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베른슈타인에 두 번째 전제로는 국가는 사회로부터 발전한다. 오늘날 국가는 계급국가들이라는 건 벌써 상투어로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도 관련된 모든거와 마찬가지로 고정된 절대적인 뜻에서는 아닌지라 변화하는 발전들에 관점에서만 파악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지배계급들에 대한 정치적인 승리와 더불어 국가는 자본주의적 국가들마저 됐다. 물론 자본주의 발전 자체로는,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들마저 미치는 영역들로 더욱 확대됐고, 국가들에 대한 새로운 기능들도 부여하고, 경제생활들도 관련해 국가들로부터도 개입하고, 규제한다는 걸 더욱 필수적인 걸로만 만들었기에 국가들에 대한 성격들도 본질적으로는 변화하게한다. 미래로는 국가들로부터도 사회와도 점차적으로 융합되면서부터는, 국가들에 기능들마저 사회로 복귀한다는 걸 준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었고, 분명하게 이러한 뜻으로는 마르크스는 노동자보호법들마저 사회적인 삶이나 과정들에서도 '사회'라는 의식적으로도 개입한 첫번째 사례들이라고 말하던, 베른슈타인에 논거로 인용하고 있는 문장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면에도 이와 같은 자본주의들에 대한 발전들로부터도, 국가라는 본질들에도 다른 변화들마저 생겼다.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국가들로는 먼저 지배적인 자본가계급들에 대한 조직들일뿐이다. 국가는 사회적인 발전들도 촉진하는 보펴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다양한 기능들도 떠맡고, 단지 이해와 사회발전들에 대한 지배계급들에 이해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이고 또한 이해관계들마저 일치하는 한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노동자보호법들로는 사회전체들에 대한 이해관계들로부터도 동시에 계급들로도 자본가들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화로는 자본주의들로붜도 발전하는 특정시점들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자본주의 발전들로부터 특시점들로 이르면, 계급으로 지배계급들로부터 이해관계는 심지어는 자본주의라는 뜻일지라도, 경제적인 진화들에 이해관계와도 대립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단계적으로는 이미 도래했고, 또한 오늘날 사회생활들에서도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현상들로는 관세정책들이나 특히 군국주의 안으로 드러나고 있다. 두 가지로는 관세정책들이나, 군국주의로는, 자본주의 역사들로도 꼭 필요했었고, 토대들로부터도 진보적인 혁명들에 역할들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보호관세들마저 없었다면, 몇몇 나라들에서는 대산업들마저 일어나지는 못했을거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완전하게 사정들마저 다르다. 모든 매우 중요한 나라들, 특히나 매우 보호관세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나라들로는 자본주의 발전들로도 대부분 같은 수준들로는 평균이다. 자본주의적인 발전들, 곧 세계경제들에 관점에서도 보자면, 독일보다는 영국으로 더 많은 상품들도 수출하는가로 영국마저 독일로는 더 많은 상품들도 수출할 수 있는가는 오늘날 전혀 문제마저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발전들에 관점들로는 무어인들도 자신들에 일마저 해왔고, 자신들에 길마저 갈 수 있었다. 진정으로 그는 오직 자신에 길만 가야만했었을거다. 다양한 산업부문들에서도 서로 의존하던 오늘날에 상황들로는 무슨 상품들에 대한 보호관세들로는 국내에 다른 상품ㄷ르에 생산비용들도 증가하게하고, 산업발전들마저 다시 저지하게한다. 그러나 자본계급들에 이해관계를 관점들로도 다시 봐본다면, 사정마저 꼭 그렇지는 않는다. 산업들에 발전들로부터도 보호관세들로는 필요하지는 않지만, 기업가들에게는 판매를 보호하고자 관세들마저 필요해진다. 곧 오늘날 관세들로는 더 이상 발전하는 자본주의 생산들도 더성숙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생산들로부터 보호하는 수단들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 자본가집단들로부터도 다른 집단들로부터도 보호하는 수단들로 기능한다. 나아가 관세들로는 더 이상 국내시장들도 형성하거나, 확대하고자, 산업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들로 필요한거도 아니고, 단지 산업들에 대한 오직 카르텔화를 위해서만, 곧 소비사회들에 대한 자본주의 생산자들에 대한 투쟁들로부터도 없어서는 안 될 수단들로만 필요할 뿐인지라. 마지막으로는 오늘날 관세정책들마저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는 고유한 특징들로는 다음으로 같다. 

오늘날 관세정책들에서도 결정적인 역할들도 해왔던 건 오히려 산업들말고, 농업들이었다. 곧 관세정책들로는 본질적으로는 봉건적 이해를 자본주의적인 형태로 바꿔 표현하던 수단들뿐이었다. 



군국주의에 대해서도 같은 변화들도 생겼다. 만일 역사를, 실현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또는 실현되어야만 했던 모습들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에 모습들로 고찰해본다면, 우리는 전쟁들로부터도 자본주의 발전들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밖에는 없어진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발칸제국들, 러시아, 그리고 폴란드는 모두 자본주의 발전들로부터도 조건이나 계기를 전쟁에서 그들로부터 승리했거나, 혹은 패배했거나 마찬가지들로만 찾았을뿐인지라. 나라들에 대한 분열들이나, 자연적인 고립들마저도 극복해야만 했었던 나라들에 경우들로도, 군국주의는 자본주의라는 뜻으로 혁명적인 역할들도 수행해오긴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상황들로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여는 아무런 역할마저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에 위협적인 갈등들도 무대마저 됐다면, 분명하게도 유럽자본주의를 위해서만 중국으로부터는 개발하는 문제에만 관련된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이식됐거나, 중국이라는 땅에서도 폭발하게된, 진전된 유럽들에 대한 적대문제와도 관련된다. 오늘날 유럽이나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도 무기를 들고 서로 적대시하고 등장한 세력들마저도, 한쪽으로는 자본주의 나라들, 다른 쪽으로는 자연경제라는 상태에 있는 나라들도 아니고, 바로 동등하게 높은 수준들로도 자본주의마저 발전했기 때문에 갈등들도 겪는 나라들이다. 물론 상황적으로는 갈등들도 일단 한 번 생긴다면 자본주의 발전들에도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완전하고도, 무의미하게도, 갈등들로는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 대한 경제생활들에도 심각한 혼란들이나 변혁마저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계급들에 대한 관점들로 보면 사정마저 전혀 다르다. 오늘날 자본계급들에게 군국주의는 세 가지 뜻에서 필수불가가결하다. 첫째로는, 다른 민족집단들로부터도 서로 경쟁하는 '민족'들에 대한 이해관계들로, 수호를 위한 투쟁수단들로만, 둘째로는 금융자본들뿐만 아니라, 산업자본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투자수단들로, 셋째로는 국내로는 노동계층들에 대한 적대적인 자본들에 지배를 위한 도구로 군국주의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이해관계들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들에 대한 발전로는 무엇도 공통점마저 없어진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군국주의를 규정짓는 특성들로부터 매우 잘 드러낼 수 있는 건, 첫째로는 군국주의는 모든 나라들에서 경쟁적을도ㅗ, 마치 내적이고, 기계적인, 추동력들로부터도 증가하고 있었다는건데, 현상들로는 몇십 년 전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조차도 않았다. 또한 비록 동기적으로는, 곧 매우 우선적으로만 관련된 나라들, 투쟁대상들, 그리고 모든 자세한 사정들도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다가오는 폭발들도 피할 수는 없고, 숙명적인 군국주의라는 자본주의 발전들에 대한 동력들로부터 자본주의로는 병리현상마저됐다. 



사회발전들이나 지배계급들로부터도 이해관계마저 충돌하는 상황들에서, 국가는 후자에 입장들만 취한다. 국가는 정책들에서 지배계급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사회발전들이나 갈등들에도 빠지고, 그리하여 점점 더 전체 사회라는 대표자로 성격마저 상실하고는, 따라서 점점 더 순수한 계급국가들로만 빠지게된다. 아니면 더욱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국가들에 대한 두 가지 속성들로는 서로 분열됐어서 국가들에 대한 존재들 내부적으로는 모순들마저 깊어지게된다. 그리고 실로 모순들도 날로 첨예해진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성격만 지닌 국가라는 기능들, 곧 사회생활들에도 국가들로부터 개입하는, 국가라는 사회를 그저 '통제'하기만 하는 일마저 많아자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들에 대한 계끕적인 성격들로는 점점 더 국가들로 하여금 국가활동들에 중심들이나 권력수단들로부터도 오로지 지배계급들로 계급이해를 위해서만 사용할 뿐이었고, 전반적인 사회전체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뜻으로만, 영역들에서도, 군국주의, 관세정책들, 식민정책들로부터도 두드러지게, 두도록 강요했다. 게다가 상황적으로도. 국가라는 '사회통제'들에도 역시나 점점 더 계급적인 성격들도 침투하고 지배하게 되어진다. 영국만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들에서도 노동자보호법들도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부디 잘 살펴보라. 



국가존재들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변화로는, 베른슈타인도 언제나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수단들로부터 보는 민주주의 발전들에 단지 모순된다는게 아니라 반대로는 완전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다수를 획득한다는 건 더구나 사회들에 점진적인 사회화로 이르는 직접적인 길임으로는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정치생활로 민주주의적 형태로는 의심할 바 없이도, 국가는 사회로부터 오직 발전하고 있다는 걸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현상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특징짓고, 구분했던, 자본주의 국가라는 본질들 속에 있는 모순들로는 현대민주주의에서도 더욱 날카롭게만 드러날 뿐이다. 분명 민주주의라는 형식들로는 전체 사회들에 대한 이해관계를 국가조직 속으로 표현하는데만 기여했을 뿐이다. 그러나 반면에, 여전하게 단지 자본주의 사회라는, 곧 자본가들에 이해관계들로만 결정적으로 지배해왔고, 단지 이해를 표현하기만 하는 사회였을 뿐이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일지라도, 내용들로는 지배계급들에 도구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다음으로 같은 사실들로도 명백하게도 또한 드러내진다.



곧 민주주의는 자신들에 계급적인 성격마저 부정하고, 실질적으로만 민중들에 이해관계를 위한 도구로만 변화되는 경향들도 지니자마자, 민주주의적인 형태들 자체로도, 지배계급들이나 그들에 국가기구들에 대한 대변자들로부터도 희생된다. 의회주의라는 다수획득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 관념들로는 문제들로부터도, 단지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인 측면만 고려했을 뿐, 또 다른 측면들로는 실질적인 내용들마저 충분하게 고려하지도 않던 하나에 추측으로만 보일 뿐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총체적으로는 베른슈타인도 가정했듯이 자본주의라는 사회들로부터도 점차 번지는 직접적인 사회주의들에 대한 요소만 아니라, 반대로도 자본주의라는 적대를 의도적으로도, 성숙하게만 하고, 발전하게만 하는, 자본주의라는 특유에 수단들이다. 



국가들에 대한 객관적인 발전들로 살펴볼 때도, '사회적인 통제'를 늘이고,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실현한다는 건 베른슈타인이나, 슈미트나, 말들로부터도, 그저 나날로 더욱 현실들로부터도 모순되는 상투어만 될뿐이다.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는 이론들로는 사회주의 질서라는 방향들로도 자본주의라는 소유와 자본주의라는 국가들에 대한 점진적인 개혁이라는 주장들에만 이른다. 그러나 양자만으로는 현재사회들에 대한 객관적인 경과들 속에 정반대되는 방향들로도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과정들로는 점점 더 사회화될 수는 있었고, 국가들에 대한 개입들, 곧 생산과정들에 대한 국가들에 통제로는 더욱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사적소유로는 점점 더 폐쇄적이기만하고, 침해할 수도 없게됐고,

국가들에 대한 통제들로는 점점 더 배타적이고, 계급이해들로만 침윤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발전들로부터 더불어 국가들, 곧 정치조직들이나, 소유관계들, 곧 자본주의라는 법적인 조직들도 점점 더 사회주의적인거도 아니고, 자본주의적으로 되어가는 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만 도입한다는 건 이론적으로도 극복할 수도 없는 두 가지라는 한계들마저 나온다. 



