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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품절 됐지만 올해 미국에서 새로 번역된 듯 싶다. 한국어판을 구하고 싶었지만 중고서점이나 소규모 서점들을 돌아다녀도 구하지 못했다ㅠ 영어 번역본이 나온 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다. 이거라도 더듬더듬 읽어볼 생각이다. 혹시 이 책을 찾으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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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그 동네의 아이들은 쥐를 잡는다. 정부에서도 쥐를 잡는다. 쥐는 질병의 매개체다. 그런 낙인을 지녔기에 죽여도, 괴롭혀도 마땅한 대상이다. 허나 쥐들만이 그렇지 않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인간‘을 쥐로 은유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쌓인 쓰레기 더미 때문에 모이는 쥐들, 그 쥐들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정부가 보낸 사무적인 주거지 조사원들에게는 주민들이, 가부장에게는 그에게 속한 가족 구성체가, 사내아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비치는 동네의 소녀가 쥐로 그려진다. 또한 의도치 않게 하천에서 죽은 아이도 쥐에 부합한다. 마지막 사례이자 은유, 그러니까 하천에 빠진 아이가 어떻게 쥐로 전치될 수 있을까. 영화 초반에 아버지가 쥐를 집아 변기 속에 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고 쥐는 바다로 갔을 거라며 달랜다. 이 장면은 스노우볼(생쥐)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나자, 달로 갔을 거라 안위하는 아이와 등치되며 그 의미를 재차 확인 시켜준다. 바다/달 모두 인간 또는 쥐가 살 수 없는 곳, 즉 비장소이다. 이 비장소들이 지시하는 건 다름아닌 아이가 갖는 위로이자 이상일 뿐이다. 그들은 영화 초반에 모사된 타조처럼 하늘을 날지 못하며, 부패해가는 하천으로 들어가면 바다로 가지 못하고 끝내 죽거나 운이 좋게 살아 나왔다 해도 질병에 옮고 만다. 이렇게 해서 ‘변기에 내려진 쥐=하늘로 올려 보내진 쥐‘라는 등식은 ‘바다로 가지 못하는 쥐=달로 갈 수 없는 쥐, 또는 하늘을 날 수 없는 타조‘(이상의 허물어짐)로 치환될 수 있다. 바다로 갈 걸라는 꿈은 품은, 변기에 내려진 쥐는 결국 하천으로 내려가 죽고 말므로 이는 곧 꿈을 품었어야 될 대상인 ‘하천에 빠진 소년‘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 내내 중첩된다.
쥐로 대상화된 주연 소년은 쥐를 잡아야 하는 곳에서 부단히 감수성 충돌을 겪는다. 쥐로 대상화 해야 될 타자와 소년의 내면(내면 속이 아닌)은 갈등한다. 이런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집이라는 갈망이 움튼다. ‘새로운 집‘ 이라는 건 깔끔-청결(물리적으로서의)한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정부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치워진 쓰레기 더미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텅빈 행위다. 소년의 소망은 쥐가 없는, 쥐로 은유되지 않을 수 있는, 감수성이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장소-비장소를 지시한다. 그리고 그 비장소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영 속에서 뒤늦게 취하게 된다.
이 영화가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성장 영화라는 장르는 바깥에서 갈등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겪는 감수성의 동요를 안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것일 텐데, 이건 그렇지가 않다. 어쩌면 성장의 역설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성장영화다.
그 밖에 눈여겨 볼 것들
- 동물 보호 협회에 들어갈 거라는 소년의 친구가 쥐를 잡고 있는 장면
- 소년이 여자 몸 위에서 그저 엎드려 있는 모습
- 초반 커튼과 스크린 또는 액자처럼 연출된 창문
- 한 순간 영웅으로 비춰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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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그릇 > 타협 없는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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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파상력,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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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인문학은 하나의 종교로 정립된다. 진리는 기계처럼 구조적으로 짜여지며 그 진리에 대한 윤리적인 실천은 믿음으로써 발화된다. 강박적으로 진실을 좇는, 대타자를 간극 없이 체화해 이행하는 자들의 도착증세는 이제 윤리적 책임이라는 환상적 실재로 전회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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