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국어 시간에 배운 시조예요.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회고시(懷古詩)로 흔히 세상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정작 이 시조를 배울 당시는 이 시조의 주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세상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지요. 학교를 졸업한 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사 이 시조의 주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렴풋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조의 주인공처럼 한 시대 역사의 틀을 짜거나 권력의 못을 박아본 적이 없기에 이 시조의 작자가 느끼는 무상함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사진은 길재 선생의 '한거(閑居)'라는 시예요. 위 시조와 관련하여 읽어보면 내용 이해가 한결 더 쉬울 것 같아요.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초가집 홀로 한가롭나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 밝고 바람 맑으니 흥 넘쳐라.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외갓네 오지 않고 새 소리만 조잘조잘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 울타리 아래로 평상 옮기고 누워서 책을 보다.

 

하늘에 달이 휘영청 밝고 바람은 서늘해요. 모르긴 해도 시냇가 옆에 지은 초가이니 시냇물 소리도 은은히 들려오겠지요. 외갓 사람 오지 않은 조용한 곳인데다 한 밤중이라 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요. 더없이 고적한 공간에 있지만 시인은 외롭지 않아요. 외려 흥이 나요. 왠지 모를 충만감이 밀려오기 때문이에요. 하여 자신도 모르게 누옥(陋屋)을 나와 대 숲 아래 평상을 옮겨 놓고 누워 책을 봐요. 고적하지만 충만함이 가득한 공간에 자신도 동참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어요. 바로 마지막 구절이에요. 내용 전개상 무리가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좀 문제가 있어요. 지금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밤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달빛 아래 책을 본다는 것일까요? 옛날 도서의 글씨가 아무리 크다 해도 달빛 아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달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무리한 일이지요. 비록 시적으로는 그럴듯한 행위일런지 모르지만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돼요: “길재 선생은 실제 책을 본 것이 아니다. 다만 시적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적 표현을 위해 등장시킨 이 부분은 선생 자신도 모르게 선생의 마음자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책은 자연과 대척점에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책을 본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한거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이 시를 선생의 한거와 유유자적함을 읊은 것으로 보는데, 이는 피상적 분석이 아닐까 싶어요.

 

길재 선생은 한 때 역사의 틀을 짜고 권력의 못을 박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러나 새 정권의 탄생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력의 뒷방으로 물러났어요. 그렇게 물러난 한거란 사실 그리 흔쾌한 한거가 아니지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길재 선생의 한거는 어쩔 수 없는 체념에서 택한 한거라는 생각이에요. ‘오백년...’의 시조에서 과거의 영화에 대한 그리움의 자취가 어른거리듯 이 시에서도 어쩔 수 없는 체념에서 택한 한거에서 오는 세상에 대한 미련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누울 와)(물건 품)의 합자예요. 높은 곳에서 몸을 구부려[] 아래 있는 대상을 살펴 본다는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임하다'는 본뜻의 일부를 사용한 거예요. 높은 곳에 위하하여 아래를 바라볼 자세를 취했다란 의미로요. 임할 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臨時(임시), 降臨(강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먹을 식)(나 여)의 합자예요. 는 음을 담당해요. 풍족하게 먹어 배가 부르다는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남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배가 부르기에 더 먹을 수 없어 남겼다란 의미로요. 남을 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餘談(여담), 餘裕(여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벼 화)(많을 다)의 합자예요. 벼 모를 옮겨 심는다는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다이)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소출을 늘리기 위해 이앙을 한다는 의미로요. 옮길 이.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移徙(이사), 移秧(이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흙 토)(까마귀 오)의 합자예요. 둑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村塢(촌오, 촌락), 塢壁(오벽, 작은 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사람 인)(신하 신)의 합자예요. 엎드려 쉰다는 의미예요. 신하는 보통 군주 앞에서 몸을 굽힌 자세를 취하기에 을 합하여 의미를 표현했어요. 눕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여기에도 쉬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지요. 누울 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臥佛(와불), 臥薪嘗膽(와신상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길재 선생의 시를 너무 혹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시를 100번 가량 읽었는데도 일반적으로 이 시에 대해 언급하는 한거의 운치가 떠오르질 않는 거예요. 하여 그 이유를 따져보다 위와 같은 평을 하게 됐어요. 시 한수를 가지고 길제 선생이 한거의 운치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좀 무리가 있긴 해요.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을 가지고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한거의 운치가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적어도 제게는요.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 서예 비림 박물관에서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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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11-28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 개인적인 의견을 혹평이라 생각하지도 않지만서도,
무릇 평이란걸 하려면 적어도 백번은 읽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생각되어서 숙연해집니다.
백번은 커녕, 날림으로 읽어내고 감정을 분출해내는 저를 반성하게도 되고요.

좋고 귀한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꾸벅~(__)

찔레꽃 2017-11-29 08:36   좋아요 2 | URL
겸손이 지나치셔요~ ^ ^ 좋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양철나무꾼 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더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다소 싱거운(?) 생각을 해봤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