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중용 - 수양과 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증자.자사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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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은 '대학'과 '중용'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먼저, '대학'은 말한다. 개인 수양이 가정과 국가를 이어서 천하 평화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평화의 기본이 된다는 '이상'을 제시한다. 질서과 체계, 규칙과 정리라는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공자의 '유교'를 잘 보여준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정리', '질서', '체계', '규칙'이다. 태양은 태양의 자리를 지키고, 달은 달의 자리를 치키고,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풀은 풀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켜야 한다.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천년 넘은 꼰대어는 소통이 안되는 '권위주의 사고방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 '유교'는 '꼰대'의 철학이다. '질서'를 강조하는 쪽이 '위'라는 점이 이유다.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는지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선택적 철학이 가장 '유교'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세다.

'유교'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하지, 상대가 상대의 위치에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위치'에 오른 이들이 난데없이 "너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라." 하니, 그것은 '유교'를 빙자한 '간섭'이 된다.

대부분의 철학은 '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수양'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너'는 없다.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다만 오늘 그 '성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공자팔이'는 공자말을 앞세워 말한다.

"너의 본분을 다하라."

사실 유교 철학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둘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왜 나만 해?"

이 유치하고 철없는 생각은 그대로 성장하여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된다. 자신만하기에 '손해' 본다고 생각한 이들이 '다른 이들의 철학'을 고쳐 놓으려고 간섭하기 시작한다.

상대는 하던 말던 자신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임금'이 '임금'의 위치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신하'는 '신하'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는 하지 않는데 '나만' 한다고 손해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수신'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에 힘쓴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점차 자리를 잡는다. 부처를 팔고 예수를 팔고, 공자를 파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위엄이 없는 자들은 성인을 힘을 빌어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니 결국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스승'을 욕보인다.

다음으로, 중용은 무엇인가. 중용은 '유교와 도교'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적절한 중간을 말한다. 모든 행동과 사고는 중도를 지켜야 한다. 도덕적 행위와 인간관계의 가르침도 준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이 말은 '지나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자른 편이 낫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다다익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은 꼭 화를 부른다. 즉 선을 넘지 않는 조화로움은 '질서' 만큼이나 중요하다. 달이 달의 위치에 떠 있는 이유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과 지구로 부터 튕겨 나가는 관성 사이의 균형 때문이다.

즉, 대학과 중용은 사실 우주를 이루는 방식이다. '균형'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균형'을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너무 붙어 '충돌'하지 않고, 너무 멀어 '튕겨져' 나가지 않는 적절한 선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만 그렇겠는가.

군자지교 담담여수(君子之交淡淡如水),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아서 담백하고 평온해야 한다. 군자의 우정이 욕심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소인지교 감감여주(小人之交甘甘如酒), 소인의 사귐은 달콤한 술과 같아서, 진하고 강렬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소인의 우정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함께 여행하거나 동거를 하게 되면 꼭 싸우게 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다보면 그 흠을 보게되고 싸우게 된다. 즉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화'를 면치 못한다. 모든 관계는 '대학'과 '중용'처럼 질서와 균형이 중요하다.

다시보자면

공자의 철학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예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부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너'가 아니라 '나'에 두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원수'가 해서는 안된다.

'깨닮음'에 이르러라, 라는 말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두어야 한다.

공자의 수양, 예수의 사랑, 부처의 깨닮음.

그 가르침을 우리는 때로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하는 무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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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 Andersen, Memory of sentences (양장) -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
박예진 엮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 센텐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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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여행자를 자신의 침대에 눕힌다. 누운 여행자가 침대에 몸이 맞지 않으면 자르거나 늘려서 맞춰 버린다. 그리스 신화 중 하나다.

잔혹 행위의 명분은 '정의 집행'이다. 결국 '폭력'이고, '잔혹함'이만 그것이 문명 사회에까지 남아 일부 유용하게 사용된다. 왜 그럴까.

