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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트위터 유저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감해 봤을 말이 있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영국 유명 축구 감독 말이라나. 굳이 유명인들의 트위터 망언 사례를 떠올릴 것도 없다. 짬짬 시간 날 때는 물론 해야 할 일도 미뤄놓고 한참 스마트폰을 터치하다보면 하루에도 열두번쌕 내가 이게 뭔 짓인가 싶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또 트윗하고 있지.


  명확한 목적도 맥락도 없다. 그런 잡담을 한없이 되풀이 생산할 뿐 아니라 남이 올려놓은 잡담을 내려 보느라 몇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이렇게 쓸데없는 일이 또 있을까? 트위터는 정말 인생의 낭비인 게 분명하다. 인간이라면 어느 세대,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했을 법한 낭비 말이다. 오로지 발화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몇 시간을 투자한다. 식욕 성욕 배설욕 수면욕 따위가 인간의 생존과 관계된 것이라면, 발화욕은 그야말로 인간이 사는 보람,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널리, 적은 비용으로 편하게 이야기를 가공하고 전파할 수 있을까. 인간의 많은 발명품은 이 수다욕구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매체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발화 방식도 끊임없이 변했고, 그와 맞물려 사상과 사회 역시 변화했다.
 그리고 현대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잡담 창고는 누가 뭐라 해도 SNS일 것이다. 거기서 오가는 정보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없는 잡담, 평범한 일반인들의 일상 단편이다. 어떤 의미있는 주제로 토론이 오간다 해도 SNS의 특성 - 즉 짧은 잡담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 가지 정보도 공적인 것이 없다. 누구나 언제든 끼어들 수 있고 자신만의 맥락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배출할 수 있다. 그야말로 1세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대화 방식. -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방식의 변화 자체로도 재미있는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되 별로 의미는 없는, 그래서 별 거부감 없이 공감 추천을 올려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아사이 료의 신작 소설 [누구] 는 딱 그런 이야기이다. 트위터에서 열심히 인생을 낭비하는 20대 여섯 명을 등장시키고 이들이 트위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의 인물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건 트위터 멘션 캡쳐, 중반 줄거리는 그 인물들 중 한 명의 시점에서 밋밋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의 소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소설의 메인 퀘스트인 '취업'은 현대 도시에 사는 20대는 모두 실시간 플레이 중인 네버엔딩 과업이다. 게다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매우 공감할 만하다. 얄팍한 트위터 안에서 허세부리지 말고 진짜 자신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자고. 건실하고 좋은 주제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평범해서? 별다른 기승전결이 없는 일상의 전개라서?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아니다. 이 작품이 제게 떨어진 조명을 한껏 살려내지 못한 것은 제 소재와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이다. 강철스프링곱슬머리를 데려다 조선시대 비녀를 꽂으려는 시도같달까.
  이 작품은 '트위터'라는 소재를 거의 살려내지 못했다. 잘 쓴 소설이었지만 무난한 소설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설은 트위터의 속도감과 자발적 참여를 끌어낼 수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낯선 일본인 여섯 명의 트위터를 강제 팔로 당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멘션들 안에서 내 마음대로 맥락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흥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엄연한 화자=주인공이 존재한다. 사건의 흐름은 이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순서에 맞추어 진행된다. 즉 이 트위터 멘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소설의 고정 화자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러니 습관적으로 트위터 새로고침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또 하나 문제는 이 소설의 구성상 작가의 메시지가 트위터 멘션과는 상관없이 전달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에서 트위터는 거의 작은 일기장으로만 쓰인다. 기이할만큼 소통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다른 인물들의 계정을 스토킹 하기만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트윗 사용 방식이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고 해도 주인공 외 인물들마저 트윗을 통한 소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문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다른 인물의 트윗에 대한 감상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직접 구두로 전달한다. 한 번 전달 할 때마다 한 인물의 설교조 연설이 길게 이어진다. 꼭 반 학급회의 시간에 임원이 일어나서 발표를 하듯 말이다. 그런 연설이 있은 후 대상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것도 간접적으로만 나올 뿐이다. 트위터는 여기서도 완전히 빠져 있다. 


  이렇게 소설 구조에서부터 트위터라는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시도를 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소설에 나오는 발화도구는 트위터에 화상 통화 등 최첨단인데 그걸 다루는 소설은 전형에서 안주해 버린 것이다. 전형이 나쁠 것은 없지만, 소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썼다면 안주했다고 표현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외에도 대체 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지인 뒷담화용 부계정을 돌리면서 트위터 잠금 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주인공이 왜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지는 다른 인물의 추측이 붙긴 했다. 하지만 왜 다른 인물들도 잠금기능을 쓰지 않는 것인가?) 넘어가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만약 트위터의 기능을 살려서 좀 더 '멘션 대화'를 잘 보여주는 작가가 폭로하려 했던 주인공의 이중적 모습도 더 잘 들어났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글쎄.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의 부계정 트위터를 일부러 찾아내 면박주는 리카 쪽이 더 괴팍해 보인다. 뭣보다도 리카는 그걸 일부러 폭로해서 몇장에 걸쳐 설교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주인공이 계속 열등감을 느끼며 이상화하던 고타로도 아니고 사랑하던 미즈키도 아니었으니까. 리카는 주인공에게 관찰자인척 허세를 부리는 걸 그만두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굳이 트위터를 하지 않더라도 항상 관찰자 아닌가. 주인공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허세는 물론 짜증스럽다. 작가의 의되대로 아주 익숙하고 평범한 찌질함이다. 주인공의 그런 마인드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초반부에는 이 소설을 읽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 안에서 이렇게 주제를 공공연히 내비칠 만큼 주인공이 문제적인 모습을 보였나? 던져진 문제들은 얼만큼 무르 익었나? 그 부분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내가 작가의 주제의식에 공감하고 주인공에게 내 자신을 꽤 발견했는데도)

 

  그래서 이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내 생각 한줄 요약:

 

'좋아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트잉여가 죄인가요?'

 

 

  SNS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잡담' 방식을 결정할 것이고,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도 그에 맞게 변해 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려고 고심하는 이야기꾼들이 세계 도처에 많을 것이다. 과연 소설은 어디까지 SNS를 흡수할 수 있을까. SNS는 소설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 소재와 주제와 글맛이 착착 붙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오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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