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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올린 글 두 편


주상전主上殿에 글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왕세자 신 이제는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제 살 곳을 잃으면 반드시 하늘에 호소하고 자식이 제 살 곳을 잃으면 반드시 어버이
께 호소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극한 본성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시비와 득실을 헤아린 뒤에야 그렇게 하겠습니까? 

신 이제는 비길 데 없이 어리석고 완고하지만 부왕 전하께서는 신이 적장자라는 이유로 그 우매함을 잊으시고 세자에 책봉하셔서 이제 벌써 14년이 됐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치고 깨우치시어 크게는 충효의 도리부터 작게는 일상의 자잘한 행동부터 제시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을 두어 날마다 경서를 읽게 하시고 대간에게 더욱 엄격 히 살피게 하시니 자애로운 생각과 교육하는 방법이 더할 바가 없었습니다. 경서와 사리에 통달해 세자의 임무를 다하고 종사의 중책을 잇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신 이제는 전하의 자애로움을 믿을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전하가 종사를 생각해 구상한 큰 계획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악하

고 어리석은 무리를 가까이하고 욕망만을 따라 법도와 예절을 무너뜨린 것이 이미 여러 번입니다. 작년 가을에는 전하께서 특히 견책하시어 신은 그때 조금 깨닫고 반성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아이 때의 습성이 그래도 남아있어 소인의 꾐에 빠져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유혹에 빠져 마침내 하늘과 아버지와 임금을 속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성하지 않았으니 신의 죄를 생각하면 용납될 곳이 없습니다. ‘스스로 지은 죄는 벗어날 길이 없다’는 옛 사람의 말은 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몸을 때리며 반성하고 버려져도 만족해야지 감히 한 마디 말이라도 해서 스스로 새로워질 도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신 이제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 때부터 지금 24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어버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하루 아침에 지척咫尺의 거리에서 호·월胡越4처럼 멀리 떨어져 수라를 챙겨드리거나 문안할 방법도 없고 건강이 어떠신지 살필 길도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먹는 것도 잊고, 자려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며, 말없이 있을 수 없게 됐습니다. 예전에 가까이 모시며 직접 말씀을 듣고 동생들과 안뜰에서 즐겁게 놀던 것을 돌이켜보면 꿈속 일처럼 아득합니다. 복잡한 마음이 어찌 사라지겠습니까? 


신 이제의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전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아직 끊지 못해 신의 불초함을 잊으시고 생각을 놓

지 못하실까 걱정됩니다. 여기까지 말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흐릅니다. 신 이제는 타고난 바탕이 우둔하고 마음 씀이 광망狂妄해 지금 비록 죄를 뉘우쳤지만 앞서의 잘못을 다 시 밟지 않을 것을 저 자신이 보장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경계하는 8가지 조항으로 종묘와 하늘에 계신 영령께 맹세해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또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새로워지겠다는 뜻을 서술해 전하께 올립니다. 


‘화복禍福은 모두 자신이 초래하는 것’이라고 옛사람이 말했으 니 선행도 악행도 참으로 내게 달려있는 것이지 남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예부터 소인이 세자를 꾀어 미혹시킨 일은 역사책을 찾아보면 흔히 나오니 소인은 제거하기 어려우나 가까이하기는 쉽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서 기이한 재주와 음란한 꼬임으로 신을 불의한 데 빠뜨린 자들을 법대로 처단해 앞으로 간사한 소인들이 아첨하는 길을 막고, 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바른 선비를 가까이하고 날마다 좋은 말을 들어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 가엽게 여겨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이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었다. 





세자가 내관 박지생朴枝生을 보내 직접 지은 글을 올렸다.


