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지 않는다 - 세상에 가려지기보다 세상을 바꾸기로 선택한 11명의 이야기
박희정.유해정.이호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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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기) 위한 도끼여야만 한다˝라고 말했죠. ‘소수자/사회적 약자는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라는 생각은 제 안에 얼어붙은 바다였고, 이 책은 그 바다를 부수는 도끼였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수자의 이야기‘라서 좋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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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생활자
배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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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쓸모없는 인간다움을 위한 찬가

출구 없는 폐쇄회로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소설(小說)이란 무엇인가. 배지영의 <근린생활자>를 읽으면서 문득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생각했다.

 

작을 소(小)에 말씀 설(說)을 써서 ‘작은 이야기’라 이름 붙은 문학 장르.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소설은 그런 존재였다. 공자나 맹자 같은 유학자의 가르침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쓸모없고, 때로는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는 이야기.

 

공자는 시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올바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봤고, 시 3,000여 수 가운데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시’ 300여 수를 간추렸다. 유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은 보잘것없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위대하신 유학자들의 말씀이야말로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농공상의 계급 질서를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대다수 백성에게는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소설이 유교 경전보다 훨씬 유익하고,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신분 질서의 질곡이나 가부장제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쓸모가 없다. 그러나 소설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홍길동전>은 적서차별 문제를 제기했고, <방한림전>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던 여성 영웅을 탄생시킴으로써 가부장제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소설, 나아가 문학의 의미가 바로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문학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문학은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지만, 또한 문학평론가 장 리카르두의 말처럼 문학은 어린아이의 아사를 추문으로 만들어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코드 훔치기> 80쪽)

 

배지영의 <근린생활자>는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과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학의 본령에 닿아 있다. 배지영은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의 삶을 이야기하고(「근린생활자」), 조금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이 어떻게 이기주의로 매도당하는지(「삿갓조개」)를 말한다.

 

그가 그려내는 현실은 출구 없는 폐쇄회로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벌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탈출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세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그것」), 전임 회장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연구원은 ‘최악의 처세를 하는 사회인’으로 조롱받는다.(「청소기의 혁명」) 그들의 몸부림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질주를 계속한다.

 

“이제 곧 나무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거나 발이 미끄러져 구르다 갈비가 부러질지 모른다, 아니 그 전에 무릎에 꺾여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울음 같은 웃음도 달음박질도 그리고 눈물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도무지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사마리아 여인들」 중에서

 

그들이 부질없을지도 모를 몸부림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억압이 큰 만큼 흔히 쓸모없다고 치부되는, 그래서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적인 가치를 절실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근린생활자>에 수록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개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말하는 가치를 좇는다. 「사마리아 여인들」은 ‘박카스 할머니’라고 불리는 성매매 노인과 도벽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밑바닥 인생끼리의 만남, 범죄자끼리의 만남이겠지만, 국가나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서로가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의 주인공은 우수사원으로 인정받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가족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봤을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대한 악에 맞선다.

 

「청소기의 혁명」 속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 유행이 지난 청소기를 팔고, 환불돼 돌아온 청소기 속 먼지마저 “개인이 남긴 개별적인 자취”(「청소기의 혁명」)라고 생각하며 비우지 않는다. 그가 비우지 않은 먼지는 세월호 참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분명한 사건)를 당해 돌아오지 못한 학생이 이 세상에 남겨둔 마지막 흔적이 된다. 그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드릴 게 있다’고 말한다.

 

‘불운과 슬픔의 도시로 자신의 터전이 낙인찍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추모관이 몇 년 만에 헐리는 세상에서 그만은 여전히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를 믿고, 그 쓸모없음이 인간다움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성능과는 아무 관계없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청소기, 가령 “같이 커피를 마시는 청소기, 딸꾹질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청소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그만이, 그런 그였기에 청소기 속 먼지마저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망자의 마지막 흔적을 유족에게 전해준다.

