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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 위화, 제7일, 227p -
증오어리지 않은 비판.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왜곡하지도 않는 포용력. 매일 황당한 사건들이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보도되는 요즘 이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선이다. 알량한 위안도 눈먼 분노도 현대인들의 피로와 절망을 해소해주지는 못하기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날카로움과 유머, 온기를 두루 갖추고 현실을 직시한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비평가 신형철은 소설을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대가의 소설' 세가지로 분류했다. 위화의 [제7일]은 저 세번째 소설의 조건을 독특한 설정으로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 죽은 이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위화만의 방식. 따뜻한 회색 세계 -
나는 그간 기록이란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자들에 의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필자'이며 읽는 것은 '살아있는 독자'다. 게다가 이 글을 쓴 나와 읽은 당신이 모두 죽는다 해도 기록만은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가 '인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갱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기록의 이 '불사성'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당대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삶'을 포착해내는데 공헌해 왔다. 우리가 소설 책장을 펴드는 건 '아직 모르는 다른 이들의 삶을 맛보고 싶어 하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위화의 이번 소설은 아주 달랐다. 이 소설은 죽은 자에 의한, 죽은 자들을 위한 소설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소설인 것이다.
[제7일]의 화자는 불운한 화재폭발 사고로 사망한 한 남자다. 그는 죽은 지 첫날, 짙은 물안개가 퍼져 있는 세계를 거닐어 스스로 화장터로 향한다. 팔에는 스스로를 애도하기 위한 검은 완장을 찬 채다. 남자에게는 그를 애도해 줄 친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삶은 기이하고도 평범하고 서글프면서도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묵묵히 살아낸 인생을 죽어서야 천천히 회고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나에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다'라는 말을 사극에서 듣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가 아니라 망자가 된 그 자신 아닐까. 이 소설에서 단 하나의 접점 화장터 빈의관을 사이에 두고 이승과 저승은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이승에서의 자신을 투명하게 보게 해주는 렌즈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주인공은 저승의 물안개 속을 헤매며 자신과 주변인들을 돌아본다. 그 추적의 끝에는 어김없이 죽음이 있다. 사람의 삶을 쫓는 것은 곧 죽음을 쫓는 것이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주인공 주변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빈번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명징한 이승의 태양 아래 묻어두고 망각해 버리는 것일 게다. 우리는 희끄무레한 저승세계에 가서야 나를 비롯해 내 주변에 망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독자들이 당혹스러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저승 세계를 돌아본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망자들에게는 더 이상 급할 것이 없다. 제대로 묘지에 묻히든 묻히지 못하든 그들 모두에게는 영원이 주어졌으니까. 독자는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조금씩 저승의 경계를 넘는다.
마치 맑은 물이 가득 든 유리컵 안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흩어지듯 풀려나가는 이야기.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형이다. 주인공 양페이를 버리고 떠난 아내 리칭, 양페이의 양아버지와 젖을 물려준 이웃집 부인, 그의 이웃에 살던 젊고 가난한 커플들의 이야기도 모두 지난 일일 뿐이다. 양페이는 죽고 나서야 그들과 해후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그의 인생의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야 온전히 완성될 수 있었다.
- 이 소설에는 죽은 자들이 잔뜩 나온다.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이야기에 굵직한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에게는 모두 지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쫓듯 책을 읽어 내려간다.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살아 생전 겪었던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겪고 있는 현실이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들 말이다.
기이하게도 이 소설의 사자들은 모두 '머물 곳'을 잃은 자들이다. 이 작품의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는 법칙은 딱 하나. '거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강제 철거 해프닝과 저승의 묘지 과시가 겹친다. 이 소설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갈 곳을 잃고 떠밀려' 죽은 자들이다. 자살하듯 폭발에 휘말린 주인공부터 태어나자마자 의료폐기물로 버려진 스물일곱명의 아기까지. 모두 다.
현실에서 제대로 된 거처를 보장받지 못한 자들 대부분이 죽어서도 안식할 땅을 얻지 못했다. 아무도 그들을 제대로 염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철거되고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물들 안에 깔리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은 무너져 내리는 현대 사회에 묻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제대로 묻히지 못한 혼들이 구천을 떠돈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마지막 단장도 하지 못한 채. 저승의 검은 비와 흰 진눈개비 사이로 나타났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환한 대낮에 좀 더 '편히 잘 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모르는 채 한다. 알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다르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담담히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저 모노톤 저승세계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담담한 폭로 덕분이다. 망자들은 언제 썩어 흐트러질지 모르는 몸을 잃고 대신 영원을 얻었다.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방랑. 어쨌든 '영원'이란 모든 싸울 이유를 무화시킨다. 은원과 득실이란 다 시간과 얽힌 일 아닌가. 시간이라는 물레가 영영 멈춰버린 이상, 남는 것은 썩은 살에서 뼈를 발라내듯 남겨진 진실뿐이다. 어느 장지에도 묻히지 못한 자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진실들끼리는 서로를 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침묵을 공유할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한다. 이제는 진시황처럼 대놓고 불노장생을 말하지는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승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려 애쓴다. 또 그와 함께 피안의 세계에 대해 온갖 상상을 펼친다. 사후 세계만큼 인간이 상상력을 집요하게 발휘시킨 소재가 있을까.
위화의 [제7일]은 최근 읽었던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위안이 되는 저승 세계 이야기였다. 그가 다루는 것이 모두 억울한 죽음, 고통스러운 죽음인데도 그러했다. 우리가 예로부터 가장 불길하게 여겼던 '구천을 떠도는 혼들'이 주인공인데도 이 소설은 아름답다. 죽은 그들은 더 이상 가엾지 않다. 가엾지 않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흘러가는 강과 심장 모양 잎사귀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연인의 희생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은 처녀의 장례식 길을 진심으로 배웅할 수 있다. 우리가 죽어 남길 뼈와 혼이, 우리가 마지막 남기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죽는 것도 그리 끔찍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처참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세상인데도 무가치하지는 않다. -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위안을 꾹꾹 곱씹었다. 인간의 추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의 손을 이렇게 따스하게 맞잡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가 아닐까. 부디 우리 모두가 이 온기를 유지할 수 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