우선 '팔랑스테르' 체제를 건설하고, 지구상에 바닷물들도 모두 레모네이드로만 바꾸겠다는 지극히도 푸리에적인 생각들도 매우 공상적일뿐이다. 그러나 쓰디쓴 자본주의라는 바다를 충분하게 겪어보셨다면 사회주의를 단물로 바꿀 수 있다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생각들도, 마찬가지로 더욱 어리석을뿐이고,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덜 공상적이지조차 않겠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에 대한 생산관계로는 점점 더 사회주의로 접근한다. 그러나 반대로 자본주의라는 사회에 정치적이고, 법적인 관계들로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와 사회주의라는 사회들이라는 사이에도 더 높은 벽만 세우거나, 칠뿐이다. 벽들로는 설령 사회개량들마저 진전될지라도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발전들로부터도 약화될 수는 없고, 반대로도 더욱 강화되고 높아질뿐이다. 따라서 벽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건 오로지 혁명이라는 망치질로부터. 곧 모든 무산계급들로부터 정치권력들마저 장악할 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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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치카, 내 작은 새여, 


내용으로는 비록 슬프지만, 어제 당신으로 보내 준 엽서 때문에 정말로 기쁩니다. 카를도 체포된 뒤로는 당시 우리 둘이서는, 아직도 기억하십니까. 퓌어스텐호프 카페에서 웃음마저 터뜨려서, 약간에 주목마저 받았던 때처럼, 당신마저 다시 웃게할 수 있도록, 얼마나 당신 곁에 있고 싶던지.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때는 얼마나 좋았던지.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포츠담 광장에서 자동차 뒤를 쫓아가고, 키 큰 느릅나무 아래 조용한 레어트가에 위치한 꽃 만발한 동물원들도 지나 교도소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퓌어스호프에 내려 당신, 미미와도 5월에 화려한 쥐트엔데에 자리한 내 집에 들어와서는, 하얀식탁 옆에서 인내심으로 가지고 내 요리를 기다려주던 편안한 시간들, 파리스타일로 요리된 맛있는 강낭콩들도 아직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내가 당신 집에 돌출창으로 세워뒀던 괴테에 흉상이나, 설탕에 졸인 과일 한접시로 장식된 화분받침들, 무엇보다도 태양으로부터 계쏙 내리쪼이는 더울 날씨들마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로 기쁘게 봄을 느끼고는 있었지요. 그리고 밤에 당신을 방문하면, 당신도 작은 방에서 말광량이 같은 모습들로 식탁 옆에서서 차를 따르고,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주부역할들로 한다는 걸 얼마나 좋아했던지, 또 한밤중에는 향기나는 어두운 거리를 지나 집까지 서로 배웅을 해주었지요. 내가 당신을 집까지 배웅해주었구요. 푸른하늘로 된 배경으로는 마치 오래된 기사들에 성처럼 검고 가파른 윤곽들로 지닌 경사진 지붕들로부터도 우리에게 다가섰던 쥐트엔데에 환상적인 달밤들마저 기억하시나요. 소니치카, 나는 항상 당신 곁에 머물고는 싶습니다. 당신으로 함께 수다를 떨거나 아무 말 없이 있기도 하면서 당신에 생각마저 분산하게하고 싶었습니다. 당시네게 확실하지는 않던 의심에도 빠지지는 않도록 말입니다. 당신도 우편엽성에서 질문했었지요. "왜 모든 일만 이럴까요." 그렇습니다. 귀여운 이여, 예전부터 삶에는 고통, 이별 그리고 그리움 등 모든게 포함됐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일들도 받아들여야만 하고 모든 걸 아름답고 좋다고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억지로 짜낸 지혜만도 아니라, 내 천성에서도 그렇게 하고는 있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도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상황들에서도 정말로 행복하게만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내 삶에서 무엇도 놓치고 싶지는 않았고, 과거와 현재를 자체로만 받아들입니다. 당신도 당신에 인생관들을 갖도록 할 수 있다면.


당신으로부터 카를에게 사진을 보내 준 건 감사에 인사를 하지는 않았군요. 그러나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를 모릅니다. 정말로 당신으로부터 내게 줄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생일선물이었습니다. 훌륭한 사진틀로 장식되어 내 앞에 탁자 위에도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그에 시선마저 도처에서 나를 뒤쫓고는 있습니다. 세워 놓은 위체에서 마치 사람들을 보는 거와도 같은 사진들도 더러 있다는 걸 당신도 아실겁니다. 사진으로는 정말로 잘 찍혔더군요. 러시아에서 온 소식들에 카를도 분명하게 기뻐할겁니다. 그러나 당신도 개인적으로는 기뻐할 이유마저 있어야합니다. 이제는 당신, 어머니에게로 가는 여행들에 방해될 건 없겠지요. 생각해보았나요. 나는 당신 때문에 절실하게 태양이나 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건 싹마저 트기 시작하더니, 어제는 눈송이들마저 내렸어요. 쥐트엔데에 '남쪽풍경'으로는 어떠신가요. 작년에 우리 두 사람도 그곳 울타리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꽃에 풍요로움들에 경탄했었지요. 


조용한 곳에서 나는 카를에게 알려줬었던 괴테에 봄에 대한 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곤 합니다. 당신들 두 사람으로는 아직도 봄마저 잘 느끼지는 못했을거란 생각마저 들더군요.  



언덕은 벌써 부드러워져,

솟아오른다. 

눈처럼 하얀 종꽃마저 

나풀거린다. 

활짝 열린 샤프란은 

강렬한 불꽃을 피우고 

에메랄드 빛으로 싹트고 있다. 

그리고 핏방울처럼 싹트고 있다. 

앵초는 으스대고,

그렇게 되바라진 

장난꾸러기 제비꽃도 

숨느라 애쓴다. 

모든 건 

움직이고 흔들린다. 

곧, 봄은

봄은 활동하고 살아있다. 



정원에서 가장 

풍요롭게 피어오르는 건 

귀여운 사랑이란 마음.

항상 나를 향하는 

타오르는 눈길

노래를 일게 하고 

즐거운 말마저 샘솟는다. 

늘 열려 있는

꽃에 마음

진지함 속에는 정다움

고통 속에도 순수한 마음

여름이나 장미와 

백합꽃으로는 가져와도

그래도 여름도 사랑으로 겨룬다는 건 

아무런 의미마저 없을거다. 



당신은 후고볼프는 작곡한 '천상에 노래'를 알고 있나요.

고인으로 된 내 친구 파이스트는 내 생일에도 노래를 훌륭하게 불렀지요.

소니치카, 편질를 쓰는 일들로 자신마저 괴롭히지는 마세요. 

나는 자주 편지를 쓰겠습니다. 당신, 엽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말만 보내주어도

나에게는 충분하고 완벽합니다. 밖으로 많이 외출하시구, 식물들도 채집하세요. 

혹시 내 작은 꽃 도감들 가지고 있던가요. 편안하고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모든 일들도 잘 될겁니다. 두고보시지요.

당신으로 늘 많이 그리고 진심들로 포옹하겠습니다.



당신에 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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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 대중파업들에 역할. 



우리는 러시아대중파업들도 사회민주주의자들도 미리 계획해 둔 전술들에 대한 인위적인 산물들도 아니고, 현재에 혁명들에 기초한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는 이같은 혁명들에 대한 새로운현상형태를 가져온 요인들로는 과연 무엇일까. 



러시아혁명으로는 절대주의를 폐지하고, 근대지배계급들에 의회제들에 따른 입헌국가를 만든다는 건 또 하나에 과제였었다. 형태상으로는 1848년에 독일 3월혁명들이나, 18세기말에 프랑스댛혁명들에서도 해결해야만 했었던 과제들로부터도 완전하게 똑같은거다. 그러나 이같은 형태상으로 비슷한 혁명들로부터는 발생했던 조건들이나, 역사적인 환경들로는 오늘날에 러시아와는 근본적으로도 달랐다. 매우 결정적인 차이로는 그들 서방들에 지배계급들에 혁명들이나, 현재 동방에 지배계급혁명들 사이들로는 자본주의는 아주 빠르게 발전해왔다. 서유럽국가들 뿐만 아니라 절대주의라는 러시아에서도 발전들도 이뤄졌다. 대공업들로는 근대적인 계급분화들, 첨예한 사회적인불평등들, 대도시들에 근대적인 생활들, 근대적인 무산계급들도 창출해왔고, 러시아에서는 지배적인 형태들, 곧 사회발전들에서도 결정적인 생산양식들마저 됐다.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로는 붕괴되어가는 국제환경들 속에서도 러시아들에 계급의식적인 무산계급들로부터도 지배계급혁명들로부터 두드러지게도 모순적인 상황들도 맞게됐다. 지배계급들로는 서구에서도 일어났던 기존에 혁명들에서도, 혁명들에서도 지도적인 요소는 꼭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지배계급들로부터 둘러쌓이고, 조직되지도 못하고, 설령 지배계급들로부터도 군대에 복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혁명으로는 지도적이고, 주도적인, 요소로는 계급의식적인 무산계급들이다. 심지어 큰지배계층들 가운데 일부로는 공공연하게도, 새로운지배계급들이나, 도시에 새로운지배계급들에 지식인들만 명확하게 저항적이었고, 심지어는 혁명적인 성향들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혁명들에서 지도적인 역할들로부터 할 운명들을 걸머진 러시아 무산계급들로는, 자본들이나 노동 사이에 적대마저 최고점들에 이르렀을 때 자신들에 특수한 계급이해들에 대한 매우 선진적인 의식들을 가지고 지배계급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환상들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게 하는 투쟁들을 시작했다. 이같은 모순된 상황들로는, 형식 상에 지배계급 혁명들에서는 절대주의에 대한 지배계급 사회에 적대감들로부터도 지배계급 사회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대한 적대감에 좌우된다는 사실들, 무산계급들에 투쟁들로는 절대주의와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 똑같은 비중들을 가지고 벌어진다는 사실, 혁명적 투쟁에 강령들로는 정치적 자유와 8시간 노동쟁취 그리고 무산계급들에 사람들에 대한 생활들을 위한 물질적 기준들에 동일한 비중들로는 두는데로 집중된다는 사실 등에서 나타난다. 러시아혁명들에 양명성으로는 정치투쟁들이나, 경제투쟁들로부터도 밀접한 통일들, 그리고 둘에 상호작용들 속에서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미 보았듯이, 대중파업들로부터도 적절하게 표현된 러시아 사태 진행들에서 두드러진 특성들이다. 



한편으로 혁명적인 대중들에 정치적인 훈련들이나, 그들에 대한 지도를 지배계급 정당들로 떠맡고, 다른 한편들로는 혁명으로는 단순하게 낡은 정부들에 대한 타도문제들에만 한정됐던 기존에 지배계급혁명에서는 단기간들에 바리케이드 전투마저 혁명투쟁에 알맞는 형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의식마저 혁명투쟁과정들에서 계몽되고 있고, 노동계급들로부터도 자신들에 세력들로 정비하고, 스스로해야하고, 혁명들로부터도 자본주의적인 착취뿐만 아니라 낡은 국가권력들에도 대항해서 진행된다. 그와 함께 대중파업으로는 낡은 국가권력들을 무너뜨리고, 타도하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는 수단들일 뿐만 아니라 매우 광범위한 무산계급들에 계층들에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됐다. 도시에 산업무산계급으로는 이제 러시아에서 혁명에 심장으로 됐다. 그러나 직접적인 대중정치투쟁들을 벌이러면 무산계급들로부터도 먼저 하나에 대중들로 결집되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공장, 작업장, 광산, 주물공장들에 한계를 벗어나야만 하고, 자본주의들에 일상적인 멍에들로부터도 그들에게는 강요한 분열들이나, 퇴보를 극복해야만 한다. 



대중파업들로는 무산계급들에 대한 모든 위대한 혁명투쟁들로 초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충격적인 투쟁형태들이다. 자본이나 노동 사이에 대립들로는 더욱 발전할수록 대중파업들로는 더욱 효과적이고, 결정적이다. 앞서 일어났던 지배계급들에 혁명들에서도 주된 투쟁형태들이었던 바리케이드 전투와 국가무장력들에 맞서 일으키는 공공연한 충돌로는 오늘날에 혁명으로는 단지 무산계급들에 대중투쟁들이나 전과정에서 벌어진 절정이나 한 계기들에만 지나지 않는다. 