 

그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이 어둡고, 차가운 세상이 한 줌의 온기, 한 줌의 인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근린생활자>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이 지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근린생활자>의 의미도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집은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일어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고, 저항이 패배로 끝나리라고 비관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이 책은 억압에 의해 짓눌린 인간적인 가치들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가치, 이를테면 우정, 가족애, 정의감,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이 비루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세상이 부정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처절한 실패담이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왜 그들이 부질없는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나아가 모두가 쓸모를 말하는 시대, 인간다운 가치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멸시당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실용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손해 보는 짓, 무용한 생각, 실없지만, 피식 웃게 하는 농담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큰 불행을 당한 이들 앞에서 ‘지겨우니 그만하라’라는 식의 막말도 서슴지 않고 할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정말 중요한 거라 여겼던 것들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별거 아니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진짜 중요했단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사소한 거라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 가장 큰 후회로 남는 것처럼 말이죠.”-「작가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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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 우리 몸에 새겨진 불평등의 흔적들
시민건강연구소 지음 / 낮은산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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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큰 규모의 의학일 뿐이다."

독일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말이다. 젊고 유능한 의학자였던 그는 1848년 독일 북부 실레시아 지방에 발진티푸스가 발병하자 질병 퇴치 조사관으로서 ▲전면적인 민주주의 ▲보편적인 학교 교육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으로부터 받던 세금을 부자 지주에게 전환할 것 등의 '사회적 처방'을 지시했다.

극빈층이 모여 살던 당시 실레시아 지방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전염병은 언제든지 다시 발병할 수 있었다. 루돌프 피르호는 단순히 환자 개개인에 대한 투약이나 수술이 아닌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표지.
▲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표지.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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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사회를 기록한다>(시민건강연구소 씀, 낮은산 펴냄)는 루돌프 피르호의 신념을 입증하는 사례로 가득 찬 책이다. 시민건강연구소가 <프레시안>에 2014년부터 연재한 글을 묶은 이 책은 공중보건 분야의 다양한 최신 연구를 소개하며 "사람들이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힘"(6쪽), 즉 불평등, 차별, 사회적 재난, 부조리한 사회제도 등이 인간의 몸과 정신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보여준다.

뻔한 것을 새롭게 보여주는 수치의 힘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가 주장하는 내용은 어찌 보면 별로 새롭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불평등과 차별 등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몸과 정신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이는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어리고, 비정규직이고,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수록 산재를 예방할 수 있는 자원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모건 레이 박사 연구팀의 2016년 연구는 통념을 연구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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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뻔할 수 있는 내용도 구체적인 연구와 수치를 통해 보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노동시간을 예로 들면 일을 너무 적게 할 때는 수입 부족과 일자리의 불안정성 때문에 불안하고, 일을 너무 오래 하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괴롭다. 일은 적당히 하는 게 좋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몇 시간을 일해야 적당한 노동시간일까?

책에 등장하는 훵 딘 교수 연구팀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신건강이 점점 좋아지다가 39시간이 넘어가면 악화됐다. 올해 5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순차적으로 주간 40시간 노동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정신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 40시간도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인 셈이다. 연장근로를 포함해서 52시간을 일할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가사 노동/돌봄 노동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가사 노동/돌봄 시간이 주당 28시간 이상인 경우 노동시간이 34.5시간을 넘어가면 정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노동시간을 40시간보다 5.5시간 이상 줄여야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보호할 수 있다.

이 연구 하나만으로도 막연하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구체적으로 몇 시간을 일해야 하고, 노동시간을 몇 시간 줄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낮은 최저임금은 아동 건강에 해롭다

이 책에 담긴 연구들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기도 하다.

첫째, 이 책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환경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이 통념보다도 훨씬 크고, 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철희 서울대학교 교수가 2017년 <아시아 인구학 연구>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전쟁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던 태아들이 나이가 들어 중고령자가 되었을 때도 악영향을 미친다.

1945년에서 1959년까지 연도별 출생자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면 출생 연도가 최근일수록 건강 결과가 전반적으로 좋아졌지만, 유독 1951년 출생자들만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나 있다. 특히 남성은 장애, 의사소통의 제한, 이동 능력의 제한, 정신장애, 인지 능력의 제한, 기본적 활동의 제한, 외출의 제한, 노동 능력의 제한 등 8개 평가 지역 모두에서 유의미하게 나쁜 점수를 기록했다.

