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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날 강남의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이곳은 분명 내가 선택해서 온 공간이었지만, 어딘가 낯설고 고독했다. 사람들은 모두 바삐 움직였고, 매장마다 밝은 조명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무언가를 사, 소유해,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져." 라캉의 말이 떠올랐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구의 욕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내가 걸음을 멈춘 이곳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공간일까, 아니면 나를 무의식적으로 구속하는 또 다른 감옥일까? 라캉은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계와 실재의 틈에서 찾았다. 상징계는 질서와 규칙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환상의 덫에 가둔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분명히 상징계의 산물이다. 이곳은 소비를 중심으로 질서를 구축하며, 우리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라캉이 말한 실재는 이 공간의 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재는 부재와 결핍의 영역이며, 백화점의 화려한 유리창과 조명이 가리고 있는 공허함 그 자체다.


백화점을 나와 거리를 걷는다. 들뢰즈라면 이 거리를 리좀(Rhizome)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리좀은 고정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다. 도시의 도로망은 들뢰즈의 철학처럼 끊임없이 확장되고 연결된다. 그러나 그 확장은 자유가 아닌 통제의 도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호등과 CCTV, 거리마다 똑같은 브랜드가 들어선 상점들은 흐름 속에서 우리를 규율하고, 선택의 환상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코드화한다고 말한다. 도시는 그 코드화의 결과물이다. 획일화된 건물, 정형화된 동선, 그리고 비슷한 브랜드의 간판들. 이 흐름 속에서 도시의 개성은 지워지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지금 서울인가, 뉴욕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장소인가?


바디우라면 현대 도시를 '사건(event)'의 공간으로 바라볼 것이다. 바디우는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건의 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도시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건을 차단하는 곳인가? 백화점과 지하철역 같은 장소 속에서도, 바디우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시선, 그리고 새로운 연결의 순간이다. 나는 버스 정류장 옆 작은 가로수를 보며 생각한다. 누군가 그곳에 나무를 심었고, 또 누군가는 그 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멈췄을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도시의 정해진 질서 속에서 작은 틈새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모든 생각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한 책에 대한 나의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여전히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을 펼쳐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프랑스 철학의 깊이에 늘 끌렸으면서도, 난해한 개념의 벽 앞에서 눈길을 돌렸던 내게 이 책은 일종의 해방이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타원으로 구성된 도식은 단순한 그림 이상이었다. 그것은 철학의 복잡한 개념을 단숨에 명확히 보여주는 지도가 되었고,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철학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창이 되었다. 도식은 마치 혼란스러운 거리를 걷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라캉의 ‘실재계’와 ‘상징계’는 내 일상에서 느껴지는 분열을 설명했고, 바디우의 ‘사건’은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내 삶에 가져오는 혁명을 다시 보게 했다. 들뢰즈의 ‘특이성’은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각기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은 단지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의 힘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책이었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이 주었던 감동이 아직도 내 사고를 자극하고 있는 지금, 그 후속작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도시와 정신병리를 중심으로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철학을 풀어낸다고 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기억, 그리고 시스템과 질서가 겹쳐진 거대한 상징계이자, 때로는 실재와 마주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 복잡한 공간을 라캉과 들뢰즈, 바디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낸다는 기획은 그 자체로 대담하다. 특히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익명의 장소와 정크 스페이스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편의점, 쇼핑몰, 공항, 지하철역 같은 공간들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장소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 공간은 정체성과 기억을 지우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이 백화점처럼 변해가고, 도시 전체가 소비를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이 시대에, 철학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번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답을 시도하는 것이다.


