의 묘사, 과거의 시간대, 조건법 현재의 si절 등에서 사용됩니다. 보통은 과거에 지속되었던 일, 과거의 반복되었던 행위 등을 나타냅니다. 영어의 ‘used to’와 다소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ne battait pas’때리곤 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번역한다면전에는 때린 적이 없다정도가 될 것입니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라는 이정서 씨의 번역은 시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없지요.

(3) Je la tapais, mais tendrement pour ainsi dire.

이 문장부터는 레몽의 대사입니다. 여기서 동사는 ‘tapais’, ‘taper’ 동사의 반과거 시제입니다. 두 번째 문장과 같은 시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과거 시제는 어떤 용법으로 사용되었을까요? 뒤에 반복이나 습관을 나타내는 ‘comme toujours(늘 그렇듯이)’가 등장하므로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taper’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때리다라고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 Je la tapais »만 한 번 해석해보겠습니다. ‘je’는 주어로라는 뜻입니다. ‘la’는 인칭대명사로, 레몽의 정부를 가리킵니다. ‘tapais’는 앞서 보았듯이반복적으로 때렸다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요? “나는 그녀를 종종 때리곤 했습니다.”입니다.

그 다음 부분을 직역하면그러나 이를테면 부드럽게 그랬습니다.”입니다.

여태까지의 문장과 죽 연결해보겠습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종종 때리곤 했지만, 이를테면 부드럽게 그랬습니다.””

이상하지요? 전에는 때린 적이 없지만 그녀를 종종 부드럽게 때리곤 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될까요?

바로 ‘battre’ 동사와 ‘taper’ 동사의 뉘앙스 차이 때문입니다. 둘 다때리다는 뜻이긴 한데, 사실때리다는 단어의 뜻이 넓지요? 손바닥으로 뺨을 치는 것도때리다라고 하고, 주먹으로 마구 구타하는 것도때리다라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battre’는 보통 ‘taper’보다 더 심한 정도로 때릴 때 사용하는 동사인 것입니다.

네이버 사전이 드는 예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battre’에 대한 예문으로는 “Il a été battu à mort(그는 죽도록 맞았다).”가 나옵니다. ‘taper’에 대한 예문으로는 “Maman, il m'a tapé(엄마, 그가 나를 때렸어요)!”가 나옵니다. 느낌의 차이가 오시지요?

각 단어의 기원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battre’는 라틴어 ‘battere’에서 유래하는데, ‘battere’세게 때리다(beat)’ 정도의 의미입니다. 반면 ‘taper’, 기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중기 저지 독일어인 ‘tappen’의 경우가볍게 두드리다(tap)’ 정도의 의미입니다.

‘battre(
프랑스어) – battere(라틴어) – beat(영어)’ ‘taper(프랑스어) – tappen(중기 저지 독일어) – tap(영어)’의 상관관계가 보이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이 부분이 이해가 가시나요? 레몽은 그때 처음으로 자기 정부를 피가 나도록 때렸지만(battre), 그전에도 더 약하긴 했지만 때린 적(taper)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레몽은 자기가 예전에 정부를 살짝 때린 적(taper)은 있어도 구타한 적(battre)은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직역하면 오히려 의미의 혼동이 생기고, 의역을 약간 첨가해야 합니다. 예컨대 앞의 ‘battre’, 피가 날 정도였으니까구타하다로 번역하고, ‘doucement’약하게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구타했다. 전에는 그녀를 구타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종종 때리긴 했지만, 약하게 그랬단 말이지요.””

Stuart Gilbert
<이방인> 영어 번역본은 아예 더 확실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 부분을 번역해 놓았습니다.

“He’d beaten her till the blood came. Before that he’d never beaten her. “Well, not hard, anyhow; only affectionately-like.””
그는 피가 나올 때까지 여자를 구타했다. 전에는 그녀를 구타한 적이 없었다. “, 어쨌든 세게 그런 적은 없었고, 애정 표현으로 그런 적만 있지요.”

Matthew Ward
<이방인> 영어 번역본도 마찬가지입니다.

“He'd beaten her till she bled. He’d never beaten her before. “I’d smack her around a little, but nice-like, you might say.””
그는 여자가 피를 흘릴 때까지 그녀를 구타했다. 전에는 그녀를 구타한 적이 없었다. “손찌검을 한 적은 조금 있지만, 다정함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지요.””

반면 이정서 씨의 문장을 봅시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 “내가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이를테면 부드럽게였소.””

우선 반과거 시제가 무시되었습니다. 반복의 의미가 상실되었지요. ‘battre’ ‘taper’는 짐짓 구분되어있긴 하지만 이정서 씨가 그 뉘앙스 차이를 포착해서 이를 달리 번역했는지, 아니면 그저 단어가 달라서 달리 번역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정서 씨가 이 부분을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라고 요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정서 씨의 번역본에서는 ‘battre’때리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정서 씨가 요약한 부분에서는 ‘battre’손을 대다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정서 씨는 본인이 구분을 해놓고도때리다(battre)’손을 대다(taper)’ 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간 이정서 씨가 그 뉘앙스를 잡아냈든 못했든, 다행히때리다(battre)’손을 대다(taper)’는 구분해서 번역했습니다. 반면 이정서 씨의 번역은 반복의 의미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4) Elle criait un peu. Je fermais les volets et ça finissait comme toujours.

이 문장들은 간단하므로 한 번에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문장들은 모두 반과거 시제로 쓰였습니다. 즉 앞서 언급되었던종종 약하게 때리긴 했다는 부분과 같은 시제로 서술되었으므로, 레몽의 앞선 대사 부분과 같은 사건을 설명합니다.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녀는 조금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나는 겉창을 닫곤 했고, 늘 그렇듯 끝나곤 했습니다.”

문장들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같은 표현이 반복되므로 여기서도 의역이 약간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조금 소리를 질렀지요. 나는 겉창을 닫았고, 늘 그렇듯 끝나곤 했지요.” (‘그럴 때면종종 때리다를 지시해서 반복의 의미를 살립니다.)

반면 이정서 씨의 문장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가 잠깐 울부짖으면 내가 겉창을 닫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끝나는 일이었소.”

우선 앞의 문장과 같은 반과거 시제인데 이정서 씨는 갑자기 여기서 조건법(가정법)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si절이 없으므로 조건법으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은 과거의 동시성을 나타내는 용법일 수도 없는데, 과거의 동시성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앞이나 뒤에 복합 과거 내지 단순 과거 시제가 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정서 씨의 번역은 문법적으로만 보더라도 오류가 있는 셈입니다. 만약 이정서 씨가 이 부분을 반복적 행위로 이해했더라면 다르게 번역했어야 할 겁니다.

(5) Mais maintenant, c’est sérieux.

여기서의 동사는 ‘est’ ‘être’의 직설법 현재로 쓰였습니다. ‘to be’ 동사입니다. 레몽 대사에서 바로 이 지점부터 시제가 반과거에서 현재로 바뀌게 됩니다. 즉 레몽 대사 중에 이 문장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과거의 반복된 사실들이고, 이 문장부터는 현재의 일이 됩니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심각합니다.”

반면 이정서 씨의 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심각했던 거요.”

이정서 씨의 번역은 현재 시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레몽이 (3) (4)에서 했던 말들을 반과거 시제로 제대로 번역을 해야, (5)로 넘어오며 시제가 현재로 바뀌면서예전이제가 확실히 구분될 수 있습니다. 시제에 잘 주목하시면서 지금까지의 번역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구타했다. 전에는 그녀를 구타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종종 때리긴 했지만, 약하게 그랬단 말이지요. 그럴 때면 그녀는 조금 소리를 질렀지요. 나는 겉창을 닫았고, 늘 그렇듯 끝나곤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심각합니다.”” – 본인 역(번역에 이견이 없는 부분은 이정서 씨 번역본을 차용했습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 “내가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이를테면 부드럽게였소. 그 여자가 잠깐 울부짖으면 내가 겉창을 닫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끝나는 일이었소. 그러나 이번엔 심각했던 거요.”” – 이정서 역.

(6) Et pour moi, je l’ai pas assez punie.

여기서 동사는 ‘ai pas punie’인데, ‘punir’ 동사의 복합 과거입니다. 즉 과거에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벌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 여자를 충분히 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라는 이정서 씨 번역에는 의역이 다소 있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3.
레몽에 대한 이해

레몽은 종종 자기 정부를 때렸고(손을 댔고), 마침 화가 나서 그때 더욱 강하게 구타했을(때렸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앞서 말했듯이, 설령 종종 자기 정부를 때린 적이 없고, 이번이 처음이더라도, 레몽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결백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이정서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교수님이나 김화영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인용합니다.

« 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 ? » - p. 170.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 이정서 역, http://saeumbook.tistory.com/440 (실제 인쇄본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뫼르소가 레몽과 셀레스트를조금 다르게보고 있나요? 아닙니다. 셀레스트가 레몽보다 나은 것입니다. 즉 뫼르소는 레몽의 인물 됨을 셀레스트보다 낮게 평가하지만, 그래도 자기에게는 레몽이 셀레스트와 똑같은 친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레몽의 인물 됨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그려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과잉 해석입니다.

레몽은 원문에 묘사된 그대로, 자기 정부를 피가 날 때까지 구타한(때린) 남성입니다. 굳이 그런 자의 도덕적, 법적 결백을 옹호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정서 씨의 번역이 레몽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정도일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이정서 씨의 번역 전체를 보겠습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여자를 때렸다.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 “내가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이를테면 부드럽게였소. 그 여자가 잠깐 울부짖으면 내가 겉창을 닫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끝나는 일이었소. 그러나 이번엔 심각했던 거요. 그런데 나로서는 그 여자를 충분히 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이정서 씨는 이 부분에 대해서 레몽이 “‘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정서 씨 번역본에 반복의 의미가 빠져 있고, 문법적 오류가 있음에도, 이 부분이 반드시 레몽이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다고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중의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본에는 그런 중의적 의미가 없습니다.)

첫째, 이정서 씨와 같이, ‘전에는 그녀를 때린 적이 없었다에 주목해서 레몽의 대사가 레몽이 처음으로 자기 정부를 때린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레몽은 전에는 자기 정부를 때린 적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정서 씨와 달리, ‘때리다손을 대다의 뉘앙스 차이에 주목해서 레몽의 대사가 과거에 자기 정부에게손을 댄’, 즉 이번과 같이 심하진 않았지만부드럽게손을 댄 사건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레몽은 전에도 자기 정부에게 손을 댔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정서 씨의번역이 크게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정서 씨의이해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정서 씨가 번역가로서 기본적인 성실함은 갖춘 덕분에, ‘때리다(battre)’손을 대다(taper)’를 구분해놓아서 제대로 된 이해도 가능합니다. 이정서 씨 번역본이 몇몇 부분에서 아쉽고, 이정서 씨 해석에는 동의하기가 몹시 힘들지만, 그 번역본은 나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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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서 씨는 레몽이 전에는 자기 정부를 때린 적이 없다고 해석하면서도, 레몽의 대사가 과거에 레몽이 자기 정부에게손을 댄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은때리다(battre)’손을 대다(taper)’의 뉘앙스 차이를 완전히 이해했던 것이며, 그 뉘앙스 차이에 따라 때린 적은 없지만, 손을 댄 적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단지 요약하면서 잠시 착각한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지요.

만약 이정서 씨가 그렇게 이해했었다면, 이정서 씨에게 미리 사과를 드립니다. 다만, 만약 레몽이 자기 정부에게 이따금 손을 대고, 또 때렸다면, 레몽이양아치라는 해석은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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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eque’
‘Arabe’는 다르게 볼 수 없다더니, ‘battre’ ‘taper’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말이냐? 이중잣대 아니냐? 라는 반론이 나올 것 같아 미리 덧붙입니다.

어떤 두 단어의 뜻을 같게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Mauresque’ ‘Arabe’를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해서 어떠한 두 단어들을 절대 다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은 아니며, ‘battre’ ‘taper’를 다르게 볼 수 있다고 해서 어떠한 두 단어들을 항상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Mauresque’
‘Arabe’를 같게 볼 것이냐, 다르게 볼 것이냐는 당시 프랑스와 알제리의 문화, 언어 사용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들을 달리 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이정서 씨의 근거가 부족한 데 비해, ‘Mauresque’ ‘Arabe’를 같게 봐야 한다는 근거들은 쉽게 찾아지기에 이들을 같게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battre’ ‘taper’를 같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문법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만약 ‘battre’ ‘taper’가 둘 다 똑같이때리다를 지칭한다면, 위의 구절은전에 때린 적은 없지만 부드럽게 때리곤 했다가 됩니다. 즉 자체적으로 모순입니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battre’ ‘taper’를 달리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 번역본들도 이 모순을 피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 번역본들의 문체가 원문과 더러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법에 대한 이해를 바꾸지는 않았겠지요.

