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 - 이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그 영화를 다시 볼 수밖에 없다
주성철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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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건조>, <방구석1> 등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활약하며, 자타공인 홍콩영화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린 주성철 기자의 첫 평론집이다. 두꺼운 만큼 책 구성이 알차다. 크게 제1전시실 감독관, 2전시실 배우관, 3전시실 장르관, 그리고 제4전시실 단편관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집중해서 본 부분은 제3전시실의 저널리즘 장르관이었다. <나이트 크롤러>, <트루스>,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 <신문기자> 등 대표적인 저널리즘 영화 소개를 읽으며, 요즘 시대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소위 기자정신이라든지 언론의 공정성 실종에 나 또한 물음표를 던지게 됐다. 다른 흥행 장르에 비해 주목도가 덜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박찬욱 감독을 향한 저자의 애정 어린 평가도 눈여겨볼 만했다. 박찬욱의 단편영화 일대기에서 그가 줄곧 천착해온 속죄혹은 믿음의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발견한 부분,

그리고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속에서 <아가씨> 숙희와 <헤어질 결심> 송서래를 떠올리게 하는 연결고리를 찾아낸 대목들이 흥미로웠다.


책을 덮기 전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보았다. 영화저널리스트, 영화평론가, 영화서비스업자 등 다양한 직함 사이에서 저자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기까지 어떤 고민들을 해왔는지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영화비평인가 영화해설인가, 아니면 그냥 영화 이야기인가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는 일은 이도 저도 아니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이도 저도 맞는 일이다.”(6)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비평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법하다.


평론집과 딱히 친한 독자는 아니라 이 두꺼운 책을 어떻게 소화해야 좋을지 처음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독서는 완독에 매달리기보다 내가 관심 가는 배우나 장르에 한정해 읽어 내려갔다. 이런 방식으로 읽으니 확실히 부담감이 덜하다.

여기에 실린 수많은 작품 목록을 보면 이미 명성이 자자한 영화의 비중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영상 콘텐츠를 잘 챙겨보지 않는 내 입장에선 낯선 영화들도 많았다. 안 그래도 메릴 스트리프(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를 깨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이 책 안에 메릴 스트리프 배우관이 마련돼 있어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업로드되는 <무비건조> 영상을 볼 땐 주성철 기자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으로 영화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뿐한 기분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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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과부들을 위한 발칙한 야설 클럽
발리 카우르 자스월 지음, 작은미미 외 옮김 / 들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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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 인도 이민자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야설 강좌라니, 과연 파격적인 소재다. 그것도 매일같이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모두 감내하며 살아가는 '과부'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보통 글쓰기 수업은 시나 에세이 짓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고 일상 속 우울감을 해소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야설로 삶의 아픔을 치유하지 말란 법도 없다.


나이 지긋한 사별 여성들이 이 수업의 학생 역할인 반면, 신여성 혹은 MZ세대로 대표되는 니키가 수업을 지휘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웠다(사실상 니키는 취업 사기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지간으로 묶이지 않는다. 사별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가면서 니키가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이야기가 '여적여' 구도로 쏠리지도 않는다.

글자를 쓸 줄 모르는 이 학생들은 야설을 기록물로 남기기 전 서로가 생각해 온 이야기를 발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건 이렇게 하는 게 더 현실적이야, 아냐 이게 더 낭만적이야, 하는 식으로 티키타카하며 이야기를 다듬어 낸다.

생기발랄하고 유쾌한 장면이 이어지는 한편, 한 여성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두고 장르가 미스터리•스릴러로 전환되는 순간들이 있다. 여성혐오를 기반에 둔 명예살인, 결혼 문화를 바라보는 세대 간 서로 다른 관점, '형제회'와 같은 남성 단체의 모욕적인 감시를 피해야 하는 사우스홀 여성들의 고초 등 진지하게 생각해볼 지점들도 다수 등장한다.