현대 사회는 '죄값'을 치루게 하지 않는다. '교화의 기회'를 준다. 결국 폭력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감옥'이라는 용어는 '교도소'로 바뀌고 다시, '교정시설'로 바뀌었다. 이처럼 사회는 '비폭력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비문명에서 문명으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에 대한 '합의'다. 다수가 '규칙'에 합의한 국가가 '문명국'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집단의 상상력'이 하나의 커다란 규약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법'이 된다. 자연계에서 '살해'나 '폭력'은 '죄'가 아니다. 약육강식은 '생존'의 최우선 덕목이다. 이런 자연계에서 태어난 인류는 점차 다수가 합의에 이른 '규칙'을 갖게 됐다. 점차 사회가 '문명'으로 나아 갈수록 '폭력'보다는 '비폭력'으로 흐른다.

인간 사회는 '공리'를 추구한다. 폭력이 결과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차원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에 합의했다. 그럴싸하게 말하면, 법리와 법치는 '문명화'의 기준이다. 사회가 개인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때, 집단은 '폭력'이라는 원시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폭력'은 즉각적인 해결책이다. 즉, 때로는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불길로 쓰러지는 아이를 보게되면, 발로 걷어차서라도 일차적으로 불길 밖으로 꺼내야 한다. 그거에 대고 비폭력과 대화를 선호 할 수는 없다. 언어적으로 '폭력'이 '사회악'처럼 되는 시대지만 때로 '폭력'은 즉각적인 해결책으로 유용하다.

반면 울고 있는 아이에게 '호랑이' 만큼이나 효과적인 것이 '곶감'이다. 때로는 '교화'도 반드시 필요하다. '교화'와 '폭력'은 적절한 비율로 사용돼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교화'가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물을 훈련 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훈련시키는 확실한 방법은 당연히 먹이를 통해, 혹은 적당한 신체적 행위를 동반해서다.

언어가 덜 발달한 아이를 점차 문명인으로 기르기 위해, 일부는 비문명적인 방식이 필요하기도 하다. 단순히 신체적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심리적인 위협이다. 잔혹한 이야기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어린 시절, 밤 열 두시면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12시 전에 잠에 든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거나 누워서 먹으면 소가 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설득할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 논리력을 가지고 길들이는 것 보다는 일단 행동을 통제하고 문화를 습득하는게 먼저인 경우도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집'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처럼 '잔혹성' 매개로 '교훈'을 나른다. 그의 이야기에 '잔혹성'과 '공포'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 매커니즘이 본질적으로 '공포'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밖을 나다니지 않고 낮선 이를 경계하며 특정한 주파수의 소리에 긴장감을 갖는다. 그것은 '생존력'을 높였다.

'공포가 없어야 하는 사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생존 면역은 줄어든다. 개인적으로 '조던 피터슨'의 '훈육 방식'에 크게 공감했다. 훈육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회가 오면서 '아이'의 무법적 행동을 절제할 방법이 잃어가고 있다.

부모도, 선생도 사회도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공포에 내성 없는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되려 우리 사회는 '생존력'의 위협을 받는다.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적당한 공포를 통해 아이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 생존력을 높인다.

자연은 우리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과 밝은 낮만 주지도 않았고 푸르른 봄과 풍요로운 가을만 선물하지도 않는다. 자연이 우리를 기른 방식은 어둡고 적막한 밤, 춥고 굶주리는 겨울, 때로는 폭풍우와 천둥, 번개와 같은 위협도 있다.