    • 한말씀 2014/05/05 05:50 addressedit & del


이 부분은 'Mauresque' 건이 끝나고 문제제기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indifference 님께서 먼저 고된 짐을 떠맡으셨군요. 번역자가 반과거 시제의 용법에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taper'가 반복적, 습관적으로 이루어진 행위란 걸 쉽게 알 수 있었겠지요. 'battre' '구타', 'taper' '손찌검' 정도로 옮길 때 한국어에서 그 뉘앙스 차이가 잘 드러날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더해서 레몽이 계획한 '응징' 방식을 보면 과연 이 남자를 양아치 말고 뭐라 불러야 할지 깝깝해집니다. "(편지로 미끼를 던지고) 그 다음에 그녀가 돌아오면 그는 일단 그녀와 잠자리를 즐기다가, "사정 직전에" 얼굴에 침을 뱉고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p.50) 또 결국 레몽이 수용하진 않았지만, 그의 '업계쪽' 친구들은 아예 "얼굴을 그어버려라"고 제안했었지요. 이런 구렁텅이 속에서 레몽을 의리남으로 구출해내는 번역자의 상상력이 참 으리으리합니다.

  1. 한말씀 2014/05/05 05:52 addressedit & delreply


자료를 차근차근 소개할까 하다가 일단은 현재 논란이 된 사안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옮겨둡니다.
저자는 Cyril Aslanov,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현재는 예루살렘 헤브루대학 언어학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
원문링크 추가: http://id.erudit.org/revue/meta/1999/v44/n3/001910ar.pdf)


<Les voix plurielles de la traduction de Camus en hébreu> ('
카뮈의 헤브루어 번역에서의 다성적 목소리들')
in Journal des traducteurs, vol.44, n.3, 1999, p.448-468.

"Enfin, il convient de noter que le terme « Mauresque » (L’étranger I, 3) a subi des avatars intéressants selon les diverses traductions de L’étranger. Cet ethnonyme qui désignait les Arabes maghrébins dans le contexte de la colonisation française a une longue histoire : il semble refléter l’usage espagnol qui consistait à appeler Moros les Arabes ou les Berbères d’Andalousie et d’Afrique du Nord. Dans les traductions allemande et américaine de L’étranger, ce terme très connoté est traduit par Maurin et par Moor. Ce faisant, ils se sont contentés de trouver dans leurs langues respectives l’équivalent étymologique du signifiant Mauresque / Mora sans trop se poser de questions sur le signifié ou le référent de cet ethnonyme dans le contexte particulier de l’Algérie d’avant l’indépendance. [...] Dans le contexte de l’Algérie française et dans les usages de langage pieds-noirs, l’adjectif maure / mauresque ne désigne pas spécialement les Berbères, mais tous les Musulmans d’Algérie, qu’ils soient arabes ou kabyles."

"
끝으로 <이방인>의 다양한 번역본에 따라 ‘Mauresque’(13)라는 용어가 흥미로운 변모를 거쳐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 동안 마그레브 지역 아랍인들을 지칭하던 이 명칭은 자못 그 유래가 깊은데, 과거 스페인에서 아랍인 또는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 지방의 베르베르인들을모로스(Moros)’라 불렀던 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의 독어번역본과 영어번역본은 함축적 의미가 강한 이 용어를 각각 ‘Maurin’ ‘Moor’로 번역했다. 이렇게 처리하면서 역자들은 ‘Mauresque / Mora’ 라는 시니피앙의 어원적 등가물을 각자의 언어에서 찾아내는 데 만족했을 뿐, 이 용어가 독립 이전 알제리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갖는 시니피에 또는 지시대상에 관해서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 식민지 알제리라는 맥락과검은 발(pieds-noirs)’의 언어 용법에 있어서 형용사 ‘maure / mauresque’는 특별히 베르베르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이든 혹은 카빌인이든 상관없이 알제리의 무슬림 전부를 가리켰다."
(
이후에는 실제 헤브루어 번역본들의 사례를 짚으며 검토하는 내용입니다.)

---
언어학자의 논문조차 다시금 '그저 한 사람의 주장'으로 치부될까 모르겠습니다. 엄밀히 말해 저 학자의 주장 속에는 정작 그 근거가 빠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너무 당연하고 일반화된 상식이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따지고 들자면 못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다음번엔 카뮈와 마찬가지로 알제리 식민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회고와 역사학, 사회학 연구 자료를 제시하면 설득이 될까요... 번역자가 입버릇처럼 꺼내는 '텍스트에 집중하자'는 말은 얼핏 거부할 수 없는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텍스트도 완결적이고 폐쇄적인 세계 속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다. 텍스트의 기본인 언어 자체가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텍스트 바깥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해서, '오로지 텍스트!'라는 강박적 구호와 집착은 도리어 텍스트의 숨통을 틀어막고 옥죄는 변절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모쪼록 번역자께서 <이방인>이라는 텍스트가 식민지 알제리라는 특별한 시대상황 속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책소개의 서두에만 간략히 언급될 무의미한, 불활성의 배경이 아닙니다.

    • 한말씀 2014/05/05 05:57 addressedit & del

어제 써둔 글에 인용자료의 출전을 추가해 수정했더니 글이 밑으로 내려와버렸습니다. 제 실수인지, 기술적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죄송합니다. 바로 위에서 indifference 님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셨으니 혹여 관심있는 분들이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1. 꼴남 2014/05/05 06:51 addressedit & delreply

Ind!이제 고마해라..할일이 이것밖에 없냐?..오늘은 어린이날 나가서 좀 놀아라..

  1. 고마해라 2014/05/05 09:28 addressedit & delreply

고마해라 입니다. Indifference님과 한말씀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쓰신 글들 다 읽어 보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성과가 없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정서씨의 입장이 변하셨군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계시지만, 그것을 하나의 "해석"으로 한정하고 있군요.

그럼 이제 '한국에서만 김화영의 오역때문에 이방인이 오해되고 있다'는 주장,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이방인'을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도 철회하신 건가요? 이제 책 걷어 들이고, 사장직 사퇴하시고, 석고대죄하실 차례인가요?

이정서씨, 이점 확인하려고, 다시 들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정서씨의 해석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만 김화영의 오역으로 이방인이 오독되고 있다.'는 이정서씨 및 새움측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사실 이미 밝혀졌지요. 이정서씨가 학자들의 연구를 일개 개인의 의견으로 무시하고 있어서 그렇지..) 위의 열거한 사안들, '책 걷어들이고', '사장직 사퇴하고', '석고대죄'하시겠다는 말씀, 여전히 유효한가요?

이정서씨, 연휴의 마지막 날이네요. 연휴를 핑계로 숨어 계실 수 있는 날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푹 쉬시고, 이 질문에는 확실한 답을 주세요.

그리고 여전히 이정서씨를 지지하시는 분들, 이정서씨는 지금 무슨 성전을 벌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박해받는 약자도 아닙니다. 그냥, 순수한 무지에 의한 것이었든, 의도된 것이었든, 거짓말을 했고, 그것으로 상업적인 성과를 얻었고, 지금도 계속 그것을 얻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정서씨의 번역투에 만족하신 분들은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정서씨의 저 광고, '사기'에 속으셔서 책을 구입하셨던 분들은 이제, 다른 생각을 해보실 때입니다. 반품 요구든, 항의든, 무엇이든.

이정서씨. 저는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어느정도 진실을 제시하면,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이실 줄 알았습니다.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은 이정서씨입니다. 연휴는 편하게 마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연휴 후, 저 위의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세요.

  1. 출판인 2014/05/05 10:15 addressedit & delreply

난리났군요. 바보들 총출동이네.우리 학계가 정말 이정도뿐이 안된단 말인가! 오호 통제라,..

  1. indifference 2014/05/05 12:58 addressedit & delreply

안녕하세요, 이것이 제 마지막 댓글이 되길 바랍니다. 그동안 이정서 씨 해석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셨던 모든 분들께 정말 수고하셨다고 말을 남기고, 이렇게 만난 게 참우연이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소일거리였다고 믿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정서 씨의 주장들을 한 번 복기해보겠습니다. ‘고전문학과 관련해 근래 보기 힘든 급진적이고 전향적인 주장들이었지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 http://saeumbook.tistory.com/440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존의 <이방인>은 결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닙니다. 그러한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 http://saeumbook.tistory.com/443

이제 한 번 스웨덴 아카데미(‘노벨문학상 위원회가 아닙니다, 물론 이정서 씨가 편의상 그렇게 지칭했으리라 믿습니다)가 카뮈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 이유를 봅시다.

카뮈는 세계 속 인간의 조건을 특징지음에 있어 거기에 모든 개인적 의미(personal significance)를 부정하고, 오로지 이를 부조리(absurdity)를 통해서만 바라봄으로써, 또한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대표하게 됩니다. (…)
이러한 점이 <이방인>을 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직원인 주인공은, 부조리(absurd)한 사건의 연속 끝에 아랍인을 죽입니다. 그러고는, 자기 운명에 무관심(indifferent)한 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한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합일하여 무기력에 절은 수동성으로부터 탈출합니다.”

다시 한 번 짧게 비교하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 이정서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직원인 주인공은, 부조리(absurd)한 사건의 연속 끝에 아랍인을 죽입니다.” – Anders Österling,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차관

그러므로 지난 25년 간의 독자 여러분,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맞습니다. 혹은 적어도 스웨덴 아카데미마저 여러분과 같이 태양 아래에서 무지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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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위해 스웨덴 아카데미 원문을 아래로 뺐습니다.

“Camus represents also the philosophical movement called Existentialism, which characterizes man's situation in the universe by denying it all personal significance, seeing in it only absurdity. (…)
This is what makes L'Étranger (The Stranger), 1942, famous. The main character, an employee of a government department, kills an Arab following a chain of absurd events; then, indifferent to his fate, he hears himself condemned to death. At the last moment, however, he pulls himself together and emerges from a passivity bordering on torpor.” - Anders Österling, Permanent Secretary of the Swedish Academy, 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literature/laureates/1957/press.html

  1. 어휴 2014/05/05 20:04 addressedit & delreply

오랜만에 들어와봤더니 이정서씨의 어처구니없는 해석이 탈탈 털리고 잇군요. 한달전에는 이의제기하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고 관심있는 사람들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정서씨가 유명해진 모양이죠?

사실 이정서씨 번역 자체는 다른 번역들이 그러하듯 나름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들을 갖고 있어서 그 자체론 별 문제가 되지 않죠. 그런데 이씨가 번역을 넘어서는 황당무개한 해석을 마치 자신만이 발견한 진실인냥 말한 것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고 봅니다.

레몽의 성격이나 아랍인과 무어인 등등도 헛웃음이 나는 해석이었지만 길거리의 여자들을 창녀라고 운운하는 것을 보고 정말 황당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암튼 덕분에 별 관심없던 이방인을 불어로 읽게 된 것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그 해석들이 솔직히 너무 한국 유교(?) +마초 (?) 해석이라 정말 난감하다는거ㅠ 해석하는거 좋고 각색도 좋고 뭐든 좋은데 그 방향이 너무 후져요

    • 몰라서묻는 순수한질문임 2014/05/05 21:01 addressedit & del

이정서 님이 "황당한 해석을 마치 자신만이 발견한 진실인양 말한 것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는 어휴 님의 말씀에 질문이 있어요.

이정서 님은 자신의 그 "황당한 해석" "자신만이 발견한 진실"이 아니고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공지의 진실인양 주장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우리 한국 독자들만이 김화영 교수님의 엉터리 오역에 25년 동안 속아서 잘못 읽어왔다고 주장하신 거 아닌가요?

이정서 님이 적으셨듯이 "텍스트는 열려 있는 것"이니까 해석은 독자 각자의 몫이지요.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으로 공분을 살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공분을 산 게 있다면, 그 황당한(혹은 독특한, 혹은 단세포적) 해석을 가지고 평생을 까뮈 연구자로 살아오신 노학자의 번역을 '엉터리'라 단언하고 "김화영의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노학자를 비방한 데 있지 않을까요?

  1. indifference 2014/05/05 20:18 addressedit & delreply

화가 나서 하나 더 남깁니다.

이정서 씨가 이 글을 처음 올렸을 때는 "<이방인> 속에서 아랍인과 무어인에 대한 지시어는 총 20번이 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저는 '아랍인'이라는 단어만 해도 25번 이상 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아무 말도 없이 글을 "<이방인> 속에서 아랍인과 무어인에 대한 지시어는 스무 번 이상이 쓰입니다."라고 수정했군요?

