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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사형제도, 과연 필요한가?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11
케이 스티어만 지음, 김혜영 옮김, 박미숙 감수 / 내인생의책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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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에 관한 생각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한 듯 끔찍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실질적으로 사형제도가 폐지라고 해도 일단 ‘사형’을 선고하기는 한다. 근데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에 영어 수업에서 사형제도의 찬반 문제에 대해 1분의 짧은 Speaking으로 말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들어서 반성에 표를 던졌다. 내 기억에는 사형 제도에 찬성을 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경험은 나의 사고를 또다시 흔들어놓았다.

 

사형제도는 한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민감한 주제다. 찬성과 반대 측이 각자들의 주장과 근거를 가지고 팽팽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논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는 이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나쁜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형을 비롯한 형벌에 관한 논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에서 이 논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다고 쉽사리 말할 수가 없다.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사형제도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는 약간 생각이 변했다. 어쩌면 사형보다 무기징역 혹은 종신형을 내리는 것이 최고의 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사형은 최대한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원래대로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나쁜 일은 한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있다면 가끔은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말들 속에서 조금은 죄를 뉘우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저번에 읽었던 <벌레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한 아이를 살해한 남자는 종교에 귀의를 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그 아이의 부모에게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말한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살인마는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이렇게 피해자와 관련된 사람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살아있다면 항상 그 사람들의 원망이 따라다닐 것이다. 무슨 죄를 저질렀고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일생동안 반성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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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꼭 보여주고 싶은 서양명화 101
김필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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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그림 중에도 가장 끌리는 것은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이었다. 예술 관련에 대해 지식을 이야기하라면 부끄러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고치려고 해봐도 아직까지 예술이나 음악 같은 분야는 내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러한 내가 아는 작품이니 당연히 반가워 할 수밖에. 물론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기도 했다. 주변의 사물과 동화되어 사람의 형체까지도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시선을 보낼 듯하다.

 

  물론 요즘 들어 자주 고민하게 되는 문제와도 ‘절규’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몇 년 뒤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될까. 성적은 어떻게 올리는 것이 좋을까. 사교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길러지는 것일까. 점심은 무엇을 누구와 먹을까. 지금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을까.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나 아니면 안정된 생활에 만족해야 하나. 대략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의 중요한 고민들까지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이 하게 된다.

 

  ‘절규’는 이런 나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사람들은 조금은 내성적인 나에게, “너는 고민이 없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혹은 “항상 긍정적인 모습이라서 좋다.”라는 말도 내가 매년 빼놓지 않고 듣는 말이다. 이런 말들을 듣는 것은 본래의 내가 아닌 것 같다. 사실 이것은 내가 가진 일부분에 불과한데도 이것이 내 전부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들이 내 마음속에 하나둘 쌓인다. 조금씩 쌓이는 돌들이 탑을 이루고 잠깐의 실수로 잘못 놓인 돌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조용한 얼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편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절규’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감정을 배제한 처절한 울음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소리가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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