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트라우마 초점 심리치료 ACT - 수용전념치료를 활용한 마음/신체/정서를 포괄하는 치유 안내서
러스 해리스 지음, 송승훈 외 옮김 / 하나의학사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F-ACT(트라우마 초점 수용 전념 치료)는 트라우마는 물론 다양한 증상에 유연하고도 효율적으로 사용 가능한 근거기반 치료 기법입니다. 저자는 TF-ACT'다재다능'하다고 자랑스레 소개하는데 실제로 치료자가 상향식으로든 하향식이든 융통성 있게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고, EMDR(안구 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치료)이나 PE(노출 치료)와도 통합할 수 있어 현장에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의 구성도 현장에서 바로 사용하기에 용이하게 짜여 있습니다. 주요 기법마다 예문과 자료가 딸려 있고요. 장마다 ''으로 관련 사이트를 통해 도움을 얻도록 안내하고 있어요. 이 사이트에서 시연 영상을 비롯 다양한 오디오 및 비디오 자료, 전자책과 임상 도구를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해리가 심하거나, 신체화나 공황 증상에 압도되어 지지적 상담의 포지션만으론 회기 진행을 깊게 가져가기 어려운 내담자와의 작업에 큰 힘을 얻을 수 있겠다 싶어요. 특히 진정을 위한 호흡법, 마음 챙김 명상, 심지어는 주의 전환을 위해 그라운딩 기법 등을 시도했다가 효과가 없었거나 내담자의 불안이 도리어 커지는 부작용을 경험한 선생님이 계시다면, 이 책이 도움되지 않을까요.

 

트라우마 초점 수용 전념 치료의 차이점이자 강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TF-ACT는 내담자의 증상 및 감정, 생각을 없애거나 바꾸려 싸우지 않습니다. 신경가소성의 원리를 근거로 이미 자리 잡은 신경 경로를 제거하지 않고 그 위에 새 길을 그려 넣습니다. 주의 전환 시도가 자칫 그의 핵심 문제 행동인 '회피'의 강화가 될 위험이 있음을 염두에 둡니다. 폭풍우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하지 않고 폭우가 지나는 동안 통제력을 유지하고 안전감을 가질 방법을 제안합니다.

 

12[투쟁의 전장을 떠나기]를 읽어보시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및 생각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투쟁을 내려놓는 시도에 대해 배울 수 있어요. 내담자가 불쾌함을 느낄지라도 신체를 여전히 통제하고, 의미 있는 '지금의 일'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케 되면 현재에 접촉하며 고통을 수용할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P.88-95를 참고하시면 통상적인 마음 챙김과 트라우마에 효과적인 마음 챙김 연습의 차이, 주의분산과 이완이 TF-ACT에서 연습시키고자 하는 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정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23장 역시 혼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받을 내용이 적혀 있어요. 이러한 차이점들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시고 기법들을 내담자와 연습하시길 추천해요.

 

TF-ACT는 내담자의 인지를 판단하기보다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즉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유도하는 생각이라면 통상적으로 '긍정적'이라 여기는 인지라도 이것이 적절한 시간에 "오고, 머물고, 떠나갈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p.200) 제거하거나 바꾸거나 피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TF-ACT는 다양한 메타포(은유)를 통하여 내담자를 교육하고 이해시킨다는 점입니다. 책에도, 관련 사이트에도 유용한 여러 가지의 메타포가 소개되어 있으니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내담자가 단순한 회복을 넘어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기를 바란다는 고백과, 상담 장면에서 실패와 실수를 마주하게 될 선생님들에게 완벽한 치료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단언이 외려 선배님의 충고로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순간조차 ACT를 적용하여 누구라도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찰하고 배울 수 있으며, 자기 자비 의식을 통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고 선생님들 많은 힘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의 일은

성취감과 영감,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고통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최저점 없이 최고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담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기쁨을 느끼고,


우리가 할 수 없을 때에 슬픔을 경험합니다. - 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말로 큰다.˝ 은유작가의 소개글처럼, 사람에게는 타인의 입술과 혀를 거쳐 나오는 체온이 덧입혀진 ‘말‘의 포옹이 진정 필요하다. 당신의 마음을 안아주는 버지니아 울프만의 목소리와 언어의 온도가 스민 아름다운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계선
장선우 지음, 장서윤 그림 / 달그림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은 경계에 머무른다

