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날 강남의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이곳은 분명 내가 선택해서 온 공간이었지만, 어딘가 낯설고 고독했다. 사람들은 모두 바삐 움직였고, 매장마다 밝은 조명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무언가를 사, 소유해,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져." 라캉의 말이 떠올랐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구의 욕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내가 걸음을 멈춘 이곳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공간일까, 아니면 나를 무의식적으로 구속하는 또 다른 감옥일까? 라캉은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계와 실재의 틈에서 찾았다. 상징계는 질서와 규칙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환상의 덫에 가둔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분명히 상징계의 산물이다. 이곳은 소비를 중심으로 질서를 구축하며, 우리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라캉이 말한 실재는 이 공간의 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재는 부재와 결핍의 영역이며, 백화점의 화려한 유리창과 조명이 가리고 있는 공허함 그 자체다.
백화점을 나와 거리를 걷는다. 들뢰즈라면 이 거리를 리좀(Rhizome)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리좀은 고정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다. 도시의 도로망은 들뢰즈의 철학처럼 끊임없이 확장되고 연결된다. 그러나 그 확장은 자유가 아닌 통제의 도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호등과 CCTV, 거리마다 똑같은 브랜드가 들어선 상점들은 흐름 속에서 우리를 규율하고, 선택의 환상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코드화한다고 말한다. 도시는 그 코드화의 결과물이다. 획일화된 건물, 정형화된 동선, 그리고 비슷한 브랜드의 간판들. 이 흐름 속에서 도시의 개성은 지워지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지금 서울인가, 뉴욕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장소인가?
바디우라면 현대 도시를 '사건(event)'의 공간으로 바라볼 것이다. 바디우는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건의 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도시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건을 차단하는 곳인가? 백화점과 지하철역 같은 장소 속에서도, 바디우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시선, 그리고 새로운 연결의 순간이다. 나는 버스 정류장 옆 작은 가로수를 보며 생각한다. 누군가 그곳에 나무를 심었고, 또 누군가는 그 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멈췄을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도시의 정해진 질서 속에서 작은 틈새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모든 생각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한 책에 대한 나의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여전히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을 펼쳐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프랑스 철학의 깊이에 늘 끌렸으면서도, 난해한 개념의 벽 앞에서 눈길을 돌렸던 내게 이 책은 일종의 해방이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타원으로 구성된 도식은 단순한 그림 이상이었다. 그것은 철학의 복잡한 개념을 단숨에 명확히 보여주는 지도가 되었고,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철학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창이 되었다. 도식은 마치 혼란스러운 거리를 걷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라캉의 ‘실재계’와 ‘상징계’는 내 일상에서 느껴지는 분열을 설명했고, 바디우의 ‘사건’은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내 삶에 가져오는 혁명을 다시 보게 했다. 들뢰즈의 ‘특이성’은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각기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은 단지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의 힘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책이었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이 주었던 감동이 아직도 내 사고를 자극하고 있는 지금, 그 후속작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도시와 정신병리를 중심으로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철학을 풀어낸다고 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기억, 그리고 시스템과 질서가 겹쳐진 거대한 상징계이자, 때로는 실재와 마주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 복잡한 공간을 라캉과 들뢰즈, 바디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낸다는 기획은 그 자체로 대담하다. 특히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익명의 장소와 정크 스페이스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편의점, 쇼핑몰, 공항, 지하철역 같은 공간들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장소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 공간은 정체성과 기억을 지우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이 백화점처럼 변해가고, 도시 전체가 소비를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이 시대에, 철학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번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답을 시도하는 것이다.
장용순 교수는 단지 철학자나 건축가가 아니다. 그는 철학과 건축이라는 두 학문을 횡단하며, 현대 사회의 구조와 흐름을 날카롭게 진단하는 학자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쌓은 그의 이력은 그가 도시와 철학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에서 보여준 그의 도식적 접근은 프랑스 철학의 난해함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풀어냈다. 이 도식은 철학의 복잡한 사유를 시각적으로 정리하여, 우리가 철학적 논의를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후속작에서도 그가 도시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어떻게 라캉의 ‘상징계’와 ‘실재’, 들뢰즈의 ‘리좀’, 바디우의 ‘사건’이라는 개념과 연결 지을지 기대된다. 백화점 같은 장소가 인간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 도시의 공간이 어떻게 욕망과 질서를 동시에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도시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되면 다시 도시를 걸어볼 것이다.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지하철역의 끝없는 동선 속에서, 공항의 기계적 질서 안에서, 나는 라캉과 들뢰즈, 바디우의 목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백화점은 단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상징계로, 지하철역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의 흐름으로, 공항은 바디우가 말한 사건의 가능성으로 보일 것이다.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도로로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펼쳐질 수 있는 하나의 무대다. 『라캉, 들뢰즈, 바디우의 세계관』이 프랑스 철학의 난해함을 풀어내어 새로운 지도를 제시했다면, 후속작은 그 지도를 바탕으로 도시를 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단지 철학 아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도시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조명될 것이다. 이 책이 하루빨리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도시를 철학으로 다시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