독일사회민주당에서도 기회주의자들, 베른슈타인, 다비드와 같은 작자들로는 혁명들에 대한 새로운 유형들로부터, 계급투쟁들에 대한 문명화와 완화를 예언하는데까지도 나아갔다. 사실 새로운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라는 환상을 좇아 계급투쟁들에 문명화나 약화를 바람직하게만 보아왔다. 그들은 계급투쟁들로부터도 순전하게, 완전하게, 의회 안에 경쟁으로 오그라들었고, 가두투쟁들로는 간단하게 단지 사라질거라고만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더 심오하고 훌륭하게 해결책들을 발견했다. 물론 혁명적인 대중파업들로부터도 나타난다고 결코 거친 가투투쟁들로부터도 사라지거나 단지 필요없는 걸로 되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정치투쟁들에서 일어나는 하나에 계기들 정도로만 축소하게하고, 아울러 혁명적인 시기들이나 매우 정확한 뜻으로는 거대한 문홪거인 작업들을 서로 결합하게만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화적인 작업들이란 야만적인 형태들로 자본주의 착취와 '문명화'들로부터도 전체 노동계급들에 대한 물질적인, 지적인, 수준들도 상승됨으로 뜻한다. 우리는 앞에서 대중파업들로부터도 절대주의에서 비롯한 러시아에 특수한 산물들도 아니고, 자본주의 발전들이나 계급관게들에서도 현재단계들에서 비롯한 무산계급들에 대한 계급투쟁들이라는 보편적인 형태라는 걸 살펴봤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세 개에 지배계급들에 혁명들, 프랑스대혁명, 독일에 3월혁명, 그리고 현재에 러시아혁명들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번영들이나 종말들로부터도 보이는 발전들에 연속적인 사슬들마저도 이루고는 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분화하지는 못한 지배계급들에 사회내부에서 모순들로부터도 오랫동안이나 폭력적인 투쟁들을 위한 공간들을 줬었고, 혁명들에 열기 속에서도 처음으로는 싹트고 무르익는 온갖 적대감들로부터도 방해받거나, 강제됨도 없이 격렬한 급진주의적인 정신들 속에서 거세게는 휘몰아쳤다. 자본주의들로부터도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반세기 뒤에 독일지배계급들에 대한 혁명들로는 벌써 자본이나 노동들 사이에서 이해들로부터도 대립하고 있었고, 힘에 대한 균형들도 이루고 있다는 두 가지 측면들에서도 방해받는다. 혁명들로는 지배계급들이나, 봉건지주들에 대한 타협들 속에서 질식되어서, 짧고, 비참한, 에피소드로 끝났다. 



다시 반세기 뒤로, 현재에 러시아혁명들로는 이미 절정들로부터도 넘어선 역사과정들 속에서도 한 지점으로 서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에서 정점, 가운데 다른 측면들에도 뿌리를 두고는 있다. 지배계급들에 대한 혁명들에서 지배계급이나 무산계급들 사이에 대립으로도 또 다시 질식된다는게 아니라, 반대로 격렬한 사회적인 투쟁들로부터도 새롭고 긴 시기까지도 확대한다. 그리고 새롭고 긴 시기로는 절대주의 타도라는 낡은 과제들로는 혁명, 자체로는 창출할 수 있는 많은 새로운 과제들로 견주어본다면, 사소할 뿐이다. 현재에 혁명으로는 절대주의 러시아라는 특수한 사건들 속에서 국제적인 자본주의 발전들에 일반적인 성과들을 실현하고는 있고, 낡은 지배계급들에 혁명들에, 마지막 계승이라기보다는 서방에서 일련에 새로운 무산계급들에 대한 혁명들에 선구자로 나타나고 있다. 매우 후진적인 나라들에서도 용납할 수는 없을만큼 지배계급들에 혁명들로부터도 지체됐다는 이유들 때문에, 독일에서는 매우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무산계급들에게 한층 더 나아간 계급투쟁이라는 길이나 방법들을 보여주고는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는, 러시아혁명들로부터 한 편에 훌륭한 연극들, 또는 특수하게 '러시아적인' 무엇으로 여기거나, 기껏해야, 투사들에, 영웅주의들, 곧 투쟁들에 매우 부차적인 장식물들로부터도 찬양하는데만 그치던게 아니라, 완전하게 잘못됐다. 독일노동자들로부터는 러시아혁명들로부터 자신들에 문제로, 곧 단순하게는 러시아무산계급들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문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들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사들에 대한 한 장을 본다는 걸 배워야만 한다는 건 훨씬 더 중요해진다. 독일노동조합지도자들로부터도 의회주의자들로는, 혁명적대중투쟁들로부터도 하기에는 독일무산계급들로부터도 '너무 유약하고' 독일들에 대한 조건들로부터도 '충분하게도 성숙하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그들로는 명백하게도 독일에 계급관계들에 성숙도와 무산계급들에 대한 힘으로 재는 잣대나 독일노동조합들로부터도 관련한 통계나 투표숫자들뿐만 아니라 러시아혁명들에서 벌어지고 잇는 사건들 속에 있다는 생각들도 조금도 하지는 않는다. 7월왕정들이나 파리에 6월전투 상황들에서도 프랑스에 계급대립들로부터도 무르익었음으로는 1848년 독일3월혁명들에, 그리고 과정들이나 좌절들에 정확하게 반영되었듯이, 오늘날 독일에서는 계급대립들에 대한 성숙들로부터는 러시아혁명들에 대한 사건들이나 위력들 속으로 반영됐다. 독일노동운동관료들로부터는 사무실 책상서랍들에서 그들에 힘이나 성숙도에 대한 정보를 뒤지고 있는 동안, 그들로는 자신들로부터도 찾고 있다는 건 위대한 역사적인 혁명들로 눈앞에 놓여있음을 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는 생각해볼 때 러시아혁명들로는 국제노동운동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노동운동들에 힘들이나 성숙함들로부터만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무산계급들에게는 러시아혁명들에서 그저 프롬동지나 엘름동지 등으로부터도 바라던대로, 극단적인 투쟁형태들에 대한 사용들이나 대중파업들이라는 교훈만을 이끌어내고, 그럼으로 단순하게 제국의회선거권들로부터도 폐지하는 경우에는 대비하는 예비병력들로부터도 자신들을 깎아내리면서 대중파업들로는 의회를 방어하려는 소극저인 수단들이라는 교훈만을 이끌어낸다면, 러시아혁명으로는 통탄스럽고, 터무니조차도없고, 보잘거없는, 성과를 낳는 셈이다. 우리에게 제국의회에 대한 선거권들로 빼앗아간다면, 우리는 저항할거다.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않다면, 보기를 들어 예나에서나, 엘름동지들로부터 했던 걸로 당통 식으로, 영웅들인 체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을거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지고 잇는 의회적인 권리를 매우 온건한 방법들로 방어한다는 건, 러시아혁명들에서와같이, 무엇보다도 끔찍한 대중들에 희생들로부터도 자극제로 필요한, 태풍들로부터도 휘몰아치는 듯한 혁신들이라기보다는 모든 야당들에 대한 매우 단순한 첫 번째 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방어만으로는 혁명적인 시기들에 무산계급들에 정책 모두를 충족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통선거권들에 폐지들로부터도 독일에서 곧바로 대중파업들에 대한 투쟁들로 벌일만한 상황들로부터도 불러일으킬건지에 대한 확실하게, 예측하게, 어려우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 독일에서는 격렬한 대중투쟁들로부터에 시기마저 닥쳐올거라는 건 확실하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도 단순하게 의회방어들에만 기초해서도 진술들로는 계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독일에서 대중파업들로부터도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들이나 계기를 미리 파악한다는 건, 사회민주당들에 능력 밖에 일이다. 왜냐하면 당대회 결의만으로는 역사적인 상황들로부터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들로부터도 할 수 있었고, 또 해야만 할 일들로는 투쟁들로부터도 일단 벌어지면, 투쟁들로부터는 정치적인 목적들로부터도 명확하게 해주고, 투쟁들에 정치적인 목적들로부터도 단호하고, 일관된 전술로, 공식화한다는거다. 사람들로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처방들로부터는 마련하면서부터 역사적인 사건들을 저지할 수는 없으나, 명확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사건들로는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따라서 자신들에 행동양식들로부터도 조정할 수는 있다. 



독일무산계급들로부터도 몇 년 동안 눈여겨보아 왔던 최초에 정치적인 위협들로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권리들로는 보통선거권들로부터도 광범위한 인미대중들에게 빼앗아 갈 반동쿠데타였다. 만일에 사태는 엄청나게 중요한데도,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쿠데타 뒤로는 공공연한 인민들에 운동들로부터도 곧바로 일어날거라고는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숱한 상황들이나 요인들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독일에 첨예한 상황들이나 다른 한편들로는 러시아혁명들로부터도 앞으로 새롭게 태어날 러시아에 대한 여러 국제적인 반응들로 고려할 때는, 보통선거권들에 대한 폐지들로부터도 가져올 독일정치들에 대한 파국만으로는 권리를 지키려는 투쟁들도 멈추게할 수는 없을거라는 건 자명하다. 쿠데타에는, 짧든, 길든, 어느 정도 시간들마저 지난 뒤로는 기본적으로도 격분해서는, 저항하는 인민대중들에 대한 일반들로부터도 커다란 정치적인 대가를 치르는 사태마저 뒤따르게 마련이다. 식량소요들,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육류파동들, 끝 없는 군국주의와 '해군지상주의'로 드는 비용들, 식민정책들에 대한 부패들, 쾨니히스베르크 재판들에 대한 민족적인 수치들, 사회개혁들에 대한 중단들, 철도노동들이나, 체신공무원들, 그리고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사태들, 광산노동자들에 대한 기만들이나 조롱들, 로브타우 판결이나 전체적으로는 계급별, 재판체계들, 야만적인 직장폐쇄체계 등들도 대가들이다.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모두 30년에 걸친 융커귀족들이나 거대한 트러스트 자본들에 대한 연합지배들로부터도 내리누르는 중압들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번 공마저 굴러가기 시작하면, 사회민주당들도 바라든, 바라지는 않든, 결코 다시 멈추게할 수는 없다. 대중파업들로 반대하는 사람들로는 러시아혁명들에 대한 교훈들이나 본보기들로부터도 독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준들도 될 수 있다는 점으로는 부인하는 버릇마저 있다. 이유로는 그들은 먼저 러시아에 동방들에 전제주의들로 근대적인 지배계급들에 대한 법질서로 나아가는 거대한 첫 발걸음들도 내딛어야만 한다는 걸 들고는 있다. 또한 그들은 러시아에서 혁명들에 대한 격렬함들이나, 폭력성들로는 낡은 정치질서와 새로운 정치질서들 사이로는 형식들에 대한 차이들로부터도 충분하게 설명된다고는 얘기한다. 독일에 사회적인 대립들로는 그렇게도 초보적이기만 한 격렬함들로부터는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매우 필수적인 형식들이나 입헌국가들에 대한 보장들로부터도 오랫동안 존재해왔다는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는 일단 독일에서는 공개적인 정치투쟁들도 일어난다면, 역사적으로는 규정된 투쟁목적들조차도, 현재에 러시아와는 아주 다를거라는 사실마저도 잊고있다. 독일에 지배계급적인 법질서들로는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따라서 지배계급적인 법질서들로부터도 완전하게는 고갈되어 끝장날 때도 됐고,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들마저 사라질 때도 됐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더 이상 지배계급혁명들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공개적이고, 정치적인 대중투쟁들에 시기에 역사적으로, 필연적으로, 마지막 목적들로는 무산계급독재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독일에 현재조건들이나 이러한 과제들 사이로 거리는 동방들에 대한 전제주의와 지배계급적인 법질서 사이에서 거리보다 훨씬 더 크므로, 과제들로는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는게 아니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거대한 사회적인 투쟁들로부터도 이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로부터 제시한 전망에도 커다란 모순들마저 없던가.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대중투쟁들에 대한 궁극적인 시기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무산계급들 가운데 매우 후진적인 부분들, 농업노동자들, 철도노동자들, 우편노예들에 단결권들도 얻을거고, 착취라는 매우 나쁜군더더기부터 없애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로는 정치적인 임무들로는 무산계급들에 권력장악으로 맨 먼저다. 한편으로는 매우 직접적인 이익들, 곧 노동계급들에 물질적인 향상들을 위한 노동조합들에 대한 경제투쟁들도 있고, 다른한편들로는 사회민주당들에 궁극적인 목적들도 있다. 확실하게 이건 매우 커다란 모순들도 있지만, 우리들에 논리적인 판단들에서 비롯하는 모순들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들에 대한 발달들에서도 비롯하는 모순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아름다운 직선처럼 발전한다는게 아니라, 오히려 번개처럼 지그재그들로 발전한다.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아주 다양한 발전단계들도 보여주고 있듯이, 각각에, 나라들에서는, 내부들에서는, 동일한 노동계급들에 서로 다른 게층들도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는 후진적인 나라들로부터도 매우 선진적인 계층들도 한데 뭉쳐서, 대중전체들로부터도 빽빽하게 열도 지어, 체계적으로 전진할 수 있을 때까지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는 않는다. 역사는 조건들도 성숙되자마자, 매우 잘 준비된 부분들부터 차례대로, 폭발하게되는데, 그때는 이미, 그리고 벌써, 혁명적인 시기들로부터도 격렬함들 속에서 잃어버렸던 터전들도 회복되고, 불균등하던거도 균등하게된다.



