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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등학생 때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솔직히 밝히자면 어떻게 쓰여져 있기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냐!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네요. :) 한 문장으로 평을 일축한다면, 신문을 소설화한 느낌입니다. 문장의 기교없이, 하기야 다루고 있는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이런" 이야기를 굳이 수려한 문체로 구축해나갈 필요가 있겠어요. 카메라 렌즈가 사물을 무덤덤하게 담아내듯, 작품에서 성인과 어린 소년, 소녀와의 끔찍한 성관계는 건조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집니다. 아니 '묘사', 라기보다는 '고발'에 가까운 문장들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싸늘하지만 분노에 휩싸인 '고발'. 

 

아동성매매 실태를 파헤치는 모든 장면이 처참하고 공포스러웠지만, 호르몬제를 치사량을 훌쩍 넘어서면서 강제로 주입당하고 결국 코와 입에서 핏물을 내뿜으면서 죽은 '타놈'은 너무나 가여워 마음이 괴로웠네요. 폭력과 굶주림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음으로 내내 애교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던 아이인데... 에이즈에 걸려 쓰레기장으로 버려지고, 열흘을 걸어 찾아간 고향마을에서도 버림을 받고 마침내 개미 떼에게 먹히면서 아버지의 손에 불에 타 죽은 '야이룬', 일본인 소년 '쓰바사'의 이식수술을 위해서 산 채로 심장을 적출 당했을 '센라' 등... 또한 결코 죗값의 벌충이 될 수는 없겠지만 '충'도 '로베르'도 '장'도 어른들의 성적 노예였다고 생각하면 암담해집니다.

 

타이... 해외 자체를 가 본 적 없지만 언젠가 여행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해도 저와는 무관한 듯 멀게만 느껴질 어느 낯선 국가... 우리와 똑같은 인격을 지니고 있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들이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좀먹어들어가면서 스러진다고 생각하니 평화나 구원의 의의는 과연 무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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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지는 한참이 되었는데...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뒤늦게서야 독후감을 쓰게 되었습니다. :)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어요.

 

제목과 표지를 보았을 때는 상당히 야한 내용이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언급만 드리우는 정도고 묘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악마>라는 제목이 아주 부합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나'와 마르트의 거침없는 사랑 방식이 쉽게 타오르고 철이 없는 꼭 그만큼, 오히려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맹목성을 띠고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특히나 마르트의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후반부에 '나'가 어린애 같은 어리광을 부리느라고 마르트를 상당히 못 살게 구는 장면이 있는데 이마저도 묵묵히 감내하듯 끌어안아주는 소녀의 모습이 성모 마리아처럼 성스러운 한편... 마르트라는 캐릭터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강인함이 결코 그녀를 유약한 여성으로 보이게만은 하지 않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할까요? 정독 전, 뒤표지의 줄거리를 무척 대강 훑는 바람에, 저는 어린 소년인 '나'와 이미 남편이 있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이해하고는, 두 사람의 나이 차가 한 스무 살쯤은 나는 설정일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르트도 '나' 못지않게 매우 어린 소녀더군요. 그래서 더더욱, 마르트의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반대로 고집스럽고 단호한 면모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매혹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와 마르트의 사랑이 충분히 지고지순하고 순진무구한 형태나 빛깔을 띠었다고 생각합니다. 멋모르는 쾌락과 호기심에 돌발적인 행동들을 보일 때마저도 순수한 치기의 일종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마르트가 없는 마르트의 집에서, 그녀의 친구인 스베아를 끌어들여서 조그만 애무를 반복하며 쾌락에 사로잡혔던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스베아를 탐하고 있으면서도 마르트를 쾌감에 중점에 놓음으로써 정신적으로 유희를 즐기는 것 같던 제멋대로의 '나'가 성욕에 몸이 단 듯 방탕한 꼬마 악마처럼 생각되지만은 않았어요. ;)

 

