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9조의 사상수맥 동북아 역사재단 번역총서 25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박동성 옮김 / 동북아역사재단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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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내각이 끝내 3월 25일 자위대를 헌법9조에 명기하는 개헌안을 발표했다. 9조 2항(전력 보유 불가 조항)에 위배되는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으로써 헌법9조를 무력화하려는 개헌안이었다.

헌법9조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이날 도쿄 곳곳에서 반개헌·반아베를 외치며 아베 내각 퇴진을 촉구했다. 1947년 탄생한 헌법9조, 일명 평화헌법이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정치의 뜨거운 쟁점이자 최전선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개헌 세력들은 평화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로 '평화헌법은 미국이 강요한 비자주적 헌법'이라는 논리를 들이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세운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주도하던 미국이 억지로 평화헌법을 패전국 일본에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 정치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헌법9조의 사상수맥>에서 그런 주장을 단호히 반박한다. 그는 "헌법9조가 '밀려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인이 계속 주장해온 사상의 '자주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누워서 침 뱉는 행위"(45쪽)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헌법9조가 제정되기 이전부터 일본에 존재했던 반전‧평화사상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헌법9조의 사상수맥>은 "헌법9조는 패전 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대와 국경을 넘어 면면히 이어져온 평화운동과 반전사상의 도달점이라는 점을 당파성 없이 냉정한 자료 비판으로 검증했다"(19쪽)는 평가를 받으며 11회 시바 료타로 상을 수상했다.

국제연맹, EU에서 실현된 막부 말기의 반전 사상

 <헌법9조의 사상수맥> 표지.
▲  <헌법9조의 사상수맥> 표지.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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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야마무로 신이치에 따르면, 일본이 서구 열강의 위협을 받던 막부 말기부터 이미 요코이 쇼난, 나카에 초민 등 여러 사상가가 소리 높여 반전을 외쳤다. 특히 <서국입지편>, <자유지리> 등을 펴내 자유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나카무라 마사나오, 역시 자유민권운동을 이론적으로 이끈 우에키 에모리의 주장은 이후 현실에서 일부 구현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메리켄시 서> 등에서 전쟁을 멈추는 방법으로 평화의회와 세계연방을 제안했다. 그는 미국 연방제도를 모방해 '각국 원수가 의회와 협동하여 각각의 토지와 인민을 하나의 공법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영국·프랑스·스위스 등의 국명은 일절 폐지하여 하나의 국회를 세우고, 관리가 되는 사람들이 원래 출신국과는 다른 장소에서 근무하는' 세계연방을 구상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세계연방이 실현되면 '종래의 원한이나 시기, 의심이 사라지고, 합동·협화·우애·공평의 선한 면들이 생길 것이며, 세계 사람들이 합동·협화·우애·공평을 누릴 때 세계평화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화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평화·자유 동맹에 의한 만국평화회가 제네바에서 1867년부터 1876년까지 13회 열리고, 1899년 제1회 헤이그 평화회의가 개최되면서 실현됐다. 여러 국가가 하나의 공법하에서 출신지를 초월해 관리로서 근무하는 것도 부분적이지만 EU에서 실현되고 있다.

우에키 에모리는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만국공의정부'를 제창했는데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국공의정부'는 각국이 정체를 불문하고 참가할 수 있으며, 각국은 동수의 의원을 내고 헌법에 따라서 헌법에 따라서 규칙을 세워서 집행할 수 있으며, 경비도 각국이 부담하며, 미개 국가는 보호하여 독립시키며, 불복하면 탈퇴할 수 있지만 내정간섭은 할 수 없으며, 공의정부의 결정에 위반할 경우에는 징벌을 받지만 국토를 몰수당하지는 않는다."(146쪽)


저자는 우에키 에모리의 구상을 설명하며 "이러한 대강이 37년 후에 창설된 국제연맹의 규약과 공통점이 많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최초로 군비철폐 강령 내건 사회민주당

나카무라 마사나오, 우에키 에모리 등의 반전사상은 이후 고토쿠 슈스이를 필두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계승했다. 고토쿠 슈스이, 가타야마 센 등이 1901년 결성한 사회민주당은 '이상강령'에서 '만국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군비를 전폐할 것'을 주요 과제로 제기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강령'에서 "전쟁은 원래 야만의 유풍이어서 명백히 문명주의와 반대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군비철폐·전쟁 폐지를 호소한 최초의 정당 강령이다.