필수 인자의 일부를 완전히 정제해 버린 순수하고 깔끔한 비폭력은 때로는 우리 사회를 약하게 만든다. 원래 온실속 화초는 세상과 단절된 온실 속에서만 꽃을 피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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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5분 명상
혜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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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큰일이라 생각한 일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건을 맞이 한다. 나를 삼켜 버릴 위협도 있다. 그러나 깨달을 때도 됐다. 나를 덮칠 듯한 위협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고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사업을 망친다. 시험에 떨어진다. 기회를 놓친다. 인생을 바꿔 놓을 결정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 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가 결정되는 순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다른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교대상은 사라진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사라진다. '현실'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사람은 그것에 의미를 둔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냥 일어났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맞이할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럴 수도 있었는데...' 혹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이 마치 내것이었던 것처럼, 마치 내것으로 올 것처럼 아른 거린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오고 간다. 머리로 진리를 깨우쳐도 행하기 어렵고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며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자아'는 사실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분열한다.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 등. 나를 구성하는 내면과 외면은 일체화 되지 못한다.

'해야 하는데...'하지 못하는 일,

'하면 안되는데...' 해버리는 일,

'부조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해보겠다.

성경 구약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다. 노아의 홍수 후, 모든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 함께 모여 살고 화합했다. 인류는 목적을 가졌다. '하늘'에 닿는 일이다. 야심찬 계획은 가능해 보였다. 신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끈기? 노력? 열정? 꿈과 희망?

아니다.

소통이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무너 뜨리기 위해 '소통'을 막았다. 소통이 중단되자 탑쌓기는 중단됐다.

무슨 일이든 '집중'이 중요하다. 집중은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회사는 회의를 통해 사업을 전개하고, 정치는 소통을 통해 국민을 통합한다.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면 꽤 어려운 일들은 그럴싸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러 사람도 아니고, 하나의 '나'를 구성하는 마음과 감정, 행동, 생각, 말이 모두 따로 움직이면 어떻게 이루고저 하는 바가 이루어지겠는가. 마치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작동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일체화를 떠나 어떤 상태인지 관심도 없이 마구잡이다.

축구를 한다며 오르손은 오른쪽으로, 왼손은 왼쪽으로 힘차게 돌리고 머리는 위아래로, 오른 다리는 뒤로, 왼다리는 앞으로 움직인다. 그 정신없이 산만함을 갖고 경기장에 들어 섰으니, 체력과 실력은 둘째치고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다.

차분히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나로 모으려면...

일단은 그렇다.

그것들이 뭘 말하는지는 듣고봐야 한다.

윗집과 아랫집이 싸우고 있으면 서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귀 기울이고 봐야 한다. 그 소통의 첫째는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두어야 한다. 가만히 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는다. 물은 점차 맑고 깨끗해진다.

후회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과거'와 '희망'이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미래'에 줄이 손발이 꿰어 움직이는 현재를 살고 있다면 그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차라리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왼쪽 발가락 네번째의 감각을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

스스로를 돌이켜보건데, '일치하지 않는 자아'는 일반적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상대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체화된 자아를 갖고 있나'.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했던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처럼, 상대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로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코코샤넬은 상대를 겉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을 겉으로 평가할 것이라 했다. 즉, 나는 상대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되, 스스로는 정제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나의 '자아'는 지금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도 고삐 놓쳐 촐랑거리는 망아지가 제멋대로 나를 헤치고 있진 않은지 잔잔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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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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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을 수도 있다.'

카뮈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관심한 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주인공은 동요하지 않는다. 오늘이던가, 어제이던가, 헷갈려 하는 것이 극단적인 '사회 이방인'을 말한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면 그 도입부가 비슷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도입도 이와 같이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극단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는 강하게 독자를 흡입한다. 소설 '이방인'에는 '감정'이 없다. 그저 현상이 있을 뿐이고 '생각'이 있을 뿐이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일컬는 '사이코패스'는 어린시절 급격하게 미디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 괴상했는데 겉으로는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다. 그들에게는 '이성'과 '감성' 중 '이성'과 '본능'만 남기고 '감성'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들은 감정도 없고 죄책감이나 후회도 없다. 감정에 공감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 괴기할 정도로 이상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기까지 한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이런 사이코패스를 다루기도 한다. 소설 '아몬드', 미국 드라마 '덱스트', 영화 '추격자'라던지,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 그들은 공포스러워야 할 상황에 되려 침착하고 되려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성적 판단과 본능적 감각, 강약에 대한 인식과 정복욕 등이 있을 뿐이다.

