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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불
안녕달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평점 :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다
동심과 유년시절의 추억은 동서고금,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토록 가치롭게 평가되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대체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갓난시절부터 아동기까지, 한정없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허용되는 경험은 이후 낙심의 순간 스스로를 놓지 않도록 인간성을 지켜주는 방파제 또는 안전지대의 역할을 한다. 특히 조부모의 사랑이란, 부모의 것과는 다르게 마냥 넉넉해서 이에 대한 경험은 더욱 값지다. 바로 그런 사랑의 추억을 건드려 의식 저편의 잠자던 그리움을 깨운다는 점에서, [겨울 이불]은 특별하다. 시골집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겨울잠이 한창인 동물친구들이 등장하는 그림동화 [겨울이불]은 훈훈했던 이전 세대의 향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심과 조건없는 사랑의 재경험으로 이끄는 따끈한 초대장이다.
온돌바닥과 이불
겨울이불은 눈까지 함빡 내린 어느 겨울날의 이야기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푸근하다. 이야기는 아이가 눈에 잠긴 집의 마당에 들어서며 시작된다. 엄마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고 툇마루에서 방안으로 건너오며 발을 딛는 순간 주인공은 "앗, 뜨거워!" 비명을 지르고 만다. 이는 첫 번째 마법의 주문이다. 온돌 장판의 뜨거움이란 지글지글 끓는 정도라서, 온도조절에 실패하면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다. 아이의 외침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움찔하게 될 정도의 온도에 맞춰진 바로미터다. 이 부름에 독자 중 온돌장판을 겪어본 이라면 예외없이, 몸에 새겨진 기억이 순식간에 소환될 것이다. 곧이어 할머니의 겨울 이불, 커다란 진분홍 꽃송이의 문양이 독자들의 추억 중추를 톡톡 건들기 시작한다. 가장 뜨끈한 아랫목에 펼쳐져 있는 이불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아이가 차례로 벗어던져 놓은 겉옷들처럼, 우리도 아이의 행적을 따라 점차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불을 들치고 내복차림의 몸을 밀어놓는 아이와 함께 작가가 초대하는 동화세상 속으로 동반입장하고야 마는 것이다.
계란 한 판과 식혜
할머니의 이불 속은 현실과 동화가 뒤섞인 유쾌하고 다감한 세계이다. 개구리와 너구리, 곰과 거북이가 어울리며 밀감을 까먹고, 수다를 떠는 찜질방의 풍경은 낯선 듯 익숙하다. 뜨끈한 바닥 이편저편 뱀과 고슴도치, 다람쥐와 두더쥐가 동면하듯 널부러져 있다. 가장 안쪽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식혜와 고구마를 간식삼아 즐기며 '우리 강아지'를 반겨준다. 찜질방의 대표 먹거리인 식혜를 쭈욱 빨아들이는 조부모의 확대컷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이처럼 독자의 입 안에도 단숨에 침이 고인다. 미각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훌륭한 도구이다. 식혜의 달큰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혀끝에 감도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초대의 지평은 단숨에 계란장수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얼어붙은 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이전 세대로까지 넓어진다. 카운터의 곰이 지키고 있는 구운 계란 한판은 바둑판처럼 촘촘한 골목길로 변해 그 사이를 계란차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누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 떠는 동네 주민들이 모퉁이에 자리한 그 모습은 정겹다. 흰곰이 식혜를 떠 주려고 젖힌 이불깃 아래에서 등장하는 것은 밥알이 눈송이처럼 떠다니는 얼음강이다. 식혜 옹기 안의 작은 세상에서 심연의 가라앉았던 다정함과 그리움을 길어올리듯 국자가 마법같이 길어지며 얼음층 아래에서 달큰한 음료를 쑥쑥 퍼올린다.
혼자가 아니다
간식을 먹고 나누는 자리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아이는 제입보다 먼저 배고픈 다람쥐의 입에 간식을 물려주고, 할머니가 다정스레 까내어 아이의 입에 쏙 물려주는 흰 달걀의 말랑함만큼이나 이불 속 찜질방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명랑하다. 배도 부르겠다, 따뜻한 바닥에 누워 무릎베개를 한 아이의 이마를 거슬한 할머니의 손이 쓸어준다. 사락사락하며 할머니의 손과 아이의 머리칼이 마찰하는 소리가 네컷으로 전개된 페이지에서 독자들은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 듯 하다. 안녕달 작가는 부드럽고 푸근한 그림체 속에 수많은 실마리를 숨겨놓았다. 모든 힌트는 독자들이 저마다 소중히 간직해 온 추억의 유산을 돌이켜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 장치이다. 그렇게 그림책 한 권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든든하고 푸근한 심정이 되길 바랬던 것이 아닐까. 잠들기 전 마지막 아이의 시선에 가득했던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안녕달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같기도 하다. 가만가만 쓸어주는 할머니 손의 촉감과 동물친구들의 어우렁더우렁 함께 하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이런 합창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은 혼자일 수 없다. 혼자가 아니다라고.
온기는 번진다
겨울의 한기는 현실적인 삶의 온도와도 같다. 열심과 경쟁이 당연시되는 생계 현장의 기온은 냉랭하다. 그렇게 하루를 차게 보낸 후 추위를 거슬러 연기와 불빛이 배어나오는 집 마당에 들어선 아빠가 방안에 들어서자, 바람 냄새가 코끝을 휘감는다. 그런 아빠에게 할머니가 내미는 것은 아랫목 포근한 이불 속에 묻어 놓은 밥 한공기이다. 앉은뱅이 상위에 펼쳐진 염려와 다정함은 뜨끈한 밥 한술 위에 할아버지가 슬쩍 떼어 올려놓은 고등어 살 한 점처럼 배부르게 기름지다. 일터에서 돌아온 자녀에게 고령의 부모가 던지는 "밥은 먹고 다녀야지"라는 심상한 한 마디는 안쓰러움, 듬직함, 염려, 고마움과 격려의 마음이 그득 눌려 담겨있다. 잠이 폭 든 아이에게 점퍼를 둘러씌워 업고 가는 아빠의 모습이 포근포근 내려앉는 눈송이와 하얀 입김 덕분에 시려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이가 품고 있는 애정과 녹아내린 아빠의 심정이 하나가 되어 이윽고 독자들에게까지 내려앉을 것이다. 아빠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온기란 번져나가는 것이기에, 나 역시 마지막 장을 펼치며 독백을 따라해본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