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린치 지음, 정영목 옮김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시인 장의사가 마주한 열두 가지 죽음과 삶>>

1장, 장의, 산 자를 위한 의식 중에서


*죽은 사람은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근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24시간 내내 아무 때나 죽으며, 어느 요일, 어느 달을 선호하는 것 같지 않다. 계절 쪽으로도 분명하게 좋아하는 때가 드러나지 않는다. 별의 배치나 달의 이울기나 전례典禮 일정도 큰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장소도 중요하지 않다. 쉐보레와 양로원에서, 욕조에서, 주간州間 도로에서, ER에서, OR*에서, BMW에서 앉아서 가기도 하고 누워서 가기도 한다. 알파벳 머리글자로 표시되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에 장비나 중요성을 더 할당할 수도 있지만—ICU**가 어쩐 일인지 그린브라이어 요양소보다 나아 보인다—죽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게 내가 묻고 태우는 죽은 사람들은 그들 이전의 죽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죽을 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의 결여는 사실 뭔가 심각한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첫 번째 확실한 표시의 하나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그들이 숨 쉬기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물론 CVA나 ASHD***보다 흉부 총상이나 쇼크와 외상을 기록하는 데 들어가는 잉크가 더 많겠지만, 어떤 사인도 다른 사인보다 지속성이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다. 어떤 것이든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관심이 없다.


누구냐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괜찮고, 당신도 괜찮아, 그런데 그는 죽었어!” 하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위로다.

이것이 우리가 강바닥을 훑고 비행기 잔해나 폭격 현장을 샅샅이 뒤지는 이유다.

이것이 ‘작전 중 실종’이 ‘도착 시 이미 사망’보다 고통스러운 이유다.

이것이 우리가 관을 열어 두고 모두가 부고를 읽는 이유다.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보다 낫고, 그것이 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낫다. 일단 내가 죽은 사람이 되면, 네가 괜찮든 그가 괜찮든 나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다 꺼져도 상관없다. 죽은 사람은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은, 부사副詞와 보험 통계에 묶여 여전히 관심을 가진다. 자, 그런 차이가 있고, 그래서 내가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 살아 있는 자는 주의 깊고 또 종종 관심을 기울인다. 죽은 사람은 관심이 없다. 어쩌면 근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없다. 이것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입증할 수 있는 진실이다.


(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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