그러니까 새움지기님이든 이정서 씨든 여기 있는 댓글들을 보고 있는 것이며, 때로는 개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고없이 본인의 과오를 감추고 있지요?

    • 몰라서묻는 순수한질문임 2014/05/05 20:59 addressedit & del

그러고보니, 이정서 님의 글에서 그 부분이 바뀌어있네요.
"
20번이 쓰입니다."에서 "스무 번 이상이 쓰입니다."!

ind..
님이 댓글에서 "25번 이상 등장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 20번이 쓰입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 뒤에, ind.. 님의 댓글을 읽고 바꿨다는 것이지요.
이정서 님, 그렇죠?

혹시 나중에 들어와서 이정서 님의 글을 읽고 밑에 달린 ind.. 님의 댓글을 본 사람이 있다면, ind.. 님을 오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은 비례 혹은 결례인듯.

자신의 이름으로 올린 글을 수정했다면, 그것도 단정적으로 한 말씀을. 그것에 대한 소명이 따라야됩니다. 최소한 그것을 근거로 자기주장하려면 말이죠. 저는 분명히 이틀전까지만 해도 역자님께서 총 20번 나왔습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한 글을 읽었답니다. 조작하고 나서 뻔뻔스럽게도 시인하지 않은 것이군요. 해명을 바랍니다.

    • 어이없음 2014/05/06 03:46 addressedit & del

20번이든 20번 이상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수량화에 저항하는 것이 인문학이라 했는데
이젠 숫자 잘못 헤아린 것 가지고 트집 잡으시네..
역자의 의도는 까뮈가 아랍인과 무어인을 구분해서 쓰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인데..
이건 뭐 빨대를 뻘대라고 잘못 썼으니 당신 번역에 문제가 많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 ㅉㅉ

  1. ... 2014/05/06 00:24 addressedit & delreply

충격적이네요 이정서 씨.. 그동안 무지로 인해 논쟁을 따라가기도 벅찼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서 씨의 진심을 믿었는데.. 은근슬쩍 글 내용까지 바꾸시다니.

전 이번에 이정서 씨의 역본을 통해 처음으로 이방인을 접한 독자인데요. 글을 책을 읽기 전에 레몽이 양아치가 아니라는 이정서 씨의 새움 블로그에서 대충 본 상태였음에도 책을 읽으면서 왜 양아치가 아니라는 건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그러나 이정서 씨의 주장을 계속 읽으면서(한편으론 뫼르소가 괜히 그렇게 적극적으로 레몽을 도왔을까 하는 생각도 나중에 했지만) 점점 레몽이 그저 다혈질인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이정서 씨의 해석에 수긍을 해갔죠. '정당방위론' 역시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설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정서 씨의 주장에 동의했기에 그런 차원에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ind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반론을 보면서 무척 혼란스러워지더군요(글이 좀 벗어납니다만, 그에 대응하는 이정서 씨의 태도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설령 이정서 씨가 세계 최고의 카뮈 권위자였다 할지라도 그런 독단적인 태도는 지양해야 했습니다.). 오늘 ind님이 밑에 레몽의 성격에 대해 적어놓으신 걸 보니 이제야 제가 처음에 느꼈던 바가 틀리지 않은 것이었구나 하는 걸 알고 다시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무지와 독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판단을 흐릴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되네요.

전 책 구매 전 새움블로그에 있던 이정서 씨의 글만 보고 이정서 씨를 옹호하는 글을 제 블로그에도 남겼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 글 지우려구요.
이제라도 무지의 늪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뺄 수 있도록 도와주신 ind님께 감사드리고 싶네요. 다른 분들도 노력 많이 하셨지만 솔직히 어투가 공격적이라 반감이 들어서 좀 그랬는데(물론 이정서 씨부터 그러셨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이분은 정말 신사적으로 논쟁에 참여하셔서 보기 좋았고 또 본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네요.
마치 사이비교주에게 속았다가 깨어난 느낌이랄까..
아직도 진실을 외면한 채 맹목적으로 이정서 씨를 지지하는 일부 댓글을 보면,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영감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참고로, 이정서 씨가 본문에 쓴 총 20번 쓰인다는 말 저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제발 이상한 쪽으로 몰아갈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 어이없음 2014/05/06 03:48 addressedit & del

똑같은 똘마니들 또 계시네..
어디세요? 민음사? 아님 문학동네?

ㅋㅋㅋ 이런 식이군요...
막상 내가 이리 몰리니 웃음이 나네요.
난 일개 대학생 독자일 뿐입니다.
솔직히 여기에 제 신분을 노출하고 싶진 않지만, 정 확인코 싶으시면 제가 이정서 씨 옹호한 글을 쓴 개인블로그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글 아직 안 지웠거든요.
그리고 한말씀 님도 지적하셨지만 고작 횟수 바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이 사람아 뭘 좀 알고 답글 써라.

  1. 야담 2014/05/06 02:53 addressedit & delreply

얘끼 이사람들아, 본문도 아니고 블로그 설명글에서 20번을 스무번이상이라고 고쳤다고, 이 난리라니, 나는 무슨 소린가 했네...에휴. 세어보니 스무번이 넘었나보지. 정말들 왜들 이러나? 이게 지금 정상적으로 보이나?

    • 어이없음 2014/05/06 03:49 addressedit & del

이건 번역 비판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요?
그냥 제 느낌..

  1. 어이없음 2014/05/06 04:04 addressedit & delreply

솔직히 ind님 비판글 반론하자면 조목조목 많은데 귀찮아서 하기가 싫네요.
하도 지엽적이고 해석이 분분한 것들이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거라서 이현령비현령꼴 날 것 같은데..

근데 정말 궁금한 거는 이런 분들이 문학작품의 본령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느낄까, 그런 의문이 들어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데 한 줄기만 잡아서 물고 늘어지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그게 지 아무리 스웬덴 한림원이라고 해도 그건 그냥 상 줄 때 쓰는 표현이고
그 표현조차도 한 사람이 맡아서 시중의 여러 논평 중에 골라 쓰는 건데
그게 마치 절대적인 양, 혹은 대단한 권위를 가지는 양 거론하는 걸 보면
문학이 뭔지 과연 알기나 알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한림원에서 노벨상 준 거는 <이방인> 때문만은 아니고 까뮈가 쓴 여러 저작을 묶어서 준 것 아닌가요?
그걸 <이방인>에만 적용하면 무리가 있겟죠?

뉘앙스만 해도 그렇죠.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는, 맥락에 맞는 뉘앙스를 살렸느냐 못 살렸느냐가 중요한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
이정서는 이런 뉘앙스를 살렸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 뉘앙스가 맞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분의 뉘앙스에 대해 A는 이정서와 달리 이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 이런 논리지. 해석학적 순환에 빠진 거 아닌가?

안타깝지만 그게 또 비평가들의 못된 습성들이자 밥벌이 수단이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이 대목에서 생각되는 말.
창작의 차원과 비평의 차원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창작자들은 비평가의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번역은 오로지 창작자 입장에 선다는 것!!!

    • 한말씀 2014/05/06 04:42 addressedit & del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1.
노벨상을 받은 <이방인>이 이렇게 개연성이 없을 리가 없다 목놓아 주장하신 건 번역자 자신입니다.

2.
본문의 뉘앙스 차이와 문법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3. '
번역이 곧 창작이다'는 식의 멋진 표현은 자주 듣고, 공감합니다. 하지만 번역자에게 허용하는 최대한의 권한이 오독과 왜곡까지 너그럽게 포용하지는 않습니다.

  1. 어이없음 2014/05/06 04:29 addressedit & delreply

<이방인>에서 내가 가슴을 치며 천지를 쿵쾅거렸던 말

"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
이정서 역, 새움, 166)

이런 구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바다 수영을 배우고 나서
바닷물 속에서 눈을 뜨고 물의 지붕 위에 부드럽게 일렁이는 여름 햇살을 보았을 때......

그리고 내가 아주아주 늙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아주아주 가까이 느낄 때......

그때나 느껴보았고, 또 느껴볼 수 있을 벅찬 감동이 있다.


이런 감동은 가령 김화영 번역본에서는 실감하기 힘들다.
우리말 고유의 리듬감도 없고, 무엇보다 문체가 살아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비교해보자.

"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
김화영 역, 민음사, 136)

텍스트를 지배하는 어떤 관념이 주인공의 심중에서 치솟는 감정의 파도를 납작하게 눌러 놓았다.
".....
있었던 것이다." 감정의 파도를 멀찍이 대상화해서 가둬 놓았다. "" 속에...
"
깨달으면서"는 또 어떤가?
곧 죽어갈 마당에 이 세계가 그렇게 인식의 대상이어야 했을까?

어쨌거나 난 이 몇 줄의 문장을 위해 <이방인>의 저 숱한 구절들이 달려왔다고 믿는다.

세계는 이토록 천진한데 여전히 나는 어둡고 탁하다.

이정서의 번역은 내게 그런 걸 느끼게 해준다. 나는 여전히 어둡고 탁하다.

  1. 한말씀 2014/05/06 04:33 addressedit & delreply


오늘은 또 색다른 화제가 생산됐군요. 성실하고 예의 바르게 논쟁하시던 indifference 님께서 급기야 화가 좀 나신 듯하고, 다른 독자분들께서도 실망이 크신 것 같습니다. 저는 뭐 '고마해라'님 건 이후로 화가 나 있던 상태라 별반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 중 'Arabe'의 등장 횟수는 크게 중요한 사안이 아닙니다. 스무 번이면 어떻고 스물다섯 번이면 어떻습니까. 애초에 <이방인>에서 아랍인은 다른 호칭을 갖지 않습니다. 문법적으로 필요한 인칭대명사 'Il'()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셈이 틀렸다고 해서 번역자가 주장하는 바에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번역자와 새움측이 억울하단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참고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L'etranger> PDF 무료 파일을 받으실 수 있고, 특정한 단어나 대목이 문제될 때마다 문서에서 '찾기' 기능을 이용하면 매우 편리합니다. 번역자가 이 방식을 활용하지 못했던 게 좀 안타깝군요.)

그런데 이 사안을 그저 '횟수 착오와 교정'으로 축소해버린다면 다시금 중대한 착오를 저지르는 셈일 것입니다. (바로 위 '야담' 님의 관점이 그렇습니다.) 여러 독자들께서 부적절하다 여기는 부분은 에디터 님의 지적처럼 그 교정이 아무런 '소명'도 없이 남몰래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저는 애초에 번역자가 단호히 내걸었던 여러 주장들이 논쟁 와중에 조금씩 후퇴하거나 수정되어 왔다는 점과 이번 사안이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고마해라 님의 줄기찬 이의제기와 논거제시 끝에 'Sirènes'의 해석에 대한 번역자의 태도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바뀐 것을 기억합니다. 그 논쟁 끝에 번역자가 내놓은 답변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번역할 수 있는데, 자신은 그 양가성을 살려두기 위해 '사이렌'을 음가 그대로 옮겼다는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당시 어느 독자분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번역자는 자신의 책 서두에 분명히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 (<역자의 말>, 9.) 'lentement' 'tout de suite'라는 기본적 부사를 거꾸로 이해한 채 또 다시 김화영 선생을 무식쟁이로 몰아간 대목도 마찬가지지요. 이에 대해선 아무 해명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기언 교수'를 부르짖으며 써냈던 그 격정적인 글은 또 어떻게, 몇차례나 바뀌었던가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제게는 게시물을 매번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두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번역자는 "눈 밝은 독자들"을 요청했었지요. 이곳에서 번역자의 해석과 주장을 반박하고 근거를 앞세워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번역자가 고대하던 독자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지와 몽매에 빠진 장님도 아닙니다. 부르는 소리에 달려왔고,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 오류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모두가 바라는 '번역논쟁'이란 누가 더 잘났는가를 가리는 시합이 아닐 것입니다.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가 관건이 되야 하며, 참여자의 성실한 탐구 끝에 믿을 만한 지식 한 줌을 얻어내는 공동의 작업입니다. (물론 이상적인 소리인 것은 인정합니다. 최대한 억누르기는 했지만 일단 저부터 ''를 방석으로 깔고 글을 써왔으니까요.) 그런데 논쟁에 얽힌 한쪽이 상대의 ''을 이유로 진지한 견해를 무시하거나, 오류가 입증됐음에도 수긍치 않거나, 교묘한 말바꾸기로 유리한 포지셔닝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논쟁은 단 한걸음도 진척될 수 없습니다. 저의 느낌으로 indifference 님과 또 다른 여러 독자들의 불만은 이러한 사정들이 쌓여온 끝에 터져나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저의 '느낌'이고, 사실상 저의 불만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어떠한 지적이 수용됐고, 어떠한 주장이 사실로 합의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면 논쟁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학문적 태도나 훈련을 요하는 것도 아니어서, 드라마의 결말을 두고 치고받는 갑남을녀의 토론장에서도 이 원칙은 좀체 훼손되지 않습니다. 새움 측에서 보다 신중하고 사려깊게 논쟁에 임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 야담 2014/05/06 06:21 addressedit & delreply

허허, 이정서씨 글 정말 중독성 있는데, 다시 들어와보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군요.
허접한 인간들, 허접한 트집이지만, 이정서씨 이거 보게 되면 답해주지 그러세요. 스무번을 스무번 이상으로 고쳤다고 이 난린데....
격이 떨어지면 새움지기님이라도 시켜서 말이오.
처음 들어와 보는 사람 괜한 오해도 할지 모르니. 제 보기엔 그럴 이유야 없겠지만 말이오.