경계는 조화롭다


모든 생명체는 그저 존재할 뿐인데 그중 자신을 그리고 시공간의 개념을 규정하려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만 정의가 가능하기에 시공간의 개념은 어쩌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필요에 의해 세워졌던 틀이 지나치게 견고해져 양식이 존재를 앞서나갈 때, 사람은 틀과 틀이 부딪히는 경계에서 길을 잃고야 맙니다. 이렇게 어느 편으로 온전히 넘어가기에는 모호하거나 혹은 복잡해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해 장선우와 장서윤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 [경계선]. 두 사람이 주목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사색 여행과도 같은 책


이 책의 앞표지에는 "'나'를 찾아 헤매는 지금, 당신의 이야기"라는 문구가, 뒤표지에는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경계에 머무는 우리의 고민을 담다"라는 문구가 새겨있습니다. 두 문장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시선은 경계 위에 놓여있는 존재의 실존, 선 너머 여기에서 저기로 넘나드는 에너지의 흐름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독백을 가장한 생각거리를 건넵니다. 그림책의 외양을 하고서 선문답과 같은 질문을 툭툭 던지는 통에 독자는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요. 질문마다 답이 똑떨어지지 않으니 생각할 것이 많은 탓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기를 작가는 바랐을 것입니다.


다채로우면서도 부드럽게 톤 다운되어 혼란스럽지 않은 색채의 삽화 역시 한두 문장으로 이뤄져 짧지만 쉬 대답할 수 없는 의문형의 지문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섬세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간결화된 그림체는 독자의 사색을 돕습니다. 촘촘하고 단정한 가는 선들이 층을 이루어 겹겹이 쌓인 지층의 단면 같기도 하고, 잎의 맥 같기도 합니다. 선을 덮는 선과 면으로 채워진 지면은 문명사회에서 수차례 규정하고 강제하며 가르고 그어놓은 '상식'과 '양식'이라는 이름의 규칙들 같기도, 적당히 느슨하면서도 중간중간 교차점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의 관계망을 그려놓은 듯싶기도 합니다. 종으로 또는 횡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채색된 면이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살아온 시간의 궤적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런 배경 위에 나일 수도 여러분일 수도 또는 누구라도 될 터인 여러 나이 대의 인물들이 나붓이 올려져 있습니다. 특정되지 않는 인물들의 실루엣을 책장 사이사이 눈으로 좇으며 어느 사이 자신의 내면과 접촉하게 되지요. 이렇듯 아름다운 책 [경계선]은 장마다 독자들이 자신을, 지난 시간을, 모든 인연을 차분히 되짚어 보도록 안내하기에 마치 완행열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사색 여행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얇은 이 한 권의 그림책을 마지막 장까지 넘겨 덮고 고개를 드는 여러분의 얼굴빛은 홀가분한 듯 요요할 것입니다.



나는 경계에 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당신에게 경계란 어떤 의미일까


경계라는 단어에서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요.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정서는 아마도 안정감이나 견고함보다는 긴장감 또는 의구심에 가까울 것입니다. 인간은 설명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거리낍니다. 또한 특정의 안정감을 보장하는 집단에 소속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경계는 그 두 가지가 부족한 지점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역과 영역이 맞닿아 있는 중간지대로서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어 '생장점'과 같은 느낌 역시 있습니다. 두 욕심이 충돌하고 서로 잡아당기니 사람이라면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니 긴장하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렇게 속삭여줍니다. '세상은 경계에 머무르고 사람은 경계에 있다' 그러니 경계에 걸쳐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모든 것이 그렇기 존재하기에 실존의 방식은 경계 위에 얹혀 있기에 "경계는 조화롭다"라고 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생애 발달 단계마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열망하며 머무르고자 합니다. 반면 우리는 끝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지요. 인간은 살아있기에 정체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모순된 모습조차, 경계선 위에 자리한 실존의 형태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저 갈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계선] 책이 전하듯 우리의 헤매는 모습에는 지향점이 있어 긍정적입니다. "어디에든 속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경계가 위협이 아닌 조화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욕구에서조차 일정한 방향성과 흐름을 상정했답니다. 매슬로우 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어요. 그의 피라미드 형태 욕구 모델에서 가장 낮은 단계는 생리적 욕구이며, 가장 높은 것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의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모든 이는 낮은 욕구에서 시작해 점차 높은 단계의 것을 실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요.