자궁 내 선천성 감염, 전쟁 스트레스로 인한 부모의 정신건강 악화, 전쟁으로 인한 영양 부족과 보건의료 서비스 부실 등이 어머니 배 속에 있던 태아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겨 수십 년 후까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 이 책은 일반적으로는 건강과 별로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환경이 알고 보면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례로 최저임금 수준은 아동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콤로 교수팀이 2016년 발표한 논문 <영아 사망률과 출생 시 체중에 대한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에 따르면 주의 최저임금이 연방 기준보다 높은 경우 일관되게 건강 결과가 좋았다. 주의 최저임금이 연방 최저임금 기준보다 1달러 높아질 때마다 저체중아 출생은 1~2% 감소하고, 영아 사망률은 4% 내외 감소했다.

서상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이 결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겨우 1~2% 변화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을 기준으로 만일 모든 주가 최저임금을 1달러 인상한다면,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저체중아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숫자를 2,790명 줄이는 것에 해당한다. 또한 신생아 후기 사망 사례도 518명 줄일 수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2016년 사망한 영아가 총 1,154명이고 그 중에서 신생아 후기에 사망한 아기가 494명이었던 것을 본다면 이는 결코 작은 숫자라고 할 수 없다." -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199쪽


서상희 연구원은 또한 1999년 영국에서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배경에 아동 빈곤이 증가하던 현실이 있음을 지적하며 "최저임금 인상이야말로 아동 빈곤율을 낮추고 아동의 건강도 증진할 수 있는 훌륭한 아동 복지 정책이자 보건 정책"(202쪽)이라고 주장한다.

대안은 '연대의 공동체'

이 책은 불평등과 차별, 사회적 재난 등이 초래하는 건강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으로 '연대의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동성애 혐오와 관련한 하첸블러 교수팀의 2014년 논문 "미국 이성애자들의 반동성애 편견과 총 사망률"은 의미심장하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 편견 수준을 최대 4점으로 수치화했을 때, 동성애 편견 점수가 1점 올라갈 때마다 사망 위험이 2.9배 높아졌다. 혼인 상태, 인종, 성별, 연령 등의 여타 요인을 모두 고려했을 때도 사망 위험은 여전히 1.25배 높았다. 연령별 사망률을 이용해 환산하면 기대수명이 약 2.5년 줄어든 것이다.

특히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이 1.3배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연구진은 이는 분노로 인한 심혈관 반응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차별은 차별받는 이에게는 물론이고, 차별하는 이에게도 해롭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연대'의 부재가 미치는 악영향을 보여주는 이 연구와는 달리 '연대'를 통해 건강을 지킨 사례도 있다. 히키치 교수팀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전후로 발생한 노인들의 인지 능력 저하 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사회자본('사회적 행위자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 조직의 특질'을 뜻한다-기자말)이 재난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연구에 따르면 2010년 사회자본이 낮았던 집단과 높았던 집단을 구분했을 때, 사회 활동 참여와 친인척 혹은 이웃 접촉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거나 증가하는 경우에 주거지 손상으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반면 사회 활동 참여와 사회적 접촉이 줄어든 집단에서는 주거지 손상에 인지 기능 저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낼 수 있는 것은 호혜성과 연대로 이어진 '우리'의 공동체"(219쪽)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은 공중보건 분야의 연구를 소개한 책이다 보니 대체로 건조하다. 그러나 이 책은 따뜻한 감성이나 극적인 사례 없이도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보여주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원래' 그런 것도 없다.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거대한 사회 불평등, 건강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꾸어야 한다." -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245쪽



불평등, 차별, 사회적 재난, 부조리한 사회제도 등이 만들어낸 건강 불평등을 바꿔낼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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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사회학 - 현대인은 왜 좀비가 되었는가
후지타 나오야 지음, 선정우 옮김 / 요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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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부 애호가가 지지해온 마이너 장르에 불과했던 좀비물은 어느덧 메이저의 범주에 올라왔다. <워킹데드>, <바이오해저드> 등 좀비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게임이 성공을 거뒀고, 한국에서도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이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국제정치이론과 좀비>를 쓴 대니얼 드레즈너에 따르면 모든 좀비 영화 중 1/3 이상이 과거 10년간 나왔고, 좀비는 지난 10년간 종말 이후 세계를 그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됐다.