모든 사회적인 진보들에 속도는 단숨에 두 배로는 빨라진다는거다.

러시아혁명들로는 모든 발전단계들이나, 노동계급들에 대한 서로다른 계층들에 모든 이해관계들마저도, 사회민주주의적인 혁명강령들로도 통일됐었고, 수 많은 부분적인 투쟁들로부터도 무산계급들에 거대한 공동계급행동들 속에서도 통일됐었다. 조건들도 무르익는다면, 독일에서도 그러할거다. 그리고 그때에 사회민주당들에 임무는 매우 후진적인 발전국면들도 아니고, 매우 선진적인 발전국면들에 발맞추어, 당들에 전술들도 조정하는 일들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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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축적에 영역으로 군국주의. 


군국주의는 자본에 역사에서도 매우 확실한 기능들을 수행했다. 
군국주의는 모든 자체에 역사적인 국면에서 축적들을 동반했다. 
유럽자본에 시초로는 소위 '원시적인 축적' 시기에도 군국주의는 신세계와 향료를 생산하는 
국가로부터도 인도를 정복했을 때 결정적인 역할들을 했다. 
이후로 군국주의는 근대식민지에 대한 정복들, 원시사회에 대한 사회적연대로부터 파괴와 생산수단들에 점유들, 사회구조로부터 상품경제를 저해하는 국가들에서 상품무역들에 강요들, 
원주민들에 폭력적인 무산계급화와 식민지에서 임금노동에 대한 강요에도 사용됐다. 그리고 유럽 외 지역에서도 유럽자본들에 세력범위형성이나 확대들, 저발전 국가들에서 철도건설면허에 대한 강요와 국제차관에서 유럽자본에 청구권 집행들에도 군국주의는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비자본주의 문명들을 가진 지역들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 간 경쟁수단으로도 군국주의는 사용됐다. 


이에 덧붙여서, 아주 중요한 다른 기능들도 추가된다. 군국주의는 또한 순수경제적으로도 자본에서 잉여가치들에 대한 실현을 위해서도 대단하게 중요한 수단들로, 곧 자체적으로도 하나에 축적영역들로도 나타난다. 누구든 자본화된 잉여가치에 포함된 생산물 더미에 구매자로 파악해야하는가를 연구하면서도, 우리는 거듭 국가와 국가기관들을 소비자로 지적하기를 거부했다. 
이들에 소득원천들로부터도 파생된거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업종사자와 현재 사회에 다양한 기식자들, 왕, 목사, 교수, 창녀 그리고 용병들을 포함하는 잉여가치들, 부분적으로는 노동임금들에 의존해살아가는 수익자와 동일한 범주에 놓았다. 하지만 아래로 두 가지 전제조건들을 만족해야만 문제는 완전하게 해결된다. 첫째로, 마르크스 재생산공식들에 대한 뜻에 따라서, 국가는 자본주의 잉여가치와 노동임금 외에 다른 세금원천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걸 가정하고, 둘째로는 우리는 국가와 국가기관들을 소비자로만 주시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만일 국가공무원들 따라서 '용병'들 역시나 개인적인 소비마저 문제로 된다면, 이는 만약 노동자에 대한 소비수단들로부터도 비용으로 부담되는 한에서 소비는 노동계급들에게도 자본계급들에 추종자들에게 부분적으로는 이전된다는 걸 뜻한다. 


노동자 소비에 감소를 뜻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짜낸 간접세 총액들로부터는 국가공무원들에 봉급들을 지급하고, 상비군들에 군량들을 제공한다고 잠시 가정해본다면, 사회적총자본들에 재생산들에서는 변화마저 발생하지는 않는다. 사회에 대한 총수요나, 종류로나, 양에서나, 아무런 변화마저 발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활수단들 부분에서도 변화마저 발생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도 생산수단에 분야들도 이전으로 같이 유지된다. 변화된 건 그저, 단지 상품으로 노동력이라는 V와Ⅱ부문들에 대한 생산물들, 곧 생산수단들 간에 가치관계들뿐이다. 노동력들을 나타내고, 노동력으로부터도 동일한 크기로는 화폐인 V는 더 적은 양으로부터 생활수단들로도 교환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남은Ⅱ부문들에 대한 생산물들에는 무슨 일도 발생하는가.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국가공무원들이나, 상비군들에게도 바로 이동한다. 노동자에 대한 소비와 동일한 크기를 자본주의 국가기관들로부터도 소비를 대신한다. 따라서 재생산조건들로부터는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총생산물 분배에서도 변화마저 발생한다. 곧 전에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소비를 위해, V와 일치했던,Ⅱ부문들에 대한 특정 생산물들에 대한 일정부분들마저도 자본계급추종자들에 대한 소비에 할당된다. 사회적재생산들에 측면에서도 보자면, 처음부터 일정한 가치크기만큼이나, 곧 자본계급들이나, 추종자들에 대한 소비를 위해 할당된 잉여가치들에 대한 일정부분들만큼마저도 더 많은 상대적인 잉여가치들도 있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변화마저도 일어나지는 않았고, 처음부터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 국가도구를 지탱하기 위한 자금들을 간접세 메커니즘들로부터 노동계급들에 착취에서 얻는 한, 잉여가치들에 증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잉여가치들 가운데 소비된 부분만큼만 증가를 가져온다. 잉여가치와 가변자본 간에 보완적인 분할들은 단지 사후적을도ㅗ 자본이나 노동력들 간에 교환들로부터 완성된 후에 발생한다. 하지만 소비된 잉여가치는 사후적으로도 증가한거라면, 국가기관들에 소비로는 비록 노동계급들에 희생으로 발생할지라도, 자본화된 잉여가치들에 대한 실현수단들로는 고려되지도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노동계급들로부터 국가공무원들이나, '용병'들을 유지하는 비용들에 대부분을 책임지지도 않는다면, 자본가들은 스스로도 비용들을 모두 책임져야만 한다. 자본가들에게는 계급지배를 위한 기관들에 유지에 필요한 몫들을 잉여가치들에서 직접 할당해야만 한다. 할당되는 잉여가치들에 부분들로는 할당된만큼 자본가들에게 소비를 축조하거나, 더 할 수 있도록, 자본화되기로 정해진 잉여가치들 가운데 일정부분들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로는 자본계급들에 대한 직접적인 유지를 하기 위해서는 잉여가치들 가운데 더 많은 부분들을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에, 더 적은 규모에 잉여가치를 자본화할 수밖에는 없다. 자신들을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생존비용들 대부분들을 노동계급들 그리고 단순재생산들에 대한 대표자로는 농부와 수공업자들에 저가함으로,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들 가운데 많은 부분들로 자본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자본화할 수 있는 건 결코 잘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곧 해방된 잉여가치는 정작 실제로는 새로운 상품들을 또 다시 제조하고, 또한,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판매시장들을 결코 만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만일 과세로는 국가에 수중들로 집중된 수단들을 전쟁물자생산에도 이용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간접세와 높은 보호관세를 토대로 군국주의에 필요한 비용들은 주로 노동계급들이나 농민들로부터 지불된다. 두 종류에 세금들로는 별개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노동계급들로부터 지불하는 세금들은 경제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임금상승을 하고, 생필품들에 가격상승들마저 상쇄하지 못한다고 가정해보면, 현재에 노동계급들 대부분에 해당되고, 노동조합들로부터 조직된 소수들조차도 카르텔이나 경영조직들로부터 압력으로 상당한 정도에 상태기 때문이다. 간접세로는 노동자구매력에 일정부분들은 국가로 이전된다는 걸 뜻한다. 일정한 크기에 화폐자본들로붜 가변자본들로는 이전처럼 여전히 이에 부합하는 양에 살아있는 노동들을 운동하게 하는데 이용된다. 곧, 가변자본들에 적합한 불변자본들을 생산하는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용한다. 자본들에 순환들로부터 완성된 후에, 노동계급들이나 국가 사이에 분할들도 진행된다. 곧, 노동자들은 노동력들을 교환하면서도 받은 임금들 가운데 일부를 국가로 넘겨준다. 이전에 모든 가변자본들로는 노동력이라는 물질형태로도 자본들로부터 점유된 반면에, 가변자본들에 대한 화폐형태 강누데 일정부분들을 노동계급들도 보유하고, 다른부분들로는 국가로부터 소유된다. 거래는 자본으로부터 순환마저 종결된 뒤로, 자본이나 노동 사이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거래는 자본에 배후에서도 진행되기 때문에 자본순환들이나 잉여가치생산들에서도 본질적인 부분들을 결코 직접적으로는 침해하지도 않고, 무엇도 관련은 크게 없다. 하지만 거래로는 총자본들에 재생산에 대한 조건들로는 영향들을 미친다. 


노동계급들로부터 구매력에 대한 일정부분들을 국가에 이전한다는 건, 생활수단들로부터도 소비로 지출되던 노동계급들에 대한 몫으로, 이전된만큼 한 줄어든다는 걸 뜻한다. 총자본에서 상황들로는 동일한 양들에 대한 가변자본, 화폐자본으로, 노동력으로, 동일한 양들로, 점유된 잉여가치들로부터도, 노동보존들에 필요한 더 적은 양들에 생활수단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일치한다. 실제로는 노동계급들에 총생산물들 가운데 더 적은 양들도 할당된다. 총자본들에 대한 재생산에서 가변자본들에 대한 가치크기보다도 더 적은 양들에 대한 생활수단들도 생산된다. 왜냐하면 가변자본들에 가치와 가변자본들에 실현되는 생활수단 양들에 사이에서 가치비율 자체로는 변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정해봤듯이, 화폐로 표현된 노동력에 대한 크기로는 동일하게 유지되거나, 생활수단들에 가격상승들에 비례해서는, 곧 가격상승들을 상쇄할 정도로, 오르지는 않는 반면에, 간접세들에 대한 크기는 생활수단들에 가격상승으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무슨 방향으로 재생산들에 대한 물적관계들에서도 변화들마저 발생할까. 
노동력들에 대한 갱신들에 필요한 생활수단들에 대한 양이나 상대적으로도 축소됨으로, 상응하는 불변자본들이나, 살아있는 노동들도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 새로운 유효수요로는 사회에서도 발생한다면, 자유로운 불변자본들이나 살아있는 노동으로는 다른 생산들에도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데, 국가는세금제정들로부터도 창출하는 새로운 수요는 결국, 노동계급들에 구매력들로부터 일정부분들을 점유한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국가는 생활수단들 이전에 '제삼자'로만 다루었었던, 역시나 세금으로 지불되는 국가공무원들에 대한 생계를 위한 생활수단들에서도 수요를 무시하기 때문으로는 아닌, 특수한 종류로 생산물들, 곧 육지와 해상에서도 군수물자를 필요로도 하기 때문이다.



위 과정에서 무슨 변화마저 사회적 재생산들에서 발생했는지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다시 마르크스에 둘째 축적공식들을 예시로 들어보자. 



Ⅰ. 5000C+1000V+1000M=7000. 생산수단. 

Ⅱ. 1430C+285V+285V=2000. 소비수단.



이제 간접세와 이로 인해 야기된 생활수단들에 대한 가격상승들로부터 실질임금으로부터는, 

곧 노동계급들에 소비로는 간접세들에 대한 총액으로 100만큼 축소된다고 가정해보자. 따라서 노동자는 여전하게 1000V+285V=1285V를 화폐로 받지만, 실제로는 1185만큼에 생활수단들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수단들에 대한 가격상승으로도 같은 크기로, '100'은 국가에 세금으로만 들어간다. 이밖에도 국가는 농민 등으로부터도, 군수장비를 위한 세금들, 이를테면, 105만큼 거두어서, 총계250으로부터 수중으로 가지게 된다. 250으로는, 새로운 수요들, 군수장비들에 대한 수요를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에 흥미를 끄는 건, 다름아닌 노동임금들에서 유래한 '100'이다. 값어치는 '100'에 달하는 군수물자들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고자, 마르크스 공식에서도 가정했듯이, 동일한 유기적인 구성적인 평균치를 구성해보면, 불변자본, 71.5와 가변자본, 14.25로부터 요구되는 하나에 적절한 생산분야들로부터도 만들어져야만 한다. 



71.5C+14.25V+14.25M=100. 군수물자. 



또한 새로운 생산분야들에서도, 소비를 위해 71.5에 달하는 생산수단들로부터, 대략13, 분야에 노동자들에게도 유요한 간접세들에 대한 부과로 인해서, 대략 13분에1에 달하는 실질임금들에 대한 축소분들로부터도, 일치하는데 달하는 생활수단들로부터도, 더 제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새로운 판매확대에서는 발생한 자본이윤들로는, 단지 가상적인 걸로 응수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노동계급들에 대한 실질적인 소비들에 축소로는, 이에 부합하는 생활수단생산들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축소를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축소는Ⅱ부문에서, 아래와 같은 비율로 표시된다. 