사회민주당은 군비철폐를 강령으로 내걸었다는 이유로 창당과 함께 해산됐지만,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민주당 해산 이후에도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평민신문>을 창간해 반전·평화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평민신문> 창간호에 '나는 인류가 박애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평화주의를 창도한다. 때문에 인종의 구별, 정체의 이동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군비를 철폐하고 전쟁을 금절하기 바란다'고 선언했다.

근대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도 반전·평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청일전쟁은 나에게 실로 의로운 전쟁이다"라면서 청일전쟁을 정당화했던 인물이었지만, 청일전쟁이 약탈 전쟁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회의를 느낀 뒤 반전주의자가 됐다. 그는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죄악이다. 그래서 대죄악을 범하면 개인도 국가도 영구히 이익을 얻을 수는 없다"며 모든 전쟁에 반대했다.

탄압 속에서도 끝내 헌법 9조로 이어져

물론 반전·평화운동이 언제나 대세거나 주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은 비주류일 때가 많았고, 때로는 일본 정부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러일전쟁 승전 후 일본 정부는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고토쿠 슈스이 등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12명을 대역 사건으로 사형에 처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동료였던 가타야마 센, 이시카와 산시로 등도 대역 사건 이후 외국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뒤를 이어 오스기 사카에가 1914년 월간 <평민신문>을 간행하지만, 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다. 오스키 사카에는 "대역 사건 이래 우리들의 정치상 및 경제상의 주장은 완전히 언론의 자유를 빼앗겨 버렸다"고 회상하고 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에는 내무성 경보국장이 전쟁목적에 반하는 기사와 관련해 '자발적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실질적인 사전 검열을 실시해 반전사상을 게재한 잡지는 차례차례 발행 금지처분을 내리거나 폐간했다.

하지만 이런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반전·평화사상은 살아남았다. 후일 수상이 된 이시바시 단잔, 요코하마 정금은행 총무부장이던 기우치 노부타네, 헌법조사위원회 위원이던 미야자와 도시요시 등이 패전 전후의 일본에서 전쟁포기, 군비철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삼국동맹 체결을 추진해 A급 전범으로 소추된 시라토리 도시오도 요시다 시게루 외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병역거부권, 전력 불보유 등을 일본헌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헌법이 결코 미국에 '밀려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시데하라 기주로 당시 수상이 전쟁포기 조항을 발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맥아더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시데하라 수상이 신헌법을 작성할 즈음에 이른바 '전쟁포기' 조항을 포함하고 그 조항에서 동시에 일본은 군사기구를 일절 갖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구 군부가 언젠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을 미연에 없애는 것이 되고 또 일본에는 다시 전쟁을 일으킬 의지가 없다는 것을 세계에 납득시킨다는 이중의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이 시데하라의 설명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오랜 세월의 경험에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든지 매우 흥분시킨다든지 하는 것에는 거의 불감증이 되어 있었지만 이때만은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맥아더는 1951년 5월 미국의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 1955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연설, 1958년 다카야나기 겐조 전 헌법조사회 회장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데하라 기주로 수상 자신도 1946년 3월 20일 귀족회의 자문에서 "전쟁포기는 정의에 근거한 올바른 길이어서 일본은 오늘 이 큰 깃발을 들고 국제사회의 들판을 단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각국이 언젠가 전쟁포기를 진지하게 생각할 날을 꿈꾸며 "그때 나는 이미 묘지 안에 있겠지만 그 묘지 그늘에서 뒤를 돌아다보고 열국이 이 대도를 따라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내 아이를 전쟁이 가능한 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헌법9조의 사상수맥>은 헌법 9조 제정 이후의 반전·평화운동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9조 제정 이전에 그랬듯 그 이후에도 수많은 일본시민이 반전·평화운동에 나섰다. 안보조약을 개정해 일본을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입시키려던 기시 내각을 끌어내린 1960년대 안보투쟁의 주역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전 반대를 외쳤던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철수시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이 책의 주제인 헌법9조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이들도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에 맞서 헌법 9조를 지키려던 시민들의 모임 '헌법9조에 노벨 평화상을' 실행 위원회는 3년째 노벨평화상에 도전하고 있다.