 <좀비 사회학> 표지.
▲  <좀비 사회학> 표지.
ⓒ 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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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예평론가 후지타 나와야는 <좀비 사회학>에서 이 같은 좀비 현상이 현대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좀비를 이해하는 것은 곧 좀비를 만들어내는 우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10쪽)이라며 정치·사회, 과학·기술, 신체·생사라는 세 영역에 초점을 맞춰 좀비 현상, 나아가 현대 사회를 분석한다.

좀비 포맷은 신자유주의의 산물

후지타 나오야는 세계적으로 좀비 붐이 일어난 이유를 좀비 포맷을 통해 설명한다. 좀비 포맷은 '세계는 지금 좀비투성이가 되었고 정부는 이미 붕괴했으며 사람들은 후퇴전을 해야만 하고 줄어드는 자원을 서로 빼앗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방벽을 만들어 그 안쪽에서 농성을 한다'는 부류의 이야기다. <월드워Z>, <퍼시픽 림>, <혹성 탈출: 반격의 서막> 등이 좀비 포맷을 활용한 작품이다.

이 좀비 포맷에서 좀비를 다른 단어로 바꾸면 이야기는 현실과 비슷해진다. 좀비를 재일 조선인으로 바꾸면 '우리' 일본인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는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들의 모임'(아래 재특회)의 논리와 비슷하다. 좀비를 불법 이민자로 대체하면 실제로 멕시코 접경지대에 장벽을 설치하려 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유사하다.

'그 녀석들' 때문에 '우리의 생존권이 위협받는다는 근거 없는 불안과 공포... 배타주의자에게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이야기' 패턴이야말로 좀비 포맷 그 자체 아닌가요. - <좀비 사회학> 32쪽


저자는 여기서 좀비 포맷의 유행을 신자유주의와 연관 짓는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귀결로 "부유층과 그 밖의 계층 사이에 사회적·제도적인 벽이 만들어지고, 부유층인 '우리'만 안심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식의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39쪽)라고 주장한다. 재일 조선인의 특권에 대한 헛소문이 유행하고, 이들을 향한 혐오발언을 벌이는 심리도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사고 양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좀비 포맷을 활용한 작품들은 또한 좀비로 인해 붕괴한 세상, 정부의 기능이 정지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체의 고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한다. 저자에 따르면 정부라는 권위가 사라진 상황, 장벽 밖에는 좀비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동료조차 언제 좀비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배제와 선별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좀비 포맷'의 역할이다.

인간이 곧 좀비다

하지만 저자는 좀비 포맷처럼 인간과 좀비를 구별하고, 좀비를 배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좀비이기 때문이다. 2011년 미국에서 간행된 논집의 제목-<우리가 좀비다: 걸어다니는 시체의 인간성에 관한 시론>-은 이런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인간 자체가 하나의 데이터로 관리됨에 따라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고, 인간과 좀비를 구분할 수 없어졌다. 예를 들어 쇼핑몰에서 소비자들의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 중 하나인 '그루엔 전이'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좀비를 연상케 한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그루엔 전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징후는 멍하니 벌린 입, 약간 흐리멍덩한 눈, 안개 낀 것 같이 어렴풋한 감각이다. 이 독특한 정신 상태에 빠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느려진다"고 한다. - <중독증 비즈니스: '폐인' 제조 사회의 진실> 107쪽


쇼핑몰뿐만 아니다.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은 회전율을 높이려고 일부러 불편한 의자를 설치해 손님이 불쾌감을 느끼도록 한다. 인터넷 사이트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용자에 대한 맞춤 정보를 제공해 설계자의 유도대로 움직이도록 한다. 설계자 입장에서도 유도대로 사람들을 움직이려고 조작하다 보면 모니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마치 좀비처럼 느껴진다.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현실에서 좀비를 아무리 두려워하고, 두터운 방벽을 쌓아도 좀비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이 곧 좀비이기 때문에 인간과 좀비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그들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좀비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악마화된 타자의 모습에서 우리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거울 이미지이다. 타자화된 우리의 모습. (중략) 에이리언들이 너무나도 두렵다면, 그 까닭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 자신보다 더 우리와 닮았기
때문이다. - <이방인·신·괴물> 135쪽


저자는 결론부에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등 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데포르메 좀비'(데포르메는 자세한 세부를 생략하고 특징만 잡아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귀엽고, 친숙한 좀비를 뜻한다 - 기자 말)와 '미소녀 좀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인간은 친숙하고 귀여운 것과 쉽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데포르메 좀비'와 '미소녀 좀비'는 공존과 공감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이다.