<육체의 악마>를 집필한 레몽 라디게는 참 어린 나이에, 그러니까 요절을 한 작가더군요. 인터넷을 대강 찾아다 읽어보니, 장 콕토와 각별한 친분 관계였던 것 같은데, 작년 7월달에 장 콕토가 쓴 <앙팡 떼리블>을 접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앙팡 떼리블>도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랍니다! 소설보다는 소설의 형태를 빌려 쓴 문체 선명하고 이미지 아름다운 서사시처럼 느껴졌었지요.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앙팡 떼리블>도 <육체의 악마>도, 다시 마음 깊이 음미하듯 재독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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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의 맛 창비청소년문학 80
누카가 미오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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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저는 벌써 대학교 4학년생임에도, 여전히 고교시절에 머물러 있는듯이, 제가 고등학생 때 너무나 즐겨 읽곤 했던 장르인 청소년 성장 소설을 때때로 찾아다가 접하곤 합니다. 정독 내내 "아, 이젠 정말 성장소설하고는 안녕이야! 충분히 패턴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그것이 다소 유치해..."하면서도 성장소설 특유의 어쩔 수 없는 따스함이 좋아서 얼마 지나면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의 메시지가 있지요. 괜찮아! 힘내! 네 곁엔 우리가 있어! 라든지, 울지 않아! 지지 않아! 나, 강하니까! 라든지... 청소년 성장소설이라면 대게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다소 일정한 자세가 있는데요.^^; 고등학생 때도 읽으면서 "아..."하기는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좋든 싫든 조금 더 심도있는 작품을 자주 접하게 되고, 다루는 갈등과 세계의 반영수준이나 범위확장 등을 드넓도록 재촉 당하면서 쓸데없이 시건방지고 오만해져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성장소설이 이제는 빤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나도 쓰겠다!'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달리기의 맛>은 솔직히 중후반까지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부문 과제 도서로 선정되었다더니, 정말 중고등학생 정도가 읽는 것이 딱 알맞겠다! 하면서 말입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좀더 감명 받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캐릭터들의 기분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심리 상태에 온전하게 이입하지도 못했답니다. 의아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아서, 간간이 책을 덮고 인물들의 마음을 천천히 정리해보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소마는 하루마가 우수한 능력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그렇게 마뜩잖은가?-제가 외동이기 때문에 제대로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의 형제자매가, 설령 저와 같은 분야에서라고 해도, 어차피 가족인데 우수한 실력을 발휘한다면 자랑스럽고 뿌듯할 것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어머니께 의견을 여쭤보았더니 '그런 마음이 드는 한편, 그래도 자신이 누구보다 최고이고 싶지 않을까? 아무리 가족이라도!'대답해주셨습니다.-하루마는 제 형을 그렇게 이기고 싶었으면서 형이 자진해서 달리기를 그만둬준다는데 굳이 반감을 느낄 이유가 있을까? 스케가와는 동료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경쟁자가 한 명 줄어든 것인데 쾌재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1위의 여유인가? 만일 소마가 자신의 뒤에서 달리던 이가 아니고 앞에서 달리던 이였다면 스케가와는 또 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

 

누구보다도, 저는 마이에 소마를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성격 설정 상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흘려버리는 서술에 방심해서, 그의 아픔을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독자인 제가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서술되어 있지 않으면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니 무책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면의 고백이라고 해 보았자, 조리 실습실에서 미야코에게 털어놓은 한번이 그나마 격앙된 채였던 듯 하고, '그다지 상처받지도 않은 것 같은데!' 툴툴대듯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후반에 다다라서야 소마가 가여워서 어찌나 눈물이 났던지요. 저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하코네 경기에 소마도 정식으로 참가하는 마무리가 될 줄로 알았어요. 하지만 마이에 소마는 그저 앞서 가는 이들의 등을 '남아 바라봅니다.' 언젠가, 바람에 녹아들 듯 달리는 과거 아름다웠던 자신이 '안녕', 이제는 정말 안녕이라고 인사하듯 스치고 영영 멀어지지만, 남아 바라보는 소마의 모습 또한 분명히 아름다워요.

 

얼마나 달리고 싶을까요. 세상에는 얼마나 달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까요. 그야말로 경쟁사회죠. 어느 분야에서건 실력 좋고 더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뒤에 남겨두고 휙휙 멀어져 갑니다. <달리기의 맛>은 소재가 아무래도 달리기이다보니, 스쳐지나가는 자들과 따라잡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의, 분야 관계없이 보편적인 현실을 한층 시각화해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회에는 '스쳐지나가는 자들'보다 '따라잡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이 훨씬 많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들이라고, 어떻게 달리기가 간절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달리기의 맛>의 마지막 세 문단에 절절하게 그려져 있는 소마의 모습과 마음이, 작중 내내 미적지근하기만 했던 그의 진실을 맑고 진솔하게 속삭이는 느낌으로 저를 강타해와서, '유치하다!'며 읽어왔던 주제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줄줄 울 수밖에 없었네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마이에 소마들은 떨쳐내고, '잘 할 겁니다.' 세상의 모든 마이에 소마들이 정말로 아름다워요.

 