'헌법9조에 노벨 평화상을' 운동을 처음 제안한 다카스 나오미는 한 인터뷰에서 운동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내 아이들을 전쟁이 가능한 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전쟁 안 하는 헌법을 바꾸면 큰일 난다.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린이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꿈꿨던 막부 말기 사상가들의 반전사상이 15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일본 사회에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평화헌법은 극우세력 주장과는 달리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평화헌법은 평화와 전쟁 없는 세계를 염원하는 일본 시민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취이자 나아가 평화를 바라는 세계 시민이 함께 지켜야 할 공동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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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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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사퇴한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적폐로 꼽히는 국정 역사교과서 속 뉴라이트 역사관이 박근혜 정부를 촛불항쟁으로 몰아내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뉴라이트라는 집단은 몰락한 상태다. 홍진표 시대정신(구 뉴라이트재단) 상임이사가 지난해 '새로운 뉴라이트는 가능한가?'란 글에서 "뉴라이트를 내걸고 여전히 활동 중인 단체는 사실상 없었다. 이 정도라면 뉴라이트 운동은 침체나 잠복 수준이 아니라 사라져 버렸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생활보수'를 자처한 박성진 후보자는 뉴라이트 운동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역사관이 한국사회 곳곳에서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 운동이 몰락한 오늘날에도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피는 일은 여전히 의미 있다. 이 글은 뉴라이트 역사관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영훈 서울대학교 교수가 쓴 <대한민국 이야기>를 중심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핀다.

개별 인간을 중심에 둔 '문명사' 주창

 <대한민국 이야기>
▲  <대한민국 이야기>
ⓒ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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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통치가 근대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대중에게 안겨준 충격이 워낙 커서 '뉴라이트 역사관' 하면 식민지근대화론을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뉴라이트 역사관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포괄하고 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에 대해 "이 책은 탈민족과 문명사의 관점에서 지난 20세기의 한국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것"(21쪽)이라며 문명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족은 20세기의 한국사를 조명하는 중요한 시각이긴 합니다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체적인 역사의 단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개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이고 도덕적 이기심이고 협동능력입니다. 그러한 본성의 인간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또 상호 협동하면서 건설해 가는 생산과 시장과 신뢰와 법치와 국가의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명사라고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이야기>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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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이 바라본 20세기 한국사는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이다. 그는 서유럽에 기원을 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가 들어와 전통문명과 상호작용하면서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 전통 문명과 외래 문명이 충돌하고 접합하는 과정이 곧 20세기 한국사라고 덧붙인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이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이영훈에 따르면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영구병합하기 위해 조선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동화하려 했고, 이를 위해 수탈을 자행해 민심을 잃기보다는 일본의 법과 제도와 문화를 일본에 이식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근대적 경제 성장이 일어났다. 저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김낙년 동국대학교 교수와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의 연구를 인용해 1910~1940년 조선 경제는 연평균 3.7% 성장했고, 1912년~1939년 사이 조선인 평균 소득도 증대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이 대목에서 '기존의 식민지수탈론 주장대로라면 경제는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쭈그러들어야 하지만, 재화와 소득의 흐름은 연간 3.7% 속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강조하고 있다.

근대적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사유재산제도 확립이었다. 일제는 1912년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자유의 원칙'에 입각한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는 재산제도를 정비한 다음 조선과 일본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고, 수많은 공장을 세우는 등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일제가 남긴 인적 자본도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영훈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하급직 관리, 은행원, 회사원, 의사, 법률가 등으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떠받친 세력"(177쪽)이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점포와 공장, 회사를 운영한 상인과 기업가들이 중요한 인적 자본이었다. 이영훈은 "국제적으로 큰 시장에서 훈련받은 기업가 능력이 다소나마 축적되어 있었기에 신생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179쪽)라고 강조한다.

대량 토지 수탈은 없어... 쌀도 '수탈' 아닌 '수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영훈은 식민지수탈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지를 대거 국유지로 수탈했다는 주장에 대해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 심사에 공정했고, 분쟁을 거쳐 남은 국유지는 총 484만 정보 가운데 12.7만 정보에 불과했다'고 반박한다.

쌀도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수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쌀값이 30% 정도 높았기 때문에 농민과 지주는 쌀 수출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고, 수출 소득으로 공산품을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 원료를 수입해 방직공장을 차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수출을 통해 전체 경제가 성장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은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 등을 사 와서 충당했기 때문에 식량 섭취도 반드시 줄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다만, 일제 식민통치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해서 일제 식민통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영훈은 "진정한 의미의 수탈과 차별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94쪽)이라며 '인간의 본성은 자유다.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성립은 문명사의 대전환 결실"

이영훈은 해방 이후 현대사도 예의 문명사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가 바라본 현대사는 어두운 면도 있지만, 대체로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영훈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졌고,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성립은 문명사의 대전환으로 맺어진 결실"(231쪽)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관련해 소련 붕괴 이후 나온 비밀문서에 기초해 김일성과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그들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입니다"(283쪽)라고 옹호하고 있다. 

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언급하긴 하지만, 무게중심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소련 비판에 놓여있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의 현대사를 살펴본 이영훈은 다음과 같이 20세기 한국사를 요약한다.

