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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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기 위해 2013년 11월,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고 기쁜 마음 감추지 못하며 일필휘지 써내려간 나의 감상문을 다시 읽었다. '씨발 그래 좋다, 어차피 인생 좆같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돈이나 졸라 벌어서 부르주아가 되자, 그럼 되나? 그럼 이 고통이 해결이 되나?'1) 라는 명문장으로 내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준 수작이었다. 그 이후 4년, 나는 김사과의 신작을 간절히 기다려 왔으나 그녀는 두 권의 산문집만 내놓으며 내 간을 보았다. 약자인 나는 늘 짭쪼롬하게 기다렸다. 씨발 그래 좋다, 어차피 문학판 좆같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계속 김사과나 졸라 기다려서 일류독자가 되자, 그럼 이 고통이 해결되겠지? 대충 이런 심정이었다.

  고통을 두 권의 책 한꺼번에 내놓는 걸로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내심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라.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니 보상이 크구나. 비록 한 권은 개정판이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더 나쁜 쪽으로'는 일단 얇다. 단편소설 묶음인가 했는데 읽어보니 그건 아닌 듯. 하나의 테마를, 연작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여러 개의 소설, 혹은 산문, 어쩌면 운문, 아니면 그냥 파편적인 문장들로 막 내던지다시피 해서 묶어놓은 책이다. 3부에 이르면, 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시인가? 싶게, 그냥 파편화된 문장들이다. 

  파편화. 부서진 조각들. '더 나쁜 쪽으로'를 정의하기에 이것보다 더 나은 단어는 없을 것 같다. 결코 합쳐지지 않는 것들. 1부의 표제작 '더 나쁜 쪽으로'는 낯선 거리를 헤매 다니는 '나'가 증언하는 'NEO 지옥의 묵시록'이다. '우리, 우리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들으러 같은 공연에 가고 같은 영화를 보러 같은 극장으로 향하던, 같은 추억으로 얻어맞고 더럽혀진 우리들은 물론 같은 거리에 속해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유머에 웃고 같은 불면에 시달린다. 같은 외로움, 버림받은 느낌에 운다. 같은 사랑에 빠지고 같은 이별을 한다. 이 늦은 밤 우연히 여기 모인 우리가 바로 그들이다. 끔찍하게 쌓아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 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2)  여기서의 '우리'는 한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말한 것처럼 '같은 것의 지옥' 속을 살고 있는 '우리'-의미도 실체도 없는 무리-복제된 클론들이나 다름 없는 '같은 것의 공허한 창궐'이다. 이후의 1부는 여러 장소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거대한 복제의 더미 안에, 서울도 뉴욕도 샌프란시스코도 포르투갈도, 파리와 도쿄도 의미는 없다. 모든 것은 동일하다. 지옥 같은 반복, 같은 것의 연쇄,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되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의 소멸'이다.3) 그리하여 일찌감치 김사과는 '천국에서'의 결말부에서 9.11 테러와 연관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사회의 소멸) 어떻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비극배우처럼 부르짖었다.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쌍둥이들, 그들의 부서져 내리고 무너져 내리는 파편과 먼지들이 바로 21세기 우리의 세계를 예시하는 지옥도였던 것이다.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리라고는......'4)

  따라서 2부의 세 소설, '박승준씨의 경우'와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대'는 모든 게 무너져내린 시대, 모든 것이 파편으로 흩어진 시대의 클로즈업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옷을 주워 입는 대학생 박승준 씨는 '출신 성분'을 배반하고 강남의 힙스터가 된 대가로 김밥천국 안에 처박혀 죽음을 맞는다. 몸에 좋은 카레를 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결국 버블티 여자를 위협하고 조선족 살해 앞에 침묵하며 햄버거로 투항한다. 그 투항은 철저히 자발적이며 기쁨에 차 있다. 그리고 도래하는 이천칠십X년. 이 미래의 픽션은 여러 모로 앨프리드 배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를 연상시킨다. 모든 것이 진일보한 시대에 힙스터됨의 극치는 반대로 돌아가는 것 - 한복 혹은 빅토리아 시대의 복식을 하고, 말을 타는 것, 직접 쓴 서찰을 전하는 것, 셰익스피어 식의 연애를 하는 것, 사랑 때문에 자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취향의 문제이며 전시되어야 하는 거리가 된다. 모든 것은 보여져야 하고, 노출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하며, 과시적이어야 한다. 인간이 순간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자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과시적 소비로 삼던 '타이거! 타이거!'의 유한계급들처럼, 이천칠십X년의 부르주아 6세대들은 남녀가 내외하고 앉아 시를 쓰고 러시아 소설 같은 애칭을 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 서정적 사랑은 결국 '과천시 거주민의 비참함'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끝없는 말들의 정원', '계절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기이한 정원'의 풍경이며,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5)케 하는 김사과 식의 예언적 지옥도이다.

  '더 나쁜 쪽으로' 라는 제목에서 그래도 '가장 나쁜 쪽으로'(베케트)라도 나아갈 수 있으니 일말의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글을 보았는데, 과연 그럴까?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라는, 어찌 됐건 최상급은 아니고 비교급에 그친 것이니 희망은 남았다는 말.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것은 나쁜 것. '나쁘다-더 나쁘다-가장 나쁘다'는 희망의 여지가 50%-25%-0%이렇게 점점 줄어드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0%-0%-0%인 것이다. 나쁘다는 것은 그냥 나쁜 것이다. 조금 나쁘고 덜 나쁘고 조금 더 나쁘고 살짝 나쁘고 알게 모르게 나쁘고 끔찍하게 나쁘고 최악으로 나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나쁘다. 이성복 식으로 말하자면 '나쁜 것은 언제나 미치게 나쁜 것, 나쁜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나쁜 것, 왜 어떻게 나쁘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나쁘다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6) 김사과의 소설에서 '희망'이라는 것을 찾는 것만큼 무용한 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사과의 소설은 철저히 허무하고, 냉소적이며, 자기혐오적이고, 자기를 혐오하는 이상으로 타인과 세상을 혐오하여, 그 예전 김사과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처럼, 식당 아줌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 가서 아버지를 때려죽이는 발광의 행동으로밖엔 해소할 수 없는 파괴적 욕동이 있다. 그것이 오늘날, 이 시대의 젊음이다. 꼰대들은 받아들일 수 없고 기승전결로는 씌어질 수 없으며 결코 교훈의 카테고리 안에 묶일 수 없는 난폭함과 제멋대로성. 그것이 김사과가 보여주는 이 시대 코스모폴리턴들의 초상이다. 이해할 수 없음. 말로 설명할 수 없음.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와 브랜드, 자학과 공격성의 난폭한 조합, 고급과 저급 사이의 봉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박한 조합. 조 말론의 향수 냄새와 고시원 방의 카레 냄새가 뒤섞인 이 저주스럽고 힙한 풍경. 이것이 201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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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사과, '천국에서', 창비, 2014, P.186
2) 한병철, '같은 것의 테러',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P.10 참조
3)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P.28
4) 김사과, '지도와 인간', 위의 책, P.96
5) 김사과,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세대', 위의 책, P.174
6) 이성복,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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