<달리기의 맛>에서도 일순 언급됩니다만, 달리기뿐만 아니라 각종 모든 분야에서 살아남는 자와 탈락하는 자가 걸러내지지요. 예시로 든 분야에 제가 전공하는 문학도 있더군요. 누군가는 문단 내에서 입지를 굳히고 작가가 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마이에 소마가 독자에게 아프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캐릭터들보다 '나와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저도 하루마, 스케가와, 후지미야보다는 소마와 닮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한 번 달리기를 놓아버렸던 소마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고, 이후 그렇게나 상처받고 울고 아파했음에도 후회하지 않은 것처럼 저는 어떤 상황이 오든지간에 몇 번이고 글을 선택할 것이고... 글도 저를 선택해준다면 기쁘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글 덕분에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가장 마지막 장(326페이지!) 반 페이지가 저를 많이 울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반복해 이야기하지만 이런 매력 때문에 이제 청소년 성장소설은 졸업! 하면서도 손을 대어 버리게 되는 것이겠지요! 실은 진부한 메시지나 감동이 가장 근본적인 위로를 전해줄 때가 참 많지요. 유치하다는 표현은, 어쩌면 지독하거나 나쁜 표현만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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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가장 경애하는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의 친척>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기억이 있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이 플래너리 오코너에 대해서, 다른 작품 내에서도 곧잘 언급하였기 때문에, 항상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종교적 색체가 강한 스토리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읽기에 돌입할 때까지만 해도, 내용이 딱딱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두려웠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주인공 헤이즐 모츠는 종교적 구속이 상당히 강력한 집안에서 자라난 청년입니다. 작품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만,-제가 부족해서 놓친 것일 수도 있고요!-헤이즐 모츠는 종교적 관례 내 은근하고도 짙고 깊숙한 모종의 압박과, 신앙과 구원에 관련한 모순과 배신에 의해서 상처를 받고 너덜너덜해지고 극도로 예민해진 인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헤이즐 모츠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병적이리라 여겨질만큼 집착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죠.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에 맞닿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한층 더 심하게 배반당하고 상처를 입고, 피폐해져가는 헤이즐 모츠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현명한 피>는 독보적인 음울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헤이즐 모츠의 행방을 되짚으면서, 자신과 똑같은 복장과 말투로 위장을 하고 가짜 설교자로 나섰던 남자를 차로 들이받아 죽여버렸던 모습이 특히나 진득하게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가짜 설교자에게 터뜨렸던 헤이즐 모츠의 파괴적인 분노는 마치 독자인 저 자신이 가짜 설교자 행세라도 했었던 양, 마음 속 위축을 끌어올리기까지 했습니다. 헤이즐 모츠가 차가우면서도 격렬하게 경멸과 혐오를 드러내보이면서 내뱉어냈던 말들도 의미심장했고요.

 

헤이즐 모츠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인물 에녹 에머리가 있지요. 개인적으로 에녹 에머리 같은 캐릭터를 몹시 좋아합니다만 몇몇 분들은 공감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 수는 없습니다만,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 등장하는 미나미 생각이 나기도 하고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의 갓짱 생각도 나고, 캐릭터의 성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불안정한 어린아이가 까부는 것처럼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자의식이 다소 강한 듯 하고 철도 덜 든 것 같으며 고집스럽고 이기적이고 졸렬한 면모까지 엿보인다고 말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러한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멸시를 보내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듯이 조그만 미소를 머금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어느 한 면은 굉장히 극단적 철부지 아이같은 저 자신과 닮았노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녹 에머리가 자신에게는 현명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자부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읽으면서 '이 멋진 제목이 이 부분에서 언급되는구나!'감탄했습니다. <인간실격>이라든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든지 <목요일이었던 남자>라든지 제목만으로도 너무나 멋있고 위엄이 넘쳐서 읽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소설책들이 많지 않습니까? <현명한 피>라는 제목도 저에게 굉장히 근사하게 다가왔답니다.:) 에녹 에머리가 박물관 유리관 속 미라 처리를 해놓은 조그만 남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잔뜩 애가 달아서 헤이즐 모츠를 이끌려고 동동거리던 모습도 기괴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현명한 피>의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보태준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릴라와 악수를 나누면서 에녹이 떠듬떠뜸 흡사 고해 성사하듯이 마음을 털어놓기를 시도했지만, 그것이 진짜 고릴라가 아니라 인형 탈을 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상처입는 장면, 종내는 고릴라 인형 탈을 자신이 써버리고 어느 연인을 잔뜩 겁먹게 만드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녀 사바스 호크스가 에녹 에머리로부터 미라 남자를 받고 보여준 반응도 저는 제법 놀라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미친 듯이 기겁을 하면서 발작을 일으켜 잠시나마 머리라도 이상해져버릴 줄로만 알았는데요. 미라 남자를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작품 내에서도 헤이즐 모츠에게 자신들의 아기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안아들고서 헤이즐 모츠의 도망을 경계하고 그에 대한 불용을 드러내는 사바스의 모습은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결국은 사바스가 헤이즐로부터 출행랑을 쳐버린 후, 여관 주인이 눈이 먼 헤이즐 모츠에게 집착하고 협박하는 모습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좀더 전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관점에서 심도있게 <현명한 피>에 대한 감상을 쓰고 싶었지만, 제 능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인상깊었던 캐릭터성, 장면 위주로만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저의 마이페이퍼는 하잘것없어 그다지 좋은 근거가 되지 못하고 있지만, <현명한 피>는 분명 수작이랍니다. 저는 이 책을 저희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는데, 구입하고 싶은 책 목록을 채우고 나면 함께 구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시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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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신선한 가을,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인생의 친척>을 모두 함께 읽을 것을 권합니다. 오에만의 특별하고 오묘한 감수성은 진부하지 않은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주어, 독자 여러분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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