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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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어린 시절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연습'이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면 좋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될 수 있다면 어릴 때 만나봐야 한다. 뭐든 그렇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두 번 부터는 쉽다.

바나나를 산책 시켜보자.

바나나를 산책시키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다. 여기에 산책하는 바나나를 쓰다듬어 보라고 주변인에게 요구까지 해보자. 더할 나위없이 이상한 의미다. 사람들은 거절하거나 피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거나 실패해 보는 일은 일부러 많이 겪어본다. 겪으면 겪을 수록 담담해진다.

실패에 담담해 질수록 나아갈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을 향하는 카페트 같은 것이다. 즈려 밟고 나아가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밟지 않고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네모난 피자를 요구하거나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이런 행동은 '거절'을 당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고로 거절을 당하면 좋다. 실패하면 성공하는 꽤 승패 없는 목적이다. 무언가를 해도 달성한다. '승낙'을 받아도 좋다. '승낙'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네모난 피자'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며, 실제 네모난 피자를 먹을 수 있게 된다.

20대 초반 수첩에 적어 두었던 글이 있다.

'평소에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녀본다.'

인생이 새로워지는 방법 중 하나다. 너무 당연해서 일고의 가치도 없던 것에 '예외'를 두어 보는 것이다.

'자동차'를 처분했다. 가장 좋은 것은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아이가 말했다. 빨리 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한걸음 한걸음 꼭꼭 아이의 머릿속에 추억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손으로 양치질을 하거나,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나이를 쌓아가면 새로운 것들이 사라진다. 실제 새로운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습관처럼 엄청나게 내리는 많은 선택들로 단순해지는 것이다. 행동에 온통 무의식적 흔적이 생긴다. 삶을 무의식에게 맡기고 나니, 의식이라는 녀석은 잡생각을 하느라 고통스러워진다.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구름 모양을 관찰하곤 했다. 바닥에 타일 무늬를 세밀하게 살펴 본 적 있다. 성인이 되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것은 아무 자극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할 때, 패달과 핸들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숟가락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온 신경을 집중했던 기억이 있다. 인생 초보 시절이다. 지금은 아니다. 모두 무의식의 역할이다. 시간이 지나면 노래를 부르거나 라디오도 들으며 운전 할 수 있다.

잡생각이 일상에 끼어들 여지가 많아진다.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무의식적으로 샤워를 하며, 생각없이 운전을 한다. 무의식에게 일을 밑기니, 자아는 과거나 미래를 혼자 떠나고 망상을 만들어 걱정을 안고 산다. 얼마 전,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어리버리 했다. 경험 없는 일을 하는 나의 서투름이 어색했다. 나이가 많으면 점차 스스로 익숙한 것들로 채워 나간다. 결국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고립된다. 나또한 그렇지 않은가.

난데없이 '새빨간 소지품'을 사거나, 황당하게도 생전 배달주문 해 본 적 없는 샐러드보울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한번의 일탈로 인생은 '무' 경험자에서 '유' 경험자로 엄청난 정체성을 획득한다. 고로 그것이 싫었던 이유를 재확인하거나 그것을 다시 좋아 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넓어진다. 삶이 다채로워진다.

세네카의 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당신의 패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일주일 동안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해보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당신이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인지 자문해 보라. 상황이 좋을 때 앞으로 닥쳐올 나쁜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이 상냥하게 구는 동안 우리 영혼은 그녀가 돌변할 때를 대비해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망하더라도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다고 하던 '일론 머스크'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기계발서나 철학서에서 많은 배움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정보로 흘러가버릴지 삶이 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마라. 몸으로 살아 내라."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최근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고 삶으로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인지를 배웠다.

가끔 혼자 적막한 시간이 올때면 가끔 불평과 불만이 쌓일 때가 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을 권유하며 나는 그렇지 못할 순간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의 마음에 와닿는다.

"소리 내어 불평하지 말라... 혼자 있을 때도 하지 말라"

조용히 스스로 자신을 다잡고 천천히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무의식에 쌓여 생으로 나오고 그것은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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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창조한 나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6
제임스 앨런 지음, 서진 엮음, 안진환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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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한 친구를 알게 됐다. 이름은 'John'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했고 나보다 서너살은 많았다. 국적은 뉴질랜드 였으나 그는 대만계 출신이었다. 키가 작고 생머리에 피부는 하얗고 가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다기 보다 투명했다.

John은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다녔다. 오클랜드 대학교에 있는 잔디 정원에 누워 낮잠을 잤고 가끔은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엄청난 '육식꾼'인 나와 반대로 '채식주의자'였고 소식가였다. 한번은 Sal's Pizza에 방문했다. 어퍼퀸스트리트에 위치한 Sal's Pizza는 뉴욕식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거기서 존은 피자를 주문했다. '치즈피자 한 조각'과 '물'.

