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그는 대단히 낙관적인 기분과 자포자기의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일부는 감방에서 머무르길 원했다.
말의 꼴주머니를 짜고, 월터 스콧 경의 이야기를 읽고, 마당에서 머리칼을 깎이는 동안 감기에 걸리고, 깔개에 관한 구식 농담을 들으면서.
그는 감방에 머무르길 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운명에 굴복하는 최상의 길은 그런 운명을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용감한 친구들 1, 304-305pp.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모자라고, 시간에 허덕이는 자신의 바쁜 모습을 SNS에 노출시키며 자신이 이렇게 '바쁜 사람임'을 광고한다. 조금이라도 한가해 보이면 '잉여' 취급을 받는 이 시대에, 바쁜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높은 가치를 증명한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약속을 잡고 갖가지 활동들로 자신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메꾸어 나가는 것인지 모른다. 체념한 조지의 모습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내가 바뀌자!"
조지의 이런 모습은 책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데, 노골적인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은 인종차별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아서 경,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겠군요. 전 인종에 대한 편견과 이 사건이 관련돼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감한 친구들 2, 22p
"전 깜짝 놀랐어요." 조지가 마침내 입을 연다. "그가 왜 저를 괴롭히려고 했던 걸까요?"
(중략) "아서 경, 경께서 이 사건에 인종적 편견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신다는 점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샤프와 전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누굴 싫어하려면 먼저 알아야죠. 그다음에 싫어할 이유를 찾는거고요.
싫어할 이유가 충분치 않다면 상대방이 지닌 약간 이상한 점, 예를 들어 피부색 등을 구실로 싫어할 수 있겠죠. 하지만 분명 샤프는 절 모릅니다.
제가 그에게 뭔가 잘못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봤어요. 제 의뢰인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고……."
용감한 친구들 2, 192-193pp.
1권의 전부분이 아서와 조지의 차이점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아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를 고무시키는 양친 아래서 자라났으며(엄마는 이야기꾼, 아빠는 화가로 모두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예술가였다), 조지는 상상력을 금기시하는 환경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로 태어나고 자라왔다(용감한 친구들 1, 12-17pp.). '상상력'에 대해 갖는 태도 하나만으로 이 두 인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과 삶의 태도를 갖게 됐다. 조지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문제의 원인과 결과로 인식하고, 아서는 그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문제의 원인으로 추론한다.
사실상 차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차별이 더 교묘하고 해소하기 힘든 법이다. 차별로 인한 피해자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트라우마를 지니게 되는 것도 이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정희진처럼 읽기, 95p.
성희롱을 당할 때 피해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대개 '이거 지금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일 때가 많다. '그냥 장난이겠지?'하고 넘겨버리기도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넘겨버린 성희롱 경험은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 머릿 속을 떠돈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가 하는 말은 주로 '예민한' 행동으로 치부되기에 피해자는 자신의 불쾌함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줄 사람들을 찾는다. 이미 사건이 종결된 뒤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거 내가 기분 나쁠 만한 일 맞아?"라고 묻는 우리는 이미 가해자 중심주의 사회에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해결하기엔 이미 늦어버린(늦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두고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해하려 하기 시작한다.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면서. 자신이 경험한 불쾌함이 암묵적인 차별 행위에서 기인한 것인지 추론하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내가 남자/백인이었어도 이렇게 말했을까?'라는 상상력. 상상력이 없었던 조지가 자신이 겪은 상황을 인종차별이라 정의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조지가 선택한 길은 '그런 운명을 원함으로써 운명에 굴복하는 길'이었다. 차별을 원했다는 말은 아니다. 조지는 자신에게 닥친 불합리한 상황을 가시적인 인과관계에서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받아들이려했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문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 통제력을 갖게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은 그래서 계속, 꾸준히, 자신이 맞닥뜨린 불쾌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조지는 전형적인 피해자였다.
반면 아서는 상상력이 과한 인물이었다. 조지와의 첫만남에서 그를 파악하는 모습이라거나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마치 '셜록 홈즈'처럼 눈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상상하고 추론하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론한 것이 곧 진실이라고 믿었다. 아서의 이런 자신만만함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100%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은 결코 틀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과 혹여 틀리더라도 사회적으로 '처벌'하지 않는 환경이 결합됐을 때에나 이런 자신감이 가능하다. 백인 남성에 엄청난 유명세와 부를 가진 작가였던 아서는 거침없는 자신의 행동에 처벌은 커녕 오히려 팬들로부터 사실상의 '강화'를 받았다. 조지가 누명을 벗도록 도운 것도 아서였지만, 그 역시 편견에 휩싸여 행동하긴 마찬가지였다. '파르시들은 타인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다거나 동양인의 천성, 긍정적 특성을 들어 조지의 무죄를 주장한 아서가 앤슨과의 설전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한 것은 그 역시 앤슨과 다를 바 없는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논리 자체의 허점을 짚어내지 않고 그 논리를 반박하는 식으로 따라가게 되면 결국 처음 주장한 사람에 더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앤슨이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 순간, 앤슨은 아마 승리를 예감했을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동양인'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데 있을 뿐, 인종차별의 가해자였음은 동일하다.
그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금욕적인 원칙에 따라서라기보다는 부모가 그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배심원단이나 위원회는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금주는 적당히 절제하는 삶의 방식으로도, 혹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옭죄는 태도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용감한 친구들 2, 187p.
실제 이유가 어떤 지 보다는 자신이 판단한 사실이 중요하다는 이들의 논리는, 결국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아서는 이런 조지를 '적당히 절제하는 삶을 사는 동양인'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앤슨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옥죄는 사이코 패스' 쯤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방향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아서의 유명세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전략은 조지를 '유죄인 동시에 무죄'인 상태로 밀어넣었다. 빠른 시일 내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위원회가 움직이도록 만든 효과적인 전략이기는 했으나 스태퍼드셔 지서와 다를 바 없는 스스로의 논리적 허점에 빠져 아서는 조지의 완벽한 무죄를 밝혀내지 못했다(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역시 이런 사실을 조지가 스스로 깨닫는, 2권의 198-201쪽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여성들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비칠런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들이 가해자의 지위를 갖고 침묵하던 남성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고 있다. 그간 여성들은 '내가 잘하고 바뀌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 이중 노동을 하거나, 아예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신이 준-가해자의 위치에 서곤 했다. 이번 사건이 여성들을 이중 노동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