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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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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괴세대--> 단카이세대 강담사--->고단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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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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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신작을 읽는다.
황석영의 밑바닥 정서와 나의 그것은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나는 행동하기보다는 사색가에 가까워 그만큼의 에너지로 세상과 맞부딪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해주는 큰 형의 이야기로 새겨듣고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성장기이다. 전작 <바리데기>처럼 현실의 시간과 추억의 시간이 오밀조밀하게 짜여 있다. <바리데기>가 '화엄의 세계'라면, <개밥바라기 별>은 '랭보의 세계'이다. 그러면서 푸코, 이반 일리히, 헤겔, 이오덕의 이야기가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문학 소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문학 소년'보다는 '종교적 소년'기를 거친 나로서는 해보지 못한 그의 찐한 '탈선'의 경험이 무용담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싫은 가냐고? 물론 아니다.

비슷하게 소년기, 혹은 청년기의 성장기를 주로 표현하는 유하나 김종광의 영화나 글이 찌질한 자기 오물들의 배설이라면, 황석영에게는 성찰의 힘과 아픔을 보듬는 힘이 느껴진다. 이게 거장과 하수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오랜만에 밑줄을, 그것도 아주 긴 밑줄을 그어보았다. 푸코, 이반 일리히, 헤겔과 이오덕이 인용되는 이 부분이 그다지 새롭지는 않지만, 다시금 학교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정도의 자퇴 이유서를 쓸 수 있는 십대라면 정말 학교는 감옥일 뿐이다. 황석영은 이 책의 주인공 준처럼 '세상을 배움터 삼아, 세상을 친구이자 스승 삼아' 그렇게 내공을 쌓아왔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가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다시금 새겨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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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개밥바라기 별>, 86~90쪽
준의 자퇴 이유서 부분