소설 이방인의 무감정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인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무감정을 일관한다. 아랍인을 살해하고도 무감정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정할 뿐이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무감정자'의 독백을 하나 하나 꺼내 읽다보면 차분하면서도 섬뜻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악'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일은 그럴만했고 인과관계는 명확하며 그것에는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 소모'가 없다. 그저 무향무취무색의 흑백화면을 동공에 힘을 풀고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어찌나 자유로워 보이던지,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초탈'한 성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에 '비겁하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당화를 하지도 않는다. 다만 범인과 다르게 보여지는 이것으로 그를 '성인'이라 볼 수는 없다. 그와 성인의 커다란 차이라면 '무감정'에 '비도덕성'이 함께 하는가다.

우리를 이끌던 성인들은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놓치지 않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참착함을 유지하며 꽤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 보았다.

십자가에 못 밖히던 예수의 '주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처럼 자신의 목숨조차 초월한 침착함과는 다른다.

하나는 무감정과 비도덕이고 하나는 절제와 도덕이다. 무감정과 비도덕의 핵심은 '지극한 이기심'에 있다.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사고와 행동이다. 아이러나하게 이 대척점에 '절제와 도덕'이 있다. '절제와 도덕'은 지극한 이타심'에 그 뿌리를 갖고 있으며 초자기적인 사고와 행동을 갖는다. 이런 양극단이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이유는 '유다'와 '예수'의 모델을 함께 썼던 '다빈치'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극단적인 빛과 극단적인 어둠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두 공통점은 양극단이 결국 하나와 닮았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중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자칫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라가 버리기도 한다. 어쨌건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던 주인공이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실 사이코패스는 생각보다 흔하다. 우리가 100명을 알고 있다면 그들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다. 통계적으로 볼 때, 한 번도 그런 유형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이 그런 유형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사이코패스이거나 혹은 살면서 수명의 그들을 만난다. 우리는 그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으며,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저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에 의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방인을 격리하고 처치하고자 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고 피해를 끼치기 때문일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다고 반드시 격리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잘 섞여 일상을 살아가기도 하고 여느 드라마와 영화처럼 특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로 사회적 이득을 주기도 한다. 산술적으로 대한민국 5천만 국민중 50만은 사이코패스다. 이들을 모두 격리하고 처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노사이드'라 할 수 있다. 인종청소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혐오'와 '불신', '공포'는 악을 처단한다는 목적으로 또다른 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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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2학년 평생 공부 습관을 완성하라
송재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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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에서 소풍을 갔다. 아이의 가방은 터질 듯 했다. '돗자리', '쓰레기봉투', '외투' 거기에 3단 도시락과 간식을 채워 넣으니 가방이 빵빵했다. 자기 몸통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아이에게 동화책을 챙기라고 했다. 아이는 가방을 열고 한참을 가방과 씨름했다. 겨우 가방에 동화책을 넣은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이가 말했다.

"아빠, 책은 빼면 안돼? 가방이 너무 무거워."

아이의 가방은 정말 무거워 보였다.

아이의 눈을 보고 당연하게 말했다.

"음.. 그러면,.. 도시락을 빼도록 해"

아이는 그건 안된다며 도시락과 책을 모두 넣고 학교를 갔다. 순간적으로 가장 먼저 제외해야 하는 것. 그것은 중요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물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라리' 도시락을 빼라고 했던 선택이 나름 옳았다고 여겨졌다.

