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알을 깨듯이 나는 나를 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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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 말 듣지 못해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 눈 보지 못해

나는 이어폰을 끼고
먼저 투명해진다

말을 끊고
눈길도 끊고

아무도 없다
다가오는 사람 없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그래
내가 직접 그렇게 한 거야

지금
여기에서

내가 나를
사라지게 했어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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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봐. 자연에는 정사각형이 없어!
하지만 잘 살펴보면 원은 볼 수 있었을지 몰라. 아침에 막 지평선 위로 떠오른 태양, 한밤의 보름달, 해바라기의 동그란 원....... 어쩌면 물속에 돌멩이를 던지다가 돌멩이가 물 위에 만드는 원을 보았을지도.
원시인은 달팽이 껍데기에서 나선형도 보고, 뾰족한 산에서 삼각형도 보았겠지만, 분명 정사각형은 못 봤어.
동그란 동굴 속에 살고, 동그란 움막집을 지은 원시인에게 정사각형은 너무 미래 지향적인 모양이야. 불가능의 첨단도형!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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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공주

아무래도
우리 할머니 인어 같아
허리 아파서 종일 누워 있어
다릿심 없어 걷지도 못하는데
할아버지가 고무옷 입히고 업어서
바다에 퐁당 빠뜨려 주면
아프던 허리는 어디 갔는지
가파도 근처까지 헤엄치더래
며칠 동안 입을 안 열던 할머니가
바다에만 가면
꽃노래도 부르고 열 길 물속 얘기하느라
할아버지보고 먼저 집에 들어가라 한다네
다른 해녀들 밤 되어 다 집에 가도
할머니는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본대
어제는 아빠랑 할머니 데리러 갔는데
할머니 눈에 그 넓은 바다가 다 들어 있어
눈망울이 보름달만큼 커져 있었어
별빛 받은 할머니 얼굴이 소녀 같더라니깐
집으로 돌아와 새근새근 주무시는데
숨소리마다 물거품이 피어올랐어
세 살부터 들어가 놀던 바다에서는
돌아가신 부모 형제 얼굴이며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시나 봐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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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다랑쉬굴에 견학 왔다
까마귀 울음처럼 캄캄한 시간은
무릎 접고 등 굽혀야 보였다
견학 시간이면 떠들거나 휴대폰을 하던 우리들은
다랑쉬굴 앞에선 모두 묵묵히 있었다
봄이 한창인 사월인데 그 겨울날이
아직 굴에서 나오지 못해서일까
언 감자알 같은 돌을 갖고 놀던 아이 노래가
귓가를 울려서일까 젊은 모습 사진만 남기고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를 떠올려서일까
제사 때마다 그 사진을 넋 놓고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푸른 발이 아른거려서일까
나는 뒷덜미가 시려 자꾸 어깨를 움츠렸고
바람에 실려 온 동백꽃 향기가 매캐한지
친구들은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1948년 12월 18일 당시 하도리 · 종달리 주민 11명(아이 포함)이 숨어 생활하다가 발각되어 집단 학살당한 곳.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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