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경애하는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의 친척>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기억이 있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이 플래너리 오코너에 대해서, 다른 작품 내에서도 곧잘 언급하였기 때문에, 항상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종교적 색체가 강한 스토리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읽기에 돌입할 때까지만 해도, 내용이 딱딱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두려웠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주인공 헤이즐 모츠는 종교적 구속이 상당히 강력한 집안에서 자라난 청년입니다. 작품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만,-제가 부족해서 놓친 것일 수도 있고요!-헤이즐 모츠는 종교적 관례 내 은근하고도 짙고 깊숙한 모종의 압박과, 신앙과 구원에 관련한 모순과 배신에 의해서 상처를 받고 너덜너덜해지고 극도로 예민해진 인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헤이즐 모츠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병적이리라 여겨질만큼 집착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죠.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에 맞닿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한층 더 심하게 배반당하고 상처를 입고, 피폐해져가는 헤이즐 모츠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현명한 피>는 독보적인 음울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헤이즐 모츠의 행방을 되짚으면서, 자신과 똑같은 복장과 말투로 위장을 하고 가짜 설교자로 나섰던 남자를 차로 들이받아 죽여버렸던 모습이 특히나 진득하게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가짜 설교자에게 터뜨렸던 헤이즐 모츠의 파괴적인 분노는 마치 독자인 저 자신이 가짜 설교자 행세라도 했었던 양, 마음 속 위축을 끌어올리기까지 했습니다. 헤이즐 모츠가 차가우면서도 격렬하게 경멸과 혐오를 드러내보이면서 내뱉어냈던 말들도 의미심장했고요.
헤이즐 모츠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인물 에녹 에머리가 있지요. 개인적으로 에녹 에머리 같은 캐릭터를 몹시 좋아합니다만 몇몇 분들은 공감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 수는 없습니다만,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 등장하는 미나미 생각이 나기도 하고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의 갓짱 생각도 나고, 캐릭터의 성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불안정한 어린아이가 까부는 것처럼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자의식이 다소 강한 듯 하고 철도 덜 든 것 같으며 고집스럽고 이기적이고 졸렬한 면모까지 엿보인다고 말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러한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멸시를 보내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듯이 조그만 미소를 머금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어느 한 면은 굉장히 극단적 철부지 아이같은 저 자신과 닮았노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녹 에머리가 자신에게는 현명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자부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읽으면서 '이 멋진 제목이 이 부분에서 언급되는구나!'감탄했습니다. <인간실격>이라든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든지 <목요일이었던 남자>라든지 제목만으로도 너무나 멋있고 위엄이 넘쳐서 읽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소설책들이 많지 않습니까? <현명한 피>라는 제목도 저에게 굉장히 근사하게 다가왔답니다.:) 에녹 에머리가 박물관 유리관 속 미라 처리를 해놓은 조그만 남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잔뜩 애가 달아서 헤이즐 모츠를 이끌려고 동동거리던 모습도 기괴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현명한 피>의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보태준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릴라와 악수를 나누면서 에녹이 떠듬떠뜸 흡사 고해 성사하듯이 마음을 털어놓기를 시도했지만, 그것이 진짜 고릴라가 아니라 인형 탈을 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상처입는 장면, 종내는 고릴라 인형 탈을 자신이 써버리고 어느 연인을 잔뜩 겁먹게 만드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녀 사바스 호크스가 에녹 에머리로부터 미라 남자를 받고 보여준 반응도 저는 제법 놀라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미친 듯이 기겁을 하면서 발작을 일으켜 잠시나마 머리라도 이상해져버릴 줄로만 알았는데요. 미라 남자를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작품 내에서도 헤이즐 모츠에게 자신들의 아기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안아들고서 헤이즐 모츠의 도망을 경계하고 그에 대한 불용을 드러내는 사바스의 모습은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결국은 사바스가 헤이즐로부터 출행랑을 쳐버린 후, 여관 주인이 눈이 먼 헤이즐 모츠에게 집착하고 협박하는 모습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좀더 전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관점에서 심도있게 <현명한 피>에 대한 감상을 쓰고 싶었지만, 제 능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인상깊었던 캐릭터성, 장면 위주로만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저의 마이페이퍼는 하잘것없어 그다지 좋은 근거가 되지 못하고 있지만, <현명한 피>는 분명 수작이랍니다. 저는 이 책을 저희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는데, 구입하고 싶은 책 목록을 채우고 나면 함께 구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시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