아이는 그날 '수수께기 동시책'을 가지고 갔다. 수수께끼 동시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이 책을 펼치고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기가 많아진다고 했다. 얼마 전, 학교 선생님과 면담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내 교육관을 명확하게 말씀 드리고 왔다. 그렇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 책은 읽어야 한다. 그 둘의 상관관계를 볼 때, 둘 다 욕심을 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진심이다. 아이가 명문대를 가던 말던 상관없다. 다만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생긴다. 개인적인 관찰과 경험으로 아이는 고학년이 되면 아빠보다는 친구와 시간을 많이 가진다. 되려 부모를 성가시다고 여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그닥 좋아하진 않아도, 서로가 비슷한 걸 좋아하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최근 아이 교육에 대한 책을 많이 읽는다. 아이에게 교육에 대해 엄청난 압박을 주진 않는다. 아이는 일어나면 꽤 긴 시간 책을 읽는다. '패드 학습' 하나, 한자 한 글자, 연산 수학 한 장 정도 한다.

학원은 다니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가 학원을 다니면 아빠와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MBTI에서 지극히 I(내형형) '아빠'라 그닥 약속이 있진 않다. '일', '집', '일', '집'이라는 비교적 따분한 일상을 만족해 한다. 언젠가 아이들은 '아빠'보다 '친구'를 좋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향형 아빠는 곧 '거의 유일한 친구'를 잃을 예정이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기고자, 굉장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아이에게 '학원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아이에게 '책읽기'를 강제하진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초콜릿'이나 '과자'와 같은 간식을 챙겨서 무릎에 앉아 책을 읽는다. 거의 99%는 아버지인 내가 읽고 가끔 짧은 글을 아이에게 넘긴다. 넘긴다기 보다 뺏긴다. 아이는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을 미리 예약해 둔다.

동화책은 꽤 좋은 이야기 소재다.

나의 어린시절 '잭과 콩나무'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었다. 나는 그 소설을 '호주 출신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알았다.

아이와 책을 읽을 때,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소개를 읽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다보면 꼭 성인의 책처럼, 작가마다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읽었던 책을 썼던 작가의 다른 글이라는 것을 보면 기쁘기도 하다. 아이와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잭과 콩나무'라는 책을 이야기하니, 꽤 충격적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만보니, '잭'이라는 '아이'의 행운에 대한 관점으로 읽었을 때만, 흥미로운 책이었다.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집으로 몰래 들어간 잭은, 사실 주거침입과 절도까지 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거인은 난데없이 도둑질을 당한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이에게 '잭'이 남의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이는 아빠를 닮아 다독한다. 다독하다보면 독특한 것을 알게 된다. 책마다 출판사마다, 작가마다 커다란 테두리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제목을 보고 같은 동화라고 알고 읽었으나 전개 방식이 다른 경우도 많고 어떤 경우에는 결말도 다르고 아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이전 책과 비교해서 읽다보면 그 또한 재미가 쏠쏠하다.

아빠의 욕심으로 간혹 원서를 섞기도 한다. 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읽는다. 문법이나 단어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다만 거기에 풍부한 감정을 넣어 읽는다. 아이도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다 불현듯 하나를 물으면 그때는 알려준다. 그것이 고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교육관'은 조금 독특하긴 하다. 나의 교육관은 '주체성'이다. 아이가 반에서 1등을 하건 30등을 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아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언젠가 아이가 똑똑해 지고 싶다고 말했다. 왜 똑똑해져야 하냐고 물었다. 똑똑하면 공부도 잘할 수 있단다. 공부를 잘하면 뭐가 좋냐고 물었다. 공부를 잘하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했다. 하고 싶은 건 공부를 못해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는 가만히 생각한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근데 안 해도 돼.

정말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용기는 갖고 있는 듯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 들이면 그만이니까.

세상에는 '원'만큼 '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그릇만큼만 행복하다. 원을 크게 갖고 채우지 못하면, 원을 작게 갖고도 채운 것보다 불행하게 산다. 굳이 가능할지 말지 모르는 일에 대해 욕심으로 원만 키울 수는 없다.

송재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느낀바가 있다. 자기 정리 정돈 잘하고 예의 바르고, 자기 할일 똑부러지게 하면 된다. 그것이 진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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