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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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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20km를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한밤중에 12톤 트럭을 비롯한 여섯대의 차가 연쇄 추돌해, 여섯명이 숨지고 세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야기는 이 사고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신문사 주최의 아마추어 보도 사진전에서 연간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책을 저널리즘과 복수심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읽었다.

 

 

당장 인명 구조가 불가능했던 만큼,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현장을 담은 것은 보도사진에 뜻을 둔 야마가 씨 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촬영자가 언론 관계자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아마추어이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후지와라 씨의 비판은, 나에게는 감정에 치우친 의견으로 들린다. 또 이런 박력있는 보도사진은 '1만 분의 1혹은 10만 분의 1의 우연'을 만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인 만큼, 그런 의미에서 야마가 씨는 보도사진가로서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31쪽, 독자투고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반론글 중)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면서 아마추어 보도사진가인 야마가 교스케는 고속도로의 추돌사고 현장을 찍어 '격돌'이란 이름으로 신문사에 응모하고, 이 사진은 연간 최고상을 받게 된다. '격돌'은 교통사고의 일반적 보도 사진인 사고 후 처리 과정의 모습이 아니라, 사고 당시 뒤엉킨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한 장면을 생생하게 찍었다. 야마가 교스케는 야경을 찍기 위해 사고현장 주변의 고원을 돌던 중 우연히 사고장면을 목격했고, 촬영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심사위원장은 이를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고 표현하며 극찬한다.

 

신문의 독자 투고 난에는 야마가 교스케의 '격돌'이 너무 자극적이라 차마 똑바로 보기조차 힘들정도로 비참하며, 더구나 아마추어 사진가의 현상공모 방식으로 찍은 사진을 보도하고 수상하는 것은 지양될 필요가 있고, 또한 아마추어 사진가의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신문사의 현상공모에 거부감을 표하는 부류와 보도에는 프로와 아마추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특히 '우연'이라는 결정적 순간은 아마추어에게 더 적합한 순간이며, 보상이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주장을 펴는 부류로 나뉘게 된다. 이른바 저널리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된 것이다. 과연 보도에 프로와 아마추어가 있을 수 있을까.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에게 자행된 폭력에 관한 이야기 이다.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해서 어쩌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가정관리사 카타리나 블룸은 댄스파티에서 만난 탈영병이자 횡령범과의 하룻밤 사랑 후, 경찰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완전히 뒤바뀐 사람이 된다. 그녀가 경찰의 추격을 받는 범죄자의 내연녀였다라는 추측성 보도로 그녀의 평범했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진다. 이전의 정직하고 성실했던 삶으로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적 매장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우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은 이른바 아마추어 보도가가 아닌 프로 저널리스트에 의한 것이었다. 신문기자는 카타리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흉악범의 애인으로 단정지어질 만한 사진들을 신문 1면에 보도함으로써 대중적 흥미에 맞춰 카타리나 라는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신문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차이퉁'으로 대변된 언론은 카타리나에게 왜 그토록 잔인했을까.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한 언론이라는 허울 좋은 명제 아래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비틀며, 왜곡하지 않았던가. <10만 분의 1의 우연>에는 그렇게 짜맞춰진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생생한 사진' 만이 신문에 실리는 보도 사진의 유일한 조건일까요? (26쪽, 독자투고의 글 중)

 

전문 보도자와 아마추어 보도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보도를 업종으로 삼는 사람의 보도라고 해서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다소 잔인하거나 확장되어도 상관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보도에 있어 그 수위 조절은 프로나 아마추어의 경계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요즘세상은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을 이용한 다양한 저널리즘이 무차별 다수에 의해 또다시 무차별 다수에게 공격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크게는 사건 사고로 부터 작게는 식당의 메뉴나 서비스 정보까지.

이 중 우리가 알앙야 하는 정보는 어느 정도나 될까. 그리고 보도되는 정보들에 대해 어느정도까지 신용해야 할까. 보도의 사명과 인명 구조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지를 묻기 이전에 무수한 익명의 대중으로서 뭔가 화끈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누가 무슨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389쪽, 미야베 미유키의 해설 중) 일은 없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수한 익명의 아마추어 저널리스트로서 '알린다는 행위'를 통해 이기적인 공명심 따위를 갖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복수심에 관하여.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칼에는 칼, 이에는 이' 이보다 더 충실한 복수도 없겠지만, 살인자라고 해서 목숨으로 죄값을 치르는 것에는 반대한다. 인권의 차원이거나, 인간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강제로 남의 삶을 빼앗은 사람이 사형된다고 해서 죄값을 다 치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자가 한순간의 죽음으로 모든 죄갚음을 끝내기 보다는 사사로운 자유마저도 빼앗긴채 더 오래도록 죄책감으로 고통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니까.

 

다시 카타리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면, 카타리나 역시 왜곡과 과장으로 보도를 일삼아 자신의 삶을 망친 저널리스트에게 복수를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후 그녀는 살인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약 7시간 동안 길을 방황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수 없었노라고 진술한다. 그만큼 카타리나에게 있어 저널리스트라는 그는 죽어마땅한 자였던 것이다.

누마이 쇼헤이 역시 공공의 제재를 통하기 보다는 개인적 복수를 계획한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이기심을 채우려 한 자들을 향한 누마이의 뿌리깊은 원한은 백번을 이해하고도 남지만, 복수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저주받을 자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해서 가슴에 남은 한은 다 풀리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피폐해 질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누마이로써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명예'에 상처를 내주는 것이 어땠을까. 그들의 거짓을 만천하에 열어 보이고, 그에 상응하는 파멸을 맛보게 하는 것이 더 통쾌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싸구려 공명심에 왜 누마이 쇼헤이가 목숨을 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지독한 복수는 원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닐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 중 <10만분의 1의 우연>은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일이 없었다 라고 미야베 미유키는 밝히고 있지만, 내가 읽은 세이초의 작품 중에는 이 작품이 최고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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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3-12-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죠. 여태 나온 책을 모두 사서 구입을 했는 데 읽지는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ㅋ
오우 출판사에 책까지 제공 받아 쓰시다니 대단하세염 ㅋ
서평을 알차게 잘 쓰시네요. 책의 적절한 소개와 자신의 의견의 결합...흠 부럽네요.
저도 이렇게 쓰고 싶은 데 -.-

비의딸 2013-12-10 19:10   좋아요 0 | URL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지만, 정작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는 좋아하지 않아요. 때문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위대함을 저는 전혀 못알아보겠더라구요.. 해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들에서는 별로 감흥을 받지 못하겠던데, 이 책은 좀 맘에 들었어요. 마쓰모토 세이초를 정말 좋아하시는 루신님이라면 좀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시작부터 답이 뻔하거든요.
그리고 출판사 서평이라면,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말씀하시는거죠. ^^;
신간을 잘 안사보게 되는데 신간평가단을 하면 신간을 받아볼 수 있잖아요.. 그 욕심 때문이에요.
서평을 잘 쓰는 것 같진 않아요. 그저 내 나름의 감상을 잘 남기고 싶어요.
읽고, 쓰는 것이 참 좋아요. 내가 느낀걸 내가 다시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루쉰님의 꾸밈없는 생활글이 늘 부럽죠. 저야 말로 책을 읽고 내 개인적 이야기와 잘 조화하고 싶은 사람인걸요. 그게 참 힘들어요. 내가 본거, 느낀걸 글로 정리하는게.
칭찬에 칭찬을 되돌리는 이 어색함을 그저 웃음으로 넘기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