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꾹꾹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장 아래 작은 활자로 추가된 글자 몇 개를 보고 당황한다. - 1부 끝 - 맙소사. 이게 1부라고? 즉 2부가 나올 거란 말인가? 아. 정말 다행이다. 그가 2부를 나중에 내 줘서. 덕분에 2부는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만세. 만세. 만세. 

  적당한 기발함을 적당히 배포할 줄 아는 센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내 감상이다. '적당한 기발함'이라는 게 성립 가능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이 소설은 가볍고, 심각하지 않고, 적당히 심심풀이로 보기 좋다. 적당한 유머 감각과 밉보이지 않을 지성, 감성을 갖춘 인물들이 나와 몇가지 착상을 주고 받는다. 그 와중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상식 사전이 '에드몽 웰즈' - 주인공의 증조부라는 신선격 존재를 빌어 마구 투입된다.  이런 구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는 이야기를 매끈하게 술술 풀어나가는 작가다. 내가 적당히라는 말을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가 왜, 나쁜가? 소설은 일차적으로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면 그건 장점 아닌가.  
  
  비록 이 소설이 '진화'와 '현세계의 편견을 뛰어넘는 시도'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편견'에 휩싸여 있으며, 편견이 으레 그렇듯 자화자찬과 팔 안으로 굽기가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작가는 '공평'하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편견에 휩싸인 무리들을 까내린다. 자신들도 인종 차별 당했음에도 어느새 백인들처럼 피그미 족 사람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는 반투족이라든가, '여성 인권 묵살의 상징'인 차도르를 옹호하여 프랑스 출신 페미니스트와 드잡이하는 이슬람권 여성들 말이다. 작가는 신문에서 보도되는 그런 사건들을 싹 모집해 자신의 책 안에서 신나게 섞었다. 쉐킷 쉐킷~.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전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그렇게 보일 만한 증거가 책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가치를 알아 보는 이들은 '소르본 대학의 공모전'에 입상한 프랑스 백인 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적이고 일정 이상 부유한 백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적어도 그들이 이 세계에서 약자 계층에 속하지는 않는다. (남녀간 차별을 제외하고 본다면 말이다.) 이들은 그 부모들에게서 너희가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 계시에 따르든, 반하든 결국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해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달은 이, 이자 주제를 전하는 이들은  '중산층 이상 백인 인텔리'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이 소설을 그렇게 보는 건 쿨하지 못하다고? 이 소설은 그런 얘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라고? 실컷 이 세계의 편견과 아집을 보여주면서 왜 주인공에게는 그걸 적용하면 안되나? 그럼 공평하게 주인공 남녀가 그런 자신의 소속을 뛰어넘는 인식을 보여줬는지 살펴 보자고. 음. 어디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허덕이는 걸 보고 한심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 가는 곳이 '무려 전생으로의 회귀'니까 하는 말이지. 작가가 짜놓은 틀에서는 그런 인식을 벗어날 필요조차 없다. 이미 그들의 쿨함과 진보적 태도만으로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이 소설에서는 세계의 편견을 깨닫는 것마저 (서양 세계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백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체험하는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의식은 또 어떤가. 새삼 말하는 게 허무할 만큼 신비주의에 쩔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해결책'을 알아 보는 것마저 백인들의 역할인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남녀의 그 기발한 영감은 그들이 팔천년 전 전생에 '위대한 거인들'이었을 때 이미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순환 고리란 거다. 이 소설은 진화를 얘기하지만 그 '진화 방법'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일의 재현, 반복'이다. 법칙에 따르는 순환이 어떻게 진짜 변화란 말인가? 그 법칙이 바로 지금의 모순을 찍어낸 틀인데. 

  그런데 적어도 이 두 권 짜리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섯 명의 주요 인물 중 아무도 자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한 지성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문제 제기도 나오지 않는다. 아, 그 문제는 너무 구닥다리라 아예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들이 쿨한 과학자들이자 아마조네스 전사,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되뇌는 군인들이기 때문에, 진보의 첫발을 내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할 필요조차 없는 건가 보다.
  진보란 가장 뻔한 문제들의 답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소설이니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니까 다룰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있다. 솔까말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미니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거지 걔네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겪는 - 혹은 실험체들이 겪게 되는 윤리적, 정신적 문제가 아니란 건 나도 안다. 그 문제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문제들을 떠올렸고, 그게 떠올랐다는 게 이 소설의 구멍으로 느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소설은 정말, 구멍 천지니까.

  심지어 그들은 미니 인간들을 만들어 놓고 아주 뻔한 신 롤플레이도 한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지구의 멘트도 공허하고 별 맛이 없다. 지구의 자기 역사 서술은 차라리 과학 교양서 쪽을 보는 게 훨씬 재미있을 정도다. 원래 신화적 서사란 클리셰 난무라지만, 이 소설은 그게 '뻔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사상누각이랄까. 공들이지 않은 탑이랄까. 대충 이런 건물에는 이 쯤에 창문이 있고 문은 이쯤에 있겠지 / 하고 슥슥 구멍을 뚫어 놓은 집을 구경하는 것 같다.  베르베르 쯤 되는 다작 작가면 이제 그런 법칙들에는 이골이 나있긴 할테다. 그렇다고 읽는 나한테 '이골이 났다는 걸' 어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 소설은 '재미있게 풀 수도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뻔한 사건들을 연속시킨다. 베르베르 식의 글쓰기 방식을 쭉쭉 펼쳐 나가기는 하지만, 그 안이 텅 비어 있다. 이 소설은 지푸라기 공이다. 그 표면에 지구과학, 생물학, 역사, 문학, 신학, 심리학 등등 온갖 상식들이 잡초 나부랭이들이 붙어 있다. 문체가 가볍고 읽기 편해서 쑥쑥 읽히지만, 따져보면 이 잡초들이 붙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아무 잎이나 한두 잎 쯤 떼어내도 지푸라기 공에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것 같은 걸. 적당히 재미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시간 떼워야 할 때 읽기 좋은 소설. 2부가 나올 모양임.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떼워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내가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흥분한 채 쓴 내 리뷰는 엄청 조잡하고 건방져 보일 거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게 베르베르의 글이 아니었거나, 베르베르가 쓴 글이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이렇게 툴툴 거렸을까 계속 자문했다. 어차피 이프 온리에는 답이 없으니까, 과연 어땠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글에 그런 문제들이 있고, 베르베르라는 저자 이름을 단 채 우리 집에 배송되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