  1. 이정서 2014/05/06 08:36 addressedit & delreply

야담님/ 인디님.
날이 찹니다. 어제부터 불현듯 냉기가 대한민국을 덮은 듯합니다. 원통히 간 영령들과 우리들 마음이 모아진 때문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국가의 총체적 부실 앞에 분노가 치밉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처음에 썼던 ‘20스무 번 이상으로 고친 것 맞습니다. 아랍인이 등장한 곳을 밑줄 쳐 보니 20곳이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빼먹은 곳이 한 군데 더 있더군요. indifference 님의 지적대로 몇 군데 더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냥 스무 번 넘게라고 해두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정은 별게 아니라 봤는데, 이조차 함부로 할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인디님, 여러 지적들을 해두셨는데, 여전히 고마운 마음입니다. 바른 지적은 언제든 고치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 드릴 수는 없고, 카뮈가 한 말 하나만 인용해두겠습니다.
-----

카뮈는 갈리마르로부터 자신의 저서를 한 권 받았다. 아직 저자 증정본이 도착하기 전이어서 한 권만 도착했는데, 서평은 그보다 훨씬 뒤에야 도착했다. 그르니에가 그에게 <코메디아>에 실린 아를랑의 서평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지만, 카뮈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서평은 물론 파리의 다른 비평들을 접하지 않았다. 한 가지 그가 확인한 사실은, 언론에 게재된 서평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덕성이라는 관점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카뮈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불쾌한 심사를 기록했다. “책 한 권을 쓰는데 3년을 바쳤는데 겨우 다섯 줄로 조롱거리가 되다니...... 게다가 인용까지 잘못되었다.”

그는발송할 생각은 없었지만비평가들 중 한 사람 앞으로 보내는 편지 초안을 썼다. 그 익명의 서평자는 <이방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고 중요한 사항을 전혀 몰랐다. 주인공이 자신의 일면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이었다. 카뮈가적게 말하려고했기 때문에 서평자는 그 책을 부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주인공을 무기력한 인물로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작가는 그 비평가에게 한 권의 책이 국가에 이바지하거나 저해한다고 말할 권리가 없다고 강변했다.
카뮈는 보내지 않은 그 편지를 이렇게 끝냈다.

또 다른 오류를 범하지 말기로 하자. 나는 불행한 작가가 아니고, 이 편지를 발표할 생각도 없다. 비록 오늘날 그러기는 쉬운 일이지만 당신은 잡지에서 내 이름을 자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할말도 없거니와 나 자신을 상술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몇 해 걸려 작업한 원고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렇게 한 유일한 이유는 그 원고가 완성됐기 때문이며, 현재 그 다음에 이어질 원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_
허버트 R 로트먼 지음, 알베르 카뮈 자서전 중에서


    • 고마해라 2014/05/06 09:03 addressedit & del

이정서씨 딴 말씀 하지 마시고, 답변을 주세요. 비겁하십니다.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정서씨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일입니다.

묻습니다.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한국에서만 이방인이 그렇게 오독되고 있다는 이정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 (물론 이미 밝혀졌지만) 책 수거하고, 사장직 물러나시고, 석고대죄하시겠다는 그 말씀 여전히 유효한가요? 프랑스에서는 까뮈가 죽인 아랍인이 모레스크 여인의 '기둥서방' 혹은 '연인'으로 이해되고 있고, 까뮈의 살인동기가 정당방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정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사기'로 밝혀질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 여전히 유효한 건가요?

. 말씀에 따라, 쪽팔림을 무릎쓰고 갈리마르 출판사에 문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이 이정서씨의 의도와 다를 경우, 문학동네나 민음사와 맺은 판권 운운할 것이 우려되어서, 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따로 문의했습니다. (이정서씨 때문에 아주 망신살이 뻗쳤습니다 그려.) 갈리마르 쪽에서는 아직 답변이 없고(아마 없을 듯 합니다), SEC에서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물론 답변은 충분히 예상하고 계시듯, 이정서씨 사기치지 마시랍니다. 아래는 질의 후 받은 답변 내용입니다. facebook 계정을 통해 문의한 것이니, 이정서씨도 이 계정을 통해 저 답변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서씨 말대로,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이죠.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왜곡했다고 할까봐. 다만, 이정서씨의 "번역을 고치기 위해 공적으로 무슨일을 해야한다"는 말은 강조하고 싶네요.

Je suis Giovanni Gaetani, administrateur de la page Facebook de la SEC. Cette traduction me semble vraiment bizarre et je crois que il faut faire quelque chose pour la corriger publiquement.

    • 나도 출판인 2014/05/06 09:19 addressedit & del

아니, 지금 프랑스가 몇신겨? 댓글 단 시간보니 이정씨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 달았네? 왜 이젠 안 나오겠다더니? 24시간 대기중이구만... 허허 도대체 이기언씨하고 뭔 관계야? 하는 짓이 애 같으니, 자식인가? 원 참나... 내가 다 화가 나네... 이 사람아 누군진 모르지만 나이값을 좀 해. 난 불어를 모르니 잘난체 하지 말고... 불어 몰라도 하나도 안 창피하니까. 쯧쯧.

    • 고마해라 2014/05/06 09:25 addressedit & del

지금 2 21, 이제 자려고. 내 직업이 좀 그래. 우리 어린이, 불어 못한다고 창피할 거 없어요. ? 읽지 못하니까 분해서 그래요? 미안해요. 깍꿍. 그런데 번역하기 나도 귀찮고. 이제 자야할 시간이라서요. 미안. 어린이. 낼 봐요.

    • indifference 2014/05/06 10:02 addressedit & del

이정서 씨가 돌아오셔서 깨끗이 사과할 줄 알았으나, 그런 것 같지 않아서 다시 댓글을 답니다.

아무 말 없이 ‘20스무번 이상으로 고친 것에 제가 화가 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창한 게 아니라 제가 원래 남긴 댓글이 매우 이상해집니다. 이정서 씨 글이 수정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괜한 지적을 한 것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둘째,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명 없는 수정은 논의를 어렵게 만듭니다. 필요에 따라 소명 없이 수정을 가하면, 원래 비판자들이 제기했던 논점이 흐려지고 애매해집니다. 추후 논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에게 장벽으로 작용하기 마련이고, 이미 논의에 참여하던 사람들을 더 지치게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SEC 관련된 것입니다.

우선 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SEC’, 카뮈 연구회)는 그냥 일개 단체가 아니라 1982년부터 설립되어 플레이아드 편집자 등을 포함한 카뮈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연구회입니다. 고마해라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갈리마르 출판사가 작품 해석의 문제에 답할 것 같지는 않고, 만약 답을 받는다면 SEC으로부터 답을 받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 시비를 무릅쓰고 번역해놓습니다.

저는 SEC의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인 Giovanni Gaetani입니다. 그러한 번역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무슨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indifference 2014/05/06 10:14 addressedit & delreply

이정서 씨에게 다음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부탁합니다.

1. 20
세기 초의 'Arabe' 'Mauresque'가 다른 인종이라는 근거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2.
레몽이 정부를 때린 것과 관련, 반과거 시제가 반복의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에도 그 때가 레몽이 처음으로 때린 것이라고 이해한 근거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3. <
이방인>에 대한 이정서 씨의 해석과 스웨덴 아카데미(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기관)의 해석이 다른 까닭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
이방인>에 대한 이정서 씨의 번역/해석에 대해 프랑스 카뮈 연구회(SEC)에서 '이상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까닭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 나도 출판인 2014/05/06 10:20 addressedit & delreply

인디하고 고마해라, 지금까지 둘이서 서로 묻고 답하고 칭찬해주고 별 쑈를 다하더니, 이제 아주 막장이구만, 난 불어를 모르니 우리말로 해봐요,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뭐라고 물어봤는데? 매 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번역이 도대체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이야? 혹시 김화영 교수걸 두고 그렇다는 거야? 앞에 원본 대조해놓은 걸 보면 불어를 몰라도 김화영 번역이 잘못됐다는 걸 알겠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유식한 댁들도 이정서씨 번역 어디가 어떻게 어떤 단어를 잘못 옮겼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그걸 지적하면 되지 무슨 변죽만 올리고 있어?
출판인들 다 바보로 알아요?

정말 이건 공적인 조치가 필요한 거 아닐까요? 불문학 교수님들...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고만 계실 건가요? 당사자인 김화영 교수는 왜 침묵하고 있는 거요? 우리나라 불문학자 하나도 없어요? 영문학하는 김욱동 교수한테 불어 소설 <이방인>을 오역이요 아니오? 물을 정도라니? 언제는 이정서씨보고 영문판 참조했다고 그 난리더니, 영문학자한테 오역이냐 아니냐를 묻질않나? 당신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오?

이정서씨한테 부탁드리는데, 영문판도 좀 올려주시오. 답답하니...

    • indifference 2014/05/06 10:24 addressedit & del

일단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프랑스어를 모르시는데 어떻게 원본 대조를 통해 김화영 씨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셨나요? 이정서 씨가 'limite' ''이 아니라 '경계'라는 의미라고 하면, 프랑스어를 몰라도 ''이 잘못된 번여기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나요?

    • 나도 출판인 2014/05/06 10:36 addressedit & del

~ 답답하네, 그건 그냥 끝이라고 합시다. 지금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알면서 그러는 거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까지 이상해지네. 그만 난 나갑니다. 계속 그러고들 있으쇼.
, 원본대조는 앞에 글 두 편만 봐도 다되어 있네요. 좀 글이라도 읽고 책이라도 보고 하든가.

    • indifference 2014/05/06 10:54 addressedit & del

물론 이정서 씨 글에는 프랑스어 원본와 한국어 번역본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출판인님이 프랑스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뭐가 맞는 번역인지 판단할 수 있냐는 겁니다. '딱 보면' 아나요?

    • 나도 출판인 2014/05/06 11:06 addressedit & del

또 들어오고 말았는데... 인디님, 기본적으로 소설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정서씨 쓴 글 중에 김화영 번역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인물중심으로 지적한 글이있어요? http://saeumbook.tistory.com/405

정말 훌륭한 불문학 교수가 되시려면 다만 불어를 잘하는 것보다 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뒤따라야할 거예요.
소설에서 인물에 대해 잘못 해석하면 그건 다틀린 거에요.
꼭 한번 읽어보길 바라요.

    • indifference 2014/05/06 11:14 addressedit & del

그래서 왜 이정서 씨가 레몽이라는 캐릭터를 잘못 이해했는지 저 위에 매우 긴 반론을 펼쳤습니다. 특히 이건 캐릭터 '이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문법에 대한 번역 '오류'까지 수반한다는 점을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 나도 출판인 2014/05/06 11:31 addressedit & del

완전 쇠귀에 경읽기구만, 뭘 기대했든 내가 잘못이지. 에이구... 이정서씨 혹시 보게되더라도 더이상 상대하지 마요. 지금 이글 지우고 나가고 싶지만 이정서씨를 위해 잠시 살려나요. 출판사 임의로 지우던가... 나는 진짜 아웃!

  1. 독자 2014/05/06 11:28 addressedit & delreply

정말이지 어쩌다가 이 댓글 흐름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죄로 어제오늘 참 분노를 느낍니다. 열개의 질서정연하고 인내심 많은 글과 한개의 개소리가 나란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한 걸 목격합니다. 세상이 참 해괴하게 돌아가고 여기가 그 여실한 축소판이네요. 나도 출판인인지 뭔지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이정서 씨가 그때그때 조리가 부족하면서도 매우 조리 있는 체 상황논리의 파도를 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인의 이방인 이해를 이정서 씨가 아주 새롭고 해괴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겠다고 설치니까 그게 절대 아니라고 몇분이 보다못해 나선 거 아니었습니까? 너무나도 설득력있게 이정서 씨의 착각을 바로잡아주고 근거를 제시해주었습니다. 이정서 씨는 참으로 의뭉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네요. 자신이 벌어들인 질문에 제대로 응하세요!