아, 그리고 책에 실린 야설들의 수위가 꽤 높은 편이었다. 특히 미라와 리타의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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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 오늘도 정주행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윤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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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애 고취 방송' <시스터후드>의 진행자이자 프리랜서 작가로 활약 중인 윤이나의 '장르 불명 인터랙티브 옴니버스 에세이'다. 내가 지은 수식어구는 아니고 저자 본인이 소개한 로그라인 중 일부다. 그 표현대로 다양한 장르의 영상 콘텐츠를 소개하고 평하는 책이다.
넷플릭스, 웨이브, 왓챠, 디즈니+, 애플TV+와 같은 OTT 플랫폼의 콘텐츠 리뷰가 두루두루 실려 있는데, 그 중심에 '여성의 시선'이 평가 기준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이야 여성서사의 정체성이니 뭐니를 고민하는 시기도 지났고 내겐 일상적인 소재가 되었지만, 이제 막 여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사람도 분명히 생겨 나고 있을 터. 그런 사람들에겐 이 책이 여성서사 콘텐츠 입문용으로 탁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모험은 늘 귀환으로 마무리된다. 소년에게 세계는 집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를 가르쳐주는 바깥이며, 모험을 통해 성장했다고 해도 이 변화를 인정해주는 곳은 언제나 고향, 집이다. 소녀의 모험은 홀로서기로 마무리된다. 소녀에게 세계는 집이 얼마나 좁고 억압된 곳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자유의 공간이며, 모험을 통한 성장은 그 넓디넓은 세계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소녀는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녀는 돌아가지 않는다 <에놀라 홈즈>」, 37쪽)


소수자인 여성이 좋은 방과 의자를 가지게 되었을 때, 곧 한 집단에서 리더의 위치에 올랐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지윤에게 주어진 것은 자리일 뿐, 힘이 아니다. 지윤은 유리 절벽에 서 있다. 기업이나 조직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만 여성에게 기회를 주고, 실패하면 그 책임을 묻는 현상을 유리 절벽이라고 할 때, 지윤에게는 이제 떨어질 일만 남은 셈이다.
(「어차피 터져버릴 시한폭탄이라면… <더 체어>」, 143-144쪽)



저자가 추천하는 넷플릭스 콘텐츠 중, 밀리 바비 브라운 주연의 영화 <에놀라 홈즈>와 산드라 오 주연의 드라마 <더 체어>를 나도 굉장히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특히 <더 체어>는 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 대 교수, 교수 대 교수 구도의 다양한 갈등 양상을 다루고 있어 나의 대학생활을 반추해 보게 만든 작품이다. 문학 전공자라면 더더욱 공감 포인트가 많을 거다. 아무튼 두 작품 모두 새 에피소드를 얼른 내주길 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에세이는 OTT 중독을 자처하는 시청자들에게 또 다른 자극을 북돋아 준다. 호불호가 쉽게 갈릴 법한 다큐멘터리, 스탠드업코미디 장르를 과감히 추천하는 데서 그렇게 느꼈다. 웬만한 유명작은 섭렵했으니 이제 발 빼겠다던 구독자들이 외려 다큐멘터리에 빠지는 과정을 종종 봐 왔는데, 윤이나 작가도 이미 그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다.
나는 OTT 입문자도 아니고 열혈 시청자도 아닌 모호한 입장이다. 워낙에 영상물 시리즈를 진득하게 못 보는 스타일인데 어쩌다 하나에 꽂히면 몰아 보는 경향은 있다. 이런저런 영화를 뒤적거리면서 찜 목록만 부질없이 늘려 가던 중에 이 책을 읽었고 <스케이터 걸>, <걸스 오브 막시>, <위 아 40> 등을 새로 추가했다.

<시스터후드>는 내가 평소에 즐겨 듣는 팟캐스트이기도 하고, 이전에 같은 저자가 쓴 '내리막에 익숙한 밀레니얼을 위한 용기 고취 에세이'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코난북스)를 읽은 적도 있다.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자의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보아 온 독자(애청자)로서 앞으로는 그의 집필 활동도 더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습관대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리뷰를 썼지만, 청춘 혹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 관해 영감을 주는 콘텐츠 추천도 많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윤이나 작가의 진면목을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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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까는 여자들 -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
신민주.노서영.로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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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약 이대녀라면('삼대녀'도 상관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마음보다 '그래, 역시 내가 맞았어'라는 오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온통 젊은 여자들에게 겸손을 강요하는 판에 스스로 겸손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 오만하고 건방지고 되바라진 여자들이 만드는 세상을 이제는 시도해 보아야 하니까. 구절판에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신, 구절판은 걷어차고 새 판을 까는 여자들이 되자.
(10쪽, 「구절판을 걷어찰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에서 말하는 구절판 행사란 이런 것이다. 특정 이슈를 다루는 토론회에 온통 남성 패널을 부르고, 여성은 구색 맞추기로 한 명만 섭외하는 행사. 구절판 행사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남성들에게 '이대남'이라는 명칭이 먼저 붙었고, 그 반대 항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이대녀'라는 설명도 일러주고 있다.