누군가에 의하면 이 세계마저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하길 원합니다. 로저스 Carl Ransom Rogers는 자신의 이론에서 세계의 생장 경향성을 인간의 성장 가능성의 바깥쪽에 덧대어 '사람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변화할 내적 힘이 있다'라는 주장의 견고한 지지대로 삼았죠. 생장 경향성 이론은 신트로피 Syntropy 법칙과 같습니다. 즉 세상은 생성되고 번성하려는 성향을 지녔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세계의 일부이기에 안정을 갈구하면서도 이 영역에서 저 영역으로 건너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향을 필연적으로 지닌 게지요. 그렇기에 사람은 경계 위의 사람에게 끝없이 질문합니다. 너는 어디에 속했고 너는 누구이며 너의 것은 무엇이냐고. 긴장감에 눌려 급히 어느 한편으로 뛰어들어가 숨지 않을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면 어느 순간 생장점에서 푸릇한 가지와 잎이 움틀 거예요. 시간이 절대 멈추지 않아 현재를 사는 우리는 단 한순간도 현재에 머무른 적이 없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니까요. 고민과 질문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미래를 살고 있는 겁니다.

뭐하나 딱 떨어지지 않아 갑갑하고 마음 아픈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당신은 이미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사색 가득한 그림책 에세이 [경계선]과 함께 잠시 내면을 관조하는 완행 기차 여행을 떠나보시지요.

※ 이 책은 서평단으로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고 정성스럽게 작성한 후기임을 알립니다.


좋고 싫음과 맞고 틀림. 취향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세상은 경계에 머무른다. 머리, 몸통, 팔, 다리처럼 분명하게 나뉘지는 않는다.

나는 경계에 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이불
안녕달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염없이 허용되고 품어지던 그 시절, 아동기로의 회귀, 사랑받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안식처와 다름 없다. 그림동화 [겨울이불]은 훈훈했던 이전 세대의 향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심과 조건없는 사랑의 재경험으로 이끄는 따끈한 초대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이불
안녕달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다

동심과 유년시절의 추억은 동서고금,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토록 가치롭게 평가되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대체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갓난시절부터 아동기까지, 한정없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허용되는 경험은 이후 낙심의 순간 스스로를 놓지 않도록 인간성을 지켜주는 방파제 또는 안전지대의 역할을 한다. 특히 조부모의 사랑이란, 부모의 것과는 다르게 마냥 넉넉해서 이에 대한 경험은 더욱 값지다. 바로 그런 사랑의 추억을 건드려 의식 저편의 잠자던 그리움을 깨운다는 점에서, [겨울 이불]은 특별하다. 시골집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겨울잠이 한창인 동물친구들이 등장하는 그림동화 [겨울이불]은 훈훈했던 이전 세대의 향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심과 조건없는 사랑의 재경험으로 이끄는 따끈한 초대장이다.




온돌바닥과 이불

겨울이불은 눈까지 함빡 내린 어느 겨울날의 이야기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푸근하다. 이야기는 아이가 눈에 잠긴 집의 마당에 들어서며 시작된다. 엄마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고 툇마루에서 방안으로 건너오며 발을 딛는 순간 주인공은 "앗, 뜨거워!" 비명을 지르고 만다. 이는 첫 번째 마법의 주문이다. 온돌 장판의 뜨거움이란 지글지글 끓는 정도라서, 온도조절에 실패하면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다. 아이의 외침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움찔하게 될 정도의 온도에 맞춰진 바로미터다. 이 부름에 독자 중 온돌장판을 겪어본 이라면 예외없이, 몸에 새겨진 기억이 순식간에 소환될 것이다. 곧이어 할머니의 겨울 이불, 커다란 진분홍 꽃송이의 문양이 독자들의 추억 중추를 톡톡 건들기 시작한다. 가장 뜨끈한 아랫목에 펼쳐져 있는 이불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아이가 차례로 벗어던져 놓은 겉옷들처럼, 우리도 아이의 행적을 따라 점차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불을 들치고 내복차림의 몸을 밀어놓는 아이와 함께 작가가 초대하는 동화세상 속으로 동반입장하고야 마는 것이다.