'한 조각?'

한 판은 시켜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John은 일단 한 조각을 먹으라고 했다. 치즈피자 한조각과 제로콜라. 이렇게 주문했다. 꽤 맛있는 식사였다. 배는 적당히 든든했다. 피자를 먹고 '알버트 공원'으로 갔다.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 그늘로 갔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 적당히 배가 불렀고 존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정화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대만계라고 해도 결코 대만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는 깨끗한 곳이며, 자신의 정화된 몸이 오염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가 말한 '오염'은 일반적 '오염'이 아니었다. '정신적 공해'를 포함한 오염을 말했다. 시간이 나면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눈앞에 지나가는 '상'을 지켜 본다고 했다. 그것을 그저 바라 보라고 했다.

그때 아마 나의 나이가 스물 셋.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존은 지나가는 관경을 붙잡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머리는 정화된다고 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한참을 했는데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 행위는 자신의 '에너지'를 키운다고 했다. '에너지를 키운다.'

나이가 어렸던 나에게 '에너지'라던지 '상'이라는 말은 '사이비'스러웠다. 자꾸 그러한 주제로 빠지는 '존'에게 말장난을 하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때 왜 나는 그랬을까. 그의 말을 잘 귀 기울이고 들었어야 했다.

다시 상기시켜 보건데, 그의 말은 이랬다. 눈을 감고 자신의 상을 지켜보면 내부에 있는 에너지는 확신한다.

내부의 에너지, 그것은 자아.

외부의 에너지, 피부 밖의 에너지.

더 나아가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에너지층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때 첫번째, 에너지가 '자아'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이 에너지층을 확산하여 가장 끝에는 '사랑'이라고 했던 부분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몇 겹의 에너지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그가 설명한 행위는 '메디테이션' 혹은 '마인드풀니스'로 불리는 명상이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에는 차원이 존재한다. 1차원, 2차원, 3차원처럼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각 감정은 저마다 수준이 다르다. '제임스 앨런'의 '스스로 창조한 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이 걱정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다시 마음을 끌고 와 평화와 힘의 영역으로 자신을 다시 세우십시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명확한 비전과 완전한 판단력으로 올바른 길과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을 보는데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인연이 떠올랐다. 걱정과 염려, 불안, 공포 이것은 차원 낮은 감정이다. 꾸준히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차원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높아진 차원은 일시적으로 회기본능이 있어, 언제든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디폴트값이 변경되기 전까지 꾸준한 노력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차원은 자꾸 저차원으로 돌아간다. 꾸준한 반복과 정화를 통해 우리가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회기본능'은 우리가 '저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는 요긴한 무기로 변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환경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도 비몰아치는 환경과 포근하고 따뜻한 환경이 존재한다. 같은 환경에서 어째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는가. 어쩌면 내부의 환경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닐까. 쉽게 변화하는 내면의 노예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계에 휘둘리게 된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어떤 성취를 이루게 하고 어떤 성장을 가능하게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누가 나를 만드는가. 밖에서는 외부적 환경이 있다면 안에서는 누구인가. 회사도 51%의 주식을 소유하면 지배력이 생긴다. 내가 나를 지배 한다면, 환경은 1%만 있어도 충분히 내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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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 - 우울과 불안을 끌어안는 심리학
임아영 지음 / 초록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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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았구나'하고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날카로운 가시에도 장미가 피는구나'한단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아닐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본다는 것.

그냥 해골 바가지라도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의 날'을 줬고 누군가에게 '재수없는 날'을 줬을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빌게이츠의 말에 따르면, '삶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 시작은 '받아들임'에서 부터다. 인류 역사상, 단 한순간도 그 어떤 장소에서도 '평등'은 존재한 적 없다. 불가능한 것을 좆으면 자괴감만 커저간다.

불평과 불만을 쌓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카드 게임의 묘미는 블러핑으로 좋은 패의 상대를 이겨 냈을 때다. 단순히 운에 좌우되는 게 카드 놀이라면 참여자의 역할이란 관찰 밖에 없다.

왜 사람들은 카드 놀이를 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불확실성이 있으며 우리에게 '좋은 카드'가 올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카드'만 선택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나쁜 카드도 나올 수가 있다. 우리는 그 법칙을 이해하고 카드게임에 참여한다. 고로 나쁜 카드가 나왔을 때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가난해서, 학력이 좋지 않아서, 남자라서, 아시아인이라서, 21세기에 태어나서... 크기를 막론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는 '열등감'만 쌓인다.

'하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실제 하루살이가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니다. 대략 2~3일 정도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하루살이가 하루만 살거나 2~3일만 살거나 결과적으로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르고 죽는다. 낮과 밤은 알 수 있으나, 그들은 계절을 모른다.

