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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 게시물은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릴러와 SF의 결합, 게다가 평소 관심있던 신학에 대해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책의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다.
그보다는 각자의 방식으로 비범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 의 축과 어찌보면,
동떨어진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이 책은, 크게는 최우혁이라는 인물의 서사로 흐른다.
서른네살의 최우혁, 당장 자기 입에 풀칠할 능력도 없다.
김형의 소개로 학원에서 논술학원 보조강사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노름으로 날린 빚더미를 갚아나가야 하는 신세고,
앞으로 남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걸 알면서도
다시 도박이라는 환락과 쾌락의 늪에
언제 빠져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유혹' 에 취약한 인간이, 한 번 그 맛을 본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삶의 의미도 없는 한 개인이
믿을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사건들을 겪고,
깨달음을 얻고 갱생해나가는 이야기다.
이렇게 큰 뿌리로 보면 모험기이자
우혁의 성장 소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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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혁의 인생을 뒤흔드는, '이도유' 가 등장한다.
우혁은 계곡에서 물에 휩쓸려 죽을 뻔 한다.
그때 우혁은 기적처럼 살아난다. 이도유가 살려준 덕분에.
우혁은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지만, 애써 외면하려 했던
도유가 눈 앞에 등장하자 당황한다.
그는 재림예수가 되어 목숨의 위협을 받고
그의 교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있다.
우혁에게 도유를 돕는 일은, 신의 계시와 같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느껴졌다.
이도유의 도주를 돕는 우혁의 속마음
우혁은 자신이 엄청난 일에 휩싸인 것을 감지한다.
이도유의 등장은,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세상에 대한
환멸과 멸시에 더해, 그리고 이방인과 같은 자신의 인생에
그래도 살아갈만한 무언의 이유와 가치를 찾아줄 것만 같았다.
그의 목숨을 구했던 것처럼, 그를 구한 끝에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다.
조강현 시점의 서사 전개
조강현은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도가 되었지만,
신에 대한 원망과 집념 속엔 여전히 불신이 있으며 방황했다.
그때 조강현은 이도유를 만나 삶의 이유를 얻게 된다.
그는 이도유를 메시아라고 믿었다. 이도유는 심판의 날을 점지했다.
그 날을 위해 살아갔다. 하지만, 종말은 예정된 날에 일어나지 않았다.
조강현은, 도주한 이도유를 찾아 그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는다.
사건에 대한 우혁의 묘사
한 소년에 의해 종말의 날이 결정되고,
목숨을 빚지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목숨에 경중을 따지는 것과, 무언가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세상.
하지만 누군가 정당한 값을 치러 구해야 할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질량과 정량을 따지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결국에는 똑같이 태어나 죽는 목숨이라면 말이다.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죽음을 목도하고
부활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문제의식에 직면한다.
판타지적 장르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우리 현실 사회가 담고 있는 문제와 닿아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요목조목 뜯어보게 된다.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시 되며, 규모와 효율,
성장만이 부각될 뿐인 기계적인 사회.
우혁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를 설명하는 김형
믿음, 소망, 사랑.
김형은 우혁에게 기회를 주고,
믿어보려 한 이유를 말한다.
그것을 신학의 출발점과 동일시하고 있다.
점차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태어난 것에 의미를 찾고, 어떻게 살아가며
신념을 갖고 행동할 것인지 규정 짓게 된다.
결국은 그것이 신학을 만들게 된다는 것.
조세희 시점의 서사 전개_가족의 묘사
조강현의 딸, 조세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부분이다.
조세희의 가족 구성원, 그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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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은 피와 기름 위에 세워진 세상을 그린다.
그것은 철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기반으로 한다.
매대 위에서 저마다의 선택을 기다리며 진열된 소스들처럼.
우리는 선택되기를, 쓰임받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이, 종말이 과연 구원이 될지, 파괴가 될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갖는지 형태도 다양하다.
사람이,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누구든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다양하고,
실존의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단요' 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그의 섬세하고 유려한 묘사와 문체 덕분에
일련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인물과 함께
생생하게 겪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이나 홀린것처럼, 푹 빠져들었다.
책을 덮고도 한참이나 여운을 곱씹어본다.
기독교를 믿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하나님에게 구원받기를 바라지만,
절대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다.
신앙적 가치를 쫓는다는 것은, 그래서 어찌보면
실현하기 어렵지만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사실 구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지 모른다.
김형이 우혁에게 건넨 믿음, 소망, 사랑의 마음처럼.
우혁이 끝내, 김형의 신의를 져버리지 않고
앞으로의 인생을 개척해갈 의지를 얻게된 것처럼.
이 책을 읽기 전에 누군가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으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망설임없이
그러고 싶다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그 질문을 해본다.
내가 감독이 된다면, 종말의 날을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결론은, 내게 맡겨진 수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나는 그 끝을 내 손으로 끝맺고 싶지는 않다는 것.
누군가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끝내게 될지라도.
어짜피 끝이 정해져 있는게 인간의 운명이라면,
태어난 상황에서 개척해가야 하는게 숙명이라면,
그것에 맞서서 대항할 방식을 찾아보는 것만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우혁은 말미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된다. 이제 뭘 하고 살지에 대한 답은,
아이들을 대하는 일을 하는 것, 세상에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을 돕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두가 유아기를 거쳐 성인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유약하게 흔들리며, 욕심내며, 상처받고
아파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년의 모습을 한 재림예수, '이도유' 처럼.
어떠한 능력을 갖던 우리 안의 본성은 유아적인 모습과
성숙한 모습, 양면의 모습을 겸비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선택하고,
그것에 대한 신념을 갖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개개인의 몫.
그러면서도 늘 한편으로는 잊지 않아야 할것이다.
그것이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가꾸어나갈 것인지,
누군가의 피와 기름 위에 만들어진 것인지 말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지난 2,000년간 심판이 오지 않은 것처럼
그날은 여전히 미뤄지고만 있다.
무관심할 정도의 관용과 자비로.
아니, 이것조차 모르겠다.
지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태도야말로
최고의 형벌일 수 있다.
세상은 이미 그리고 아직 지옥 같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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