  1. indifference 2014/05/06 11:44 addressedit & delreply

일부 단어 번역이나 문법적 오류는 모두 지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어쨌든 이정서 씨의 캐릭터 이해는 정확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들께.

<
이방인>에 묘사된 레몽이라는 캐릭터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정부를 피가 나도록 때리고, 복수에 여념하고, 또 때려서 경찰 조사까지 받는 인물이 바로 레몽입니다.

'
농락'당했다고 이런 행위들이 모두 정당화되나요? 자기를 농락한 사람을 피가 나도록 구타하는 것이 악의가 없고, 순진한 것인가요? '독자님'은 이정서 씨의 작품 이해가 너무 한국적이고 마초적이라고 평가하시는데, 저도 십분 공감합니다. 한말씀님도 이 부분을 똑같이 지적하고 계시지요.

이정서 씨는, 만약 레몽이 양아치라면 과연 뫼르소가 그와 같이 다녔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런 반문에서, 이정서 씨가 과연 뫼르소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뫼르소는 자신의 안전이나,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 관념에 신경을 쓰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레몽의 인품이 안 좋다고 레몽과 친하게 지내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레몽과 뫼르소가 친하다는 이유로 레몽이 악질이 아니라고 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

제가 이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정서 씨의 '해설'을 보고 자기가 여태까지 <이방인>을 잘못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통탄해하는 리뷰들이 지금도 올라옵니다. 이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beatle 2014/05/06 12:58 addressedit & del

구구절절 동감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번역이란 생각이 든 결정적 지점이 바로, 레몽 캐릭터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 신념이 남달라 레몽을 멋진 사나이로 보는 독자야 어딘가 있을 수 있겠지요..만 애초 그런 필터의 번역은 좀 무섭군요. 하지만 indeffe..님 말씀대로 아무리 순화해서 묘사해도 레몽은 질이 안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이죠.

'
바른 지적에 대해선 언제든 고치'는 것 보다는 더 엄중한 책임이 뒤따라야할 것 같습니다. 역자 본인이 외친 '답은 하나다' '속았다'에 대한.

  1. 새움지기 2014/05/06 12:46 addressedit & delreply

indifference, 새움지기입니다.

독자님들의 리뷰는 막연히 '해설'을 보고 올리는 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부분 '본문 속 좋은 문장'을 인용하고 있으니까요.
그간 <이방인>을 읽으면서,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이방인> 속 카뮈의 문장들에 감동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써보게 되는 리뷰가 아닐런지요.

또 처음 읽는 독자들은 그들대로, 내용과 그 인물들에 대해 이해가 되면서 뭔가 자신이 느낀 가슴 속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리뷰를 쓰는 게 아닐런지요?

출판사의 책임있는 자세 운운하셔서, 결국 연휴중에 메시지 남깁니다.

레몽에 대한 김화영 교수님의 오해에 대해서는 역자님이 이미 다 한 이야기지만, 못보신 분들을 위해 다시 정리해 올리겠다고 하십니다.

indifference
님 때문에 또 한편의 글을 쓰게 된 셈인데, 역시 필요한 작업이라고도 하시면서, '고맙다'는 말도 전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좀 쉬시는 건 어떠실지(이건 진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이건 하기가 참 힘드네요 ㅠ).

    • 지나가다 2014/05/06 12:50 addressedit & del

새움지기에게 물어요..
이방인 사태에 관련해서 사장은/역자는/이대식은/이정서는 '새움지기'라는 아이디로 글을 쓴 적이 없나요?
아무리 봐도 사장 같은 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어이가 없네요.
그리고 연휴 끝날 때까지는 말하지 않는다던 사장과 새움지기는 왜이렇게 자주 등장하죠?

    • 공현 2014/05/06 12:54 addressedit & del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 김화영교수가 레몽을 어떻게 오해했느냐가 아니고 이정서님이 레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괜히 초점이 어긋난 글을 쓰시느라 시간을 허비하실까봐 말씀드려봅니다 ^^;;

    • 지나가다 2014/05/06 12:59 addressedit & del

초점에 어긋나지 않게 삽질은 하지 말라는 거지요.
상대가 초점을 흐리는데 초점에 어긋나지 않게만 대응해주는 건 너무 신사적이지 않나요?
사실 이방인 번역문제가 이렇게까지 온 건 초점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사장이 저질러온 비도덕적인 행태 때문 아닐까요?
이제 와서 논쟁을 접하는 독자들도 있을 텐데, 그 원인은 알고 있어야죠.
사장이 계속 말을 번복하는데, 지금 상황만 보고는 왜 이러는지 이해도 못할듯요.

    • 공현 2014/05/06 13:01 addressedit & del

아 제 댓글은 새움지기님께 남긴 답입니다. 이정서님이 김화영교수의 래몽에 대한 오해라는 현재 쟁점과는 거리가 있는 글을 쓰는 헛수고를 하실까봐 걱정되어 남긴 겁니다. 지나가다님의 댓글은 물론 물어볼 만한 이야기지요. 저도 종종 궁금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이번 논쟁을 지켜보고있는 예비독자입니다.
이정서씨나 새움지기님이나 다 알고계시면서도 자꾸 논점을 피해가시려는 것 같아서 한말씀 드립니다. 레몽에 대한 김화영씨의 오해 부분은 이정서씨가 예전에 충분히 설명하셨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읽어보았을것입니다... 공현님 말씀대로 그 부분은 반복해서 설명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지금 이 시점에 대답해주셔야 할 것 무엇인지 알고계실텐데요. 왜 이정서씨와 스웨덴 아카데미의 해석이 다른지, 왜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서 이정서씨의 번역에 대해 이상하다는 평가를 내렸는지에 대한 이정서씨의 의견이 듣고싶습니다. 저번에 누구든 갈리마르 출판사에 확인해봐라, 내 번역이 틀렸다는게 밝혀지면 그 즉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한다고 하셨고 지금 그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지요? 굉장히 중요한 시점입니다.

  1. 후안무치 2014/05/06 12:47 addressedit & delreply

지금에 와서 사장은 '한말씀', '고마해라', 'Indifference'등의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장의 번역을 지적하자 급 건전한 번역비평을 하는 척 한다.
여전히 고마운 마음이고 바른 지적은 언제든지 고치겠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사장이 이런 마음의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들이 그렇게 댓글을 달았을까?
남을 비판하고, 중상모략하고, 노이즈 마케팅만 일삼으면서 자기는 정당하다고 우기던 사장이다.

이방인을 번역한 모든 역자를 무시하고, 읽은 독자를 무시하던 사람이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이유로 남의 번역은 다 틀렸고, 자기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채 카뮈의 <이방인>을 그대로 옮겼다고 주장하던 사람이다.
아니 접신까지 했는데 그러한 사람의 <이방인>에서 고칠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동안의 헛소리는 정말 헛소리였던가?
그냥 헛소리였으니까 미안하고 이제는 건전한 번역비평을 하자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 그래도 건전하게 번역으로 비평해주니까 그동안 자기가 했던 말은 슬그머니 지우고 또 말 바꾼다.
잘못을 인정하면 사장자리도 물러나고 이방인을 폐간시키겠다던 사람이 이제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세월호를 들먹이면서 정당한 척 하지 말아라. 누가봐도 제일 정당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여기 있지 않느냐?
박근혜도 와서 한 수 배워야 할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 공헌 2014/05/06 13:01 addressedit & del

맞습니다. 이정서(정서는 무슨##)판 이방인은 그의 말대로 수거해서 불태워야합니다.

  1. ㅋㅋㅋ 2014/05/06 12:56 addressedit & delreply

이런 자는 우리 사회에서 격리시켜야함. 타락의 끝을 보여주는자.

  1. 새움지기 2014/05/06 13:10 addressedit & delreply

당신들의 광기가 당신들부터 피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1. 논리적사고 2014/05/06 13:23 addressedit & delreply

다시 도덕성이 문제가 되는군요. 어쩔 수 없겠으나 관전하는 사람으로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위의 새움지기님께 묻습니다.
역자는 자신의 번역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갈리마르에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라고 합니다.
그런 일을 누가하겠어, 그냥 제스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글은 수정되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저장해두었는데,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군요. 아래 그대로 인용합니다.

실제로 논쟁을 하던 분인 고마해라님이 SEC(1982년에 설립되어 플레이아드 편집자 등을 포함한 카뮈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연구회)에 문의했다는군요. 광기라면 광기겠으나, 본인이 이기언 교수라고 역자에게 직접 내몰리고, 이어서 다른 사람이 쓴 글도 본인이라고 남들이 우기는데 이런 식의 지적 해명은 매우 건강한 광기라 생각됩니다.
결국 SEC에서 이름을 달고 공개적으로 대답한 것을 Ind님께서 번역해주셨고요.
"
저는 SEC의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인 Giovanni Gaetani입니다. 그러한 번역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무슨 조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자라고 하여고 전문 연구회가 더 공신력 있는 건 말할나위도 없지요.
여기에 대하여 이정서씨의 대답이 궁금합니다.
사과를 하든, 말을 바꾸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든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광기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독자에대한 결례입니다.
외국에선 한국 불문학계의 수준을 어느정도로 생각할까요? 이런 걸 정말 질문이나 하게 만드는 출판사라니!
이에 대한 정확한 해명 바랍니다.
글을 이미 지웠으니 상관없다는 식의 답변은 모두를 실망시키게 할 것입니다.

아래는 지워진 역자의 말 인용부분입니다.

(
역자의 글 수정 전 부분)
당장이라도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저 위의 1안과 2안을 불러주고 나서 어느 것이 카뮈 <이방인>의 내용이냐고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출발어니 도착어니 하며, 번역의 문제 운운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그 질문을 들은 편집자는 아마도 교수님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독특한 놈'도 다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확인 결과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 출판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따른 법적 책임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지워졌다는게 뭐죠? http://saeumbook.tistory.com/440

3.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단지 태양 때문인가? 하는 문제.

교수님, 일단 한번 거기까지의 소설 상황을 짧게 정리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번역서(김화영 교수님을 비롯 기존 번역자들 모두가 그러하지만)를 정리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1. ‘
이년 저년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생양아치 같은(포주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인 여자를 피가 나게 때리고 쫓아낸 뒤, 그에 앙심을 품은 그녀의 오빠가 레몽을 해치기 위해 바닷가까지 따라와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뫼르소는 질이 안좋은 레몽이라는 사내의 요청에 따라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레몽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인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다가 우연히 그 사건에 연루되고, 해변에서 다시 우연히 그 여자인 오빠라는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뜨겁게 내리쬐는태양 때문에총을 쏘았다. 뫼르소는 이후에도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연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아 그 자리에서 사내를 확실히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태양 때문에그랬다고 대답한다.



어떠신지요? 교수님이 번역하신 그대로의 내용이 맞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냉정하게 한번 보십시오. 이게 소설이랄 수 있는지.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기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요? 모든 게 우연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저대로라 해도,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때리게 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저기엔 아예 그런 설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레몽이라는 사내가 생양아치라 이유도 없이 여자를 구타했다가 되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처음으로 손을 댔다네가 나를 농락했어. 네가 나를 농락했다구라고 레몽이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수님을 비롯한 기존 번역에서는 이농락의 이유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기 등장한 남자가 그냥 여자의 오빠라면, 카뮈가 친절하게복권전당포등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뮈는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뫼르소만 알고 있다는 암시를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해둡니다. “(레몽)가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무어 여자임을 알았다.”(본문 93)는 뫼르소의 독백은 그래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카뮈는아랍인무어인이라는 태생적 차이를 가지고 분명하게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교수님을 비롯한 기존 번역서들은 이점을 어떻게 처리하고 계신가요? 어찌된 일인지 모두 한결같이 이 점도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뫼르소는 왜 굳이 해변까지 마리와 함께 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레몽이라는 사내가 저렇듯 생양아치에, 포주에,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라면, 과연 저 이성적인 뫼르소가 자신의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의 오두막까지 따라와서 유쾌한 해수욕을 즐기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요? 마리 역시도.

마송과 레몽 그리고 나는 비용을 분담하여 8월을 함께 해변에서 지낼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Masson, Raymond et moi, nous avons envisagé de passer ensemble le mois d’août à la plage, à frais communs.)” (본문 77)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교수님이나 김화영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정황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시 그래야만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독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본문 164)



이제 제가 읽은 <이방인>은 어떤지 보겠습니다.




