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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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엔 올림픽이 있었고 2006년 부산에는 APEC이 열렸다. 전두환이 올림픽 개최를 위한 도시미관 사업으로 상계동 달동네를 철거했다면 2006년엔 APEC개최로 ‘귀빈’들이 방문해 행사장으로 가는 길옆에 보이는 하층민 주택지를 칸막이로 위장했다. 그나마 민주화의 결실일까? 88년엔 불도저로 밀었다면, 그나마 ‘가리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 모르겠다. 1세계와 3세계 혹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존재하는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달성한 다이내믹 코리아의 상징인 서울에 쪽방이 500개고, 로스앤젤레스가 10만이 넘는 노숙자들의 천국이란 ‘사실’은 마주하기 싫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전술한 현실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허물어 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재개발’이란 허위적 미명아래 지역마다 주상복합아파트가 세워지고, ‘지역경제 활성화’란 허구아래 동네마다 거대유통자본이 들어섰지만 하층민들의 비루한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건설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이 낳은 사생아인 잿빛건물들은 번쩍이지만 사회안전망에 올라탈수 없는 노인들은 건물앞과 골목을 서성이며 ‘박스’와 ‘종이’를 줍는다. 지자체가 부러 나서서 허가를 내주는 동네의 ‘이마트’들은 서민들의 밥그릇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었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이들은 자연히 노른자위 땅인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주변화된다. 그곳이 슬럼이다. 슬럼으로 흘러들어간 ‘거주민들의 운명은 대개 혐오하고, 기피하는 3D 직종에 일용직 노동자’로 소모되기 십상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도시의 미래에 대해 암울하고 끔찍한 소묘를 그려놓았다. 묵시론적 고찰이라 할 만하다. 페이지와 단락마다 인용되는 섬뜩한 자료와 통계는 결국 사고를 무감해지게 만든다. ‘카불은 거대한 고형 쓰레기 저장소로 변하는 중이다,,, 끝없이 쌓여가는 쓰레기더미는 검은 비닐봉지로 가득한데, 이 속에는 아크라의 여성짐꾼들과 십대 소녀들의 자궁에서 낙태된 태아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쓰레기의 75%가 낙태된 태아다.’ 아프간엔 피랍된 한국인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처참함도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로 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곳곳에서 슬럼과 동거하는 빈곤층의 생존권은 갈수록 축소되고 매년마다 일어나는 재해는 여지없이 가난을 할퀴고 간다. 2007년의 한국을 들여다 보자. 노무현 정부는 재난에 대비해 편성한 특별예산인 예비비 수십억을 한미FTA 홍보에 쏟아부었다. 예년처럼 이번여름에도 큰 태풍이 닥쳤으면 분명 ARS수재민 돕기 등의 이벤트로 능청스럽게 성금을 촉구했을 것이다. 이렇듯, 재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비공식 부문의 확산인 슬럼의 원인은 중층적이다. 민중들의 안위를 도모해야 마땅한 국가는 선거철에만 허망한 공약을 내뱉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요타겟인 중간계층의 토지문제는 대개 건드리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드러나듯 중산계급의 쟁점 요구사안인 '감세'를 남발해 부의 재분배를 가로막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재정악화를 '복지예산'을 끌어와 벌충한다. 민중들이 시스템이 민주화 될수록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슬럼의 대량확산’ 기획의 혁혁한 공로는 IMF와 세계은행을 앞세운 브레튼우즈 체제에 돌릴수 있다. 이 국제저격범들이 권고하는 구조조정안(SAP)을 자체적 검토없이 받아들인 결과 사회적 모순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세계은행의 경우 3세계 국가들에게 대출하는 개발자금을 고리로 직접 국가의 도시정책에 개입해 주거사업의 민영화를 강제하고, 주민들의 생존권을 담보로한 짭짤한 사업을 한다. 화장실이나 물사업은 거저먹는 신천지다. 또한 이들은 거대 NGO의 후원자란 지위를 이용해 빈민의 목소리를 왜곡시킨다. ‘NGO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주민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이를 통해 계급투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NGO가 채택,선전하는 방안은 억압받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인도주의적 감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외부의 호의를 구걸하는 것’이라고 P.K다스가 지적했듯이 SAP의 가장 악랄함은 스스로 일어서려는 민중들의 다리를 후려치는데 있다는 것이다.








거주양식이 사유양식을 규정하는가? 지리학자인 워드는 ‘한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주택거주형태가 개인의 성향과 정치적 이념성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한국에선 공적 정당이 구성원의 정당한 발언을 포착하지 못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기에 일반화 시키긴 어렵지만 분명 강남구민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앞의 물음과 무관치 않다. 정작 문제는 유산계급은 단결해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줄 테두리를 강화하는데 비해 기층민중들은 정치에 등을돌려 각개약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라면 하층민에게 정치는 미진한 실망으로 기능할 수 밖에 없다.








공식부문에서 이탈된 이들은 비공식부문으로 이전한다. 서울시민은 지방시민으로 대기업 회사원은 중소기업으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비공식 부문이 일자리를 생성하는 방식은 새로운 노동부문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노동을 분할하고 이와함께 소득까지 분할 하는 것이다.’ 위에서는 인력과 자원을 쪼개고 나눌때, 분할되고 남은 잉여의 찌거기를 둘러싼 경쟁이 아래에서 벌어진다. 공식화 되지않는 부문에서 벌어지는 전투다. 슬럼의 모습은 쉽게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가리고 싶은 치부이고, 드러날 경우 지배계급의 공적 책임이 부각될 수 있기에 대개 공식수치의 외곽에 머물게 된다. 경제적 곤란에 부닥친 하층민들의 반란에 대비해 도시의 시가전을 시뮬레이션하는 랜드군사연구소의 행보는 어떤 미래를 보여주는가? 수탈장치가 잘 작동될수록 '작동체계'를 유지시키는 국가폭력장치도 공고해 지고 있는것이다. 이는 이랜드와 대추리에서 민중을 찍어 눌렀던 '곤봉과 방패'의 공포가 전지구적으로 확산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삶의 비공식화’가 지금 우리모두의 '화두'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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