"필부필부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로 역사의 기초를 바꾸어 놓으면 지난 20세기는 한반도에서 국가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심각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해졌습니다." - <대한민국 이야기> 318쪽

군함도, 10분 만에 등뼈 굽는 중노동에 시달려

이영훈의 책은 동의할 만한 대목도 더러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이영훈 자신이 '개인'이 역사의 실체적인 단위이고, "인간 생명의 본질은 자유"(81쪽)라고 하면서도 정작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개인'들의 시각, 그들이 겪었던 '자유'의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그의 스승이자 역시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안병직 서울대학교 교수와의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은 강제동원된 식민지 조선인들이 임금을 받았는지, 강제동원 규모가 얼마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각 1쪽이 넘게 다루면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8줄 정도만 할애하고 있다. 

내용도 '농촌에서 목가적으로 살던 농민은 훈련 없이 탄광이나 토건업 등의 험한 일에 동원했다', '단체생활에 필요한 규율도 없어서 가혹한 노무관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시기라 식사가 충분하지 못했다' 등으로 피상적이다.(<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208~218쪽) 

단순히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식민지 조선인들이 맡았고, 전시라서 식사가 부족하기도 했겠지만 민족차별 속에서 필요한 물자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 <군함도>는 일제 식민통치 당시 강제징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영화 <군함도>는 일제 식민통치 당시 강제징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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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 카오리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일명 군함도로 불렸던 하시마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인 갱부들은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쉽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한 반면 조선인은 주로 가장 위험하고 고된 막장으로 들어갔다. 높이가 50~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막장에서 곡괭이를 들고 계속 누운 채로 탄을 캐야 했다. 10분도 안 돼 하반신이 저려오고 등뼈가 점점 변형될 만큼 고된 중노동이었다.

…(중략)…갱 안에는 가스 냄새도 심했다. 숨쉬기 힘들었고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또 하시마의 탄은 꼭 밀가루처럼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흩날리는 탄가루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질병에 노출되었다. 게다가 갱 안의 온도는 마치 열대처럼 뜨거웠다. 쌀부대 같은 옷이 지급되었지만 갱에서는 어떤 것도 입지 못할 만큼 무더웠다. 

물통을 챙겨갔으나 항상 목이 말라 금방 바닥이 났다. 일본인 갱부가 "조센진은 갱 내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라고 막말을 내뱉으면서 물통을 훔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갱 안 사방에 흐르는 지하수는 갱부들의 배설물로 언제나 오염되어 있었다. 갱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56~58쪽

이토록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던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몇 명이 강제동원당했는지가 그리 중요한 문제였을까. 하물며 민족차별에 대한 설명 없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피상적으로만 다루는 역사서술이 정말 강제동원당한 식민지 조선인 개인을 중심에 둔 서술일까. 거듭 생각해봐도 이영훈의 역사서술이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는 역사 서술인 것 같지는 않다.

한국전쟁 학살 희생자 시각은 없어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다룬 부분에서도 '개인'들의 고통, 그들이 경험한 '자유'의 침해가 잘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중에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학살당한 문일상씨의 딸 문강자씨는 아버지가 사라진 후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할머니가 항상 밥을 이렇게 담아서 아랫목에다 이불에 덮어놓고 그랬습니다. 언제라도 아버지가 오면 배고프기 전에 밥 먹인다고요. 십 년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4.19가 일어날 때까지요. 할머니가 밥을 담아서 아랫목에다가 두고, 할머니는 밥을 안 잡숫는 겁니다. 내 아들 밥그릇이 여기 있는데 내가 혼자 못 먹는다면서요."-<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94~95쪽

"우리 할머니, 엄마는 구경 한번 안 하고 사셨어요. 평생 바깥나들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지요. 마음이 항상 무겁고, 사람 보는 거를 못한다, 하늘을 못 본다 하는 거라요. 할머니가 그래요. 하늘을 내가 어째 봐⋯" -<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98쪽

학살 피해자인 문일상씨를 비롯해 평생 하늘을 못 보고 살았다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바라본 한국전쟁이 과연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일까.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한국 국군, 경찰이 저지른 학살은 사소한 일인가.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국군, 경찰, 우익 세력이 저지른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학살의 진상이 모두 규명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인 유족들이 오랫동안 '빨갱이'로 몰려 탄압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전쟁은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이라는 이영훈의 주장은 공허하다.

패배자는 '개인'에서 배제한 역사

나는 '민족'을 역사의 단위로 보던 관행에서 벗어나 '개인'을 역사의 단위로 보자는 이영훈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기존 식민지수탈론이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이후 경제와의 부정적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문제가 있었고, 뉴라이트가 '민족'을 너무나 당연하게 역사의 단위로 생각해온 역사학계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온 것도 사실이다.