2.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그에 앙심을 품은기둥서방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변까지 따라오고, 친구인 레몽을 따라 여자 친구와 함께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던 뫼르소는, 이들의 싸움에 연루된다. 급기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아왔던 뫼르소는 그곳에서 그 아랍사내와 마주치게 되고, ‘시뻘건햇볕을 피하기 위해 샘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오는 뫼르소를 보고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오해한 아랍사내는 먼저 칼을 빼들었고, 다시 뫼르소는태양 때문에눈을 찔러오는 그 칼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약간의 텀을 두고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느꼈던 머리 위 오후 2시의폭발하는 태양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네 발을 더 쏘아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검사가 막 사형을 구형한 뒤였던 것이다),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보다시피 앞쪽 1의 줄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방인>이 아닌가요?(그래서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노이즈가 아니라). 뒷부분은 제 것(2)을 두고 설명하겠습니다.




레몽을 따라 해변가에 놀러왔다 연루된 싸움, 이제 레몽과 아랍인과의 갈등은 해소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혼자 산책을 나왔던 뫼르소는 다시 샘으로 돌아갔다가 친구인 레몽을농락했던여자의 기둥서방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뫼르소는 단지 뜨거운 태양을 벗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누워있는 샘 가까이로한 걸음을 더 옮긴 것인데, 아랍남자는 오해하고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뫼르소의 눈을 후벼 팠기에, 위협을 느낀 뫼르소는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앞의 두 예문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바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 그것이태양 때문이었다는 표피적 이유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렇게 두고봐도, 프랑스인이나 우리나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학적 레토릭을 다르게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모두 외면한 채, 주인공 뫼르소가 우연히악한인 레몽을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다시 우연히 사내와 단둘이 만나게 되자태양 때문에총을 쏘고, 급기야 네 발의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게 교수님을 포함한 기존 번역서들의 일관된 시각입니다(그러고보니 바로 소설 속 검사의 시각입니다).




교수님, 과연 이게 말이 되나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는 주인공이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이유도 없이 그냥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이고 항소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세웠다고 믿었던 법정에서 오히려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부조리한가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을부조리 소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4.

기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이라도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저 위의 1안과 2안을 불러주고 나서 어느 것이 카뮈 <이방인>의 내용이냐고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출발어니 도착어니 하며, 번역의 문제 운운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그 질문을 들은 편집자는 아마도 교수님과는 정반대의 의미로독특한 놈도 다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확인 결과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 출판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따른 법적 책임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저는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신데, 저에 대해 어느 만큼은 알고 계시면서도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많이 불쾌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마치 제가 대한민국의 모든 교수님들과 번역가들을 한꺼번에 부정하고 있는 부도덕한 인간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건 그건 변명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안 사안마다 제 목소리를 낸 것은 변명을 한 게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 자위적 방어를 한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교수님, 설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제가 있는 것도 제게 글공부를 시켜주신 대학의 은사님 덕택이고, 지금의 출판사가 존재하는 까닭도 여러 좋은 역자님들의 도움 덕분인데 말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기존 번역서들의 실수는 바로 앞에서 확인한 듯, 생테스 레몽이라는 인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렇다면 그 시초가 누구일까를 쫓아보니 그것이 김화영 교수님 번역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틀린 걸 틀렸다고, 다른 걸 다르다고 세상에 알려야 했고, 그 사실을 정직하게 띠지의 그 카피에 담아냈던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노이즈 마케팅이 된다는 말입니까.

<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었다>라는 저 카피를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제게 그것은 조금도 과하지 않은 지극히 상식적인 카피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변명이 되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저는 김화영 교수님을 비롯한 앞선 선학들이 일궈놓은 다양한 성취와 성과들을 전부 폄훼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값진 자산들, 그것이 사적으로는 저희 새움출판사도 살찌웠다는 사실 또한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정말이지 어찌된 일인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만큼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있어서는 결코 안 될 실수가 우리 사회에서 빗어졌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실이 어떻게 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던 것이고, 그 순간부터 저는 진실을 알려야 할 의무까지 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셀레스트는 뫼르소를 위한 법정 증언에서 말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불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운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불운입니다(Pour moi, c’est un malheur. Un malheur, tout le monde sait ce que c’est. Ça vous laisse sans défense. Eh bien ! pour moi c’est un malheur.)”(본문 128)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딱 그것인 셈입니다.







5.

이제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독자님들께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한번 연재를 해볼까 합니다. 애초의 블로그 연재가 한 개인에 대한 번역 비평이 주였다면, 이제는 형식을 넓혀, 카뮈 <이방인>의 불문 원문과 더불어 영문, 일문 번역판까지 함께 싣고, 기존의 주요 번역서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기왕 벌어진 <이방인>에 대한 토론의 장을 제대로 펼쳐보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훌륭하신 번역가님들과 교수님들의 조언이 필요한 일입니다. 제 번역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워주신 기라성 같은 댓글러들과 편집자들이 다함께 참여하실 수 있다면 우리 출판계와 번역계, 그리고 순수한 독자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 일일까 생각해봅니다.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게시판에 비아냥조의 댓글들에 저희 출판사 직원들이 개입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 직원들 모두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못 됩니다. 정말 댓글에 개입할 의도가 추호라도 있다면 아예 게시판을 닫아버리면 되지 이렇듯 열어둘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간혹 적절치 못한 댓글들로 인해 마음이 상한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설혹 의견이 다르다 해도 비아냥대는 댓글은 삼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긴 글 접겠습니다.

감사합니다.(14.04.29 아침)






ps.
진지한 토론을 위해 이후 덧붙였던 말은 삭제했습니다(5.2)

뭘 어덯게 물어봤다는 거죠? 본인이 방구석에서 할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뭘 어떻게 물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논쟁을 하던 분인 고마해라님이 SEC(1982년에 설립되어 플레이아드 편집자 등을 포함한 카뮈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연구회)에 문의했다는군요. 광기라면 광기겠으나, 본인이 이기언 교수라고 역자에게 직접 내몰리고, 이어서 다른 사람이 쓴 글도 본인이라고 남들이 우기는데 이런 식의 지적 해명은 매우 건강한 광기라 생각됩니다.
결국 SEC에서 이름을 달고 공개적으로 대답한 것을 Ind님께서 번역해주셨고요.
"
저는 SEC의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인 Giovanni Gaetani입니다. 그러한 번역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무슨 조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자라고 하여고 전문 연구회가 더 공신력 있는 건 말할나위도 없지요.
여기에 대하여 이정서씨의 대답이 궁금합니다.
사과를 하든, 말을 바꾸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든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광기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독자에대한 결례입니다.
외국에선 한국 불문학계의 수준을 어느정도로 생각할까요? 이런 걸 정말 질문이나 하게 만드는 출판사라니!
이에 대한 정확한 해명 바랍니다.
글을 이미 지웠으니 상관없다는 식의 답변은 모두를 실망시키게 할 것입니다.

라고 쓰면, ,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할까요?

    • 논리적사고 2014/05/06 13:38 addressedit & del

아 글이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제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점에 한해서 사과드립니다.

다만 새움지기님이 달아야 할 답변은 그런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안 지웠으니 더 드러나 있네요.
갈리마르 편집자보다도 더 공신력 있는 단체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답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찌 대답하실 겁니까?

    • 논리적사고 2014/05/06 13:49 addressedit & del

아하, 이제는 질문을 제기한 사람도 믿을 수 없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역자는 위에 떡하니 인용한 글에서 누구든 확인 가능하다고 전화걸어보라고 했는데, 그게 일개 아무개면은 또 안되나 봅니다?
그리고 지금 새움지기의 답은 편집자로 답변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역자 스스로가 판단해서 답해야 할 부분을 새움지기라는 이름으로 답한 걸 보니 이는 편집자가 자기 역할을 오버했던지 아니면 역자가 직접 단 거가 확실하겠네요?

그럼 다시 한번 답변 주시기 바랍니다.
골방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불문학자가 직접 문의하면 이제 인정하실 겁니까? 정말 폐기처분 하실 겁니까? 질문에 답한 사람은 어차피 전문가인데 누가 물었는지가 중요한 겁니까?
어떻게 하면 인정하실 겁니까?

    • 어휴 2014/05/06 13:54 addressedit & del

남자와의 의리를 중시하고 자신을 배신한 여자도 배려하는 사려깊은 "창고관리인"인 레몽을 왜 동네 사람들이 다 싫어했을까요?
왜 소설에선 그의 직업인 "창고관리인"을 따옴표로 처리해 표기할까요?

역자의 텍스트해석능력은 뭐라 할말을 잃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 보다못해 2014/05/06 13:54 addressedit & del

논리적사고/ 뭘 어떻게 물었냐잖아? 바보야. 아이디만 논리적 사고 그러지말고. 쪼다야. 에이 천벌을 받을 놈들,!

  1. 후안무치 2014/05/06 13:36 addressedit & delreply

국가에 총체적 부실에 분노가 치민다고 사장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 드나든 사람은 알 것이다. 정작 세월호 사건에 전국민이 힘들어할 때 사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번역이 옳다고 주장하고만 있었다.
정치가도 아닌데 왜 저런 정치적인 멘트를 할까?

어쨌거나 사장은 참 말 바꾸기엔 도사다.
그 이유를 살펴 보자.

1.
그는 분명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라면서 그토록 자신있게 절대번역을 말했다. >> 하나의 해석이라고 말 바꾼다.
(
이 증거는 아직도 덜 고쳐서 남아 있다 : http://saeumbook.tistory.com/405)
번역 연재 내내 김화영을 까다가 수가 틀렸는지, 출판 할 때는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고쳐낸다.
심지어 그는 카뮈가 자신에게 접신했으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까뮈의 글에 가까운 번역을 본인이 했다고 자부한다.
그랬던 그가 여러 사람들의 지적을 받자, 급 공손해지면서 자신은 일개 번역자이니 그저 하나의 해석으로 봐달라고 애걸한다.

2.
사장은 자기의 절대 번역에 금이 가자 뭐라고 했을까? 모든 책을 폐간하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 지적 감사하고 참고하겠다.
자신은 카뮈가 접신해서 번역했으므로 조금의 틀림도 없다고 자부하던 자다. 때문에 자기의 번역이 틀리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까지 말했다. 그런데 그 글은 온데 간데 없이 지워졌다. 말 바꾸기엔 도가 튼 사람이다. 대신에 지적 감사하고 참고하겠단다. 지적 하는 사람들이 사장 겨우 참고하라고 하는 줄 아나? 김화영한테는 절판시키라더니 자긴 참고해도 되나보지?

3. "
처음으로 매우 오래도록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가 정답이다?? >> 물론 아니지 슬쩍 책 내면서 고쳤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 고치기 전의 글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


(
아래 전체 새운 사장 인용)
-------------------------------------------------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은 지 퍽 오래되었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rie. Il y avait de longs jours qu’elle ne m’écrivait plus.

보시다시피 아주 간단한 문장이다. , 그렇다면 위 문장의 번역은 맞는 걸까? 틀린 걸까?
아니 불어를 모른다면, 그냥 우리말로 이 문장은 맞는 것일까? 틀린 것일까? 조금 생각해보자.
.
.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 번역은 틀렸다. 일단 우리말로도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그 자체로 말이 안 된다. ‘오래간만이면 오래간만이고, ‘처음이면 처음이다. ‘오래간만에 속에는 이미처음이라는 시작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둘이 같이 쓰이기 위해서는 각각 지시하는 말이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오래간만에 아팠지만, 처음으로 약을 먹었다처럼. 더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해보자.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엄마를 만났다.” 말이 되는가? 실제로 엄마를 처음 만나는 건 뱃속에서 나와서다. 아무리 오래간만이라도 처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그래서 생각 없이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명백히 비문이다. 지금 옮긴이는 너무나도 간단한 문장이기에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저대로 옮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은 내용 속에 들어오면 더욱 명백해진다.
지금까지 <이방인>을 읽어온 독자라면 뫼르소가 이미 앞서도 마리를 수없이 생각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처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이전의 생각은 단편적이었고 지금은 오래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의 직역은 눈앞의 문장 그대로다.
처음으로Pour la première fois 그 후로depuis 매우bien 오래도록longtemps,’
까뮈는 지금 뫼르소가처음으로마리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매우 오래도록생각했다고 강조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의 올바른 번역은 아래와 같다(depuis longtemps은 오랫동안, 오래도록이라는 뜻의 숙어다. 두 숙어의 순서를 바꾸어 놓아도 뜻은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매우 오래도록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은 지 오랜 나날이 지났다.

