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석사 5학기, 결론은 한달째 한줄도 쓰지 못했고 어쩌면 아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누구인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서 내가 외롭고 그들은 더욱 외로워지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 P70
그렇다 해도 극단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사남이어서? 이야기 속엔 언제나 삼남까지만 나온다. 어떤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사남의 충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 P72
나는 가끔 건우 선배가 반자본주의 요정 비슷한 게 아닐까 의심하는데, 건우 선배 같은 타입들이 부잣집에 태어나 집안의 재산을 조금씩 사회로 돌려보내며 축적의 고도화를 막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례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 P76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기 중에 떠도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물고기처럼 어떤 아이디어는 지표면에 아주 가깝게, 어떤 아이디어는 성층권쯤에서 부유하다가 사람들의 안테나에 슬쩍 지느러미를 가져다 대는 것이다. 비슷한 발명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명되고, 비슷한 전설들이 먼 땅에서도 태어나는 건 그렇게 설명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안테나를 찾아. 나는 죽고 없는 사람들에게 중얼거렸다. - P85
알다시피 밴드는 나의 어떤 강박관념을 지운다. 하다가 안되면 노래로 만들지 뭐, 하고 가볍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나약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이상한 방식으로 힘이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복사뼈에 관한 꿈에서도 해방되었다. 언젠가 또 굉장한 이야기가,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이야기가 안테나에 걸려 나를 사로잡는다 해도 환 태평양이 내 편인 이상 문제없다. 논문이 되지 않으면 노래라도,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괜찮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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