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소설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을 다시 글로 써보니 좋습니다. 아래 305p 글은 마지 음악처럼 리듬감이 넘칩니다. 오랜만에 하루키의 장편 소설을 만나서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이제 작별의 시간입니다. 다음 번에 좀 더 가벼운 에세이로 하루키를 만나볼까 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어서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를 읽을 생각입니다. 뭔가 라임이 맞네요.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p95

 

 필요한 만큼 시간이 흐르면 그 정체를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전화벨이 울리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면 나는 시간을 믿어야 한다. 시간이 내 편이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 -p294 

 

 우리가 부부관계를 정식으로 끝낸 뒤에도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부로 지낸 육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공유했다. 많은 시간, 많은 감정, 많은 말과 많은 침묵, 많은 고민과 많은 판단, 많은 약속과 많은 포기, 많은 열락과 많은 권태, 물론 서로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감각까지도 제법 현명하게 공유해왔다. 거기에는 시간만이 배양할 수 있는 '자리의 무게' 가 존재했다. 우리는 그런 중력에 요령 있게 몸을 맞추고, 미묘한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 도한 우리의 독자적인 '로컬 룰' 같은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을 모조리 없던 셈 치고, 그곳에 존재하던 중력의 균형이나 로컬 룰을 배제하고서, 그저 단순한 '좋은 친구' 따위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p305

 

  진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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