“전하의 시녀는 모두 궁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모두 깊이 생 각해 받아들이는 것이겠습니까? 가이加伊(어리)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그녀가 살아가기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밀통하면 추문이 날까 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시니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고 나라 안에 원망이 가득합니다. 어찌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지 않으십니까? 옳은 일을 권장하면 떠나가고, 떠나가면 지극히 상서롭지 못합니다. 신은 이처럼 악기의 줄을 일부러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 풍류와 여색을 마음껏 풀어버리려는 계획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오직 뜻에 따르고 감정에 맡겼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한漢 고조高祖는 산동山東에서 살 때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 아했지만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고, 진왕晉王 광廣(중국 수隋 양제煬帝 〔569~618, 재위 604~618〕)은 현명하다고 일컬어졌지만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은 위태롭게 되고 나라는 망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할지 어떻게 아십니까? 이 첩 한 사람을 금지하면 잃는 것은 많고 얻는 것은 적습니다.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득한 후세까지 수많은 자손의 첩을 금지할 수 없으므로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이며, 첩 하나를 내보내는 것은 얻는 것이 적다고 하는 것입니다. 


국왕은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를 불의不 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도 용서했습니다. 김한로는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오랜 친교를 잊고 갑자기 내치시니 공신이 이 일을 계기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숙빈(김한로의 딸인 세자빈)이 아이를 가졌는데 죽조차 들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지금부터 새사람이 돼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4회로 출간 전 연재를 마칩니다. 
발간되는 책을 통해서 사료와 함께 읽는 평전의 재미를 더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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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세자의 남은 삶


폐출된 양녕대군은 즉시 강화江華로 거처를 옮겼다(6월 22일). 51세로 아직 노쇠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태종은 새로 임명된 세자에게 곧바로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8월 8일). 그때부터 붕어할 때까지 4년 동안 태종은 국무의 핵심인 인사와 군정軍政을 관장하면서 갑작스레 즉위한 21세의 젊은 새 국왕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살았다. 세자에 서 폐출된 그는 그 자체로 큰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그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실제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세종 6년(1424) 3월 청주 호장戶長 박광朴光과 같은 해 10월 갑사 지영우池英 雨는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덕을 받게 될 것” 이라거나 “그가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등의 난언을 퍼트려 처벌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탄핵이나 난언에 휘둘리지 않았고, 1년에 한 번 정도 그를 불러 우애를 나눴다(이를테면 세종 14년 〔1432〕 4월, 세종 15년 12월, 세종 16년 1월, 세종 17년 9월 등). 재위 20년(1438)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됐다). 이런 사실들은 세종의 우애와 인격의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라고 여겨진다.


자신의 과오로 권력에서 배제됐지만, 양녕대군은 정치적 관심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세조
의 집권 과정에서 그가 보인 행동이다. 그는 그 과정의 중요한 지 점에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단종端宗 1년(1453)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 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安 平大君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다(10월 17일). 

6개월 뒤 양녕대군은 단종의 사사라는 좀 더 중요한 문제에 개 입했다. 그는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錦城 大君·송현수宋玄壽 등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고, 역시 윤허를 얻어냈다. 물론 이런 사안은 그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끝내 관철됐을 것이다. 그러나 종친을 대표한 양녕대군의 적극적인 발언이 그것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 뒤 등극한 세조가 양녕대군을 후대한 것은 당연했다. 만년에 양녕대군은 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관찰사와 환관 등을 보내 극진히 수행케 했다. 또한 양녕대군이 죽음을 앞두고 병고에 시달리자 세조는 그의 서자인 이순李諄과 이심李諶 을 승진시켜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세조 8년 〔1462〕 6월 24일).

양녕대군은 세조 8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 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 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그날 그의 졸기에 기록된 사평史評 의 한 부분은 음미할 만하다.

그는 성품이 어리석고 곧았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다. 세종의 우애가 지극했고, 그 또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 시종 始終을 보전할 수 있었다.

끝으로 그의 독특한 삶은 현대에 여러 문학작품으로 재구성됐 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대표적으로 김동인(『광공자狂公子』), 조흔파(『양녕대군』), 박종화(『양녕대군』) 등이 그를 다룬 소설을 남겼다.