우리도 그렇다. 알고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대체로 우주가 이루고 있는 법칙은 크기와 상관없이 적용된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러첨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예외가 있다 해도 예외가 법칙이 될수는 없다. 작은 예외로 보편적 법칙을 모르쇠 할 수는 없다. 밤낮이 있다는 것은 여름과 겨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좋음과 나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를 보면 밤은 영원하지 않고 겨울은 영원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낮과 봄도 영원하지 않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작은 점을 찍어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 앉은 무당벌레라면 고작 보이는 것은 내가 앉은 작은 점과 양 옆에 놓여진 작은 점들 뿐이다. 다만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면 이 그림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고 점의 의미는 전체를 나타내는 작은 조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 전체를 놓친다. 이것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검정색 그리고 그 뒤에 검정색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검정색.

그러나 그 검정색 점들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자면 전체 그림은 눈사람의 어느 부분일지 모른다.

'임아영 작가'의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에서는 '초코파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 문화는 우리를 불안으로 몰았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 들어야 하는 우리 문화는 상대의 기분 알아 맞추기식으로 발전했다. 상사의 기분을 알아 맞추고 배우자나 자녀, 부모의 기분을 알아 맞춘다. 이것은 좋게 포장하기에 '정문화'이고 나쁘게 보기에 '눈치문화'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는 모호한 소통법으로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불안해하며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립과 외로움도 함께 느낀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비슷하다. 임아양 작가의 글을 보건데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면 모두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렇다. 고로 비극에서도 희극을 찾고, 불안 속에서 최소 고립될 필요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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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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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

어떤 이유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불행하다'

어떤 이유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최근 읽은 '미움받을 용기', 이후 소설이라 그 연장선에서 이해가 됐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꽤 괜찮을 법한 결말이 보이는 선택이 있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선택을 했건 행복과 만족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선택으로 생겨난 다른 '우주의 나' 또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며 '지금의 나'를 떠올려보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축구 경기가 되면 자신이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친구의 능력은 '신의 능력'이었다. 그는 항상 원하는 곳에 공을 찼고, 그 공은 여지없이 그곳에 떨어졌다.

친구의 능력을 부러워하던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방법이 궁금해.'

친구는 답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공이 간 곳에 만족하면 된다.

그랬다.

친구와 나의 가장 큰 차이는 '결과'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에 있었다. 나의 불만족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정해져 있었다. 내가 '메시'나 '호날두'가 아닌 이상, 내가 찬 공에 만족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상대적 능력치를 비교하기에 친구와 나는 물론 실력차이는 있으나, '메시'나 '호날두'처럼 프로 선수에 비교하기에, 그 절대적 능력치는 '오차범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제 '실력'을 높이거나 혹은 '만족'을 높이거나 둘 중 하나다.

축구라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친구들과 체육시간 혹은 취미 생활로 볼 한 번씩 차는 일인데 프로 선수만큼의 능력은 필요 없다. 고로 '실력'을 높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만족'을 높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선 '실력'을 높여야 한다. 다만 삶에서 범인이 천재만큼 능력을 갖는 것은 가당키나 할까. 대체로 능력은 그만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능력이 '최상'이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최상'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일회용 커피 믹스를 '잘 젓는 능력'은 완벽하게 프로 수준에 닿고 있으나, 약간의 녹지 않은 알갱이가 떠 있으나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삶의 전반은 '완전한 수준'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의 능력만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것이 '만족하는 능력'이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수 천번은 돌려봤던 '세븐틴 어게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과거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가는 영화다. 주인공는 항상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이 그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줬고 이유야 어찌됐건 주인공은 다시 같은 선택을 한다.

후회해봐야 부러워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돌아가더라도 상대가 되더라도 나는 다시 지금의 나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고로 지금의 나는 언제나 '최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불운과 불행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실수와 잘못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다. 그냥 그러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연필로 쓴 무언가를 지우는 물체에 '지우개'라는 이름을 짓고 얼굴의 양쪽에 붙어 청력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귀'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수가 합의한 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빨강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파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빨강'이라는 이름은 맞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파랑이라는 말이 맞을까.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빨강일수도,파랑일수도 있으며 더 깊게 생각해보기에, 누군가에게는 빨강이고, 누군가에게는 파랑일수도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말을 잃어버린 노인의 이야기다. 잃어버린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다거나, 그 말을 타고 놀다 떨어진 아이가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부러진 아이가 군대에 면제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모든 상황은 '좋음'과 '나쁨'으로 번갈아가며 이름을 바꾸는데, 거기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이름이 과연 존재하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름'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저 그 자체이지는 않을까. 초나라 시대, 무엇이든 막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을 팔던 장사꾼은 결국 자신의 말에 모순을 발견한다.