71.5C+14.25V+14.25M=100.



Ⅰ. 4949C+989.75V+989.75M=6928.5.

Ⅱ. 1358.5C+270.75V+270.75M=1900.



이제 국가에 대한 중재로 동일한 '100'이라는 같은 크기에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하고, 부합되게 생산수단들에 대한 생산 또한 다시 소생하게하면, 첫눈에는 사회적인 생산들에 대한 물적형태들에서, 일정한 양들에 생활수단생산 대신에 일정한 양들에 군수물자생산이라는 외형적인 변화마저 발생했듯이 보인다. 자본으로는 한쪽 손으로부터도 잃어버린 바로 그걸, 다른 손으로 얻게 되었다. 또는 노동대중들에 대한 생활수단들로부터도 생산하던 많은 수에 자본가들로부터도,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적은 수로 거대자본집단들로부터, 판매시장들로, 잃어버린 상황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으로는, 단지 개별자본들에 관점들에서도 파악할 때만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개별자본들에 대한 관점으로는, 생산들에 무슨 분야들에서 이뤄지더라도, 별 차이는 없다. 개별자본들에는 공식들로부터도, 구분하는 총생산들에 대한 부분들로는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고, 단지 상품이나 구매자들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자본가들에게는 그로부터 생산수단들을 생산하건, 살인수단들을 생산하건, 고기통조림들을 생산하건, 탱크를 만드는 강판을 생산하건 전혀 문제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자들로부터도, 군비는 자본들에 대한 경제적 투자로, 일단, 자본가들에 대한 이익들을 위해, 다른 자본가들로부터도 빼앗은데에 대한 논거로 사용됐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나, 자본들에 대한 옹호자는 관점들을 노동게급들에게도 강요하고자 했다. 그들은 간접세와 국가수요로는 재생산과정들에서도, 물적형태들에 대한 변화만으로부터 유발할 뿐이라고, 노동계급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곧, 다른 상품 대신에 순양함이나 대포를 생산하고, 노동자는 같은 조건들이나 더 나은 조건들로부터 일자리와 빵들을 찾을 수 있다고도 설득했다. 설득들로부터도, 노동자들에게도 해당하는 한, 공식들을 한 번만 봐도 진실마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비교를 쉽게하고자, 이전에 생활수단생산들로부터도 고용된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동일한 크기로 노동자는 군수물자생산들에 고용되어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노동자들은 1285V에 달하는 노동들을 수행하고도 1185만큼 생활수단만, 얻는 결과들마저 나온다.



총자본들에 대한 관점에서 다르다. 총자본에서 군비에 대한 수요를 나타내는 국가수중에 있던 '100'으로는, 새로운 판매에 대한 영역으로 된다. 이 '100'으로는 원래 가변자본들이었다. 100은 자체로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살아있는 노동이나 교환됨으로, 임무를 다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가변자본들에 대한 순환으로는 멈추었고, '100'으로는 순환에서 분리되어, 국가에 대한 수중에서, 새로운 구매력들로 다시 나타났다. 마치 없음에서 창조됐듯이, 구매력들로 새롭게 열린 판매영역들로도, 동일한 작용들을 한다. 물론 자본들로부터도 우선 노동자들에게 '100'만큼 더 적은 생활수단들을 판매한다. 개별자본가들에게 노동자는 자본가, 국가, 농부, 그리고 '외국' 등도 마찬가지로, 소비자이고, 상품들에 대한 구매자다. 하지만 우리는 총자본에서 노동계급들에 생계로는 잉여가치들에 생산들이나 실현이라는 생산들에 원래목적들로 가는 우회로, 곧 필요악이라는 사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에게 같은 양들로부터, 생활수단들로부터도 공급하지는 않았고, 동일한 양들로부터도, 잉여가치를 착취하는데까지도 성공했다면, 훨씬 더 잘한 사업들이다. 하지만 생활수단가격들로부터도 상승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노동자는 수행할 작업들마저도 줄이지 않고 화폐임금들만 낮춘다면, 결과는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생활수단생산들에 대한 축소로는 지속적인 임금하락들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다. 만일 자본들로부터 노동자들에 임금에만 바가지를 씌운다면, 노동자들로부터도 더 적은 생산수단들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걸 걱정할 필요조차도 없어진다. 오히려 자본들로부터 기회는 올 때마다 즐겁게 몰두해야만한다. 임금상승들로부터도, 상쇄되지도 않는 간접세들로 인해서, 노동계급들에 생활수단들에 대한 더 적은 수요들도 마찬가지로, 역시나 자본 일반에서는 아무런 근심걱정도 끼치지는 않는다. 물론 임금 자체로는 하락할 경우, 가변자본들에 차액으로는 자본가들에 주머니들에만 머물고, 동일한 상품가격들로는 유지된다면, 상대적인 잉여가치로는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차액으로는 국고로 이동한다. 다른 한편들로, 화폐임금들에 대한 전반적이고, 지속적인 하락들로는, 특히나 노동조합 조직들도 높을 경우에는, 매우 드물게만 나타난다. 화폐에 대한 임금, 자체를 축소하려는 자본들에 헛된 소망들로는 여기서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한계에까지도 봉착한다. 이에 반해서, 간접세들로부터도 실질임금들을 하락하게 한다는 건, 즉각적으로도, 순조롭기만 하고, 보편적으로도, 관철된다. 이에 대한 저항들로는 대부분에 경우들에도, 오랜 시간들마저 경과한 뒤로부터,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결과는 없이도, 늘 정치적인 영역들에서도 나타나곤 한다. 만일 일정시간들마저 경과한 뒤로 생활수단들로부터 생산들도 축소된다면, 총자본들에 대한 관점에서는 사업으로부터도 판매들에 대한 손실뿐만 아니라, 잉여가치 생산들에서도 부대비용들을 절감한다는 걸로 나타나기만 한다. 노동자들을 위한 생산수단들에 대한 생산으로는 결코 잉여가치들에 대한 실현만이 아니라, 잉여가치들에 대한 생산들에서도 필수조건들로부터, 노동력들을 재생산하기 위함이다. 



우리들로부터도 든 예시로 다시 돌아가자. 



Ⅰ. 5000C+1000V+1000M=7000.

Ⅱ. 1430C+285V+285M=2000.



첫눈에는Ⅱ부문들로부터도 소비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실현했듯이,

Ⅰ부문들로부터, Ⅱ부문들로부터도, 동일하게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실현했듯이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인 총생산물들을 고려해보면, 착각마저 사라진다. 이러한 경우로, 공식들로는 

아래와 같다.



6430C+1285V+1285M=9000.



노동자들에 소비로는 '100'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양부문들에 대한 축소들로부터도,

재생산공식들에 변화로는 아래와도 같다.



Ⅰ. 4949C+989.75V+989.75M=6928.5.

Ⅱ. 1358.5C+270.75V+270.75M=1900.



그리고 사회적 총생산물로는 아래와도 같다. 



6307.5C+1260.5V+1260.5M=8828.5.



첫눈에는 위 공식에서 생산규모와 잉여가치들에 대한 생산들로부터도 전반적으로도, 

축소된 걸 확인할 수 있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축소로는 단지 우리들에 대한 총생산물들에 대한 구성에서 추상적인 가치크기를 고려했을 경우로만 적용되지만, 물적관계를 고려하면 그렇지 않는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축소된 건 모두 노동력들에 대한 생존비용들 뿐이라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이제 더 적은 양들에 생활수단들이나, 생산수단들로부터도 제조되는데, 이는 단지 노동자를 부양하는데 이용된다. 이제 더 적은 자본들도 사용되고, 더 저근 생산물들도 제조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생산목적들로는 단순하게는 할 수 있는 한 더 큰 자본들을 사용한다는게 아닌지라, 할 수 있는 한 더 큰 잉여가치를 얻는다. 하지만 여기서 자본들에 대한 부족으로는 단지 노동자들에 대한 부양들에 더 적은 자본들로부터도 필요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사회전체에서 전에는 고용된 노동자들에 총 생존비용들로는 '1285'에 달했다면, 이제는 총생산물들 가운데 축소된 양 171.5(9000-8828.5)를 생존비용들에서 공제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변화된 사회적생산물공식들을 구성할 수 있다.



6430C+1113.5V+1285M=8828.5.



불변자본들이나 잉여가치는 변하지도 않고 유지된다. 단지 사회에 가변자본들, 지불된 노동들만이 축소되었다. 또는, 불변자본들에 크기는 변하지도 않고, 유지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심스러운 경우, 진행과정들이나 정확하게 일치하는, 노동자생필품들에 대한 축소에도 부합하는 불변자본들에 대한 축소를 가정한다면, 사회적인 총생산물들에 대한 공식으로는 아래와 같다. 



6307.5C+1236V+1285M=8828.5.



사회적 총생산물들도 축소됐는데도, 두 경우로는 모두 잉여가치는 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유지비용만 축소됐기 때문이다. 



상황들로는 다음들로 같이 묘사될 수 있다. 사회적인 총생산물들로는 가치들에 따라서만 사회적인 총불변자본들, 총가변자본들 그리고 총잉여가치를 대표하는 각각, 세부분들로부터도 비율들에 따라, 나눠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맨 처음 생산물들에 대한 티끌만큼, 노동들도 추가되지는 않았듯이,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생산물들로는 티끌만큼, 생산수단들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을 수 있겠다. 생산물들 더미 자체로는, 물적인형태들에 따른다면, 모두 주어진 생산기간들에 결과이기 때문에도, 가치크기로 불변자본들로는 이전 생산기관들에 대한 결과들이고, 단지 새로운 생산물들에 이전됐음에도, 고용된 전체 노동자들 역시나, 사회들에 불변자본들만 생산하는 부분들, 전체 노동자들에 대한 생계만 돌보는 사명만 하는 부분들, 그리고, 자본계급들에 모든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부분 등 세부분들로 나뉠 수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마저 축소되면, 둘째범주로부터도 수요들에 축소에 부합되는 일정한 수들에 노동자는 해고된다. 하지만 노동자들로는 원래 자본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에 관점에서는 손실만 아니라, 잉여가치 생산들에 대한 비용들로 절감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이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발생하는 국가들에 수요로는 잉여가치에 대한 실현들을 위한, 모두 매력적인 새로운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가변자본들로부터, 순환하는 화폐들에 일부로는 순환들에 궤도에서 벗어나, 국가들에 수중에서 새로운 수요를 나타낸다. 세금들을 징수하는 기술적인 측면들에서도 보면, 과정마저 다르다. 특히 간접세로 거두어들인 금액들로는, 실제로는 자본들에 대한 국가들로부터 선불됐었고, 국가는 상품들을 구매하면, 소비자들에 가격들로부터도 다시 자본들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과정들로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변화마저 없다. 경제적으로는 가변자본으로 기능하는 금액들로부터도 처음에는 자본이나 노동력들 사이에 교환들을 중재하고, 이후로는 소비자로 노동자와 상품판매자들로부터 자본가들 사이들에 대한 교환에서, 금액들 가운데, 일부로는 노동자들에 수중에서 세금들로 국가에 수중으로도 이중한다는 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들로부터도, 순환들로 던져진 금액들로는 국가로부터 수중들로 전혀 새로운 경력들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노동력들로도 교환되는데, 교환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에 기능들을 충분하게 수행한다. 곧, 자본뿐만 아니라 노동들에서도 낯설고, 외부에도 존재하는 구매력으로, 금액들로는 자본계급들이나, 노동계급들에 생계에 사용되지도 않는 특별한 생산분야들에서도 새로운 생산물들로 목적으로 둔다. 따라서 생산분야들에서 자본들로부터도 잉여가치를 만들뿐만 아니라 실현할 수도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가진다. 이전에 노동자들에게서 뽑아낸 간접세들로부터도 국가공무원들에 월급들이나 군비공급들에서도 사용된 걸로 간주했을 때는, 우리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소비'절약'들로부터도 경제적으로 자본계급추종자들에 개인소비와 자본가와노동자들에 대한 계급지배도구로 드는 비용들로 사용된다는 걸 밝힌다. 비용적으로는 잉여가치들에 대한 가변자본들로 이전되고, 동일한 양들로부터도 잉여가치는 자본화를 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군수물자를 제조하고자 노동자들로부터도 짜낸 세금들로 사용하고, 어떻게 자본들에서 축적들에 대한 새롭게 할 수 있는 제공하는가를 알게됐다.