반성문과 항의서



앞서 말한 대로 양녕대군은 어리와 관련된 실행 때문에 두 편의 글을 부왕 태종에게 올렸다.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첫 번째 글은 반성문이고 두 번째 글은 항의서에 가깝다. 태종 18년 5월 30일 변계량이 써준 첫 번째 글에는 깊은 반성의 마음이 유려한 문장에 담겨있다. 당대를 대표한 문장가인 변계량이 대신 썼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전혀 다르다. 직설적이고 급박하다. 그런 직설과 급박함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그대로 표현돼 있다. 앞의 반성문은 “왕세자 신 이제는 말씀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로 시작했지만 이 글에는 그런 도입 자체가 없다. “전하의 시녀는 모두 궁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모두 깊이 생각해 받아들이는 것이겠습니까?” ‘전하’와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화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말이다. 

중간 부분도 방탕했지만 성공했거나 절제했지만 실패한 역사적 선례를 들면서 자신의 실행을 강변하고, 신효창을 용서한 사례를 들며 태종을 비난했으며, 세손을 임신한 숙빈이 곡기를 끊었으니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위협에 가까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짧은 항의서에서 도드라지게 새된 목소리는 맨 마지막 문장인 것 같다. “지금부터 새사람이 돼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앞의 맥락과 너무 달라 다소 엉뚱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나도 그래봤고 내 아이도 그런 적이 있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오히려 부모님께 대들다가 “앞으로는 그러지 않고 잘할게요!”라고 일방적으로 말한 뒤 제 방으로 훌쩍 들어가는 것.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전과 함께 읽을 사료 부분에 대한 해설을 포함한 3회 연재였습니다. 월요일에 마지막 4회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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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과 항명, 그리고 폐출


널리 알려진 대로 양녕대군의 일탈은 주로 여색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문제는 태종 후반부터 불거졌다. 태종 16년(1416) 9월 선 공부정繕工副正 구종수具宗秀와 악공樂工 이오방李五方 등은 여색을 밝히고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에게 미녀와 매를 바쳤다가 탄로나 유배됐다.


대군을 폐출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듬해에 일어났다. 그 것은 어리於里라는 여인과의 염사艶事였다. 그녀는 전 중추中樞 곽 선郭璇의 첩이었는데, 세자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태종 17년 2월 15일). 태종은 대로했고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 보냈다(2월 17일). 세자는 즉시 반성하고 행실을 고치겠다는 맹세의 글을 종묘와 부왕에게 올렸다. 태종은 세자가 허물을 뉘우친다면서 그날로 환궁하라고 용서했다(2월 22일). 그러나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됐다. 


뒤에 실은 전문을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이 반성의 글에는 깊은 참회의 마음이 넘친다. 그러나 당대의 문장가로 세자의 빈객이던 변계량卞季良이 써준 글이라는 사실이 알려주듯 그런 회오悔悟 가 그대로 세자의 진심은 아니었다. 세자의 본마음은 1년 뒤 직접 쓴 반항의 글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세자가 이때 진정으로 반성하고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네 번째 국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같은 문제를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더 큰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항명이었다.


이듬해 세자는 어리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번에는 아이까지 갖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태종 18년 5월 10일). 태종은 다시 분노했고, 세자의 출궁과 알현 금지를 명령했다. 장인 김한로도 직첩 (임명장)을 빼앗기고 죽산竹山(지금 경기도 안성)에 부처付處됐다. 

양녕대군을 폐위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세자가 직접 작
성해 올린 것이다(5월 30일). 그 글은 첫 부분부터 매우 거칠었다. “전하의 시녀는 모두 궁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모두 깊이 생각해 받아들이는 것이겠습니까?” 세자는 문제의 원인이 부왕에게 있다고 항의했다. “지금까지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시니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고 나라 안에 원망이 가득합니다. 어찌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지 않으십니까?” 짧은 이 반항의 글은 협박에 가까운 일방적인 선언으로 끝났다. “숙빈(세자빈)이 아이를 가졌는데 죽조차 들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지금부터 새사람이 돼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라는 태종의 개탄대로 이것은 숨기지 않은 반항이었다. 그리고 그 반항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적인 관계를 넘어 국왕과 세자라는 엄중한 공적 기준이 적용되면서 항명으로 해석됐다. 태종은 그 글을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면서 심정을 토로했다. “세자는 그동안 여러 번 불효했지만,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려고 했다. 직접 그 잘못을 지적해 그가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지만,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숨기겠는가?”