흥미롭지만, 아쉬운

이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논의는 흥미로운데 분석의 정교함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재특회나 도널드 트럼프 등의 배타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연결 짓는 부분은 부자연스럽다. 나는 신자유주의가 굳이 재일 조선인이나 멕시코 이민자에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자본와 노동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입장에 가깝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자라면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책의 결론 부분에서 일본 서브컬쳐에 등장하는 '데포르메 좀비'와 '미소녀 좀비'를 "가능성의 중심"으로 규정하는 대목도 의문이 든다. 좀비 포맷처럼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손쉽게 친근한 존재로 만드는 쪽도 개운치 않다.

분명 인간은 아름답고 귀여운 것에 호감을 느끼고, 쉽게 공존할 수 있지만, 그런 종류의 공존이 진정한 공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좀비는 미소녀일 때만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가? 추하고, 흉측한 모습을 한 좀비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걸까? 본문에서 주장했듯 우리가 곧 좀비라면 좀비를 미소녀로 설정하는 손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어렵더라도 좀 더 인간과 가까운 모습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좀비물을 통해 현대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좀비 포맷에서 재특회, 도널드 트럼프 등의 배타주의를 읽어내는 대목이나 이 서평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좀비와 아이돌의 유사성을 분석한 부분은 특히 돋보인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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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카또오 노리히로 / 창비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해방 50주년을 맞은 1995년, 한국사회의 화두는 일본의 식민지배 청산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지시했다. 일본 식민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일본도 비슷한 시기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려 시도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1993년 총리 취임 기자회견 당시 "과거의 전쟁은 침략전쟁이었고, 잘못된 전쟁이었다"며 현직 총리로는 처음 침략전쟁을 인정했다.

하지만 뒤이어 호소카와의 발언을 무색게 하는 망언이 터져 나왔다. 1993년 12월 나카니시 케이스케 방위청 장관이 헌법 재검토 발언으로 사임했고, 다음 해 5월 나가노 시게카도 법무상이 난징대학살은 날조라는 발언으로 사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발족 직후의 무라야마 내각에서 사쿠라이 신환경청장관이 태평양전쟁에 침략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가 사임했다.


어째서 총리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행하는 각료들의 망언이 이어지는가. 어떻게 하면 사죄와 망언의 지겨운 반복을 끊고, 진정으로 사죄할 수 있는가.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가토 노리히로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은 이 질문을 다룬 책이다.

"일본의 3백만 사망자를 먼저 추모해야 사죄할 수 있다."

일본의 문예평론가 가토 노리히로는 이 책에서 "일본이라는 사회가 인격적으로 둘로 분열되어 있다"(56쪽)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사회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외적 자아(호헌파-혁신파)와 내적 자아(개헌파-보수파)로 분열되어 있다. 이는 두 개의 인격이 대립하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의 병립 상태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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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망언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외적 자아(호헌파-혁신파)가 사죄하면 내적 자아(개헌파-보수파)가 그에 대한 반발로 망언을 내뱉는다. 사죄에도 '불구하고' 망언이 잇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죄 '때문에' 망언이 나온 셈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혁신파가 아무리 외부를 향해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사죄해도 보수파의 망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가토 노리히로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격분열을 극복하고, 사죄할 '주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죽은 2천만 아시아의 죽은 자보다 3백 만이라는 자국의 사망자를 먼저 추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2천만 아시아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는 침략자인 자국 사망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보수파들이 여기에 반발하면서 자국 사망자를 '정결한' 존재(영령)로 추모하는 게 야스쿠니 문제라는 주장이다.

가토 노리히로는 자국 사망자들의 죽음을 무의미한 대로 먼저 추모할 때 비로소 '사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시아에 대한 전쟁책임을 명언(明言)하고 아시아의 2천만 죽은 자들에게 사죄한다고 해도 지킬 박사의 명언, 사죄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명언의 논리가 우리가 지금 여기 있기 위해 죽어간 자국의 사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균형을 이루고, 그 사죄가 이들 사망자들에 대한 추모를 통하여 우리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우리들의 명언이며 사죄인 것이다.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83쪽


가토 노리히로는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아시아인을 추모하는 호헌파에게도 '너무나 서둘러 일본을 부정함으로써 원래라면 져야 할 책임을 무의식중에 회피하는 결과가 된다'(8쪽)고 비판한다.