장용순 교수는 단지 철학자나 건축가가 아니다. 그는 철학과 건축이라는 두 학문을 횡단하며, 현대 사회의 구조와 흐름을 날카롭게 진단하는 학자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쌓은 그의 이력은 그가 도시와 철학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에서 보여준 그의 도식적 접근은 프랑스 철학의 난해함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풀어냈다. 이 도식은 철학의 복잡한 사유를 시각적으로 정리하여, 우리가 철학적 논의를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후속작에서도 그가 도시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어떻게 라캉의 ‘상징계’와 ‘실재’, 들뢰즈의 ‘리좀’, 바디우의 ‘사건’이라는 개념과 연결 지을지 기대된다. 백화점 같은 장소가 인간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 도시의 공간이 어떻게 욕망과 질서를 동시에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도시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되면 다시 도시를 걸어볼 것이다.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지하철역의 끝없는 동선 속에서, 공항의 기계적 질서 안에서, 나는 라캉과 들뢰즈, 바디우의 목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백화점은 단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상징계로, 지하철역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의 흐름으로, 공항은 바디우가 말한 사건의 가능성으로 보일 것이다.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도로로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펼쳐질 수 있는 하나의 무대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이 프랑스 철학의 난해함을 풀어내어 새로운 지도를 제시했다면, 후속작은 그 지도를 바탕으로 도시를 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단지 철학 아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도시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조명될 것이다. 이 책이 하루빨리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도시를 철학으로 다시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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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 거울을 좋아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머리숱은 여전히 풍성했고, 주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면 내가 나라는 사실이 명확히 느껴졌고, 그런 단순한 믿음이 주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런데 자크 라캉의 ‘거울 단계’를 읽고,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나였을까?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상징적 환영에 불과했던 걸까? 라캉은 말했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온전한 나를 본다고 믿지만, 그것은 타자의 언어로 구성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던 어린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온전한 ‘나’를 본 것이 아니라, 이미 타인의 시선과 언어로 빚어진 내가 아닌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 속의 나와 나 자신 사이에 숨겨진 간극. 그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분열이다.


라캉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욕망이다. 그는 욕망이란 내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욕망은 분명히 내가 느끼는 감정인데, 왜 타자의 것이라고 할까?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게 된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욕망을 배워왔으니까.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저걸 가지고 싶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내 욕망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내가 평소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 그게 정말 나 같아 보여?”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너지, 누구겠어?” 그러나 그 대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의 욕망. 그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라캉은 내 혼란스러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타자의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게 너란다.”


라캉은 언어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며, 언어를 통해 욕망을 배운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는 우리를 구속한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에게 자주 혼났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해야 할 말은 이거야.” 그때마다 나는 어른들이 정해준 언어의 틀 안에서 나를 다시 정의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점점 작아졌고, 대신 어른들이 원했던 말들로 나를 채워갔다. 라캉은 언어를 상징계 (Symbolic Order)라 부른다. 우리는 이 상징계 안에서 정체성을 구축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짜 나를 잃는다. 나는 종종 내 말을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이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일까?” 상징계 속에서 나는 타자의 시선에 맞춰 말을 배워왔고, 그것이 내 욕망과 나의 주체성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과연 나의 것인가? 아니면 단지 타인의 욕망과 언어로 빚어진 나인가?


라캉의 사상은 때로 비극적으로 들린다. 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결핍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 잃어버린 것을 채우기 위해 욕망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충족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인간 존재의 모순이다. 우리는 결핍 때문에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결핍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생각은 처음에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왜 인간은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일까? 왜 우리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욕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멈춰 서고 말 것이다. 욕망은 결핍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라캉을 읽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와 다시 마주했다. 어릴 적 거울 속의 나는 온전함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타자의 욕망과 언어로 빚어진 상징적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나를 불완전한 존재로 정의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해방시킨다. 온전함이라는 환영에서 벗어나, 나는 결핍이라는 이름의 틈 속에서 살아간다. 라캉의 사상은 난해하다. 그의 글은 미로처럼 끝없이 얽혀 있다. 그러나 그 미로 속에서 나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나를 발견한다. 결핍은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며, 그것은 단순히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나를 열어 두는 가능성이다. 나는 더 이상 거울 속의 나를 완전하게 회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거울 속의 나는 언어와 타자의 틈새에 서 있지만, 그 틈새는 곧 나의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불완전함은 결코 부족함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결핍 속에서 질문하게 하고, 갈망하게 하며, 존재하게 하는 에너지다. 결국, 나는 거울을 넘어, 그 이면에서 새롭게 태어나고자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존재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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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Me Everything (Hardcover) -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Random House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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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작, 『Tell Me Everything』소식을 듣자마자 책을 손에 들었다. 번역본을 기다릴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이 책은 스트라우트의 이전 작품인 『오, 윌리엄!』 과도 유사한 정서를 품고 있다. 『오, 윌리엄!』에서는 루시 바턴이 전 남편 윌리엄과 함께 메인 주로 떠나 과거와 현재를 되짚으며 관계의 상처와 화해를 탐구했다.