세자를 교체해야겠다는 태종의 결심은 이 시점에서 거의 굳어졌다고 판단된다. 국왕의 심중을 파악한 의정부·삼공신·육조·
삼군도총제부·각사 등 거의 모든 주요 신하는 세자의 폐위를 주청했다(6월 2일). 

새로운 세자의 책봉

양녕대군을 대체할 인물도 동시에 결정됐다. 태종은 양녕대군의 아들 가운데 왕세손을 선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국왕의 의중을 헤아린 영의정 유정현 등은 어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擇賢고 주장했다. 이튿날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했다(6월 3일). 항명하는 상소가 올라온 지 나흘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태종의 여러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 뒤 세종의 업적은 그런 평가에 고 개를 끄덕이게 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하듯 나라의 근본 을 교체한 이 결정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바꾼 중대한 선택이었다.

많은 사건은 순간적으로 발생하지만, 그 원인과 조짐은 상당히 일찍부터 형성되고 감지된다. 태종은 셋째 아들의 출중한 능력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고 높이 평가해 왔다. 양녕대군의 첫 탈선이 발각되기 직전의 사례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재위 16년 (1416) 2월 8일 태종은 충녕대군을 대동하고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행차했다. 그때 큰비를 만났는데 충녕대군은 『시경』의 「빈풍豳風」 을 인용해 그 의미를 해석했다. 태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했다. “충녕은 용맹하지 못한 것 같지만 판단하기 어려운 중대한 일을 결단하는 데는 견줄 사람이 없다.”

최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수많은 국무의 개별적 무게를 정확히 가늠해 인력과 재원을 효과적으로 투입하는 판단력이라면, 태종이 보기에 세종은 그런 능력을 가장 탁월하게 보유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종이 쌓은 위업은 태종의 판단력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냉혹하고 노회한 국왕이었던 태종의 진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세자가 자신에게 도전하지만 않았다면 그를 폐출하는 극한적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수많은 선례와 현실 정치의 냉혹한 논리에 비춰볼 때 그런 결정은 폐세자의 목숨을 박탈하고 나아가 다시 살육이 난무하는 왕실의 분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폐세자를 결정할 때 “태종이 통곡해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고 적혀있다. 국왕은 그만큼 고뇌한 것이다. 그러나 양
녕대군의 행동은 단순히 여색에 관련된 실행을 넘어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번졌다. 사적으로는 지극히 가까운 부자 관계지만 궁극적으로는 군신의 논리가 적용되는 왕실의 질서를 고려할 때 태종은 그것을 묵과할 수 없는 범죄로 판단했고, 어쩌면 바라왔던 구상을 신속하게 실천했다.

("태종의 여러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라는 인상적인 구절이 담긴 연재였습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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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폐세자의 불행한 운명과 인생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은 거대하고 복잡한 운명의 드라마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과 종말은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우주의 시작과 멸망만큼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모든 운명은 복잡하고 난해하고 절대적이지만, 그것의 현실적 위상과 영향력의 크기는 상당한 격차를 갖고 있다.


그런 격차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그 개인의 현실적 지위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자연의 원리와 비슷하게, 개인의 

현실적 지위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거대하 고 복잡하기 쉽다.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은 조선의 네 번째 국왕으로 순조롭게 등극할 운명이 자명해 보였지만, 그런 엄청난 행운은 자신의 거듭된 실책과 부왕父王의 냉엄한 결정으로 사라졌다. 

