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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처음으로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만났다.
『원더보이』, 마치 만화나 게임의 이름과도 같은 책의 제목.
한 번 보면 잊혀지지가 않을 정도로 잘 지은 듯 하다.
책 제목도 그렇고 하늘색의 책 표지개 내 마음을 이끈다.
김연수, 그는 어떤 사람일까? 당연 여자일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 날개 속의 그의 작은 미소가 실린 사진이 보였다.
이야기의 시작은 1984년,
열다섯 살 소년 정훈은 트럭으로 과일을 파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훈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은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우주비행사처럼
밤거리의 불빛들을 향해 나아가던 그 옆 모습이 된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만에 깨어난 정훈.
젊은 아가씨랑 연애 한 번 찐하게 하고 죽는 게 소원이던 아버지는
'애국 애족의 마음' 으로 남파 무장간첩의 차량을 향해 돌진한
애국지사가 되어있고, 정훈 자신은 '대통령 각하 내외분을 비롯한
각계각층 모든 국민들의 간절한 기원에 힘입어', 죽음을 이기고
다시 태어난 국민 모두의 희망의 마스코드, '원더보이'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리가 들리는 초능력이 생겨, 명실상부한
원더보이가 되어버린다. 이제 자신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라던
정보부 권대령은 정훈을 재능개발연구소로 끌고 가고,
정훈의 초능력은 고문실에서 취조 당하던 사람들의 자백을
받아내는데 이용된다.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가지 그대로 교감하고 동조하는 능력까지 있던 정훈은
고문당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온갖 밑바닥 감정들을 체험하게 된다.
권대령의 훈계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은 애착하는
것들이라 한다. "사랑 따위, 간절함이나 소망 같은 것들.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믿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으면
인간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빼앗으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그 순간 끝난다" 고.
우리가 개나 돼지 혹은 곤충이나 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들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제 우리는 강해지길
바랄 게 아니라 더욱 약해져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훈은 매일같이 고문실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광경을 지켜봐야했고, 결국은 재능개발실을 탈출,
권대령에게서 도망쳐 나온다.
권대령에게서 도망쳐 나온 정훈이 맞닥뜨리게 되는 원초적인 현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나를 밀고 나간다',
'내게 없는 것들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만들며,
인생은 갈망의 대상을 향한 끝없는 투쟁의 길이라는 사실' 등을.
역시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인듯 하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문장들에
가슴이 꽤 먹먹해지고 말았다.
정훈은 초능력자의 세계에서 나온 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FB(Fire Bottle, 화염병)' 를 잘 던진다는 선재 형,
자신 때문에 한 첫사랑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여자 같은 건 없다' 며 남장을 하고 다니는 강토 형(희선),
우주의 비밀을 바탕으로 '스스로 돕는다' 는 뜻의 자조 농장을
만들고 생명역동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무공 아저씨,
고등학교 생물선생이다 과학전문기자로 신문사에 입사한 지
육개월만에 기사 한 편을 쓰고 검찰에 기소, 해직기사 출신이
되어버린 출판사 재진 아저씨.
저마다에겐 저마다의 시절과 사연과 상처가 있다는 것.
정훈은 그동안 알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둘 깨우쳐가기
시작한다.
정훈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사랑을 느끼고, 애착을 가지고, 소망을 품으며,
상처 입고 치유 받고 희망하면서..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원더보이』를 읽고 나면 이 끝없는 우주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자라고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박한 일상의 아름다움...
'삶은 다른 곳에' 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우리는 진정 깨우친 걸까..
나의 1986년 겨울은 차라리 뜨거웠다고 할 수 있겠다.
길게 늘어선 대상 행렬의 맨 끝에서 바로 앞 낙타의 꽁무니만
쫓아가던 어린 낙타가 처음 맛보는 사막의 열기 같았다고 할까?
아무튼 약간 들뜬 상태로 후끈후끈, 이글이글. 앞으로 그 낙타가
뜨거운 사막을 건너갈 일은 수 없이 많겠지만,
자기 바깥의 뜨거움을 있는 그대로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일 테니까.
처음이란 마지막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두 번 다시는
처음과 같은 느낌을 맛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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