커다란 오역은 결코 복잡한 문장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처럼 단순한 문장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다시, 번역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심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진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도대체 나 같은 독자조차 책을 읽다 보면지금 뫼르소가 마리를 처음 생각하는 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의아해지는데, 이 책의 번역자가, 그것도 20년 동안 세 번을 고쳤다는 역자가, 어떻게 저런 걸 의심 없이 저대로 옮기고 지금까지 태연히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 2014/05/06 12:54 addressedit & del

사장 정말 불어 못하나 보네.
사전만 열라게 찾아서 번역하는 거 티 다남 ㅋㅋㅋㅋ
난 이방인 사서 보고 좀 이상하다 했는데, 예전 글 읽어보니 뽀록 아주 ㅋㅋㅋ
pour la premiere fois depuis bien lontemps, j'ai pense a Marie.

이 문장을 두고서 처음엔
"
처음으로 매우 오래도록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
라고 번역하면서 올바른 번역이라고 주장함?
매우 오래도록 생각했다는 강조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장 진짜 불문법도 모른다에 내 왼팔을 건다!

    • ㅋㅋㅋ 2014/05/06 13:03 addressedit & del

누가 한국어도 잘 모른다고 하더라. 이거 전부 남한테 시켰다에 오른팔 건다.

솔직히 영어도 못하는 거지요; 영어라도 할줄 아는 사람이면 아 이게 for the first time in a long time의 불어 equivalent로구나 직관적으로 알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영어라도 아는 보통의 독자들은 어??? 했던 거고요ㅠ

그에 대한 해명도 이미 해놓으셨군요.



마지막 회, 이 땅의 번역자, 편집자들에게

죽음을 앞둔 뫼르소에 빠져 지낸 6개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이방인>의 원고량만으로 치자면 소비한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었고,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마당이라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결코 길다고만은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 번역이 여기까지 온 것은 두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먼저 새움출판사 최하나 편집자의 존재. 최 편집자의 꼼꼼함과 단호함이 없었다면 아마 이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번역의 쉼표 하나까지 살펴서 문제 제기를 해준 그녀는 실상 나보다 훨씬 뛰어난 번역자였다. 하여 우리는 문장을 두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러나 그러한 싸움이 있었기에, 또 한 사람이 찾아들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도저히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내게는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눈앞의 편집자조차 설득하지 못할 번역이라면, ‘그 따위로 세상을 이해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게 최 편집자와 싸우고 난 날이면, 나는 도저히 연재 글을 올릴 수 없었다. 눈앞의 한 사람도 제대로 설복시키지 못하는데, 수십 년 최고의 권위자로 추앙받아 온 저분의 번역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고 난 다음날 새벽, 혹은 주말의 어느 순간이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깨를 툭 치며 말하곤 했다. "그건 이렇게 보지 그래". 그의 말을 듣고 불현듯 다시 문장을 보면, 거기, 왜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단어가 쓰여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그러한 말들이 결코 이 작품의 작가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조언들이었다는 데 있다(그렇다, 라는 것은 다음날 최 편집자의 표정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치 챘겠지만, 그렇게 나를 찾아와 주었던 이는 바로 알베르 카뮈였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이,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 걸 어쩔 것인가. 그리하여 이 번역은 마침내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두 사람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여러분이 계시다. 연재 와중에 연재의 취지가 왜곡될 수도 있었던 논란이 몇 번 있었다. 그때 자기 일처럼 개입하여 제 길을 바로 잡아주신 분들, 그분들의 댓글은 정말이지 내게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이제 연재를 마칠 시간이다. 그러나 이 자리가 김화영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는 자리이니만큼, 이번 회 역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오역들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지적하고 마무리하겠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김화영 번역)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 Elles annonçaient des départs pour un monde qui maintenant m’était à jamais indifférent.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man.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으로, sirènes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경계, sirènes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 이 문장의 바른 뜻은 이렇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졸역)





ps.

그런데 눈 밝은 독자라면, 명성과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문장을 볼 줄 아는 번역자,편집자라면, 다시 여기서 마지막 문장에도 눈이 갔을 것이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30
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바로 그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 대한 김화영 번역오래간만에 처음으로를 지적하면서, 그 자체로 말이 안 된다. ‘오래간만이면 오래간만이고, ‘처음이면 처음이다. ‘오래간만에 속에는 이미처음이라는 시작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둘이 같이 쓰이기 위해서는 각각 지시하는 말이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오래간만에 아팠지만, 처음으로 약을 먹었다처럼. 더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해보자.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엄마를 만났다.” 말이 되는가? 실제로 엄마를 처음 만나는 건 뱃속에서 나와서다. 아무리 오래간만이라도 처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그래서 생각 없이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명백히 비문이다. 지금 옮긴이는 너무나도 간단한 문장이기에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저대로 옮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은 내용 속에 들어오면 더욱 명백해진다.
지금까지 <이방인>을 읽어온 독자라면 뫼르소가 이미 앞서도 마리를 수없이 생각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처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커다란 오역은 결코 복잡한 문장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처럼 단순한 문장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다시, 번역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심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진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도대체 나 같은 독자조차 책을 읽다 보면지금 뫼르소가 마리를 처음 생각하는 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의아해지는데, 이 책의 번역자가, 그것도 20년 동안 세 번을 고쳤다는 역자가, 어떻게 저런 걸 의심 없이 저대로 옮기고 지금까지 태연히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문학은, 모로 가도 로마만 가면 된다는 말로 덮어질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우리가 신뢰하고 아름다워하는 것은 태초로부터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에 붙박여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것이 아무리 번역이라 해도, 창조자의 안내대로 소로와 대로와 바닷길을 따라 로마로 진입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같다고 해서 결코 같은 작품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고 했었다. 그러자 반론자들은우리말로는 말이 안 되지만 프랑스에서는 관형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우리말 번역이니, 불어 문법이 조금 어긋나더라도 의미를 맞추고 싶었고, '처음으로 오랫동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정말이지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그것을 쓴 작가만이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에 대해서는 카뮈로부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결국 이것은 역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의미를 따를지, 문법을 따를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라고 썼었다.





------
그런데 이 마지막 문장의 바른 해석이 정말로 '카뮈로부터 답지'한 것은 출판사에서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절묘했던 순간을 이 자리에 옮겨 적기에는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것은 분명 카뮈가 내게 보내준 마지막 메시지였지만, 자칫 잘못 설명하면 아주 우스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Pour la première fois '또다시(처음으로)인 것이고, depuis bien longtemps,와 붙어 '아주 오랜만에 다시, 엄마를 생각했다'가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우리말을 두고 나를 비롯한 저 뛰어난 역자들, 논쟁자들 역시 왜 그 긴 시간동안 엉뚱한 곳만 더듬고 있었던 것인지,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마지막 메시지는 이 연재를 따라 읽으며 격려했던 네티즌들과 논쟁에 참여했던 재야의 고수들에게 주는 알베르 카뮈의 마지막 '감사 인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더불어 나역시 그분들께, 더불어 까뮈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Merci(감사합니다)!



번역은 정말이지 이처럼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다(나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고된 수고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최 편집자를 비롯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애쓰고 계신 번역자, 편집자분들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것은 한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자는 작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동세대 우리 모두가 대를 이어 <벌거숭이 임금님> 속 어른들이 될 수도 있다는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제라도 그것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바로, 명성과 권위에 앞서문장을 볼 줄 아는 여러분들일 것은 명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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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본문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나는 꿱꿱 소리 지르기 시작했고, 그를 모욕하며,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칼라를 움켜쥐었다. 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환희와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는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실성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나는 마치 빈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그가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삶을, 다가올 이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진실이 나를 꼭 움켜쥔 만큼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건 하지 않았으나 또 다른 건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이 모든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이 이른 새벽을,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다려왔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겠다. 그도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살았던 부조리한 삶 내내, 내 미래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서 어두운 바람이 내게로 거슬러왔다. 그 바람은 이 여정에서, 내가 살았던 시간보다 더 사실적일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당시 내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그만그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이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사랑이 내게 뭐가 중요하며, 그의 하느님이나 우리가 택하는 삶, 우리가 정하는 운명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단 하나의 운명만이 나를, 나 자신을, 그리고 나와 함께 무수한 특권자를 택해야 했는데, 그리고 이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형제라고 스스로 말하는데. 그러니까 그는 이해할까? 모든 사람은 특권자라는 것을, 특권자밖에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선고를 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는 그의 아내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그 작은 로봇 여자는 마송과 결혼한 파리여자처럼 또는 내가 결혼해주기를 원했던 마리처럼 죄인인 것이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제 마리가 그녀의 입술을 새로운 뫼르소에게 허락한다한들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는, 그러니까 그는 이해할까, 이 사형수는, 내 미래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그 모든 외침이 나를 헐떡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나의 손아귀에서 부속사제를 떼어내고, 간수들은 나를 위협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돌아서서 사라져 갔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나는 잠들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얼굴 위의 별과 함께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떠올라 왔다. 밤과 땅, 그리고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식혀 주었다.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게로 흘러들었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쫒아내고, 희망을 비워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1. indifference 2014/05/06 13:58 addressedit & delreply

새움지기님. 이정서 씨의 번역이 마음에 들어서 리뷰를 올리는 독자들도 물론 있고, 이정서 씨의 '해설' 덕분에 '착각'에서 벗어났다고 리뷰를 올리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여기 댓글 다는 일부 사람들도 이정서 씨의 '해설'만이 맞다고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태에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레몽을 '양아치'로 이해하는 게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엉터리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인디님/ 분명히 레몽에 대한 오해 부분 글 올리시겠다고 말 전했습니다. 위의 개인 명에에 관한 것,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는 것 임의로 삭제하겠습니다. 밑에 글도 포함 인디님 것은 그냥 두겟습니다.

  1. indifference 2014/05/06 14:02 addressedit & delreply

새움지기님,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 레몽의 정부와 그 아랍인의 혈연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겠습니다. 만약 저의 이메일 중 표현에 이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견을 반영해서 메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Chère 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

Bonjour, je m’appelle ________, et suis lecteur de Camus en Corée du Sud.

Récemment, L’Étranger d’Albert Camus a été traduit à nouveau en coréen, avec une publication provocante, proclament que l’interprétation de L’Étranger jusqu’à maintenant n’aurait été qu’une succession de malentendu et que seul ce nouvel édition serait capable de transmettre les « véritables » idées de l’auteur. Cet incident a causé un scandale et un assez sévère débat sur ce sujet qui continue encore.

Ce traducteur coréen, Jeongseo Lee, affirme que la maîtresse de Raymond et l’homme que Meursault a tué ne seraient pas frère et sœur. Comme Camus appelle l’homme mort l’ « Arabe » et la maîtresse la « Mauresque », ils ne seraient pas de la même « race » donc, pas frère et sœur.

Choqué par cette interprétation (d’ailleurs raciste d’une sorte), je voulus vérifier les travaux et les recherches sur Albert Camus ou L’Étranger accessibles en Corée. Résultat, l’homme que Meursault a tué est bien le frère de la maîtresse. Camus utiliserait le terme « Mauresque » pour indiquer une femme arabe d’Algérie. Voulant tout de même éviter une faute de lecture, je vous envoie ce courrier électronique : pour vous demander si ma compréhension serait correcte.

Ce courrier électronique semble ridicule, j’en suis conscient. Cependant, pour une compréhension exacte de L’Étranger, et aussi parce que Jeongseo Lee refuse d’admettre la relation familiale entre ces deux personnages sans la vérification d’une personne ou organisation autorisée, je vous demande avec tous mes respects, la moindre réponse possible.

Sincèrement, merci.