그는 "이른바 세계시민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도 우리는 일단 피침략 쪽의 규탄을 받아들이는 '전후 일본인으로서의 우리'가 될 필요가 있는 것"(15쪽)이라며 인격 분열을 극복하고, '사죄의 주체'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신파야말로 '전후 일본인으로서의 우리'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긍정한다거나 태평양전쟁에 대한 비판을 '자학사관'이라고 매도하는 기존의 극우 담론과는 분명 다르다. 

일견 그럴듯한 면도 있다. '설령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수많은 아시아인에게 비극이었다고 할지라도, 전장에서 죽어간 일본인을 우리 일본인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일본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하지만 정말 그의 주장처럼 일본의 3백만 사망자를 애도하면 사죄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학 교수는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에서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선 일본사회가 자국 사망자 3백만을 먼저 애도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부터 사실과 다르다.

무종교적인 치도리가부치묘원(일본 도쿄도 지요다 구 황궁 서쪽에 있는 공원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해외에서 사망한 병사와 민간인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 기자 말)은, 1959년 야스쿠니신사의 대체물로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여전히 '자국의 사망자'만을 애도하는 시설입니다. 전사자 유족 원호도 1990년대 초까지 군인, 군속 등 유족 중심의 '자국의' 전쟁 희생자 원호비가 약 40조 엔이었는데, 대외 지불액은 개인 보상도 없이 약 1조 엔이나 되는 엄청난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일본인 특히 죽은 병사가 우선이고 이방인, 타국의 사망자는 그 다음이라는 가토 씨의 제안은 이미 옛날에 실현된 것이지요.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169쪽


그래서 문제는 자국 사망자를 먼저 애도한다고 풀리지 않는다. 망언은 일본의 침략책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활동에 참여했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가토 노리히로의 논의를 자학적이라고 일축했다.

'너무나 서둘러 일본을 부정함으로써 원래라면 져야 할 책임을 무의식중에 회피하는 결과가 된다'는 호헌파에 대한 비판도 당혹스럽다. 일본의 침략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사죄한다고 보는 게 상식적인 해석 아닐까?

다카하시 데쓰야는 "저는 일본의 전쟁책임에 관해 일본인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이 없다는 논의에 편 들 수는 없다"며 "일본인은 일본 국가의 주권자로서 일본 국가의 정치적인 자세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70~72쪽). 

그렇기 때문에 '침략을 저지른 건 선조들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끊임없이 기억하고, 사죄한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가토 노리히로가 말한 "피침략 쪽의 규탄을 받아들이는 '전후 일본인으로서의 우리'"다.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윤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그의 주장이 품고 있는 윤리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독일인이 "400만 자국의 죽은 병사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600만 유대인 사망자로 이어진다, 600만 폴란드의 사망자(그 중 300만은 유대인)로 이어진다, 2천만 소련 사망자로 이어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국을 위해 죽은' 독일군 병사에 대한 '깊은 애도'를 '먼저' 하지 않는다면, 유대인과 기타 유럽인 희생자에 대한 '애도'도, '사죄'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250쪽


세련되지만, 퇴행적 담론

결국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기존 극우파보다는 세련되지만, 여전히 가해자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가토 노리히로는 '사죄의 주체'를 세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사죄의 주체'가 되려는 혁신파에게 '너무나 서둘러 일본을 부정함으로써 원래라면 져야 할 책임을 무의식중에 회피하는 결과가 된다'는 이해하기 힘든 비판을 한다.

반면 '사죄의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보수파의 태도는 아시아의 2천만 사망자만 애도하는 혁신파에 대한 반발이라고 이해해주면서 '자국 사망자 300만을 먼저 애도해야 아시아의 2천만 사망자를 애도할 수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고, 비윤리적인 주장을 한다.

그래서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퇴행적이다. 일본이 사죄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자국 사망자 300만을 애도하지 않는 호헌파의 태도가 아니라 전후 50년이 지나도록 가해자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고통을 앞세우는 그 같은 퇴행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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