순조로운 성장과 왕세자 책봉


양녕대군이라는 개인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신생국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은 태종太宗(1367~1422, 재위 1400. 11~1418. 8)이었 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보여준 국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새 왕조의 건국과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대표되는 냉혹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한 그는 18년 동안 재위하면서 국가의 여러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태종은 자신의 가정, 곧 왕실의 외형적 번성에서도 두드러진 결과를 산출했다. 그는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와의 사이에 서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孝嬪 김씨 등 18명의 후궁에게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얻었다(그 밖에도 일찍 사망한 2녀가 있었다). 양녕대군은 이런 많은 자녀 가운데 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큰 행운을 누렸다. 1394년(태조 3년)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방원 李芳遠은 정안대군靖安大君이었지만, 6년 뒤 조선의 세 번째 국왕으 로 등극했다. 양녕대군에게 이런 변화는 수많은 왕자군王子君 가 운데 독존의 지위를 예약하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기록되지 않은 사소한 실행失行은 있었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20세 무렵까지 순조롭게 성장했다. 그는 10세 때 이제李禔라는 이름을 하사받고(태종 2년 〔1402〕 3월 8일), 한 달 뒤 원자에 책봉됐으며(4월 18일) 다시 넉 달 뒤에는 왕세자에 책봉됐다(8월 6일). 열 살이라는 조금 어린 나이에 이처럼 신속하게 후계 구도가 결정된 데는 그 사안의 중대성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던 태종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시점을 앞뒤로 양녕대군은 능력과 행실에서 두드러진 결함 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13세 때 전 총제摠制 김한로金漢老의 딸(숙 빈淑嬪 김씨)과 혼인했고(태종 7년 〔1407〕 7월 13일), 같은 해 9월 25일 에는 새해를 하례하는 진표사進表使로 임명돼 명의 수도로 파견 됐다. 이듬해 4월 2일에 귀국하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그는 국제질서의 동향과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체험했을 것이다. 세자 는 내정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했는데, 재이災異로 태종이 집무하 지 않을 때는 주요한 국무를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했으며(태종 9년 〔1409〕 1월 8일) 태종이 편찮았을 때는 경복궁 문소전文昭殿1의 삭제 朔祭를 대행하고 어전회의인 조계朝啓에 참석하기도 했다(태종 9년 8월 1일).

이처럼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냉철하고 과감한 정치적 결단에 힘입어 차기의 권좌를 예약하는 커다란 행운을 선사 받았다. 그
리고 그 자신 또한 세자로서 수준 이상의 능력을 보이면서 그런 행운은 곧 현실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인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점차 부왕의 기대에 어긋나는 실행을 저질렀고,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냉철한 그의 부왕은 다시 한번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양녕대군 개인은 물론 조선의 국운에 거대한 의미를 가진 결단이었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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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됨됨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글을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뚝한 면모부터 그늘진 모습까지

글을 통해 역사 속 인간에게

가장 진실하게 다가가려는 책이 곧 나옵니다. 

 

장수는 물론

군졸과 노비까지 생각하는

이순신의 깊은 인간애가 그대로 담긴

한산대첩 장계

 

송시열을 향한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불편한 마음을 담은

보내지 않은 편지

기유의서’, ‘신유의서

 

지위를 떠나

여느 아버지와 아들이 빚은

불화와 파열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양녕대군의 반성문

 

유자광을 바라보는

남곤과 유몽인의 상반된 시선이

여실히 드러나는

유자광전’, ‘어우야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지만

한글의 유용성과 세종의 열정을

반증하기도 하는

최만리의 상소

 

왕실, 학자, 무장, 경계인……

사료와 함께 읽어 그 깊이가 더한

역사 속 인물 이야기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인 저자가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한

인물 한국사가운데 일부를 추려 다듬고 사료와 간단한 해설을 덧붙인 새로운 시각의 평전,


김범, <<사람과 그의 글-사료와 함께 읽는 평전>>


역사 속 인물을 말하는 사료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역사가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할 것입니다.

 

 (4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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