강제동원을 다룬 부분에서는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배제하려다 보니 식민지 조선인이 받았던 민족차별을 간과하면서 오히려 강제동원당한 '개인'의 시각으로 보지 못한 문제도 있었지만, 이는 '개인'을 역사의 단위로 보는 관점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문제는 '민족'에 문제를 제기하며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개인'과 그들이 겪었던 '자유'의 침해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이영훈 교수의 역사 서술에는 "필부필부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고통,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은 학살 피해자들의 눈물은 역사에서 정당한 위치를 배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고난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성립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하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희생된 개인을 배제하거나 주변에 형식적으로만 배치함으로써 이영훈 교수가 만들어 낸 역사는 오로지 승리자의 역사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살아남아 해방 후 건국을 주도한 우파 정치세력이 중심에 선 역사, 그들이 주인공으로 북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세우고, 지켜낸 역사가 곧 이영훈 교수가 바라본 "대한민국 이야기"다.

그래서 이영훈 교수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입맛이 쓰다. 말로는 '개인'과 '자유'를 옹호하며 민족주의를 비판하지만, 이영훈 교수의 역사서술이야말로 승리자만을 위한 역사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개인'을 배제하고,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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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묻다 - 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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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규명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안전은 달라진 게 없다.'

세월호 참사 3주년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정세균 국회의장실 의뢰로 한국갤럽이 조사해 내놓은 '세월호에 대한 국민 의견 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세월호 참사 후 대한민국의 안전이 얼마나 개선됐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1.3%가 '변화 없다'고 답했다. '악화된 편' 8.3%, '매우 악화된 편' 6.6% 등 오히려 나빠졌다고 한 사람도 14.9%였다(<경향신문>, 국민 "세월호 이후 안전, 변한 게 없다").

수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3년 동안 싸웠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여전히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다. 대형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인재', '안전불감증'이란 비판이 잇따르지만, 그 후에도 비슷한 참사가 되풀이되고,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13년까지 10인 이상 사망한 '대형재난'이 276건에 달했다.

"도대체 이 수많은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5쪽)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쓴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은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생한 일곱 개의 재난을 추적했다. <재난을 묻다>는 그 결실이다.

안전관리 방치한 정부, 이윤에 눈먼 기업... 무책임이 낳은 참사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임'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비슷한 참사가 되풀이된 이유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책임지지 않아서'다. 책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라는 뜻이다.


정부를 비롯한 참사의 책임자들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는 회피했다. 이 책에는 그런 무책임의 사례가 수도 없이 나온다.

1970년 '남영호 침몰사고' 당시 일본 해상보안청이 침몰한 남영호를 발견하고 한국 해경에 수차례 긴급사태 발생을 타전했지만, 해경은 두 차례 무전을 수신하고도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교통부와 내무부는 참사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누가 '돼지'(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승객명부에서 누락시킨 승객을 지칭하는 은어-기자말)를 태웠나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남영호 침몰사고 책임자들은 사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백선엽 교통부 장관은 한국종합화학 사장, 한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을 맡았다. 박경원 내무부 장관은 1971년 내각개편으로 물러났다 다시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선주 일가도 10여 년 전부터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참사 이후 30년이 넘도록 지역 유지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침몰사고 책임자들은 때론 책임 회피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유가족들을 '불순분자'로 몰고, 입을 막으려 했다. 

"21일 정부가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조차 포기할 기미를 보이자 분노한 유족은 부산 해운국과 파출소로 몰려갔다. 한밤의 난투극은 긴급 출동한 경찰들에게 유족들이 전원 연행되면서 끝이 났다. 경찰은 사이비 유족의 개입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비탄이 시체장사로, 불순폭력 세력으로, 사이비로 매도되는 익숙한 광경이 50년 전 그날에도 펼쳐졌던 것이다." - <재난을 묻다> 43쪽

2011년 춘천봉사활동 산사태참사 때는 춘천시가 산림청의 산사태 위험경보를 지역 주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대피도 시키지 않았다. 방치된 방공포 진지에 텃밭까지 일궈 산사태 피해가 더 커졌는데, 춘천시와 군부대는 방공포 진지 관리 문제에 대해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군부대는 현장을 관리할 책임이 춘천시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춘천시는 국정감사에서 '방공포 진지를 방치한 것은 국방부 소관이지 시장이 그것까지 뒤처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책임의 주체는 정부만이 아니다. 비용 절감을 위한 안전을 도외시한 기업도 정부 못지않은, 어쩌면 정부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주범이다.