모순은 결국 어느 하나가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둘다 진실이라는 것도 아니며 둘다 거짓이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진실이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모순이 되기도 한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조건 뚫는 창의 이야기는 결국 두 창과 방패가 만나야만 증명할 수 있다. 전장에서 만날 두 병사가 초나라 한시장 바닥에서 같은 무기장수에게 각각 방패와 창을 사지 않는다면 증명이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기에 누군가를 부러워 할 수 없다. 과거에 다른 과거를 선택해 보지 않았기에 다른 현재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고로 어찌됐건 지금과 여기는 '나'의 최선이고 비교 대상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예상도 '나'보다 나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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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양육자 - 아이와 함께 사는 삶의 기준을 바꾸다
이승훈 지음 / 트랙원(track1)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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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것도 없다. 과거만 해도 사회는 함께, 아이를 '양육' 했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작은 아버지댁'에서 자랐다. 학교를 마치면 '작은아버지댁'에서 저녁식사를 했고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이 기간은 꽤 길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거의 일상이 그랬던 듯 하다. 농사일이 바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아이를 내 생계를 위해 '동생의 집'에 맡길 수는 없다. 사회는 꽤 파편화 됐고 개인화 됐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뺑뺑이 돌리기'에 적합한 학원을 알아보는 편이 맞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학원은 아이를 '양육'할까. 아니다. 친척은 아이에게 '양육자'이지만, 학원 입장에서는 '고객'이다. 즉 아이는 '소비자'로써 서비스를 이용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 사촌형은 한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한자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명확하진 않다. 다만 한자교실은 '노인회관'에서 했다. 매주 1회 한자를 공부하곤 했다.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간단한 명심보감이나 논어의 한문장을 공부했던 듯 하다.

당시 나와 동생은 다른 사촌들을 데리고 '한자교실'을 다녔다. 교육비는 따로 없었다. 어른들은 각자 시간이 되는데로 자가용을 이용하여 노인회관과 집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곤 했다. 그게 당연한 사회였다. 키즈카페가 아니라 사촌네가 놀이터였다. 학교 또한 다른 의미의 교육을 했다.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니라 사회성과 예절을 배울 수 있었다. 얼마나 잘 가르치냐보다 얼마나 존경할 수 있는지가 좋은 선생님의 기준이었다.

사회가 도시화 되면서 많이 달라졌다. 아이를 옆집에 맡기거나 친척에 맡기는 것은 꽤 염치없는 행동이 됐다. 한 두번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를 길러내는 '양육'의 관점에서 장기적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아이는 대체로 '양육'되지 않고 '서비스 소비자'로써 존재를 갖는다. 서비스 소비자는 '갑'의 입장에 서 있다. 언제나 선택하고 평가하게 된다.

'어떤 학원보다는 어떤 학원이 낫다.'

'어떤 선생님보다는 어떤 선생님이 낫다.'

평가하는 입장에서 길러지는 아이에게 '교육'은 어떤 의미일까. 양육과 교육은 기본적으로 '동경'과 '존경'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닮고 싶다는 내부적인 존경이 없이 아이는 길을 잃는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최소한의 모델이 있어야 아이는 올바른 정체성을 형성하며 나아간다.

도시의 양육자들은 아이를 '양육'한다기 보다 길러낸다.

길러낸다.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길러낸다. 이것은 물론 사전적 의미의 양육이지만 인류 보편적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소와 돼지, 양을 길러낸다. 키우고 성장시킨다. 때로는 훈련견을 교육한다. 다만 이런 행동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서적, 정신적 성장을 돕는 것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면 우리는 묻는다.

'선생님 어땠어? 바꿀까? 마음에 들어?'

마치 옷이나 신발을 고르듯 '스승'을 취사선택하고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스승'을 평가한다. 사회가 분업화되며 당연히 '육아 서비스'도 분업 대상 중 하나다. 아이를 길러주는 보모와 유치원, 키즈카페, 학원 등은 서비스업으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고객을 모시기 위한 싸움에서 '친절', '평가'는 필수다.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서비스업체'에 좋은 관점을 가지기 힘들다. 실수는 당연히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봐야만 하는 문제일까.

우리는 아이를 '애완'으로 길러내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반려동물'로 사용하는 말이 과거 '애완동물'로 사용됐다. 보기 좋고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써의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이다. 현재의 육아 또한 '애완'의 의미로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머리를 하고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게 하고 있진 않은가.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선택 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육아'를 '선택적 소비 활동'으로 여기고, 취향껏 원하는 이들이 골라 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산업화의 끝'은 저출산, 저소비, 저공감이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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