간접세에 기초하고 있는 군국주의는 실제로는 두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곧, 군국주의는 노동계급들에 표준생활조건들로 희생해서는, 자본지배도구들로부터도, 

상비군들로 유지하게 하고, 매우 훌륭한 자본들에 축적분야를 확보해준다. 

우리들로부터도 든 예시들에서 총액250가운데 군수장비들에 투자된 150들로부터도 

차지하는 국가구매력들에 대한 둘째원천들로는 관심들을 돌려보자. 150으로는 지금까지 고찰된 100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50으로는 노동자만 아니라, 소시민계층들로부터도 수공업자와 농부들로부터 세금들로 거두어들인다. 여기서 상대적으로는 작은부분들로는 자본계급 자신들에 세금으로는 무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산계급들로부터는 아닌 소비자들에 대표로 간주하려는 농민대중들에게는 세금들에 형태로도 국가에 납부한 금액으로는 원래 자본들로부터도 미리 지불한 건 아니고, 순환하고 있던 자본에서 떨어져나오지도 않았다. 150으로는 농민들에 수중에 있는 판매된 상품들에 대한 등가물들, 곧 단순상품생산들에 가치는 구현된다. 이들 가운데 일정부분들, 곧 자본들로부터는 처음부터 축적들을 위한 잉여가치 실현들로 이용하는 구매력들이다. 이제 계층들에 구매력들로는 군사적인 목적들로 국가로 이전된다는 건 자본들에도 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 그렇다면 무슨 종류로 변화마저 발생하는지 하는 문제마저 발생한다. 첫눈에는 역시나 재생산에 물적형태들에 변화마저 문제된다. 자본들로는 농민소비자들로는 생산수단들이나 생활수단들로 생산하는 대신에, 동일한 가치만큼 군수물자를, 국가를 위해 생산한다. 실제로 발생하는 변화로는 심오하다. 무엇보다도 국가는 세금징수메커니즘들로부터도 이용해 양적으로도 비자본주의적인 소비자들로부터 가지고 있던 실제 구매력들보다도 훨씬 큰 구매력들로 만들어낸다.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농민들에게 상품경제를 처음 강요한 건 현대적인 조세제도 자체다. 세금들을 꼭 납부해야만 한다는 압력으로도 농민들로는 지속적으로 생산물들 가운데 점점 더 많던 부분들로 상품을로 변환해야 했고, 동시에 점점 더 많은 걸 구매해야만 했다. 조세제도는 농업들로부터도 유통과정들로 편입하게했고, 농민들로부터는 자본생산물들에 대한 구매자로 되도록 강요했다. 더 나아가 조세제도는 농촌상품생산들에 대한 전제조건들 속에서도 역시나 농업경제들로부터도 조세제도 없이 나타나는거보다도 더 커다란 구매력들로 끄집어냈다. 



전에는 마을금고나 은행에서 투자처를 찾는 자본들로 확대하고자 쌓여있던, 농부와 저소득중산층들에 대한 저축들로부터 국가들로부터 소유로 자본들을 위한 수요와 투자할 수 있는 데나, 곳으로 찾는다. 더 나아가 단순상품생산들로도 충족될 수 있는, 따라서 자본축적들에 고려되지 않는 작게 분열됐고, 시간적으로도 분리된 수 많은 상품수요를 동질들에, 상품들에 대한 국가들로부터도, 거대하고, 포괄적인 수요마저 대신한다. 이를 만족하게하고자, 처음부터 높은 생산력수준들로 가진 거대산업들, 곧 잉여가치에 대한 생산들이나, 축적들에도 유리한 조건들도 필요하다. 분산된 소비자들에 대한 구매력들로는 군수물자들에 대한 국가주문형태들에서도 엄청난 크기로 집중되어, 개인소비마저 가지는 임의적인 변화나, 주관적인 동요들도 사라진다. 이는 매번 자동적인 규칙성들이나, 율동적인 성장들로 꼭 가져온다. 결국에는 이러한 군수물자생산들에 대한 자동적인 규칙성들이나 율동적인 성장들에 대한 지렛대로는 입법부라는 장치와 소위 여론형성들에 결정적인 언론들로부터도, 자본, 자신들에 대한 수중으로 놓이게 된다. 따라서 군수물자생산이라는 자본축적들에 대한 특수한 영역들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대될 수 있는 능력들로 가진듯이만 보인다. 그러나 모든 다른 판매영역들에 대한 확대와 자본들에 대한 작전기지들로는 자본들에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하는 세력범위를 벗어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로부터도 상당하게 의존하는 반면에,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영역들로부터 나타내는 군국주의를 위한 생산들로는 우선 자본들에 의지들로부터도 결정되는듯이 보인다. 



따라서 세계차원들에서 축적조건들로부터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본 간에 경쟁이라는 심화라는 역사적 필연들로는 자본자신들로부터도 최상에 축적영역들로 전환됐다. 비자본주의 국가들이나 사회들에 대한 생산수단들이나, 노동력들로는 세계저책들이나 식민지정책들부터도 동화하게하고자, 자본들로부터는 점점 더 많은 군국주의를 필요로할수록, 동일한 군국주의는 더 정열적으로도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비자본주의 계층들로는 단순상품생산들에 대한 대표자들이나, 노동계급들로부터도, 지속적으로도, 노동력들로부터도 빼앗으려고만 작동한다. 곧, 전자들로부터는 지속적으로도 더 많은 생산력들도 약탈하고, 후자에 생활수준들마저도 저하하게한다. 이들에 희생들로부터 기반해서는 자본축적들로는 폭발적으로도 증가한다. 하지만 국내나 국외양쪽들에서도 축적들에 조건들로는 일정한 수준에서는 자본몰락들에 대한 조건들로도 돌변한다. 



자본들로부터는 군국주의를 이용해서 국내와 국외에서 비자본주의적인 계층들에 대한 존재를 더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모든 노동하는 계층들에 대한 생존조건들로 저하하게할수록, 세계무대에서도 진행되는 자본축적들에 대한 일상사로는 지속적으로도 연결된 일련들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재앙들이나, 격동들로 변화한다. 재앙들이나, 격동들로는, 공황들에 대한 형태로 나타나는 주기적이고, 경제적인 재앙들로부터도, 함께, 축적들로는 지속된다는 건 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자본, 스스로들로부터도 만들어 낸 자연적인 경제적인 한계들에 부딪히기도 전에, 국제노동계급들에 대한 자본지배들에 대한 투쟁들로부터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선동능력들로 가진 첫째로는 경제형태들이다.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인차원들로도 확산되고, 모든 다른 경제형태를 몰아내고, 자신들 말고는 다른 경제형태를 허용하지도 않는 경향들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주변 여건들이나, 모체들로, 기능하는 다른 경제형태들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모든 세계들에도 보편적으로 퍼진 형태들로부터도 되려는 경향들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생산들도 보편적인 형태마저 될 수 없는 내재적인 무능력들에 부딪쳐부서진다. 자본주의는 자체로부터는 생생한 역사적인 모순들이고, 자본들에 축적운동들로는 이러한 모순들로는 해결하는 동시에 심화하게한다. 일정한 발전수준들에 도달하면, 자본들에 모순으로는 사회주의원칙들로 적용해 해결하는 방식들 외로는 다른 해결책들마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라는 목적에 축적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전지구적인 차원들에서도 생산력들에 대한 발전들로부터도 노동하는 인류들, 자신들에 삶에 욕구충족들로부터도 지향한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는 보편적이고, 조화로운, 세계차원들에, 경제형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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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생산들로부터는 우리들로 제기한 과제는 이런거다. 한 사회로는 공동에 대한 노동들, 곧 계획이나 조직들을 갖춘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도, 극히 다양한 형태들만을 발견했다. 오늘날에 사회에서는 지배들도, 법칙들도, 법칙들도, 민주주의마저도, 계획이나, 조직들에 대한 흔적마저도 발견할 수조차도 없다. 이는 무정부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자본주의사회는 존재할 수 있을까. 



1.