국내 지하철은 도입단가가 5억~6억에 불과했는데 이는 수출하는 전동차(10억~15억)의 절반 수준이고, 안전관리기준이 높은 홍콩지하철(18억~20억)과 비교하면 ¼ ~⅓ 수준이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도입한 대구지하철은 화재에 몹시 취약할 뿐만 아니라 화재 시 유독물질을 뿜어내는 소재로 가득해 피해가 더 커졌다. 

저자들은 "다른 나라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된 대중교통의 안전을 가장 우선적 원칙으로 둔 반면, 우리나라는 비용절감을 위해 이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110쪽)라고 지적한다.

2013년 발생한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도 비용절감을 위한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탄생했다.

"허술한 캠프 운영과 안전불감증은 하청에 하청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에서 기인했음이 드러났다. 학교가 캠프 계약을 체결한 곳은 안면도 유스호스텔 운영자 (주)한영T&Y이었지만 (주)한영T&Y는 (주)케이코오롱트래블에, (주)케이코오롱트래블은 다시 해병대 코리아 측에 훈련을 하청했다. 비용절감이란 목적하에 안전과 전문성은 후순위로 밀렸다." - <재난을 묻다> 247~248쪽.

결국 이윤에 눈먼 기업, 안전관리를 충실히 하지 않은 정부. 이들이 수없이 되풀이되는 참사의 주범이었던 셈이다.

지진 대피한 학생 체벌한 학교... 우리 모두가 '정치적 책임' 져야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엔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이제까지 반복된 참사는 몇몇 나쁜 기업과 정부 잘못이고,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안심해도 될 문제일까?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불의, 즉 '구조적 부정의'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속한 제도가 부정의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거나 혹은 그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동원해 그 제도에 반대해야 하고 반대 의사를 드러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그리고 제도를 변화시켜 더 나은 결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166쪽

아이리스 영의 주장 대로라면 수많은 재난을 낳은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한 우리에게도 그것을 바로잡을 정치적 책임이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책에 나온 여러 재난 가운데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대목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고,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일어난 2003년에도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연히 TV와 신문에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대한 기사도 봤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으며 새로 안 사실이 많다.

나는 상인동 가스폭발참사가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역시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는 존재조차 몰랐다. 이원준 대구지하철노동조합 당시 위원장이 참사 당시 안전 문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다 임금 등 노동조건과 관계없는 사안으로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불법파업으로 몰려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는 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아 참사 이전에 지하철 안전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주변 사람 가운데 참사로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상인동 가스폭발참사나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도 모두 내가 사는 동네와는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핑계를 댄다 해도 나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 아닐까. 당장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 죽어가는 데 무관심해도 되는 걸까. 나는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땅히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회피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때로 우리는 단지 무관심했던 것을 넘어 '구조적 부정의'를 낳은 공범이었다. 태안해병대캠프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람(가명)씨는 참사의 진짜 원인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복종 문화라고 지적한다.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르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관이 시키는 대로 바다로 더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친구들이 실종된 상황에서도 '빨리 친구를 찾아내라'고 교관에게 따질 생각은 못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람씨는 참사 당시 그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가 교관들한테 복종하는 관계라서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문제는 해병대캠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곳곳에서 억압과 복종이 만연해있다는 사실이다. 2016년 9월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죽나 거리에서 죽나 똑같으니 여기 있어라",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수능이 66일 남았는데 지진이 무슨 대수냐", "무단외출 시 벌점 부과하겠다"며 학교에서 계속 야간학습을 시켰다.

어떤 학교는 놀라서 교실에서 뛰쳐나온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고, 압수해둔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아 학생들이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확인할 기회마저 가로막은 학교도 있었다. 운 좋게도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학교들이 앞서 살펴본 참사 책임자들보다 나은 점이 뭘까.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안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기업과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관심과 은밀한 공조 속에 참사를 낳는 사회구조는 오늘날까지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데리다 연구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책임을 '응답가능성'으로 번역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에는 말을 통한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있고, 호소를 들으면 응답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영어로도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한다(respond to)는 뜻이 있다. 그래서 다카하시 데쓰야는 "인간은 원래 타자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52~55쪽).