"오색찬란한 다양한 반찬들 사이에 뚱하게 껴 있는 밀전병이 되어 모든 여성의 이야기를 대변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꼈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세 저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향이 모든 2030여성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 덕분에 나도 마음 놓고 이 책을 완독했다. 여성문제 관련 책을 읽으면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극소하게나마 존재하는데, 난 그때마다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이번엔 좀 뻔뻔한 상태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20대 여성으로서 국회 보좌관 업무를 수행하거나,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며 겪은 일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선하다는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한 경험담이었다. 20대 여성'도' 국회 보좌관을 할 수 있구나, 그 사실 자체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턱이 없었으니까. 마치 영화 <히든 피겨스>를 처음 보았을 때 NASA에도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존재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한편 남초 사이트의 억지 논란 만들기에 가담했던 기업들•언론들의 작태를 지적하거나, 'N번방 사건' 이후 제기된 '알페스 처벌법' 논란이라든가, 총여학생회의 잇따른 폐지 사태로 보는 대학 내 백래시 현상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발생한 여성혐오 문제들도 잊지 않고 짚어 주었다.


마지막에 실린 에필로그 인터뷰 「또 악플이 달리겠지만」의 대화도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던 중 느껴야 했던 어려움을 얘기하며 저자들은 또 한 번 신중한 태도를 내비친다.
"실제 존재하는 20대 여성들을 한 집단으로 뭉뚱그려서 말하기에는 서로 너무 다른 것도 현실이라서. 단일하지 않은 이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복잡한 고민이 들었어."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그들이 페미니스트들인지 이대녀들인지 혼동될 때가 있었어. 이대녀들 중에도 분명 안티페미니스트가 있을 것이고 (…) 하지만 적어도 이대녀들의 관심사와 페미니즘의 사안들이 어느 정도 겹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어."


내가 대선 후 맞닥뜨린 최대 고민 또한 저 인터뷰 안에 들어 있었다. 안티페미니스트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들과 건설적인 공론을 펼치는 게 가능은 할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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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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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감상평을 남길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나는 시보다 소설과 산문을 즐겨 읽는 사람이지만…"
"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솔직해지자면 나는 소설도 산문도 뭔지 잘 모른다. 그냥 다짜고짜 읽는다. 그런데 유독 시에 대해서만 아쉬운 소리를 해 온 심보가 뭘까. 나 같은 독자 때문에 시를 대하는 각박한 인식이 더 불어나는 건 아닌지 괜한 염려까지 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런 구차한 말이 나올까 봐 내심 걱정했다. 외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뜻밖의 수확을 얻어 냈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이 한 무더기였다.

동료 시인들에게 점심시간에 만나서 함께 시를 쓰자고 권하는 시, 점심 산책을 하며 "사람들의 활기" 속에서 "세계를 메우고 있는 비참함"을 홀로 생각하는 시, 그와 반대로, 인파로 복작거리는 공원에서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햇살이 푸지면 나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된다"고 고백하는 시… 점심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면면이 다채롭게 묘사돼 있었다.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표현들도 종종 등장한다. "나의 점심은 네게 한밤이었다"(백은선, 「향기」)는 시구를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글 하나가 떠올랐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에서 엄지혜 작가가 '한낮'과 '대낮'의 차이점을 헤아려 보는 구절이었다. 청탁 메일을 보내느라 진이 빠진 저자가 '한낮의 우울'을 만끽한다는 내용의 산문인데,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엉뚱한 생각이 든다. '한낮'과 '한밤'과 '대낮'은 사전에 실려 있는데 왜 '대밤'이라는 단어는 없을까 하는…

여하튼 다시 힘 빼고 처음부터 한 편씩 읽어 보다가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듯한 한 문장을 발견했다. 강혜빈의 「다가오는 점심」 중 한 구절이다.
"우리의 점심시간이 모두 에스에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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