계란 한 판과 식혜

할머니의 이불 속은 현실과 동화가 뒤섞인 유쾌하고 다감한 세계이다. 개구리와 너구리, 곰과 거북이가 어울리며 밀감을 까먹고, 수다를 떠는 찜질방의 풍경은 낯선 듯 익숙하다. 뜨끈한 바닥 이편저편 뱀과 고슴도치, 다람쥐와 두더쥐가 동면하듯 널부러져 있다. 가장 안쪽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식혜와 고구마를 간식삼아 즐기며 '우리 강아지'를 반겨준다. 찜질방의 대표 먹거리인 식혜를 쭈욱 빨아들이는 조부모의 확대컷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이처럼 독자의 입 안에도 단숨에 침이 고인다. 미각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훌륭한 도구이다. 식혜의 달큰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혀끝에 감도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초대의 지평은 단숨에 계란장수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얼어붙은 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이전 세대로까지 넓어진다. 카운터의 곰이 지키고 있는 구운 계란 한판은 바둑판처럼 촘촘한 골목길로 변해 그 사이를 계란차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누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 떠는 동네 주민들이 모퉁이에 자리한 그 모습은 정겹다. 흰곰이 식혜를 떠 주려고 젖힌 이불깃 아래에서 등장하는 것은 밥알이 눈송이처럼 떠다니는 얼음강이다. 식혜 옹기 안의 작은 세상에서 심연의 가라앉았던 다정함과 그리움을 길어올리듯 국자가 마법같이 길어지며 얼음층 아래에서 달큰한 음료를 쑥쑥 퍼올린다.



혼자가 아니다

간식을 먹고 나누는 자리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아이는 제입보다 먼저 배고픈 다람쥐의 입에 간식을 물려주고, 할머니가 다정스레 까내어 아이의 입에 쏙 물려주는 흰 달걀의 말랑함만큼이나 이불 속 찜질방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명랑하다. 배도 부르겠다, 따뜻한 바닥에 누워 무릎베개를 한 아이의 이마를 거슬한 할머니의 손이 쓸어준다. 사락사락하며 할머니의 손과 아이의 머리칼이 마찰하는 소리가 네컷으로 전개된 페이지에서 독자들은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 듯 하다. 안녕달 작가는 부드럽고 푸근한 그림체 속에 수많은 실마리를 숨겨놓았다. 모든 힌트는 독자들이 저마다 소중히 간직해 온 추억의 유산을 돌이켜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 장치이다. 그렇게 그림책 한 권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든든하고 푸근한 심정이 되길 바랬던 것이 아닐까. 잠들기 전 마지막 아이의 시선에 가득했던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안녕달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같기도 하다. 가만가만 쓸어주는 할머니 손의 촉감과 동물친구들의 어우렁더우렁 함께 하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이런 합창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은 혼자일 수 없다. 혼자가 아니다라고.



온기는 번진다

겨울의 한기는 현실적인 삶의 온도와도 같다. 열심과 경쟁이 당연시되는 생계 현장의 기온은 냉랭하다. 그렇게 하루를 차게 보낸 후 추위를 거슬러 연기와 불빛이 배어나오는 집 마당에 들어선 아빠가 방안에 들어서자, 바람 냄새가 코끝을 휘감는다. 그런 아빠에게 할머니가 내미는 것은 아랫목 포근한 이불 속에 묻어 놓은 밥 한공기이다. 앉은뱅이 상위에 펼쳐진 염려와 다정함은 뜨끈한 밥 한술 위에 할아버지가 슬쩍 떼어 올려놓은 고등어 살 한 점처럼 배부르게 기름지다. 일터에서 돌아온 자녀에게 고령의 부모가 던지는 "밥은 먹고 다녀야지"라는 심상한 한 마디는 안쓰러움, 듬직함, 염려, 고마움과 격려의 마음이 그득 눌려 담겨있다. 잠이 폭 든 아이에게 점퍼를 둘러씌워 업고 가는 아빠의 모습이 포근포근 내려앉는 눈송이와 하얀 입김 덕분에 시려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이가 품고 있는 애정과 녹아내린 아빠의 심정이 하나가 되어 이윽고 독자들에게까지 내려앉을 것이다. 아빠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온기란 번져나가는 것이기에, 나 역시 마지막 장을 펼치며 독백을 따라해본다.

애가 몸이 참 따끈하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