저는 학교에 다니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는 부모들과 공모하여 유년기와 소년기를 나누어놓고 성년으로 인정할 때까지 보호대상으로 묶어놓겠다는 제도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래, 등교시간부터 하교시간까지 일정한 시간을 규율에 묶여서 견디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규율을 어긴 자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쫒겨나야 합니다. 쫒겨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회는 규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규율을 어기면 학교에서 퇴학당함으로써 더 좋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누릴 기회를 박탈당할 우려가 있지요.
독감이라도 걸려서 하루나 또는 이틀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던 날 우리는 은근히 놀라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이 차가운 아침공기 속에 입김을 하얗게 뿜어대며 종종걸음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창 너머로 훔쳐보며 저것이 내 꼴일 텐데, 하며 놀라지요.
정오경에 동네 근처 네거리에라도 나서면 초등학교 꼬마들에서부터 우리 또래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거의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 처음 보는 시간과 거리의 풍경에 또 한 번 놀랍니다. 아줌마들 노인들 행상들 그리고 시장 상인들만이 어슬렁거리며 오후의 분주할 때를 준비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혼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나니까 자기 시간을 스스로 운행할 수가 있었지요. 가령, 책을 읽었어요. 그 내용과 나의 느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정리가 되어서 저녁녘에 책장을 닫을 때쯤에는 갖가지 신선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또 어떤 날에는 어려서 멱감으러 다니던 여의도의 빈 풀밭에 나가 거닐었지요. 강아지풀, 부들, 갈대, 나리꽃, 제비꽃, 자운영, 얼레지 같은 풀꽃들이며, 논두렁 밭두렁의 메꽃 무리와, 풀숲에 기적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원추리 한송이, 그리고 작은 시냇물 속의 자갈 사이로 헤집고 다니는 생생한 송사리 때를 보고 눈물이 날뻔 했거든요. 눈썹을 건드리는 바람결의 잔잔한 느낌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행렬, 햇빛이 지상에 내려앉는 여러 가지 색과 밀도며 빛과 그늘. 그러한 시간은 학교에서 오전 오후 수업 여섯 시간을 앉아 있던 때보다 내 삶을 더욱 충족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이 이런 충족된 시간들이 아니라 제도를 재생산하는 규율의 시간 속에서 영향받고 형성된다는 것에 저는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장기라니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그러한 기구를 통하여 교정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십 년 이상이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거의 치료 불가능하다고 판정받았던 정신이상자들이 정상적인 환경에 놓인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부분 완치되었다지요. 자연스럽게 그냥 놓아두는 것의 힘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저는 월말 학력고사의 피해자가 저 한 사람이 아니라 믿고 있습니다. 복도에 석차와 점수가 공개되어 붙을 때마다 수치심이나 모욕감은커녕 모두 부질없다는 비웃음이 입가에 떠오르지요. 숫자 몇 개나 부호 또는 단어 몇 마디를 적어나가던 시험지의 빈칸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적응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장기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가에 따라서 직업의 적성이 결정되고 어느 등급의 학교를 어느 때까지 다녔는가에 따라 사회적 힘이 결정되겠지요. 이러한 위계질서가 권력과 재산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고등수학을 배우는 대신 일상생활에서의 셈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주입해주는 지식 대신에 창조적인 가치를 터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인식은 통일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며 이것저것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하던데요, 자유로운 독서와 학습 가운데서 창의성이 살아난다고도 합니다. 결국 학교교육은 모든 창의적 지성 대신에 획일적인 체제 내 인간을 요구하고 그 안에서 지배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모두가 신사의 직업을 우리들 앞에 미끼로 내세우지만 빵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가 되는 길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독 짓는 이는, 목수는, 정원사는, 또는 아무 일도 택하지 않는 것은. 피아노 배우기에서 여러 단계의 기계적인 손동작을 강조하는 대신에 예를 들면 처음부터 직접 '등대지기'라든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같은 노래를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인지. 굳어져 버린 코 큰 외국인의 석고상을 그리기보다는 학급 친구나 아우의 얼굴 또는 늙으신 고향의 할머니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이것들은 제도 안의 최소한의 변화인데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는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도 하지만 미지의 자유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물론 힘들겠지만 스스로 만든 시간을 나누어 쓰면서 창조적인 자신을 형성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p.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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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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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현대 소설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바이지만, 소설가들이 너무 영화를 흉내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황량한 서부 영화의 화면 투르기 같은 묘사들. 혹은 <지옥의 묵시록>의 그 놀라운 미장센을 흉내낸 듯한 느낌. 그런데 나는 영화보다도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서부 편을 잃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매력적인 작가임이 분명하지만 존 스타인벡과 윌리엄 포크너를 잇는 작가라는 말이 혹시 허언이 아닌가 싶다.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광고문구는 심한 오버이다.   

정영목의 번역은 너무 매끄러워서 가끔은 지나친 의역같이 느껴진다. 의역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문장력으로 애매한 문구들을 쓱 넘어가는 수가 있다. 정영목도 그랬고, 이윤기도 그랬다. 여튼, 원서로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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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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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후의 묵시록이자, 인간성에 대한 실험의 소설이다. 만약 이 책이 사회주의 실험 이전에 나왔다면, 사회주의는 그 실험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이렇게 많이 쳐보기는 밀란 쿤데라와 움베르토 에코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생산양식'과 '지배양식'을 오랫도록 고민해 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년에 '존재양식'을 고민하는 하이데거주의자들이 되었는데, 이 책의 저자 또한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사라마구는 미학의 존재론으로 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게 이 책이 주는 강렬한 힘일 것이다.

근데, 이 책은 무엇보다 이명박 시대에 읽어야 할 책이다. 눈 먼 자들보다 먼저 눈먼자들이었던 '장님'들은 '이명박'을 지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복화술사인 '의사의 아내'까지 눈을 멀게 했다면 이야기는 불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다. 어차피 전지적 작가 시점과 주인공 시점을 왔다갔다하는 소설인데. 그러나 저자는 '증언', '응시'가 가진 긍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단 한 사람의 눈 뜬 자를 남겨둔 게 아닐까 싶다. 사소한 것 같지만, '증언'과 '응시'가 역사에서는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데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그것은 이 소설은 어차피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떠듬떠듬 읽어가야 제 맛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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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책을 통해 나와 우리가 서 있는 시간을 반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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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서정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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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3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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