  1. 새움지기 2014/05/06 14:09 addressedit & delreply

그러네요. 괜히 말려들지 말라는 주위 충고를 무시하고 또 말려들고 말았네요. 저는 내일 어떻게든 역자님과 편집부를 설득해서 이런 백해무익한 댓글들을 달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할 겁니다(아니 지금부터 막겠습니다). 당신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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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05-0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댓글 삭제하고 아예 막아놓겠다는거군요. 처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babonara1234 2014-05-06 19:57   좋아요 0 | URL
본문 대부분을 캡쳐했는데, 지금 와서 비교해보니 이미 자신이 불리한 부분은 많이 가공했네요. 거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이제 와서 없다는 게 문제...
엔하위키에까지 등장할 사건이었나봅니다.
http://mirror.enha.kr/wiki/%EC%9D%B4%EB%B0%A9%EC%9D%B8#s-3.1

라나 2014-05-0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즈 마케팅에 목적이 없었다고 출판사측에서 주장하지만 이렇게 보니 신빙성이 전혀 없어보입니다. 출발어는 물론이거니와 도착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보이고, 작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나만 옳다 주장하는 독단.. 카뮈를 접신했다는 주장은 읽을 수록 어이가 없네요. 카뮈로 분장한 귀신이라도 보셨나봅니다. 본인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세월호 사건으로 방향을 돌려버리려고 하거나, 불리한 반박이 나오면 진술을 은근슬쩍 바꿔버리는 태도...사실 "백해무익한 댓글"들은 이정서 씨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썼죠. 저렇게 질 낮은 옹호들만 눈에 보이시는 건지, 원. 앞으로 번역하겠다고 안 나서시길 바라요. 이미 출간된 책에 대한 비판에 귀를 막고 새 책을 내려는 출판사의 책, 더는 사 보고 싶지 않네요.

babonara1234 2014-05-06 19:59   좋아요 0 | URL
제일 큰 문제는 토론하는 장소가 출판사 홈페이지였어서 공정성에 이미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과도한 비판과 자기방어에 독자들이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고요.

충격받은독자 2014-05-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연휴 마지막날 오후 일곱시 현재
새움측에서는 고마해라님이 단 댓글 (페이스북을 통해 sec에 문의했던 글과 그에 대한 답장이 사실 일부라고 하심)을 싹 지우고

새움지기 19:01
아주 발악들을 하고 계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전번처럼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이일로 무슨 말을 만들어 욕을 하든 말든 상관않겟습니다. 어차피 그래왔던 분들이니까. 다만 인내도 한계가 있는 법 조금더 이런식이면 그나마 있는 댓글도 다 삭제시키겠습니다. 이후로의 댓글은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지울 참입니다. 물론 당신들처럼 상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지워드리죠. 바퀴벌레 박멸하듯. 그런 의미에서 위에 하나 지웁니다.아니 바퀴 한 마리잡습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들 계시는데 여기는 저희 블로그입니다. 손님으로 오셨으면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셔야하겠지요. 아무튼 어느곳에건 기묘한 방식으로 댓글을 다시든 다 좋은데, 여기에서만큼은 이제 하나가 달릴때마다. 그것은 물론 그에 상응해 2개씩 지워나가겠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말도 없이 지웠다고는 하지 마세요.

이런 댓글을 다셨네요. 이건 좀 너무하다 생각이 듭니다. 인디프런트님이든 한말씀님이든 고마해라님이든 상대를 바퀴벌레라고 하지는 않았던거 같고, 하다못해 요새 세상에 인터넷쇼핑몰 정말 영세한 데서도 이 옷이 사진과는 약간 다른 색감이다 비친다 같은 후기 쓴다고 마구 지우고 하진 않아요; 그러면 막 엄청 분쟁나고 그럼... 명색이 출판사이고 하니 그정도 상도는 기대했던 제가, 바보같네요 정말.

babonara1234 2014-05-06 20:33   좋아요 0 | URL
저도 바퀴벌레 댓글은 이제 확인했네요.
전 출판사나 문학계의 권력은 하등 아는 바가 없지만,
사장의 행태를 보고도 끼어들어서 싸울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바퀴벌레 댓글도 그새 정정해서 점잔은 척 하고 있네요.
혼자서 일인다역하는 게 훤하게 보이는데 참 바쁘실 것 같아요 이분.

바꾼 댓글도 달아둡니다. 진짜 아전인수격이네요.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어대던 분들, 24시간 상주하던 님들, 뭔가 크게 착각하고들 계시는데 여기는 저희 블로그입니다. 손님으로 오셨으면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셔야하겠지요.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이글부터 보시고 하든 말든 하시고, 말도 없이 지웠다고는 하지 마세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하시던 일들 하세요. 세상이 <이방인> 하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귀한 시간들입니다.

이글조차 다시보니 기분이 나빠지네요. 보실 분들은 보셨다고 보고 조만간 삭제시키겠습니다.

ps.
알려주신 알라딘 글 가서 잘 보았습니다. 이제 거기가서 노십시오.

라나 2014-05-0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추가된 댓글도 가관이네요... 24시간 상주라니 알바생들로부터 공격받고 있다고 혼자 착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이 논쟁에 관심이 있어서 스마트폰으로 틈틈히 확인하곤 했는데 그랬던 제가 바보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은 단순히 논쟁을 위한 책 한 권의 가치 밖에는 되지 않았던 건가봐요. 세상은 이방인 하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니, 어떤 학자들은 그 책 한 권 연구하느라고 일생을 다 바치기도 하는데요. 정말 이 책에 애정이 있어서 번역을 했는지조차 의구심이 듭니다. 뭐, 이 또한 노는 사람의 덧글로 받아들여지겠지만요.

babonara1234 2014-05-06 20:18   좋아요 0 | URL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많은 시간을 뺏긴 건 사실입니다.
일하면서 틈이 나면 처음엔 재미로 계속 구경을 했고, 나중엔 짜증이 나더군요.
계속해서 댓글이나 본문을 조작하는 게 어이가 없어 후반부에는 모두 캡쳐해 둔 상태고요.
저나 릴로님 같은 모든 사람을 24시간 상주 알바생으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사장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수 많은 24시간 상주 알바생들보다도 더욱 정열적으로 댓글을 다는 분이니까요.

babonara1234 2014-05-0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이방인 댓글 논쟁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번 사건에서 새움 사장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생각해봤습니다. 다른 부분은 제껴두더라도 직접적인 명예훼손 대상이 한둘이 아니었죠.

1. 김화영 - 애초에 문구가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김화영이 '추후 참고하겠다'라고 하니까 아예 폐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미 수정함.
2. 이기언 - 댓글러 고마해라를 이기언교수라고 명예훼손함. 이후엔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교수라고 부르겠다고 함.
3. 로쟈 - '로쟈 유감'이라는 글에 치졸한 비난이 가득했으나 이미 수정함.
(http://saeumbook.tistory.com/429)
4. 한겨레, 경향신문 등 기자들 - 악의에 가드간 편향된 기사를 썼다고 곡해.
5. 해고당한 편집자 - 본인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 했다는 이유로 해고하고, 이후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기자들이나 로쟈 등에게 첩보했다고 명예훼손.
6. 고마해라 - 위에서 말했듯이 이기언이라고, 자기만 보는 방법이 있다고 우겼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꿈.
7. 장정일 - 한겨레를 통해 독자로서 새움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한물 간 늙은이 취급 당함.
8. 카뮈 - 본인이 카뮈와 접신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이방인'번역을 했다고 명예훼손.
9. 독자 - 우리 모두가 당했음.


이 모두에 대해 사장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미미 2014-05-0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abonara1234님, 제 서재 이방인 관련 리뷰에 어떤분께서 이 삭제된 댓글들을 붙여주셔서 이렇게 찾아와 보았습니다.
그동안 indifference님, 한말씀님, 고마해라님께서 제시하신 의견들을 감명깊게 읽었고 그 의견에 대한 이정서씨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새움출판사의 비겁하고 졸렬한 대응과 '바퀴벌레' 운운 댓글까지 보고나니 충격이 너무 크네요. 바퀴벌레라니,, 과연 출판사 관계자가 독자들을 (건전한 반론을 제시한 독자들) 이렇게 칭할수가 있나요?

특히 고마해라님은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 이정서씨의 번역에 대해 문의를 하시고 '이정서의 번역은 이상하다'는 답변까지 받으셨다던데.. 이정서씨는 그에 대한 답변 대신 고마해라님의 댓글을 삭제하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indifference님도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 관련 메일을 보내 문의하겠다고 하셨는데,오늘 그 댓글을 삭제하고 더이상의 댓글을 못달게 해놓은 것으로 볼때, indifference님의 문의결과 역시 다른 독자들이 볼 수 없도록 하고 진실을 감추겠다는 새움출판사측의 뜻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카뮈의 원본에 가장 근접한 번역책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던 그 패기는 어디가고, 점잖고 건전하고 의미있는 반론조차 모조리 삭제해가며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걸까요? 새움지기라는 분께선 조롱댓글에 화가 나서 다 삭제하는척 하지만 결국 indifference님이나 고마해라님 댓글을 삭제하고 싶어서 조롱댓글 핑계를 대며 모조리 삭제를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출판사에 진지한 답변과 책임의식을 바랐던 제가 어리석었네요. 그냥 그 책을 안보면 될 것을.

babonara1234 2014-05-06 20:46   좋아요 0 | URL
SEC에 대한 답글은 저보다 Indifference님이 더욱 잘 말씀해주실 것 같습니다.
(이미 댓글을 다셨군요.)
그냥 저 역시 어리석었고, 이 놀음에 놀아난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indifference 2014-05-06 20:5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댓글을 달았던 indifference입니다. SEC에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혹시 번역 시비가 있을까봐 우선 제안 형식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댓글이 삭제되어, 제가 임의로 SEC에 이메일을 보냈고, 답장을 받은 후 그 답장 내용까지 담은 댓글을 (기존에 있던 댓글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달았습니다. 그 후 새움지기님은 답장의 내용이 있는 댓글을 즉시 지우고 바퀴벌레 운운하기 시작했습니다.

babonara1234 2014-05-06 20:59   좋아요 0 | URL
확인했습니다. 이에 관해서 새로 글 올리겠습니다.

indifference 2014-05-06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댓글을 달았던 indifference입니다. 미처 캡처 못하신 제 댓글이 하나 있습니다. 새움지기님은 제 댓글을 지운 직후에 바퀴벌레 운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댓글은 제가 SEC과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이었습니다.

이메일 내용은 http://indindi.egloos.com/7134167 여기에 올려두었습니다.

babonara1234 2014-05-06 20:49   좋아요 0 | URL
정말 충격적이네요.
사실이라면 새움 사장은 본인 말대로 이방인 모두 절판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나 석고대죄를 해야하는데, 그 약속을 지킨다고 믿기는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이방인 논쟁 내내 '고마해라', '한말씀', 'indifference'님께서는 시종일관 비아냥보다는 논증하고 토론하려고 했던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다른 독자분들도 블로그에 직접 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답변만 인용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공항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러한 끔찍한 번역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한국인 독자가 귀하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프랑스 카뮈 연구회 회장인 Agnès Spiquel이 곧 더 구체적인 대답을 해줄 것입니다. Giovanni Gaetani"

indifference 2014-05-06 20: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저도 이 정도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추후 Agnès Spiquel(이 분은 SEC 회장이며 카뮈 플레이아드 편집에 참여하셨습니다)로부터 답장이 오면 링크 걸어드리겠습니다.

미미 2014-05-06 21:07   좋아요 0 | URL
indifference님 그동안 님의 의견 정말 잘 보았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정확한 반론에 큰 감명 받았구요, 끝까지 점잖게 대응하시는 모습 무척 존경스러웠습니다.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서 이정서씨의 번역에 대해 '끔찍한'이라고 했다니!!
방금전 새움지기 또는 이정서씨의 그런 반응들 - 댓글 삭제, 바퀴벌레 운운 - 이 왜 나왔는지 확실히 알겠네요.
님의 블로그 글도 곰곰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indifference 2014-05-06 21: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과찬이십니다 ^^;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내용 위주로 댓글을 달면 이정서 씨나 새움지기님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아쉽습니다..

babonara1234 2014-05-06 21:45   좋아요 0 | URL
indifference님 블로그 참고하여 새로 글 올렸습니다.
혹시나 잘못 된 점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고치겠습니다.

전 indifference님이 과하게 정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중함도 어울리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요.

babonara1234 2014-05-0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모든 댓글을 다 지워버렸군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전 모든 댓글을 캡쳐해 두었는데,
전체 댓글 올리겠습니다.

독자 2014-05-06 22: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캡쳐해둘 생각까진 못했는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babonara1234 2014-05-06 22:43   좋아요 1 | URL
고생은 사실 사장이 제일 많이 하겠죠.
전 다른 분들처럼 댓글 달 수준은 못되고 수집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혹시나 저장했는데 이리 도움이 될줄은 몰랐네요.

Rutsphalt 2016-06-16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처음보는데 개빡치네 ㅋㅋㅋ 하 개빡친다... 그냥 웹서핑하다가 나무위키에 이방인 쳐봤는데, 두시간째 이 글까지 다 읽게 될줄은 몰랐다진짜

doxa0609 2018-05-0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방인 주인공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서 검색한거였는데..
역시 다 읽었네...
두시간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한 시간은 걸린듯.
사이좋게 지내요들.

윤병혁 2024-04-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서님이 이방인을 다시 읽게 만든 점은 높이 사야 할 듯하네요... 번역의 어려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