그렇다면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이 끔찍한 참사에서 구해달라는 외침,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비애를 부르짖는 절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사회를 함께 만들자는 탄원에 '응답'해야 하는 사람은 정부공직자나 기업 임원만은 아닐 것이다.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에 '응답'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난을 묻다> 마지막 장을 덮고, 재난피해자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컴퓨터 전원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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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예지(Wisdom)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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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한테 괴롭힘을 당하기보다 동료들한테 더 많이 당했어요. 나쁜 사장이 우리를 때린다고 생각하지요? 두들겨 맞는 이주노동자 중 사장한테 맞는 사람들은 20%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동료들한테 맞는 거예요."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이 지난해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지 않을 거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적나라한 차별의 실상을 알고 나니 우리 안의 치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주의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인종차별주의는 물론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이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법원이 제동을 걸긴 했지만 이슬람 7개국에 입국 금지 행정명령을 내렸고,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장벽을 쌓겠다고 말한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선택했고,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이 대선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스웨덴도 신나치주의와 연계된 극우정당 민주당의 지지율이 25%를 넘어서 1위를 차지했다(관련기사 : 증오로 하나 된 세계).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인종차별주의가 깔려 있다. 외국인이 일자리를 뺏고, 사회를 위협한다는 불안과 공포는 세계를 인종차별주의로 내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가 쓴 <인종차별의 역사>는 시의적절한 책이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고대 그리스의 이방인에 대한 인종차별부터 20세기 말 구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코소보 전쟁까지 유구한 인종차별주의의 역사를 살피며 인종차별주의를 끝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한다.

"인종차별과 합리성은 필연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다"

저자는 인종차별주의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말을 하는 사람과 목구멍에서 브르(br) 하는 소리밖에 낼 줄 모르는 '이방인'(Barbare)으로 구분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 자신을 다시 자유인과 여자, 아이, 노예로 구분해 자유인에게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최초의 인종차별적 사상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방인들이 그리스인들의 "태생적인 노예"이며,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남자는 '형상' 역할을 하고, 여자는 '질료' 역할을 하는데 형상이 질료보다 우월한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딸의 수태는 그 자체로 규범에 대한 일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최초의 탈선은 남성 대신 여성을 출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성의 발달이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리적 이성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인종차별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자는 "이성의 승리가 비이성적 믿음들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며 "오히려 비이성적인 믿음을 '이성적'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개념적' 언어로 다시 표현하며 그 믿음들에 부족했던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믿음들을 새롭게 되살리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한다.(185쪽) 

저자에 따르면 인종을 뜻하는 'race'란 단어는 '이치, 범주, 종류'라는 뜻의 라틴어 'r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race'란 낱말이 출현하는 순간부터 인종차별과 합리주의는 필연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191쪽)고 지적한다.

볼테르, 엠마누엘 칸트 등 당대의 유명한 지성들도 인종차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칸트는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남자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고, 흑인은 인류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을 차지하며, 유대인은 "탐욕스런 인간",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관용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볼테르는 백인과 흑인이 "전적으로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이나 흑인은 원숭이와 결합해 괴물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맹인밖에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서부, 에스파냐 북부에 거주한 천민집단 '카고'에 대한 차별은 인종차별주의가 뒤집어쓴 '이성'과 '합리성'의 외피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보여준다. 근대 외과학을 확립한 외과의사 암브루아즈 파레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16세기 말까지 '카고'를 나병환자의 후손, 즉 반나병환자이거나 의사 나병환자, 혹은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나병보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나병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카고'는 그대로 남아 있자 사람들은 이제 '카고'에게 인종적 기원을 부여해 하나의 민족 범주를 만들어내려 했다. 서고트인, 사라센인, 스키타이계 알라니인 등 다양한 민족이 '카고'의 선조로 거론됐다.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은 이번에는 '카고'가 나병이 아니라 갑상선과 관련 있는 '크레틴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1892년 프랑스 과학향상협회 연례 학회에서는 다시 수많은 학자들이 카고의 나병 기원설에 대한 주장이 옳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카고'를 "근거 없는 의혹의 희생자"라 칭하며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증오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고안해 내야 하는 것이 이 타자가 아닌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카고들은 우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만큼 더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은 아닌지."(137쪽)

"홀로코스트는 유일한 사건" 주장 뒤에 숨은 것은...

이 책은 홀로코스트, 혹은 쇼아라 불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설명하면서 인류가 인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다른 어떤 대량학살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도 '유일한' 사건이다. 

