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초판이 나온 책으로 그 무렵의 영화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다. 이 분의 다른 책, 예를 들면 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인생의 역사’ 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등을 읽어보았는데 읽을 때마다 매번 고개를 끄덕끄덕, 입이 쩍 벌어지다 읽고 나서는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표현의 정확성, 사색의 깊이, 세밀한 관찰, 섬세한 감수성등이 나를 압도해 버린달까. 그래서 책은 인덱스로 너덜너덜한데 나의 독후감은 빈약해진다.
p. 9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명칭 안에 전령사 헤르메스(Hermes)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은 해석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전달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p. 9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p. 20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 25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p. 34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p. 46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p. 48 소시오패스는 ‘절대적인’ 진단명이지만 괴물은 ‘상대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소시오패스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누군가에나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는 있다.
p. 64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나 역시 그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내부에 있을 때가 많다.
p. 96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 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p. 107 “우울한 인물은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우울증 환자다.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울한 인간의 관찰에 스스로를 내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에 생명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것을 숙고하는 정신은 더욱 강력하고 영민해진다.”(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p. 113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p. 132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p. 140 반전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반전과 모든 해결을 다시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반전.
p. 146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
p. 161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p. 201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p. 202 파이는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더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한 그와 같은 허구적 해석이 그로 하여금 남은 생을 살아가는 데 ‘더 낫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p. 218 (아무것에도 중독돼 있진 않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한 가지에는 중독돼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자기 자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중독돼 있는 것이니, 그는 곧 ‘자기-중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