자본주의 바벨탑에서 구조들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일단, 잠시 다시 계획적인, 노동조직들을 갖춘 사회를 먼저 상상해보자. 이 사회는 농업들이나 공업들로부터도,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두 산업들 내부에서도, 각각에 특수한 분야들로부터도, 특수한 노동자 집단들로부터도, 전문화된 매우 발전된 분업들로만 갖춘 사회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농부와 산지기, 고기잡이와 정원사, 제화공이나 재단사, 철물공이나, 대장장이, 방적공, 직공 등등도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는 모든 종류에 노동이나 생산물들을 갖추고 있다. 이들 생산물들로는 많든, 적든 사회에 모든 구성원들에게로 돌아가는데, 그러한 이유로는, 노동마저도 공동노동이기 때문이고, 노동들로는 권위들이나, 정부에 대한 전제적 법령이든, 농노제든, 다른 종류에 조직형태로든, 나뉘고, 처음부터는 계획적으로도 조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우리는 이미 인도에 예시에서도 알게 된 공동소유라는 코뮌주의 공동체라고는 생각하기로 하자. 공동체 내부들에서도 분업들로는 역사적으로도, 사실에만 상응하는거보다도, 훨씬 더 진척됐다고 잠시만 가정해보기로 하고,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로는 농업에만 전념하는 반면에, 다른 종류들에 모든 노동으로는 그저 전문적 수공업자들에게만 맡는다고 가정해보기로 하자. 이 공동체에 대한 경제로는 우리들로부터 보기에도 매우 분명해진다. 모든 토지와 모든 생산수단들을 공동으로 보유할 수 있는 건, 다름아닌 공동체 구성원들 자신들이고, 또한 그들에 공동의지로는 각각에 대한 생산물들로부터도 무엇을, 언제, 얼마나 제작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런데도 완성된 대량에 생산물들 역시나, 모두에게 속하므로, 생산물들은 필요를 기준으로 해서도, 모두에게 분배된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상태에만 있던 코뮌주의 공동체들에서도 멋진 아침에 공동소유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그로 인해서 공동체를 규제하던 공동노동들이나, 공동의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물론 일단 도달한 고도로 발전된 분업들로는 그 자체로도 유지된다. 제화공으로는 골앞에만 앉아있고, 제빵공으로는 빵 만드는 오븐 이외에는 무엇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대장장이는 정작 대장간만 가지고 있어서 망치만 휘두를 줄 아는 등등이라고만 하자. 그러나 이전에도 특수한 노동들로부터도 모두를 하나에 공동노동들로, 사회적 경제로 묶던 사슬은 사실 끊어져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각자는 홀로만 서 있다. 농부, 제화공, 제빵공, 철물공, 직공, 등등이다. 각자는 완전하게도 자유롭고, 독립된 사람들이다. 공동체는 각자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 마저도 없고, 누구도 각자에게는 전체를 위해서만 노동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고, 누구든 다른 각자에 욕구에 대한 마음들로도 함부로 쓰지도 않는다. 하나에 전체였던 공동체로는 수천 개에 파편으로 조각난 거울처럼 개별원자들, 개별입자들로만 나뉜다. 이제 각각에 사람들로는말하자면, 그저 떨어져나간 작은 먼지들처럼 공중에만 떠다니면서, 어떻게 해야 버티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룻밤 사이에도 파국으로 일어난 공동체는 과연 무엇이될거고, 외톨이마저 된 사람들로는 다음 날 아침에는 무엇을 시작하게 될텐가. 우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 우선 이전에 했던 거와 정확하게는 똑같이 노동할거다. 왜냐하면 노동 없이는 사람들에 욕구는 충족될 수조차 없는 한 사람들에 사회에서도 노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무슨 변혁이나 변화마저 일어나더라도, 노동으로는 잠시도 멈출 수는 없다. 따라서 코뮌주의 공동체에 이전에 구성원들로는 유대마저 끊어져, 완전하게 외톨이마저 된 뒤에도, 우선 계속해서 노동할거고, 게다가 각각에 노동마저도 이미 전문화됐다고도, 가정했으므로, 각각으로는 자신들에 전공이 됐었고, 자신들에 생산수단들을 가지고 있는 노동만 계속할거다. 제화공은 장화를 만들거고, 제빵공은 빵을 구울거고, 직공은 직물을 만들거고, 농부는 곡물을 재배할거고, 등등이라는거다. 그러나 이제 곧바로 어려움마저 생긴다. 생산자들 각각으로는 극히나 중요하고, 직접 필요한 사용대상들을 만들어냈었고, 전문가던 제화공, 제빵공, 대장장이, 직공들, 각각으로는 어제만 해도 모두 똑같이만 평가되던 유용한 공동체 구성원들이었었고, 공동체 구성원들 없이는 버틸 수조차 없던 사람들이었었다. 개별적으로는 각각, 전체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저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오히려 각각으로는 자신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서는, 곧 자신들에 노동생산물만으로는 생활할 수는 없었다. 제화공으로는 자신들로부터 만든 장활를 먹을 수는 없고, 제빵공마저도 빵으로만 자신에 모든 욕구를 충족하게 할 수는 없었고, 농사꾼도 저장고에서도 아무리 풍부하게 곡물마저 있다고 하더라도, 가진 건 곡물뿐이고, 굶주림이나 추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각각으로는 다양한 욕구들도 있지만, 각각은 스스로는 하나에 욕구만 충족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생산물 일정한 양들마저도 필요해진다. 그들은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개별생산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관계나 유대마저 존재하지도 않으니, 사정마저 어떻게 되겠는가. 제화공에게는 빵을 조달할 수단마저도 없어지고, 두 사람으로는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화공들로는 제빵공들에 노동에 대한 열매를 얻으려 한다면, 그런 일로는 분명하게도 상호호예에서만 기인할 수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제화공 측에서도, 제빵공들에게는 유용한 생산물로부터는 제공해야만 그런 일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도 제빵공 역시나 제화공에 생산물로는 필요하고, 제화공에게도 똑같은 상황들로 처해있다. 따라서 상호호예에 근거는 주어져있다. 제화공은 제화공에게서도 빵을 얻고자 그에게 장화를 준다. 제화공으로부터 제화공은 자신들 생산물들을 교환하고, 이제 둘로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해서 밝혀지는 건 분업으로부터도, 고도로 발전됐고, 생산자들로부터는 서로 완전하게도, 독립됐고, 생산자들 사이에는 무슨 조직들도 없는 경우로는 모두는 다양한 노동들에 생산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로는 교환이라는 사실이다. 제화공, 제빵공, 농부, 방적공, 직공, 칠물공, 이들마저도 모두 자신들에 생산물들로 서로 교환하고 그리해서 자신에 모든 방면들에 대한 욕구를 충족한다. 이렇게 함으로, 교환으로는 산산조각나고, 개별화되고, 서로 분리된 사적 생산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유대를 만들어냈다. 노동, 소비, 조각난 공동체에 생활로는 비로소 다시 시작될 수 있는데, 교환으로는 사적생산자들 모두에게, 다시 서로를 위해서 노동할 수 있다는 걸 제공했기 때문이고, 다시말해 교환으로는 산산조각난 사적생산들에 형태들에서도, 사회적 협력들이나, 사회적 생산들 마저도 다시 할 수 있도록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협력들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독특한 방식이어서,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모든 개별적인 사람들로는 이제 혼자 힘으로도 노동할 수 있고, 자신들에 계산만으로도, 자기의지와 재량들에 따라서 생산한다. 이제 개별적인 사람들로는 생활하려면 자신에게 필요한게 아니라, 다른사람들에게 필요한 생산물들을 제작해야만 한다. 따라서 각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노동한다. 자체로는, 특별한 거도 아니고, 새로운 거도 아니다. 왜냐하면 코뮌주의 공동체에서도, 모두는 서로를 위해서만 노동했다. 그러나 특별한 건 각자는 교환할 때지만 자신들에 생산물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고는 교환에서만 다른 사람들에 생산물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들이다. 이제 각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생산물들에도 도달하려면, 교환하기로 예정된 생산물들을 자기노동으로도 제작해야만 한다. 제화고응로는 신발들을 계속 생산해야하는데,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하지도 않고, 자신에게는 전혀 쓸모없고, 내던져지는 노동들이다. 그에게 신발로부터 지닌 유용성이나 목적들로는 그는 신발들을 자신들에게만 필요한 다른 생산물들로부터도 교환할 수 있다. 따라서 제화공으로는 애초에 교환들을 목적으로만 장화를 생산했고, 달리 말해, 상품으로 장화를 생산한다. 이제 각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자신에게도 목적들을 위해서, 자신에 노동으로만 제작한 생산물들을 들고 나타나야만 자신들에 요구를 충족하게할 수 있고, 달리 말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작한 생산물들에도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해보자면, 각자는 자신들로부터 상품을 들고나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 생산물에서도 자신들에 몫, 사회적인 생산물들에서, 자신들에 몫에도 도달한다. 손수교환으로부터 완성한 생산물들로는 이제 사회적 총생산물들에 일정 부분들에 대한 청구권도 주어진다. 이제 사회적이기만 총생산물들로는 더 이상 코뮌주의 공동체들에서와 같은 이전에 형태로도 존재하지는 않는데, 코뮌주의 공동체들에서도 사회적 총생산물들은 직접적으로는 양으로, 공동체에 대한 부, 전체로 나타나고, 그리고서, 다음으로만, 분배됐다. 말하자면, 코뮌주의 공동체에서는 모두는 공동으로, 공동체계정으로, 공동체 지휘 아래에서도, 노동하고, 따라서 생산된 건 이미 사회적인 생산물들로 세상에도 나왔다. 그래서 공동생산물들로부터는 개인들에게 분배되는 일마저도 이어지고, 다음에야 개별적이던 공동체 구성원들에 사적소비마저도 등장한다. 이제는 거꾸로 진행된다. 각자는 개별적인 사적 인간으로 혼자 힘으로 생산하며, 완성된 생산물들을 함께 총합을 이뤄서 사회적인 부로 간주될 수 있게 되는 일들은 교환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각자의 몫, 곧 사회적 노동에서 몫이나 사회적 부에서 몫들은 이제 그는 자신들에 노동으로 완성해 다른 상품들로 교환하고자 가져온 특별한 상품으로도 표현된다. 따라서 이제 사회적 총노동에서 각자의 몫들은 더 이상 그에게 미리 할당된 일정한 양에 노동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그가 자신에 대한 자유재량들에 따라서만 제공한 완성된 생산물들인 상품으로도 나타난다. 각자는 원하지 않으면 노동할 필요를 조금도 없고 산책들만 다닐 수도 있지만, 그는 그랬다는 이유로도, 어느 누구도 함부로 그를 꾸짖거나, 처벌할 수는 없다. 노동하지 않는다고는 꾸짖거나, 처벌한다는 건 코뮌주의 공동체에서도 반항적인 구성원에게 벌어졌던 일인데, 거기서 건달들은 "우두머리 거주민", 곧 공동체에 우두머리에게도 심하게 훈계를 받거나 공동체 회합에서 공식적으로 경멸을 당한다. 이제는 각각의 인간들은 무제한적으로도 자유로운 자신들에 주인이고, 공동체는 권위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각에 인간들은 노동하지도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 노동생산물들로부터도 교환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에는 개인으로 열심히 노동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수단들에 크게 다르다는 건 결코 보장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람들에게 생산물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에도 강요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환으로부터는 쌍방에 필요마저 있음으로 드러날 때 성사된다. 만일 공동체에 잠시동안 장화마저 필요하지도 않는다면, 제화공들은 열심히 노동하여 양질에 상품들을 제조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서 상품들을 인수하고 대가로도 그에게 빵이나 고기 등드을 주지는 않았을거여서, 그는 여전히 생활에 가장 필요한 거 없이도 지내야만 한다. 여기서 다시 공동체 내부에 대한 코뮌주의 관계와 비교했을 때는 확연한 차이마저 드러난다. 공동체에 제화공들로부터 유지되고 있었던 건 공동체 안에서 일반적으로도 장화마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화공들로부터도 장화를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지를 담당하는 공동체관리는 그에게 이야기했었고, 제화공으로부터는 말하자면 공동체에 대한 공복, 공동체에 대한 관료로도 일했었는데, 누구든 그와 정확하게 같은 처지에도 있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제화공들로부터 유지되고 있었다면 당연하게도 공동체는 그를 부양했었다. 제화공들은 다른 누구나 그렇듯이 공동에 대한 부에서도 자신들에 몫을 얻었고, 이러한 그에 대한 몫으로는 노동에서도 그에 대한 몫으로도 직접적인 연관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노동해야만 했었고, 그도 부양된 이유로는 그는 노동했기 때문이고, 공동체에서 쓸모 있는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번 달에 그로부터 제작해야만 했었던 장화마저 많았든, 적었든 아니면 때로는 전혀 없었든, 그는 이전으로부터도 같은 이유로도 자신들에 생활수단들이나, 곧 공동체 재산들에서도 정확하게 자신들에 몫들을 얻었다. 이제는 제화공들은 사람들에게도 그에 대한 노동으로도 필요한 만큼, 곧 교환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에 대한 생산물들을 취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구매되는만큼 얻고, 지체 없이도 얻는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들로부터도 원하는 방식으로도, 자신들로부터도 원하는만큼, 자신들로부터도 원하는 분야에서도, 닥치는대로 노동한다. 그는 사회에서 필요한 정상적인 걸 생산했다는 점이나 그는 실제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시간 동안에도 완수했다는 점들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사실로는 그에 생산물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취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단히 부지런하고 건실하게 이루어지는 모든 노동들에 처음부터 사회적인 관점들에서도 나오는 목적이나 가치마저 있는 건 아니다.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들에만 가치도 있었고, 교환에서는 아무도 취하지 않는 생산물들은 제아무리 건실한 거라도 무가치하고 내던져지는 노동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 사회적 생산들에 열매에 참여하려면, 따라서 사회적 노동들에 참여하려면 상품들을 생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에 노동들은 실제로 사회적인 필요노동들로 인정된다는 점을 누구도 그에게 이야기해주지는 않았고, 그는 그러한 점들을 교환해서 자신들에 상품들로부터도 남들로부터 취한다는 건, 그러한 사품들로부터도 교환될 수 있다는 거에서 알게 된다. 따라서 노동에서 그에 대한 몫이나 전체 생사물에서도, 그에 대한 몫으로도 확보되려면, 그에 대한 생산물들에 대한 사회적인 필요노동이라는 도장, 교환가치라는 도장들을 찍히는 수밖에는 없다. 그에 대한 생산물들로부터 교환될 수 없다면, 그는 무가치한 생산물들을 만든거고, 그에 대한 노동들은 사회적으로도 쓸데없는거다. 그렇다면 그 또한 소일거리 삼아 가죽들을 재단하고, 날림으로 장화를 만드는 사적인 제화공일 뿐이고, 말하자면 사회 밖에있는 사적인 제확공들이다. 왜냐하면 사회로는 그에 대한 생산물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역시나 사회적인 생산물들로부터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제화공들로부터도 오늘 운 좋게도 장화를 교환해서 그 대가로도 식료품들을 얻는다면, 그는 배만 채우고, 집으로도 돌아가서도 우쭐대기도 한다. 자신들에 사회에서 쓸모마저 있는 구성원으로도 인정됐었고, 자신들에 노동에서도 필요한 노동으로도 인정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한 장화를 인수하려 하지 않아서 다시 장화를 들고 돌아가게만 된다면, 수프도 없이 지내야만 하기 때문에도 그는 우울할만한 근거로는 충분해진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침묵들로부터도 사람ㄷ르은 긍게 이렇게 말한 셈이기 때문에 우울하다. '여보게, 사회에는 자네는 필요없고, 자네에 노동은 전혀 필요한거도 아니니, 자네는 평온하게 목매달아 죽어도 되는 쓸데도 없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네.' 우리 제화공들을 사회와도 접속해준다는 건 매번 이같은 몇 켤레에 대한 교환 할 수 있는 장화들이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교환가치들이다. 그런데도 제빵공들, 직공들, 농부들도 우리 제화공들에게도 처한다는 건 똑같은 처지다. 다들, 모두들 그렇다는거다. 제화공을 때로는 인정했다가도, 때로는 업신여이고 싸늘하게도 쫓아내는 사회라는 건 그저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만 노동하는 개별적인 상품생산자들 모두에 대한 합계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들로도 이루어진 사회적인 노동들 및 사회적인 생산물들에 대한 합계라는 건 이전에 코뮌주의 공동체 경제에서도 그랬던거와는 다르게, 개별 구성원들에 모든 노동 및 생산물들에 대한 합계와도 전혀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현재로는 누구든 열심히 노동할 수는 있어도 그 생산물에서는 교환에서 인수자를 찾을 수도 없다면 내던져지고, 전혀 계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교환만이 무슨 종류로 노동이나 무슨 종류로 생산물들이 필요했었는지를,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계산됐는지를 결정한다. 이는 마치 모두가 일단은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대로 노동하고 난 다음에 완성된 사적인 생산물들을 어떤 장소에 끌어다 모으고 거기서 사태를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도장을 찍는거와도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한 노동들에는 사회적 필요노동이었기에 교환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이러저러한 노동들은 필요노동들도 아니었고 따라서 무엇도 아니고 헛된거였다는 식이다. 이 도장으로부터 말해주는 건 이러저러한거에도 가치는 있었고, 이러저러한거로는 무가치해서도 관련자들에 대한 사적위안들이나 사적곤경들에만 머물 뿐이다. 