이번 작품 『Tell Me Everything』은 그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루시 바턴과 올리브 키터리지, 그리고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이 다시 무대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인물과 사건들이 더해져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마을의 조용한 풍경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나를 다시 불러 세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그녀의 문장은 북적거리는 소리 대신 한 사람의 낮은 목소리처럼 귓가에 닿는다. 『Tell Me Everything』에서도 그렇다. 메인의 작은 마을 크로스비.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그 공간에서 이야기는 서서히 펼쳐진다. 이곳은 그녀의 인물들이 한 번쯤 지나쳤던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엮인 관계의 실타래가 하나둘 풀려 나간다.


스트라우트는 늘 그렇듯, 한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삶을 얽어 간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하나 고유하다. 어떤 목소리는 오래된 슬픔처럼 낮고, 어떤 목소리는 다급하며, 또 어떤 목소리는 삶의 피로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에 깊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생명력은 단지 마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진실을 속삭이는 듯하다.


루시 바턴은 여전히 자신과 싸우고 있다. 그녀의 기억, 그녀의 가족, 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끝내 떨쳐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루시만의 것이 아니다. 『Tell Me Everything』의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질문에 맞서고 있다.


한편, 우리의 올리브 키터리지는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크로스비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녀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지만, 바람은 점점 더 강하게 불어온다. 올리브는 그 나이에도 여전히 깊은 뿌리를 내리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크로스비라는 공간은 마치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다. 작은 마을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갈등과 상처가 조용히 엉키고, 그 사이로 희망의 씨앗이 잔잔히 움튼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이미 고령의 나이로 등장했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이야기에서도 그녀 특유의 고집과 연륜으로 독자에게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가장 감탄하는 점은 그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미묘한 결을 포착해낸다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 오해와 화해, 이렇게 그녀의 인물들은 늘 삶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과 마주한다.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그러한 순간들을 예리하고도 따뜻하게 조명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도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능숙하게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루시와 올리브, 그리고 크로스비 마을의 또 다른 인물들은 각자 과거의 상처를 다시 들춰내며, 현재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스트라우트는 시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도록 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스트라우트는 그녀의 인물들을 통해 이해란 단순한 동의나 공감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 미련과 화해의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 관계를 이루는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Tell Me Everything』은 완벽한 화해를 약속하지 않지만 관계란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엉성하게나마 만들어진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녀의 문학은 마치 낙엽 사이에서 귀한 이삭을 줍는 순간처럼, 우리가 지나쳤던 삶의 조각들을 깊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번 책도 참 좋았다. 스트라우트다, 역시. 그녀가 그려내는 크로스비의 풍경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운처럼 오래 남아, 마음 한구석을 조용히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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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이탈리아. 통일운동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몰락하는 귀족 계급의 초상이 한 가문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표범』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개개인의 서사와, 삶의 유한성을 담아낸 우아한 철학적 탐구다. 이 작품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문학적 동료들, 프루스트, 톨스토이, 만, 졸라 등의 작품과 함께 문학사에서 빛나는 교감을 이룬다.










『표범』은 몰락하는 살리나 가문을 통해 귀족 계급의 종언과 함께, 한 개인의 내면적 고뇌를 탐구한다. 이 점에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깊은 공명을 이룬다. 두 작품 모두 귀족 계급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파국을 세밀히 묘사하며,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표범』이 주로 한 가문, 특히 살리나 영주의 내면에 집중한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여러 인물들의 엇갈린 관계를 통해 더 폭넓은 사회적 그림을 그린다.








또한,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표범』과 유사하게 가문의 몰락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토머스 만은 독일 북부의 한 상인 가문이 세대를 거치며 쇠락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두 작품 모두 몰락의 불가피성을 예견하면서도, 그 과정에 깃든 인물들의 인간적 약점과 고뇌를 탐구한다. 그러나 『표범』이 변화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살리나 영주의 품위를 강조한다면,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변화 속에서 저항하다 점차 쇠퇴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더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표범』의 핵심은 돈 파브리초 영주가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몰락하는 세계에 대해 품는 깊은 성찰이다. 그는 화려한 무도회에서도 춤추는 사람들의 얼굴 뒤에 스러져가는 생의 그림자를 본다. 이 점에서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맞닿아 있다. 프루스트는 인간 기억과 시간의 흐름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탐구한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과거를 회고하며 시간의 흔적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살리나 영주는 변화와 죽음 앞에서 그 덧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또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몰락하는 가문과 삶의 순환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표범』과 비슷하다.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는 신화적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반면, 살리나 가문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 『백년의 고독』이 마술적 사실주의의 기법을 통해 몰락을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시선으로 묘사한다면, 『표범』은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비애를 강조한다.








