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고갱의 새로운 발견...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귀스타브 아로자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통해서, 고갱으로 하여금 모든 예술가가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전에 관학파의 인습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힘겨운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한 셈이다. 119

 

그는 일찍부터 위대한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의 차이는 반드시 재능이나 솜씨의 문제라기 보다는 괴팍함의 추구, 유일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결론은 다른 누군가가 지나간 자국에 빨려들지 않는 것이 최상이며, 그것은 지금 당장은 자신과 인상파 사이에 얼마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179

 

전체적으로 볼 때 '종합장'은 상상력에 의한 예술, 다시 말해서 단순히 유형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내면에 감각을 일깨움으로써 작용하는 예술을 정의하려 한 시도다. 그것은 현존하는 대상이나 장면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정과 정서에서 비롯되는 예술이다...상징적인 예술 229

 

열정적인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의 기질을 이어받은 그가 애정과 정열을 쏟았다면 그녀의 어조는 냉담하고 사무적이다. 서로 상충하는 이런 정반대의 문체는 편지가 재앙을 야기할 수 있는 필수요소였다. 274

 

브르타뉴의 봄날이 보여주는 실제 색조와는 전혀 다르게 온기와 행복감을 한껏 고양시키기 위해 '과장'되어 있다. 노란색과 오렌지색이 녹색과 검은색 옷차림과 이룬 대비가 진홍색 꽃다발에 의해 한층 강조되어 있는 이 그림은, 여러가지 점에서 그 무렵 빈센트가 아를에서 시도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음악적' 색채를 연습한 작품이다. 358

 

그러나 베르나르의 그림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실제의 사람과 사물을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은 채 나아갈 수 있는 한도까지 나아간 것이다. 369

 

<설교 뒤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이 작품은 그가 한 번도 제대로 소속되어본 적이 없는 인상파와의 최종적인 결별을 의미하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의 길로 들어섰다는 신호탄이다. 이것은 최근 들어 규정된 클루아조니슴의 모든 특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미 그것을 훨씬 앞지른다. 373

 

<고갱, 타히티의 관능 2>

 

문화적 분열증... 85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고갱은 기본적으로는 낙천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환상을 이용해서 나쁜 시기에서 벗어나곤 했다. 86

 

그녀는 오랫동안 고갱의 예술이 가진 진가를 모르겠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반발해왔는데, 이제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과 아울러 이제는 두 번 다시 그의 그림을 언젠가 끝날 일시적인 탈선으로 여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녀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은 이제 남편을 영원히 잃어버렸으며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슬프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164

 

에밀 베르나르는 반 고흐와 주고 받은 서신들을 편집해서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 대부분은 고개오가 아를에서의 비극적인 사건을 언급한 것이었다. 젊은 베르나르가 작고한 동료에 대해 별다른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데 거리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186

 

<오클랜드 박물관-폴리네시아 최대의 예술 컬렉션> 결국 고갱은 자신이 찬미하는 작품에 내재된 의미보다는 그것들을 본 자기 자신의 반응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이 일화에서 분명해진 사실은 고갱이 유럽을 떠난 것이 새로운 예술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폐소공포증적인 옛 예술의 압력에서 탈피해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빈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280

 

화가가 한군데 모인 자신의 작품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그 연작이 그 이후 한번도 한자리에 모이지 못헀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321

 

내 눈물은 살아 있는 弔화요. 328  딸 알린의 죽음

 

그러나 그의 그림에 담긴 메시지는 이와는 다른 것으로서, 그가 거듭해서 그린 독특한 여성만의 세계에서는 제재와 의미 양면에서 여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373

'터키탕'속이 여자노예들처럼 여성들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자신들의 세상 속에 속한 독립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제시한 것으로서, 고갱이 자신의 친구들 사이에서 보낸 현실적인 삶, 즉 젊은 '바히네'가 식량과 몇 가지 선물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요리를 하고 청소하고 같이 잠자리에 드는 삶과는 몇 광연은 동떨어진 것이다. 374

 

이 원고의 한 곳에서 그는 기성의 종교 조직이 과실을 일소한다면,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에게 '종교적인 영혼'이 다고 확언하기에 이르는데...445

 

어쩌면 고갱은 서구 문명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빚어낸 강인한 여성들을 피해 세상 끝으로 간 것일지도 모른다. 462

 

조각 널빤지마저 모두 떼어내고 텅 비기는 했어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그 집을 방문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림들과 조각들 중 남아 있는 것을 구해내고 고갱을 신화화하는 과정에 착수했는데, 그 인물은 해군 군의이자 작가인 박토르 스갈랑이었다. 471

 

1906년 가을 시즌에 200여점의 작품들로 고갱 최초의 회고전...마티스는 고갱의 색채에 경탄한 나머지 훗날 그런 색채에 영감을 주는 감흥을 얻기 위해 타히티를 여행하게 된다. 앙드레 드랭과 라울 뒤피 역시 그 전시회에서 색채와 더불어 형태의 자유로움에 충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처음에는 야수파가, 이어 표현주의가, 나중에는 추상예술이라는 거의 전 세계적인 유행이 태동하게 된다. 477

 

고갱은 르 풀뒤에서 세뤼지에에게 화가가 음악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 애쓰는 것은 상관없지만 작품은 줄곧 실재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면서 완전한 추상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던진 감상적인 충격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표면적인 상상의 형상과 빛깔을 떠받치던 저 난해하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구조가 지워지면서 이러한 사실은 점점 잊혀졌다. 477

 

 

                                                                                                        장미 '사이운'

 

  

 

<고갱 선생님, 안녕하세요? /1889> 와  고갱 그림 시계...는 다른 시간 속으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아서 사 왔음. 초침이 다른 시계와는 다르게 소리도 없이 바람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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