다양한 세목들을 요약해보자면, 무슨 다른 간섭들이나 규제들로부터도 없었다면, 상품교환들이라는 단순한 사실들로부터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에 중요한 관계들마저 결정된다는 건 밝혀진다. 



1. 사회적 노동에서 사회구성원들, 각자에 대한 몫. 몫으로는 종류들에서나 양적으로나 이제 더 이상 처음부터도 공동체로부터 각자에게 할당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완성된 생산물들에 상태에서 사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거나 받아들여지지도 않게 된다. 이전에는 우리 제화공들로부터 제작한 장화 한 켤레는 직접적이고도, 사전에, 골에서만 만들어지고 있을 때도 이미 사회적인 노동들이었다. 이제는 그 장화는 다음에는 누구와도 관련마저 없었던 사적인 노동들이다. 그런 다음에야 장화는 비로소 교환시장에서도 확인들을 거치는데, 교환에서는 누군가 취하는 한에서만 장화에 사용된 제화공들에 노동으로부터도 사회적인 노동들로 인정된다. 그렇지 않는 노동들로는 제화공들로부터는 사적노동으로만 남게되고, 무가치해진다. 



2. 사회적인 부에서 구성원 각자들에 대한 몫들. 제화공들로부터는 이전에는 공동체에서 완성된 생산물들에서 자신들에 배당분들을 분배를 얻었었다. 배당분으로는 다음들로 같이 할당됐다. 첫째로는 일반적인 부유함들에 따라서만, 곧 그때그때에 대한 공동체들에 재산수준들에 따라서만, 둘째로는 구성원들에 필요들에 따라서만, 가족 수만 많던 가족들로부터는 가족 수로는 적은 가족들보다도 많이 얻어야만 했었다. 민족대이동 시대에도 유럽으로 와서는 로마제국들에 잔해 위에 정착한 게르만족 사이에 정복한 땅들로부터도 분해할 때에도 가족들에 규모는 일정한 역할들을 했다. 1880년대에도 여전하게 이곳저곳 공동소유지를 재분할하던 러시아에 공동체는 그럴 때마다 머리 수, 곧 각 가정들에 대한 "입"에 대한 수를 고려했다. 교환들로는 일반적으로도 지배하는 경우로는 사회구성원들에 요구와 부에서 그에 대한 몫이나 사이에 모든 관계로는 없어지고, 몫이나 사회에 대한 전체, 부에 대한 크기 사이로도 모든 관계마저도 없어진다. 이제는 각각에 구성원들로부터도 상품시장들에 내놓은 생산물들만이 사회적인 부에서도 그에 대한 몫으로만 정할 때 결정적이고, 또한 그 생산물들로부터도 교환에서는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걸로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그에 대한 몫으로 정해진다. 



3. 마지막으로 교환에 대한 메커니즘 자체로부터도, 사회적인 분업들로도 규제된다. 이전에는 공동체에 얼마나 많은 일꾼들도 필요한지를, 얼마나 많은 제화공들, 제빵공들, 철물공들, 대장장이들, 등등도 필요한지를 공동체는 결정했다. 개별 업종 사이에 적절한 비율로 정하고 필요한 모든 노동분야들로부터도 돌아가도록 돌본다는 건 공동체에 책임이고, 공동체로부터 선출한 관료들에 책임들이었다. 분명하게도 관료들은 무슨 촌락공동체들에 대표자들로부터도 사형마저 선고된 철물공들을 석방하고 대신에 촌락에 대장장이는 둘이니 차라리 가운데 하나를 목매달라고 요청했던 유명한 사례를 알고는 있었다. 사례로는 공동체에서 있었던 적절한 분업들에 대한 공적배려들에 탁월한 예시들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는 중세에 사를마뉴는 자신에 영지에 필요한 수공업자들에 종류와 수를 얼마나 분명하게 지정했는지를 보았다. 또한 우리는 중세도시들에서 길드 규정들로부터 개별업종들로부터도 적절한 비율로 돌아가도록 배려를 쏟으면서도 모자란 수공업자를 외부에서 도시로 불러들였다는 걸 보았다.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교환마저 일어나는 경우라면 이런 문제는 교환 자체마저도 규제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 제화공들에게는 구두를 만들어달라고는 청하지도 않는다고 해보자. 본인마저 원한다면 제화공들로는 비눗방울들을 생산하거나 종이로 용 모양에 연으로도 생산할 수도 있다. 또한 본인 마음에도 든다면 장화제작 대신에 방적, 방직 아니면 금세공 기술로도 이전할 수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사회에 그는 일반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사회에 그는 제화공으로 특별하게는 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회에는 일반적으로도 신발류는 필요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제화공들은 욕구들을 충족할 수 있는지를 이제 누구도 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제화공들마저 필요한지를, 오히려 모자란 건 직공이나, 대장장이마저 아닌지를, 아무도 우리 제화공들에게는 말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말하지도 않았던 건 그는 다시 상품시장들에서만 배워알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신발마저 교환에서 누군가로부터 취해진다면, 그는 사회에 자신들로부터도 제화공으로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반대라면 반대도 알게된다. 그는 최고에 상품들도 제작할 수 있지만, 다른 제화공들로부터도 욕구를 충분하게 충족할 수 있었다면, 그에 상품들로는 쓸데없는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는 이 업종의 생업을 그만두어야만한다. 수가 넘쳐난 제화공은 대략 동물의 몸에서 쓸데없는 물질이 잘려나가는거와 동일한 기계적인 방식으로 사회에서 잘려나간다. 그에 노동들은 사회적노동들로도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므로, 역시나 사양길에 들어선다. 자신들을 위한 생존조건들인 다른사람들을 위해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들을 생산하라는 바로 이 강요로 인해서, 우리에 퇴출된 제화공들은 결국 다른 업종으로도, 곧 욕구는 강력하지만 아직 충족되지는 않는 업종, 말하자면 직물업들이나 화물운송업들로도 가게되고, 그러면 거기서는 노동력부족분으로만 채워진다. 그러나 이런식으로도, 업종들 사이로는 올바른 비율로도 유지될 뿐만 아니라 업종 자체로는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회에서 무슨 욕구가 멈추거나, 다른 생산물들에 의해 이제까지보다 욕구마저 더 잘 충족된다면, 이는 이전에 코뮌주의 공동체에서처럼 구성원들로부터 결정한 무언가도 아니고, 그런 일마저 생기면 노동하는 사람들은 그에 맞게는 무슨 업종들에서도 밀려나 다른 직종들로 향해간다. 이런 일들로 낡아빠진 생산물들로는 교환될 수 없다는 점으로만 나타난다. 17세기에도 가발을 만드는 일들에는 도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수공업들이었다. 하지만 유행은 바뀌었고, 사람들은 가발쓰기를 멈춘 뒤에, 업종들로는 그저 가발들을 팔 수 없어서 자연사했다. 현대도시에 하수시설로부터도 확장되고, 주택마다 기계적으로도 물들을 공급하는 수도관으로부터도 확장되면서부터는, 물 나르던 사람들, 곧 빈에서는 바써러라 부르던 사람들마저도 점차 사라지고는 있다. 이제 반대되는 경우를 한 번 가정해보자. 사회가 그에 대한 상품들을 체계적으로 뿌리치고 있어서 자신들로부터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하지는 않다는 느낌마저 명확하게 받는 우리 제화공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일원이라 생각하고는 끝까지 살겠노라 생각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살기 위해서는, 그는 우리는 알고 있고 그도 알듯이, 상품들을 생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생산물들, 말하자면 수염을 장식하는 끈이나 신비로운 구두약들을 발명했다고 해보자. 이렇게 함으로부터 그는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노동분야를 새롭게 만들어낸건가, 아니면 많은 대단 한 발명천재들로부터 그랬듯이, 인정받지도 못한 채로만 남을텐가. 이 또한 누구도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그는 이를 상품시장들에서만 배워알게된다. 그에 새로운 생산물들로부터도 지속적으로도 교환에서 남들에게만 취해진다면, 새로운 생산분야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걸로 인정받고, 사회적인분업들로는 새로운 확대를 경험한다. 여러분들도 보시다시피, 코뮌주의 통치와 공동소유는 붕괴한 뒤, 경제생활에서 무슨 권위와 노동에서 무슨 조직이나 계획이나, 개별궝원들 사이에 무슨 유대도 사라진 뒤로는, 여느 때와는 다른 날 아침에 일단은 완전하게 희망마저 없는 듯이 보였던 파국들도 있는 뒤로는, 우리 공동체로는 점차적으로도 다시 일정한 연관이나 일정한 질서마저 생겨나게 하고 있었고, 게다가 완전하게 기계적인 방식으로도 그렇게 하고는 있다. 개별구성원들 사이에 무슨 소통도 없이, 무슨 꽤 노픈 권려글에 개입들도 없이, 개별화된 파편들은 그르든 옳든 짜맞춰져 전체로 된다. 교환 자체가 펌프장처럼 기계적으로 경제전체를 규제한다. 교환마저 개별생산자들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교환이 분업들을 규제하고, 교환마저 생산자들에 부와 부에 대한 분배를 결정한다. 교환마저 사회를 통치한다. 물론 교환들로는 이제 막 우리 앞에 형성된 다소 기이한 질서다. 사회는 이전에 코뮌주의 공동체에 통치 아래 있던 거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때는 사회는 꽉 짜인 전체였었고, 구성원들은 자라서 서로 하나로 되고, 끈끈하게 연대하는 일종에 대가족이었고, 견고한 유기체, 심지어는 화석화됐고 상당하게 꼼짝달싹하지는 않았고 경직된 유기체이기조차 했다. 이제 유기체는 매우 느슨한 구조물이고, 구조물 안에서 개별구성원들은 번번하게 와해됐다가 다시 묶인다. 사실로 우리는 보았듯이, 노동해야만한다는 거도, 무언가가를 만들려고 노동해야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노동해야만 하는지, 심지어는 왜 노동해야만 하는지도 아무도 우리 제화공들에게는 말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들로도, 그에게 생산수단들도 과연 필요한지, 무엇으로 과연 필요한지를,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아무도 그에게도 묻지는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마음조차 쓰지 않았고, 그는 사회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에 존재를 상품시장들에다 자신들에 노동에 생산물들을 들고 나타남으로 사회에도 알린다. 그에 상품들도 인정되게되면 그에 존재는 인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노동으로는 사회에 필요한거고, 따라서 그는 사회에 대한 노동하는 구성원으로도 인정되는데, 단 그로부터 만들어진 장화들마저도 교환에서만 취해지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 장화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만 사회적인 부에서 생활수단들을 얻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사적인간으로 사회구성원도 아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노동으로는 사적노동으로 아직 사회적인 노동도 아니다. 그는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들, 곧 상품들을 완성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소유하고 매각할 수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사회구성원들로 된다. 장화 한 켤레는 교환될 때마다, 그는 사회구성원으로 되고, 장화 한 켤레는 판매되지는 않을 때마다, 그는 다시 사회에서도 배제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화공은 그 자체로는, 인간으로는 사회와도 결합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에 장화는 비로소 그를 사회와 접촉하게하고, 장화는 교환가치로 있는 한에서만, 장화는 상품으로도 판매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이는 지속적인 접속들만이 아니라, 언제나 갱신되고 언제나 다시 풀어지는 접속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제화공들 이외에 다른 모든 상품생산자들도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사회로는 상품생산자들 말고는 누구도 존재하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생활하기 우한 수단들을 교환에서만 얻을 수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들을 위한 수단들로부터도 손에 넣으려면, 누구든 상품들을 들고 나타나야만 한다. 상품들을 생산한다는 건, 곧 생활조건들이고, 매상황들에서도 생기는 사회상태에서는 모든 인간들은 완전하게 떨어져 있는 개인으로도 개별적인 생존들을 영위하고, 개인들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에 상품들로부터만 간헐적으로나마 전체와도 계속 접촉되거나 아니면 접촉들에서도, 다시 차단된다. 매우 느슨하고 유동적인 사회들이고, 개별구성원들에 대한 끝없는 소용돌이 안에만 잡혀있는 사회다. 



우리는 계획적인 경제들에 대한 철폐와 교환에 대한 도입들로부터도 사람들에 대한 사회관계에서도 하나같이 완전한 변혁들을 가져왔었고, 변혁들로부터도 사회를 철두철미하게만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들을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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