"그래서 집단학살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홀로코스트는 유일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폭력을 동반하며 일어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홀로코스트-쇼아는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사건이다."(279쪽) 

"또한 쇼아는 용서될 수도 잊힐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라는 것, 그리고 쇼아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행위는 이미 범죄-내지는 범죄적 성향-에 속한다는 것이다."(279~280쪽)

하지만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의 대량학살 연구들은 홀로코스트를 유럽이 벌인 식민주의적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역사학자 박노자는 "'종족 절멸'은 히틀러가 식민주의 이론과 실천에서 얻은 아이디어이고, 방법(대형 수용소)도 아프리카에 대한 독일 식민주의의 경험에서 배운 것"(<야만의 역사> 10쪽)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독일이 아프리카에 세운 강제수용소는 스페인, 영국 등이 쿠바, 남아프리카에 세운 강제수용소를 모방한 것이었다. 규모는 좀 작을지언정 '종족 절멸'을 목표로 한 끔찍한 인종학살도 홀로코스트가 처음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태즈메이니아족을 한 명도 빠짐없이 말 그대로 '절멸'했고, 이탈리아도 '에티오피아인이 없는 에티오피아'를 꿈꾸며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에티오피아인 25만 명을 살해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태너드 등 일부 학자들이 '잊힌 홀로코스트', '또 다른 홀로코스트'라 부른 백인들의 인디언 학살은 폭력의 규모로만 따지면 홀로코스트 이상이었다. 데이비드 스태너드에 따르면 당시 살해당한 인디언 숫자는 5천만~1억 명, 비율은 전체 인구의 90%~95%에 달해 사망자수와 비율만 보면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즉 '미국인의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보다 더 심각했고, 학살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106~111쪽).

그런데도 홀로코스트가 이런 인종차별주의에서 비롯한 폭력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 이면에는 유대인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은밀한 인종차별주의가 깔려 있다. 

"홀로코스트를 유일하게 만들 것은 유대인들의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겪은 유대인들이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가 특별한 것은 유대인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 신학전문학교 총장 이스마르 스코쉬는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이 "선민주의의 불쾌한 세속적 변형"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홀로코스트 산업> 87쪽)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 속에 숨겨진 인종차별주의는 나치의 인종차별주의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듯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에 유일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유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벌이는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 왔다.

한 예로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 전쟁 당시 적국인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히틀러에 비교하면서 2차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세계유대인회의 의장이던 나훔 골드만은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우리는 홀로코스트 시기에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이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며,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 일을 정당화하던 버릇을 확실히 자제해야만 한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인들이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이스라엘인들은 마치 극장에 온 듯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가자지구 공습을 관람하고,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를 보낸다. 팔레스타인인 2220명이 죽고, 1만1231명이 크게 다친 가자지구 공습이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스데롯 극장'이라 불리는 이 사진은 한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이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이쯤 되면 "쇼아-홀로코스트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행위가 범죄-내지는 범죄적 성향-에 속한다"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쇼아-홀로코스트의 '일반화'를 범죄로 몰려는 시도야말로 홀로코스트를 신성화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잔혹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범죄에 가깝다.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저자조차도 인종차별주의와 이어진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제껏 그래왔듯 인종차별주의는 앞으로도 여러 비극을 낳을 것이고, 인류는 오랫동안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저자가 빠졌던 덫을 피하기 위해 희생자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웟킨스는 자전적 소설 <요코 이야기>에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나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맥락을 삭제한 채 한국인을 가해자처럼 묘사했다. 역사학자 임지현은 요코 가와시마 웟킨스에게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이란 제목의 공개편지를 보낸다.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이란 표현은 오늘날 세계를 위협하는 인종차별주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영원한 희생자라는 의식,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모두 뺏고 있다는 의식, 무슬림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의식, 그래서 우리가 저들에게 저지르는 차별과 폭력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과거 홀로코스트 희생자였지만 오늘날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이스라엘 유대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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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와 한국 대중문화 - 체험자와의 대화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7
김상민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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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초빙해 증언을 구술한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시리즈의 일부다. 


이 책에는 이장호, 강동순, 전무송, 정홍택 등의 구술이 담겨 있다. 정홍택은 너무 박정희 대통령 찬양 모드라 동의하기도 어렵고, 불편했지만, 정홍택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 구술까지 자료로서의 의미는 있다.


이런 책들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더러 있다. 황태성이 갖고 온 자금으로 KBS를 만들었다거나,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 형이자 민족극 정립을 위해 활동한 예술가 무세중(본명은 김세중), 하길종 감독을 제외하면 박정희 시대에 영화 쪽에서는 저항이 전혀 없었다는 이장호 감독의 증언, 요들송으로 알려진 김홍철 때문에 귀걸이 단속이 생겼다는 정홍택의 증언 등등. 황태성 자금으로 KBS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김종필도 했다는데, 의외기도 하고 신기하다.


다만, 흥미로운 이야기 몇 개가 있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중요한 증언들이긴 하지만, 박정희 시대 전체의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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