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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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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을 읽고


[뻐꾸기의 알은 누구의 것인가]_ 다소 길고 새삼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키 선수들이 소재로 등장하는 범죄극이라니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듯도 했다. 첫 장 시작부는 밋밋하니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넘겼다. 그런데 넘기면 넘길수록 이 소설 꼭 스키 코스를 타고 내려가는 듯 재미있더라. 단번에 슉 눈을 지치고 나가는 듯한 속도감과 안정적인 코스 구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흥미로운 질문거리로 꼭꼭 다져진, 좋은 이야기.


유전자 연구와 응용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유전학을 연구하기 훨씬 전부터 다른 동식물의 유전과 진화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환경을 통제해 왔다. 아마 본 소설의 학자 유자키의 프로젝트, '유전자를 연구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재능을 효율적으로 계발하기'은 관련 연구 중 가장 소박한 목표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윤리 도덕'만으로는 인류가 자기 스스로의 코드를 분석, 교정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어떤 잣대로 판단해야 할까? 과연 '유전자 지도'가 한 인간의 인생 청사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결국 선천적으로 물려 받은 것, 원래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것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주어진 것에서 일탈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택’일까?



 이 소설에서 제기된 질문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인가. 노력으로 변경-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인생의 관문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흔히들 해보는 질문이지 않은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오래된 질문을 '유전자'라는 소재를 통해 다시 한 번 던지고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기도 하다. ‘결국 뻐꾸기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것’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지 선택하는 것은 재능도 환경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데도 딸을 자신과 같은 훌륭한 스키 선수로 길러낸 히다 부녀, 선천적 재능때문에 원하던 음악을 할 수 없는 가쓰야 부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 히다가 자신의 딸을 기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가미조,  심장이 약한데도 크로스 컨트리 스키 활동을 즐기는 연습생 등 주변인물들이 치고 빠지며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한다. 


  와중 이 소설의 서사를 끌어나가는 것은 이 소설의 ‘유전자 개념’이 동양식 '핏줄' 개념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굳이 '부모와 자식'의 유전자 공통점을 확인해 유전자의 능력을 밝혀 내겠다는 유자키의 연구 방향은 결국 ‘대물림’ 개념이다. 


  사실 선천적 재능을 밝혀내는데 꼭 '부모 자식을 함께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전 형질이라는 게 그렇게 부모 한 쪽의 능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넘어가는데, 결국은 이 소설에서 유전자란 주제를 만들기 위한 설정이라는 게 티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만약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질문이 여기까지 였다면 이 소설은 그다지 흥미로운 이야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재능이 있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며 괴로워하는 가쓰야 신고의 고민도 결국 무엇을 타고 났든, 어쨌든 가진자들의 이야기 아니냐며 넘어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연습생들을 보면 가쓰야의 고민은 하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격인 히다 카자미는 아예 ‘주어진 재능’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전한 가치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히다 카자미는 자신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정작 완전히 보호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가 해야 할 고민은 그녀의 양아버지인 히다와 유자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복오빠가 나눠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뻐꾸기인 줄도 모르는 뻐꾸기 알인 것이다.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친아버지인 가조미와 이복오빠가 벌인 사건은 이 소설의 핵심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진실이 다 밝혀진 후에도 스릴러를 위한 스릴러, 설정을 위한 설정이라는 인상만 줄뿐. 


  하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조차도 다 답을 내리지 못한, 또 하나의 주요한 주제가 들어 있다. 좋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우리도 어디서 물려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뻐꾸기 알’이 있다 치자. 하지만 그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과연 우리가 스스로 우리 인생을 꾸리려 할 때 그 선택권은 우리 손에 놓이게 될까?


  이 소설의 배후는 ‘이 유전자가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 ‘인생을 유전자로 타고난 대로 효율적으로, 정답에 맞춰 살 것인가. 그렇게 해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인가’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선천적인 재능의 계발’ 여부가 ‘자본’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은 애초에 한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꼬이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움직이는 동인은 바로 기업의 자본 지원이다. 히다 부녀, 가쓰야 부자 뿐만 아니라 연구를 기획한 유자키마저 기업의 소속원인 것이다. 

  유자키는 이 유전자 연구가 ‘기업의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히다 부녀는 유전자 연구에 협력하기를 원하지 않는데다, 협력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는데도 기업의 보호를 받기 위해 유자키가 내미는 미끼를 물고 만다. 가쓰야 부자에 와서는 이 문제가 훨씬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가쓰야 신도는 음악을 하고 싶은데도 아버지의 일자리와 자신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제 재능을 상품으로 내걸고’ 스키를 타야 한다. 그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기업의 또다른 상품인 ‘히다 카자미’를 해치려 한다. 기업의 상품을 해치면 손해를 본 기업이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는 마지막 순간, 기업 측 입장을 대변하는 유자키는 ‘우리는 가쓰야 부자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은 전적으로 가쓰야 부자의 몫이었다.’고 말한다. 히다 부녀의 일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유자키가 가쓰야 부자의 건에 대해서는 싹 기업측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이것이 정말 가쓰야 부자의 선택이었다고 보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텐데도 말이다. 유자키 본인이 그 검은 거래를 주도 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며, 그것은 우리의 선천적 재능, 후천적 의지, 우리의 미지의 가능성/뻐꾸기 알/마저 마찬가지이다. 과연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소설은 히다 카자미가 선전하는 것을 아버지가 지켜보면서 깔끔하게 끝난다. 그러나 작가가 슬쩍 건드리고 간 질문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과연 기업이 우리의 선천적 재능을 상품화하여 계발하려 할 때, 우리는 그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그때 과연 ‘내가 바라는 건 음악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에서는 재능 계발이 다른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여지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심장 약한 연습생마저도 그렇다. 따져보면 이 학생이 스키를 탈 돈이 없다면, 스키장에 오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가 스키를 타러 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우리의 뻐꾸기 알은 정말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있는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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