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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노상, 앤드류 밀러, 문학세계사


- 레지노상은 파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페스트'이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휙 하고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내가 책상을 닦고 있는, 이 걸레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적어도 걸레는 더러운 것을 닦아낸다는 의미 하나는 단단히 지니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부니 지위니 하는, 타자에 의해 주어진 의미에 머물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겨우 걸레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걸레의 의미 역시, 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니까.

'페스트'의 의사 류는 인간이 걸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 누구에게도 보아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오로지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에 의해 증명되고, 자신에 의해 완성될 '의미'를 향한 혼신의 투신. 그것의 다른 이름을 우리는 '순수(pure)'(이 책의 원제)라고 불러도 되겠다. 파리의 레지노상처럼 죽음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추악한 수라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의 빛나는 의미를 증명할 수 있을까.

 

 

모래 그릇, 마쓰모토 세이초, 문학동네

 

-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추리문학을 세이초 이전과 세이초 이후로 갈라놓은 작가이다. 하위문학, 장르문학이었던 추리소설을 정통문학, 순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소위 사회파 추리, 지적 추리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다. 세이초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한두 가지 귀뜸을 하자면, 우선 이 작가는 놀랍게도 아쿠다가와상 수상자이다. 아다시피 아쿠다가와상은 일본 순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또한 이 작가는 1976년 이후 일본 독서여론조사에서 10년간이나 '좋아하는 작가' 1위를 차지한 국민작가이다. 깊이와 넓이, 재미와 의식을 함께 갖추지 않고서는 국민작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출판사는 문학동네이다. 책읽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내놓는 이 출판사의 성향을 잘 안다.
그의 작품에는 문학과 예술, 역사와 철학이 나타난다. 하여 지적 추리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회와 현실, 인간성의 심연이 나타난다. 하여 사회파 추리이다. 오늘날의 일본 추리장르를 지배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세이초의 아이들'이라 불린다. '13계단'을 읽느라 밤을 세워본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엔더의 게임, 올슨 스콧 카드, 루비박스

 

- 이제 장르문학은 깊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살인범이 누구인지 벌써 다 알고 있다. 어거지 반전은 차라리 비극이다. 낯익은 게임의 규칙으로 손쉽게 긴장과 흥미의 동조화를 유발하면서도, 깊이와 울림까지 겸비한 새로운 장르소설은, 그래서 반갑고도 감동적이다. 엔더의 게임은 장르문학의 최고 권위인 휴고상(독자 선정)과 네뷸러상(전문가 선정)에 빛나는, 기본적인 영양가가 보증된 SF 성장소설이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살아갈 현실의 추악함과 그 현실에서 살아갈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는 것이다. 쉽게 말해 꿈은 깨어지고 사랑은 배신당하고 세상은 잔인하고 자신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장이란 가혹한 것이며 하여 성장의 결과는 많은 경우 절망과 도피, 또는 증오와 타락과 같은 퇴행으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러한 퇴행으로 빠지지 않고 그 추악한 세상과 그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자기만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2차 성장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많은 성장소설이 씌어져야 했던 이유인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풍요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기성세대보다 훨씬 불행하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의 경험도 없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이시키는 능력도 부족하다. 한마디로 무균상태의 판타지 세계에서 백신 한 번 맞아본 적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돌연 피투성이의 현실에 내동댕이쳐질 때, 그것은 파국일 뿐 2차 성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성장소설이 나아가야 할 가능성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SF 형식의 성장이야기라는 것. '아버지 때는..' 따위의 고려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판타지 속에서 자란 요정들에게는 판타지 형식의 성장이야기가 오히려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 하나는 천재의 성장이야기라는 것. 천재는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의 중요요소인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해당사항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철완의 자아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 3년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치열한 문학적 열정이건 경박한 문화적 패션이건, 어쨌든 하루키는 하나의 현상(신드롬)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하건 아니면 거품이건간에 전문가라면 어쨌든 신드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노벨문학상 후보작가이자 동시에 베스트셀러작가라는 경천동지할 유니크한 현상인 바에야. 하여 우리는 그를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야 하는 과제뿐만 아니라 진짜건 혹은 가짜건간에 어째서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밝혀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순례와 회귀라는 구조와 여자와 죽음이란 상징, 그리고 감각적 문체라는 전성기의 하루키표 제작방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그의 제작방식에 시대와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을 주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겉보기와는 달리 시대와 현실이 사실 변한 것이 없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부터 착실히 그의 궤적을 따라온 독자라면, 이 질문을 자신에게도 던져보아야 한다.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나에게 울림을 주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 나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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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8-0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소설 파트이신데 인문/ 사회/ 과학/ 예술 파트에 먼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2013-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