『표범』은 몰락하는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격변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성찰한다. 이 점에서 졸라의 『목로주점』와 연결된다.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프랑스 노동자 계층의 비극적 몰락을 다루며,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생생히 그려낸다. 특히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이 귀족 사회를 대체하는 과정은 『표범』과 졸라의 소설 모두에서 핵심적이다. 그러나 졸라가 자연주의적 시선으로 인물들의 운명을 사회적 요인에 귀속시킨다면, 『표범』은 보다 철학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에서 변화를 바라본다.




『표범』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은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이를 품위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살리나 영주는 변화의 흐름 앞에서 체념하지 않고, 자신의 몰락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 점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과도 대비된다. 『고요한 돈강』의 인물들은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며, 변화와 맞서거나 그 안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 반면, 살리나 영주는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직시하고,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표범』을 더욱 독창적으로 만든다.


『표범』은 몰락과 변화라는 주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찾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기억을 통해 잃어버린 삶의 조각들을 재구성하고,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 세대의 쇠락을 고통스럽게 증언할 때, 『표범』은 한 개인과 가문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과정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사라짐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시간의 파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졸라가 변화의 폭력성을 사회적 시선으로 해부했다면, 『표범』은 모든 변화와 소멸 속에서 남는 인간적 품위를 탐구한다. 살리나 영주의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은 변화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보여주며, 인간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표범』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 흔적들은 또 어떤 새로움을 잉태할 것인가? 이 작품은 과거의 서사를 미래를 위한 유산으로 전환시키며, 문학적 동료들과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우아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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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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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위엄과 권위를 누리던 살리나 가문은 이제 무너져가는 시칠리아의 초라한 유산처럼, 변화를 외면하지 못한 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은 이 몰락의 이야기를 한 가문의 서사로 압축하지만, 단순히 사라져가는 귀족 계급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대의 굴곡과 함께 인간의 영혼을 관통하며, 변화와 죽음이라는 필연성을 품위 있게 노래하는 불멸의 기록이다.


살리나 가문의 문장은 위풍당당한 표범의 형상이다. 그러나 이 상징은 단지 권력의 그림자가 아니다. 표범은 눈앞의 사냥감을 끝까지 쫓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세상의 다른 사냥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이는 곧 인간의 삶을 닮아 있다. 권력과 욕망, 사랑과 성공에 집착하는 삶의 흔적들이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정점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가 서 있다. 그는 천문학에 심취하며 별들의 규칙을 탐구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과 가문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사냥과 연애, 무도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즐기지만, 삶이 주는 모든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혁명과 부르주아의 부상이 가져오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는 딸의 혼례보다 조카 탄크레디의 신분 초월적 결혼을 축복한다. 그것은 단순히 가족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 아니라, 변화의 물결에 자신을 맡기는 한 인간의 결단이다.


돈 파브리초가 무도회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깊은 연민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들은 마치 죽음이 가져갈 찰나의 시간을 모른 채 환희에 젖어 있다. 그는 그들의 춤 속에서 삶의 극적인 유희와 동시에 끝이 다가오는 조짐을 본다. 이것이 바로 『표범』의 가장 압도적인 힘이다. 변화는 겉으로는 새로움을 의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세계를 허물고 소멸을 예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돈 파브리초의 이 고백은 단순히 추상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변화를 통해서만 기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설을 꿰뚫어 본다. 이 말은 단지 체념이 아닌, 삶의 불가피한 변화와 그 안에서 지속되는 본질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표범』은 이러한 통찰을 통해 변화와 보존 사이에 놓인 인간 존재의 모순적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이 작품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생애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거절당하며 좌절을 겪었지만, 사후 출간된 이 책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부활하며 이탈리아 문학사에 찬란한 족적을 남겼다.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현재 넷플릭스 시리즈로 재탄생을 준비 중이다. 작가의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특정 시대와 개인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보편적 성찰로 확장된다.


『표범』은 묻는다.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변화와 죽음을 앞둔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작품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의미를 탐구하도록 초대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삶을 겪어낸 자들의 흔적이다. 살리나 영주의 마지막 순간처럼, 모든 변화와 죽음은 결국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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